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화(5,305자)

리허설

마흔셋 경단녀, 동기는 스물넷 · 여시결

화요일 아침 아홉 시 반⁠, 12층 작은 회의실에 상인회 세 사람과 투자사 심사역이 마주 앉았다⁠. 실장 엄여란은 문 옆 의자에 앉아 다리를 꼬았다⁠. 심사역은 짧은 커트 머리를 쓸어 넘기고 두꺼운 수첩을 폈다⁠. 리허설 날 라운지에서 손을 들었던 사람이었다⁠.

“⁠사장님⁠, 하나만 여쭐게요⁠. 비 오는 날 상환을 쉬면 회사 돈은 늦게 돌아와요⁠. 사장님들은 좋지만 회사는 손해잖아요⁠. 저희는 회사에 돈을 넣는 사람이라 그게 궁금해요⁠.⁠”

춘례가 상인회장보다 먼저 입을 열었다⁠.

“⁠비 오는 날 떼어 가면 우리는 일수 써⁠. 일수 쓰면 이 앱부터 안 갚아⁠. 일수꾼이 더 무섭거든⁠. 그러면 회사는 돈을 늦게 받는 게 아니라 못 받아⁠.⁠”

심사역의 펜이 멈추었다⁠. 상인회장이 헛기침을 하고 거들었다⁠.

“⁠우리 방앗간도 그래요⁠. 고춧가루 대목은 김장철이고⁠, 장마철엔 기계를 반만 돌려요⁠. 반만 돌리는 날에 다 떼어 가면 기계 기름값이 안 나와요⁠.⁠”

“⁠기계 기름값이요⁠?⁠”

“⁠기름값 모르시면 투자 못 해요⁠.⁠”

심사역이 처음으로 웃었다⁠. 수첩에 기름값이라고 적는 것이 단희의 자리에서도 보였다⁠. 단희가 표 선생이 그린 그래프 한 장을 탁자에 놓았다⁠. 쉬어 가기를 시험 서버에서 돌렸을 때 일수로 넘어갈 뻔한 날이 석 달에 열흘쯤 줄어드는 그림이었다⁠. 선은 두 개뿐이었고 글씨는 다섯 줄이었다⁠.

“⁠이건 누가 그렸어요⁠?⁠”

“⁠1기 다시봄 인턴 동기가 그렸어요⁠. 수학 강사셨어요⁠. 지금은 수료 대기 중이시고요⁠.⁠”

심사역이 실장을 보았다⁠. 실장은 다리를 풀지 않았다⁠. 심사역은 그래프를 사진으로 찍고 수첩을 덮었다⁠.

“⁠데모데이에 고객 질의응답 시간을 넣어 주세요⁠. 사장님들 목소리를 직접 듣고 싶어요⁠. 회사 발표 다음에 십 분이요⁠.⁠”

“⁠일정이 꽉 차 있어서요⁠.⁠”

실장의 목소리가 밝았다⁠. 심사역은 웃지 않았다⁠.

“⁠그럼 회사 발표를 십 분 줄이세요⁠.⁠”

회의실을 나오며 상인회장이 단희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저 양반 무섭네⁠. 춘례가 반대편 귀에 속삭였다⁠. 무서운 게 아니라 장사꾼이야⁠. 돈 넣는 사람은 다 장사꾼이야⁠.

*

화요일 오후⁠, 12층 복도에서 단희는 길영두와 마주쳤다⁠. 영두는 구두를 신고 있었다⁠. 운동화보다 걸음이 느렸다⁠.

“⁠팀장님⁠, 위에 불려 가셨어요⁠? 서버 연 거요⁠.⁠”

“⁠불려 갔지⁠. 경고 한 장⁠. 인사 기록에 남는대⁠.⁠”

영두는 아무렇지 않게 말하고 구두코로 카펫을 문질렀다⁠.

“⁠괜찮아⁠. 마흔하나에 경고 한 장이면 훈장이야⁠. 젊은 애들이 그러더라⁠. 팀장님 처음으로 멋있었다고⁠. 처음으로래⁠. 그 전엔 뭐였던 거야⁠?⁠”

“⁠운동화요⁠.⁠”

“⁠운동화는 멋있잖아⁠.⁠”

“⁠운동화만 멋있었죠⁠.⁠”

영두는 웃다가 목소리를 낮추었다⁠.

“⁠내일 민성이 혼자 서는 거 알지⁠? 실장님이 서류 흔들었어⁠. 나는 그 서류에 도장 찍는 사람 중 하나야⁠. 개발팀장 의견란이 있거든⁠.⁠”

“⁠뭐라고 쓰실 거예요⁠?⁠”

“⁠아직 안 썼어⁠. 내일 질의응답 보고 쓸 거야⁠. 질의응답은 대본이 없잖아⁠.⁠”

*

화요일 밤 열 시⁠, 12층 실장실에만 불이 켜져 있었다⁠. 엄여란은 투자 설명서 파일을 열어 놓고 한 낱말 앞에서 커서를 깜박이고 있었다⁠. 「⁠경력 단절 여성 고용 프로그램⁠」 고용을 지우고 ‘⁠교육⁠’이라고 쳤다가⁠, 다시 지우고 ‘⁠고용⁠’이라고 쳤다⁠. 세 번을 그렇게 했다⁠.

휴대전화가 떨었다⁠. 아들이었다⁠. 「⁠엄마 토요일 농구 결승⁠. 올 거야⁠?⁠」

여란은 「⁠갈게⁠」라고 쳤다가 지웠다⁠. 「⁠노력할게⁠」라고 쳤다가 또 지웠다⁠. 서랍을 열었다⁠. 해커톤 전 단희가 펼쳐 놓았던 그림 대본의 노란 포스트잇이 그대로 있었다⁠. 「⁠다시봄은 수료까지 — 이사회 조건 그대로⁠」 제 글씨였다⁠. 여란은 포스트잇을 꺼내 손바닥에 붙였다가 떼고⁠, 다시 서랍에 넣었다⁠. 아들에게는 결국 「⁠응⁠」 한 글자를 보냈다⁠. 투자 설명서의 커서는 계속 깜박였다⁠.

*

같은 시각⁠, 개봉동 식탁에서 단희는 질의응답에서 할 말을 적다가 다 지웠다⁠. 해윤이 잠옷 바람으로 나와 엄마의 손목을 잡았다⁠.

“⁠엄마⁠, 팔찌 고쳐 줄까⁠? M 바로⁠.⁠”

“⁠왜⁠?⁠”

“⁠내일 하늘 회사 가잖아⁠. 사람들이 WOM으로 보면 창피하잖아⁠.⁠”

단희는 손목을 들어 팔찌를 보았다⁠. 석 달 동안 키보드 위에서⁠, 시루 앞에서⁠, 개찰구 앞에서 「⁠WOM⁠」으로 반짝인 팔찌였다⁠.

“⁠두자⁠. 엄마 아직 거꾸로 보는 거 안 끝났어⁠.⁠”

“⁠언제 끝나⁠?⁠”

“⁠내일⁠.⁠”

해윤은 고개를 끄덕이고 엄마의 손목에서 손을 뗐다⁠. 찬결은 방에서 잠꼬대로 안경 형아를 불렀다⁠. 형아⁠, 화면 그만 봐⁠. 단희는 웃다가 공책을 덮었다⁠.

*

수요일 오전 열 시⁠, 해윤의 학교 운동장에 만국기가 펄럭였다⁠. 체육대회였다⁠. 배경채는 휴직 사흘째였다⁠. 넥타이 대신 학교에서 나눠 준 노란 도우미 조끼를 입었다⁠. 운동장 가장자리에 엄마 도우미 여섯과 아빠 도우미 하나가 줄지어 앉았다⁠. 아빠 도우미가 경채였다⁠.

반장 엄마가 경채에게 줄다리기 줄 끝을 맡겼다⁠.

“⁠아버님은 줄 끝에서 줄이 안 풀리게만 잡아 주세요⁠. 당기시면 안 돼요⁠. 공정해야 하니까요⁠.⁠”

“⁠네⁠.⁠”

호루라기가 울렸다⁠. 3학년 2반과 3반이 줄을 당겼다⁠. 경채는 줄 끝을 쥐고 버텼다⁠. 2반 줄 가운데에서 해윤이 이를 악물고 있었다⁠. 브로콜리 머리가 흔들렸다⁠. 아이들이 조금씩 3반 쪽으로 끌려갔다⁠. 경채의 손에 저도 모르게 힘이 들어갔다⁠. 줄이 한 뼘 2반 쪽으로 돌아왔다⁠. 반장 엄마가 경채를 보았다⁠. 경채는 손을 풀었다⁠. 줄은 다시 3반 쪽으로 갔고⁠, 2반은 졌다⁠.

해윤이 씩씩거리며 경채에게 왔다⁠.

“⁠아빠⁠, 아까 당겼지⁠?⁠”

“⁠안 당겼어⁠.⁠”

“⁠당겼잖아⁠. 한 뼘⁠.⁠”

“⁠그래서 놨어⁠. 공정해야 해서⁠.⁠”

옆에서 듣던 3반 엄마 하나가 경채에게 물을 건넸다⁠. 아버님 덕분에 이겼다고⁠, 처음에 한 뼘 당기셨을 때 우리 애들이 무서워서 더 세게 당겼다고⁠. 경채는 물을 받으며 고개를 숙였다⁠. 반장 엄마가 서류철에 무언가를 적다가 경채를 보며 말했다⁠. 아버님⁠, 내년에도 하실 거죠⁠? 경채는 내년 이맘때 자기가 어디에 있을지 몰랐다⁠. 대들보건자재 영업2팀 책상일지⁠, 이 운동장 가장자리일지⁠. 경채는 「⁠넵⁠」이라고 말했다⁠. 입으로 하는 「⁠넵⁠」은 처음이었다⁠.

해윤은 한참 아빠를 보다가 졌는데도 웃었다⁠. 수요일 오후 학부모 단톡방에 사진이 올라왔다⁠. 노란 조끼를 입고 줄 끝을 쥔 경채였다⁠. 「⁠아버님 팔뚝 무엇⁠」 「⁠넵⁠」이 스무 개 붙었다⁠. 경채는 사진을 저장했다⁠. 대들보건자재 팀 단톡방에는 아무것도 올리지 않았다⁠.

*

수요일 오후 세 시⁠, 떡집 천막 아래에서 춘례는 떡 방망이를 거꾸로 쥐었다⁠. 마이크 연습이었다⁠. 단희가 심사역 역할을 맡아 질문을 던졌다⁠.

“⁠사장님⁠, 꼬박페이를 왜 쓰세요⁠?⁠”

“⁠꼬박꼬박페이는⁠…⁠.⁠”

“⁠꼬박페이요⁠, 사장님⁠.⁠”

“⁠꼬박꼬박 떼어 가니까 꼬박꼬박이지⁠.⁠”

“⁠이름은 꼬박페이예요⁠.⁠”

“⁠이름이 틀렸네⁠.⁠”

반찬가게 이모가 건너편에서 손뼉을 치며 웃었다⁠. 건어물 가게 이모는 춘례의 떡 방망이가 진짜 마이크처럼 보이라고 은박지를 감아 주었다⁠. 춘례는 은박지 방망이를 들고 다시 해 보았다⁠.

“⁠나는 이 앱을 비 오는 날 때문에 써⁠. 비 오는 날 안 떼어 가니까⁠. 그리고 이 앱 깔아 준 사람이 열 해 전에 나한테 대출 연장 안 해 준 사람이야⁠.⁠”

“⁠사장님⁠, 그 얘기는 빼셔도 돼요⁠.⁠”

“⁠왜 빼⁠. 그게 핵심이지⁠. 그 사람이 열 해 만에 와서 상자를 날랐어⁠. 그래서 깔았어⁠.⁠”

단희는 대답하지 못했다⁠. 춘례는 은박지 방망이를 내리고 백설기 판을 뒤집었다⁠.

“⁠단희야⁠, 내일 너는 무슨 말 할 건데⁠?⁠”

“⁠아직 몰라요⁠.⁠”

“⁠모르면 떡 썰어⁠. 썰다 보면 알아⁠.⁠”

*

수요일 오후 다섯 시⁠, 9층과 10층 사이 비상계단에서 민성의 휴대전화가 울렸다⁠. 영천의 엄마였다⁠. 민성은 두 번 울릴 때까지 화면을 보다가 받았다⁠.

“⁠민성아⁠, 내일이제⁠? 큰 발표⁠.⁠”

“⁠어떻게 알아⁠?⁠”

“⁠네 목소리가 일주일 내내 내일 같더라⁠.⁠”

엄마 뒤로 드라이어 소리가 났다⁠. 남의 미용실이었다⁠.

“⁠엄마⁠, 나 내일 혼자 서⁠. 정규직 될 거야⁠.⁠”

“⁠그래⁠. 잘됐다⁠.⁠”

엄마는 더 묻지 않았다⁠. 민성은 엄마가 묻지 않는 것이 더 무거웠다⁠. 전화를 끊자마자 문자가 왔다⁠. 「⁠학자금 상환일 D-5⁠. 미납 시 신용 정보에 등록됩니다⁠.⁠」 민성은 문자를 열어 둔 채 계단을 올라갔다⁠. 한 층을 오를 때마다 계단참 창문으로 구로디지털단지의 저녁 해가 한 칸씩 내려갔다⁠. 12층 문 앞에서 민성은 숨을 골랐다⁠. 문손잡이가 손바닥에 차가웠다⁠. 앞의 네 회사에서도 마지막 주에는 늘 계단을 올랐다⁠. 엘리베이터에서 마주치는 사람들의 위로가 싫어서였다⁠. 이번에는 위로해 줄 사람도 없었다⁠. 단희는 회사 밖에 있었다⁠.

*

수요일 저녁 여섯 시⁠, 12층 심사장⁠. 천장이 높은 방에 의자 셋만 남아 있었다⁠. 실장과 대표가 앉았고⁠, 민성은 탁자 앞에 서 있었다⁠. 데모데이 전 마지막 대본 맞춤이었다⁠. 화면에 발표 자료가 떴다⁠. 맨 뒷장에 이름이 둘이었다⁠. 「⁠발표 차민성⁠」⁠, 이름 아래 작은 글씨로 「⁠도움⁠: 금단희(⁠다시봄 인턴⁠)⁠」

민성은 대본을 읽어 나갔다⁠. 비 오는 날 쉬어 가기⁠. 꺼진 날 뒤 사흘⁠. 다시 오른 날 전에는 받지 않는 줄⁠. 막힘이 없었다⁠. 대표가 고개를 끄덕였다⁠. 마지막 장에서 민성의 목소리가 멈추었다⁠.

“⁠이 기능은 제가 설계했습니다⁠. 도움 주신 분은⁠…⁠.⁠”

민성은 화면의 작은 글씨를 보았다⁠. 다시봄 인턴⁠. 단희는 이제 인턴이 아니었다⁠. 대본은 해지 소식을 몰랐다⁠.

“⁠민성 님⁠, 계속하세요⁠.⁠”

실장의 목소리였다⁠.

“⁠실장님⁠, 이 줄 고쳐야 할 것 같은데요⁠. 금단희 씨 이제 인턴 아니에요⁠.⁠”

“⁠그럼 지우세요⁠. 도움 칸 자체를요⁠. 깔끔하게⁠.⁠”

대표가 실장을 돌아보았다⁠. 실장은 대표를 보지 않고 민성만 보았다⁠.

“⁠서류는 모레 아침 아홉 시에 나가요⁠. 상환일 전이죠⁠.⁠”

민성의 주머니에서 휴대전화가 다시 떨었다⁠. 민성은 꺼내지 않았다⁠. 대신 대본을 내려놓았다⁠. 대본이 탁자 위에서 반으로 접혔다가 천천히 펴졌다⁠.

“⁠대본대로 할게요⁠. 제 발표는 혼자 할게요⁠.⁠”

실장의 어깨가 조금 내려갔다⁠.

“⁠대신 질의응답은 제가 안 해요⁠.⁠”

“⁠질의응답은 발표자가 해요⁠.⁠”

“⁠심사역님이 고객 질의응답 십 분 넣어 달라고 하셨잖아요⁠. 비 오는 날 쉬어 가기에 대한 질문은 고객 대리인이 받는 게 맞아요⁠. 그 줄은 고객 영수증에서 나왔으니까요⁠.⁠”

“⁠고객 대리인이 누군지 알죠⁠?⁠”

“⁠네⁠.⁠”

“⁠그럼 서류는⁠…⁠.⁠”

“⁠서류는 실장님이 정하세요⁠. 저는 대본대로 하고⁠, 질문은 넘길게요⁠.⁠”

민성은 노트북을 덮었다⁠. 심사장의 높은 천장 아래에서 덮는 소리가 크게 울렸다⁠. 대표가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실장님⁠, 저 친구 지금 실장님한테 통보한 거죠⁠?⁠”

실장은 대답하지 않았다⁠. 민성은 허리를 숙여 인사하고 심사장을 나왔다⁠. 복도 끝 광고 액자 속에서 1기 혜율이 웃고 있었다⁠. 민성은 엘리베이터 대신 비상계단 문을 밀었다⁠. 내려가는 계단에서 민성은 휴대전화를 꺼내 한 줄을 보냈다⁠.

「⁠질의응답⁠, 사장님 거예요⁠. 비 오는 날은 안 틀릴게요⁠.⁠」

13화는 어땠나요?

댓글 0

로그인하면 댓글을 남길 수 있습니다.

첫 번째 댓글을 남겨 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