14화(5,349자)

데모데이

마흔셋 경단녀, 동기는 스물넷 · 여시결

목요일 새벽 여섯 시 반⁠, 떡집 시루에서 김이 올라왔다⁠. 단희는 연노랑 카디건 위에 앞치마를 두르고 백설기를 잘랐다⁠. 칼이 한 번에 도마까지 내려갔다⁠. 춘례는 작은 떡 상자 열 개를 포장했다⁠. 투자사 사람들 줄 거라고 했다⁠. 리본은 반찬가게 이모가 묶었고⁠, 건어물 가게 이모는 상자마다 멸치 한 봉지씩을 끼워 넣었다⁠.

“⁠떡 상자에 멸치를 왜 넣어요⁠?⁠”

“⁠돈 넣는 사람들은 짠 거 좋아해⁠.⁠”

일곱 시⁠, 단희의 휴대전화에 혜율의 메시지가 왔다⁠. 사진 한 장과 글 한 편이 붙어 있었다⁠. 1기 다시봄 인턴 두 사람의 이름으로 쓴 글이었다⁠. 수료증⁠, 모델료⁠, 각서⁠. 각서의 마지막 문장까지 그대로 옮긴 글이었다⁠. 「⁠광고 속 인물의 이야기와 다른 사실을 공개하지 않는다⁠.⁠」 글의 끝에 혜율이 한 줄을 덧붙였다⁠. 「⁠오늘 공개합니다⁠. 아들에게는 어젯밤 먼저 말했습니다⁠.⁠」

글 아래로 댓글이 달리기 시작했다⁠. 「⁠저도 다른 회사에서 수료증만 받았어요⁠」⁠, 「⁠경단녀 인턴 광고 볼 때마다 궁금했는데⁠」 단희는 떡 칼을 내려놓고 댓글을 끝까지 내렸다⁠. 잠시 뒤 혜율이 사진 한 장을 따로 보냈다⁠. 아들에게서 온 문자였다⁠. 「⁠엄마 멋있다⁠. 근데 저녁 뭐야⁠」

여덟 시⁠, 경채가 해윤의 머리를 땋았다⁠. 브로콜리가 아니었다⁠. 단희가 떡집에서 돌아와 현관에서 구두를 신자 찬결이 다리에 매달렸다⁠.

“⁠엄마 하늘 회사 가⁠?⁠”

“⁠응⁠.⁠”

“⁠이겨⁠.⁠”

“⁠누구를⁠?⁠”

“⁠몰라⁠. 다 이겨⁠.⁠”

경채가 찬결을 안아 올리며 단희에게 말했다⁠. 하원은 걱정 마⁠. 단희는 고개를 끄덕였다⁠. 처음 듣는 말이 아니었는데 처음 믿기는 말이었다⁠.

*

오후 한 시⁠, 가람디지털센터 1층 로비⁠. 상인회장과 춘례와 단희가 주황색 방문증을 목에 걸고 개찰구 앞에 모였다⁠. 로비 구석 의자에 혜율이 앉아 있었다⁠. 계단 쪽 의자였다⁠. 엘리베이터 화면에서 작년 광고가 돌았다⁠. 혜율의 얼굴이 웃었다⁠. 의자의 혜율은 웃지 않았다⁠.

안내데스크 직원이 단희를 불렀다⁠. 방문증이 하나 더 있었다⁠. 이름 칸에 「⁠나혜율 — 1기 다시봄 수료생⁠」이 적혀 있었다⁠.

“⁠투자사에서 아침에 요청하셨대요⁠. 글 보시고요⁠.⁠”

단희는 방문증을 혜율에게 건넸다⁠. 혜율은 주황색 줄을 한참 내려다보았다⁠.

“⁠엘리베이터 타야 돼요⁠? 15층이면⁠.⁠”

“⁠계단으로 가도 돼요⁠. 같이 가요⁠.⁠”

“⁠아니요⁠.⁠”

혜율은 일어나 엘리베이터 앞으로 갔다⁠. 화면 속 제 얼굴 아래로 갔다⁠. 문이 열렸다⁠. 혜율이 먼저 탔다⁠.

*

같은 시각⁠, 12층 실장실에서 엄여란은 혜율의 글을 세 번째로 읽고 있었다⁠. 글은 오전 내내 퍼졌다⁠. 엘리베이터 화면의 작년 광고와 글 속의 각서 사진이 나란히 돌았다⁠. 책상 위의 전화가 울렸다⁠. 이사였다⁠.

“⁠엄 실장⁠, 오늘 트랙 닫읍시다⁠. 데모데이 끝나고 바로 공지해요⁠. 그 글 투자사도 봤어요⁠.⁠”

“⁠데모데이 끝나고 말씀드리겠습니다⁠.⁠”

“⁠말씀드릴 게 뭐가 있어요⁠. 닫으면 되지⁠.⁠”

“⁠제가 만든 거라서요⁠. 닫아도 제가 닫겠습니다⁠.⁠”

여란은 전화를 끊고 서랍을 열었다⁠. 노란 포스트잇이 있었다⁠. 휴대전화에는 아들의 메시지가 남아 있었다⁠. 「⁠엄마 진짜 와⁠? 토요일⁠?⁠」 여란은 답장 대신 포스트잇을 정장 안주머니에 넣고 일어났다⁠.

*

오후 한 시 반⁠, 9층 화장실 거울 앞에서 민성은 흰 셔츠 단추를 끝까지 잠갔다⁠. 어젯밤 편의점 근무가 끝나고 문 연 가게를 찾아 산 셔츠였다⁠. 소매가 길었다⁠. 길영두가 들어와 손을 씻다가 민성을 보았다⁠.

“⁠셔츠 처음 보네⁠.⁠”

“⁠처음 입어요⁠.⁠”

영두는 손을 털고 제 발을 내려다보았다⁠. 한정판 운동화였다⁠. 데모데이인데도 운동화였다⁠.

“⁠빌려줄까⁠? 행운의 운동화야⁠. 해커톤 날도 신었잖아⁠.⁠”

“⁠그날 허리 삐끗하셨잖아요⁠.⁠”

“⁠그건 컵라면 탓이고⁠.⁠”

민성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휴대전화가 떨었다⁠. 영천의 엄마였다⁠. 「⁠셔츠는 다려 입었나⁠」 민성은 셔츠 소매를 내려다보았다⁠. 다리지 않은 셔츠였다⁠. 「⁠응⁠」이라고 답하고 화장실을 나왔다⁠.

*

오후 두 시⁠, 15층 라운지⁠. 통유리창 앞에 의자 서른 개가 줄을 맞췄다⁠. 앞줄에 솔바람벤처스 심사역과 투자사 사람 둘⁠, 대표와 재무이사와 이사 하나⁠, 실장⁠. 둘째 줄에 길영두와 개발팀 몇 사람⁠, 인턴들⁠. 맨 뒷줄 방문객 자리에 주황색 줄 넷이 앉았다⁠. 춘례가 떡 상자 열 개를 무릎에 쌓고 있었다⁠.

조명이 낮아지고 「⁠엄마의 두 번째 출근⁠」이 다시 돌았다⁠. 리허설 날과 같은 영상이었다⁠. 투자자들은 처음 보는 얼굴로 화면을 보았고⁠, 인턴들은 두 번째 보는 얼굴로 단희의 뒤통수를 보았다⁠. 단희는 맨 뒷줄에서 제 손목을 보았다⁠. 화면 속 손목과 같은 팔찌였다⁠. 화면 속 손목은 하늘색 줄 아래에 있었고⁠, 제 손목은 주황색 줄 아래에 있었다⁠.

영상 속 ‘⁠멘토 팀장⁠’이 고개를 끄덕일 때 둘째 줄에서 누군가 킥 웃었다⁠. 영두가 의자에서 몸을 낮추었다⁠. 영상 속 단희가 따뜻한 한숨을 쉬었고⁠, 맨 뒷줄의 단희는 진짜 한숨을 쉬었다⁠. 석 달 전 3월 2일 아침⁠, 찬결의 양말 한 짝을 찾던 손으로 열네 장째에 서명하던 장면이 떠올랐다⁠. 첫날 서명한 열네 장 가운데 단희가 끝까지 읽은 장은 하나도 없었다⁠. 오늘은 방문증 뒷면의 주의 사항까지 읽고 들어왔다⁠.

불이 켜지고 민성이 앞으로 나갔다⁠. 회색 맨투맨 대신 처음 보는 흰 셔츠였다⁠. 소매가 길어 손목을 덮었다⁠. 민성은 대본대로 했다⁠. 어제 심사장에서 읽은 문장을 한 글자도 바꾸지 않았다⁠. 가게 수천 곳의 석 달이 화면 가득 출렁였고⁠, 비 오는 날마다 꺼졌다가 다시 솟았다⁠. 막힘이 없었다⁠. 마지막 장에는 이름이 하나뿐이었다⁠. 「⁠발표 차민성⁠」 도움 칸은 지워져 있었다⁠.

“⁠이상입니다⁠. 질의응답은 고객 대리인께 넘기겠습니다⁠.⁠”

민성이 맨 뒷줄을 보았다⁠. 앞줄 사람들이 뒤를 돌아보았다⁠. 단희가 일어났다⁠.

*

심사역이 수첩을 폈다⁠. 첫 질문은 춘례에게 갔다⁠.

“⁠사장님⁠, 꼬박페이를 왜 쓰세요⁠?⁠”

춘례가 일어나 떡 상자 열 개를 옆 의자에 내려놓았다⁠. 은박지 방망이는 없었다⁠. 대신 맨손을 주먹 쥐어 입 앞에 댔다⁠.

“⁠꼬박꼬박페이는⁠…⁠.⁠”

라운지에 웃음이 터졌다⁠. 대표가 제일 크게 웃었다⁠. 춘례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이름이 틀렸어⁠. 꼬박꼬박 떼어 가니까 꼬박꼬박이야⁠. 근데 비 오는 날은 안 떼어 가⁠. 그래서 써⁠. 열 해 전에 은행은 금단희 얼굴 보고 나를 거절했어⁠. 금단희가 창구에서 거절했으니까⁠. 오늘은 내가 금단희 얼굴 보고 여기 왔어⁠.⁠”

춘례가 앉았다⁠. 심사역이 수첩에 무언가를 적고 단희를 보았다⁠.

“⁠남구로시장 상인회 대리인이시죠⁠? 하나만 여쭐게요⁠. 이 기능은 누가 만들었어요⁠?⁠”

단희가 입을 열기 전에⁠, 앞쪽에서 대답이 먼저 나왔다⁠.

“⁠둘이요⁠.⁠”

민성이었다⁠. 발표자 자리에 선 채였다⁠. 둘째 줄의 인턴들이 서로를 보았고⁠, 3조 청년이 저도 모르게 작게 박수를 쳤다가 멈추었다⁠. 영두는 고개를 숙인 채 입꼬리를 올렸다⁠.

“⁠금단희 씨와 제가요⁠. 비 오는 날 줄은 떡집 영수증에서 금단희 씨가 받아 왔고⁠, 저는 짰어요⁠. 이름도 금단희 씨가 지었어요⁠. 발표 대본에는 없는 말이에요⁠. 죄송합니다⁠.⁠”

재무이사가 의자에서 몸을 일으켰다⁠.

“⁠금단희 씨는 계약 해지된 인턴 아닙니까⁠? 회사 자료를 들고 외부 대리인으로 온 건가요⁠?⁠”

실장이 일어났다⁠. 회색 정장이었다⁠. 실장은 재무이사를 손짓으로 앉히고 투자자들을 향해 몸을 돌렸다⁠.

“⁠제가 말씀드리겠습니다⁠. 다시봄 트랙은 제가 만들었습니다⁠.⁠”

라운지가 조용해졌다⁠.

“⁠이 회사는 열여덟 달 버틸 돈이 있습니다⁠. 정규직 한 사람에 한 해 일억이 듭니다⁠. 네 시 반에 퇴근하는 직원을 위해 회의 시간을 바꿀 여유가 지금 이 회사에는 없습니다⁠. 다시봄 트랙은 여유 없는 회사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습니다⁠. 수료증과 광고요⁠. 이사회는 그 조건이 아니면 트랙을 열지 않았습니다⁠. 저는 그걸 부끄러워하지 않습니다⁠. 없는 것보다는 나으니까요⁠.⁠”

실장은 단희를 돌아보았다⁠. 목소리는 밝지 않았다⁠. 처음부터 끝까지 평평했다⁠.

“⁠투자 설명서에 고용이라고 쓴 건 제 잘못입니다⁠. 그건 사과드립니다⁠.⁠”

실장이 말을 마치자 라운지에 의자 삐걱거리는 소리만 남았다⁠. 재무이사는 팔짱을 끼었고⁠, 투자사 사람 하나는 펜 뚜껑을 닫았다⁠. 심사역이 단희를 보았다⁠. 단희는 손목의 구슬 팔찌를 한 번 쥐었다가 놓았다⁠.

“⁠실장님 덕분에 이 건물에 들어왔어요⁠. 그건 고마워요⁠. 진짜로요⁠.⁠”

단희의 목소리는 낮고 또박또박했다⁠. 창구에서 서류를 짚던 목소리였다⁠.

“⁠그런데 네 시 반에 퇴근하는 사람이 만든 기능이 지금 시장 서른한 곳에서 돌아요⁠. 열여덟 달이 걱정이시면 돈을 갚는 사람을 늘려야 해요⁠. 그 사람들은 아침 여섯 시 반에 문을 열어요⁠. 저는 그 시간에 맞춰 출근할 수 있어요⁠. 네 시 반에 퇴근하는 대신에요⁠. 은행이 아홉 시에 열 때 저는 그 앞을 열한 해 지나다녔어요⁠. 장사꾼은 여섯 시에 시작해요⁠.⁠”

맨 뒷줄에서 혜율이 일어났다⁠. 방문증의 주황색 줄을 손에 쥐고 있었다⁠.

“⁠작년 광고의 저예요⁠. 엘리베이터에 나오는 사람이요⁠. 저는 수료증과 모델료와 각서를 받았어요⁠. 오늘 아침에 각서를 깼어요⁠. 설명서에 고용이라고 쓰신 프로그램에⁠, 저는 고용된 적이 없어요⁠. 아들한테 어젯밤 그 말을 처음 했어요⁠. 엄마는 그 회사 직원이 아니었다고요⁠.⁠”

혜율이 앉았다⁠. 춘례가 혜율의 손등을 떡 반죽 누르듯 꾹 눌렀다⁠.

*

심사역이 수첩을 덮었다⁠. 투자사 사람 둘과 짧게 귓속말을 나누고 대표를 보았다⁠.

“⁠저희는 기능에 투자하지 않아요⁠. 팀에 투자해요⁠. 오늘 본 팀은 발표자 하나가 아니었어요⁠. 투자 조건을 하나 붙이겠습니다⁠. 이 기능을 만든 두 사람이 이 회사에 있어야 합니다⁠. 둘 다요⁠.⁠”

재무이사가 대표를 보았다⁠. 대표는 오래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후드티 소매를 걷었다가 내렸다⁠. 석 달 전 교육장 시연에서 처음 손을 들던 사람이었다⁠. 시연 날 대표는 떡집이 실제로 있느냐고 물었고⁠, 지금 떡집은 맨 뒷줄에서 떡 상자를 무릎에 쌓고 있었다⁠. 통유리창 밖으로 구로디지털단지의 오후 해가 기울며 유리 건물마다 불빛처럼 되비쳤다⁠. 대표가 일어나 실장 앞으로 갔다⁠.

“⁠실장님⁠, 정규직 자리는 실장님 예산이에요⁠. 다시봄 트랙도 실장님 거고요⁠. 캠페인도요⁠. 오늘 안에 정하세요⁠.⁠”

실장은 대표를 보지 않고 맨 뒷줄의 단희를 보았다⁠. 둘 사이에 의자 스물여섯 개가 있었다⁠. 둘째 줄의 영두가 휴대전화로 무언가를 쓰다가 엄지를 멈추었다⁠. 개발팀장 의견란이었다⁠. 영두는 마저 썼다⁠. 「⁠둘 다⁠.⁠」

실장이 말했다⁠.

“⁠단희 님⁠, 오늘 여섯 시에 12층으로 오세요⁠.⁠”

단희의 손목에서 스마트워치가 떨었다⁠. 「⁠하원 18⁠:30 — 경채⁠」 석 달 만에 처음으로 다른 이름이 붙은 알람이었다⁠. 단희는 화면을 보고 고개를 들었다⁠.

“⁠여섯 시에 갈게요⁠. 하원은 남편이 해요⁠.⁠”

춘례가 떡 상자 열 개를 들고 일어나 앞줄 투자자들에게 하나씩 나눠 주기 시작했다⁠. 멸치 봉지가 상자 밖으로 삐져나왔다⁠. 심사역은 상자를 받아 들고 리본을 풀지 않은 채 무릎에 올려놓았다⁠. 실장은 받지 않았다⁠. 춘례는 실장 앞에 상자 하나를 그냥 내려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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