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화(5,324자)

네 시 반

마흔셋 경단녀, 동기는 스물넷 · 여시결

오후 다섯 시 오십 분⁠, 단희는 엘리베이터에 혼자 탔다⁠. 문 위 화면에서 손목 광고가 돌았다⁠. 구슬 팔찌⁠, 「⁠WOM⁠」⁠, 「⁠공정을 고른 경단녀⁠」 단희는 화면 속 손목과 제 손목을 나란히 들어 보았다⁠. 화면 속 손목에는 보호대가 소매에 가려 있었다⁠. 제 손목에는 보호대가 드러나 있었다⁠. 12층 숫자에 불이 들어왔다⁠.

실장실 문은 열려 있었다⁠. 통유리 창 너머로 구로디지털단지의 해가 건물들 사이로 내려가며 방 안을 주황빛으로 물들였다⁠. 엄여란은 책상 앞이 아니라 창가의 작은 탁자에 앉아 있었다⁠. 맞은편 의자가 하나 비어 있었다⁠. 탁자 위에 춘례가 두고 간 떡 상자가 있었다⁠. 리본이 풀려 있었고⁠, 멸치 봉지는 뜯겨 있었다⁠.

“⁠멸치가 맛있더라고요⁠. 앉으세요⁠.⁠”

단희가 앉았다⁠. 실장은 정장 안주머니에서 노란 포스트잇을 꺼내 탁자 한가운데 붙였다⁠. 「⁠#12 다시봄은 수료까지 — 이사회 조건 그대로⁠.⁠」

“⁠정규직 자리는 하나예요⁠. 투자 조건은 둘이고요⁠. 이사회는 아까 트랙을 닫자고 했어요⁠. 설명서 문제로요⁠.⁠”

“⁠캠페인 예산은 얼마예요⁠?⁠”

실장이 단희를 보았다⁠. 질문이 올 줄 알았다는 눈이었다⁠.

“⁠대행사⁠, 매체⁠, 모델료까지 한 해 일억 남짓이요⁠.⁠”

“⁠사람 하나 연봉이네요⁠. 실장님이 아까 그러셨잖아요⁠. 정규직 한 사람에 한 해 일억⁠.⁠”

실장은 대답하지 않고 멸치 하나를 집었다⁠.

“⁠캠페인을 접으세요⁠. 그 돈으로 자리를 하나 더 만드세요⁠. 저는 모델료 안 받을게요⁠. 제 손목도 내려 주세요⁠. 엘리베이터에서요⁠.⁠”

“⁠모델료는 이미 결재가 났어요⁠.⁠”

“⁠취소해 주세요⁠. 남편이 석 달 휴직했어요⁠. 석 달 뒤는 그때 가서 계산할게요⁠.⁠”

실장은 멸치를 씹지 않고 손끝에 쥐고만 있었다⁠. 창밖의 해가 한 뼘 더 내려갔다⁠.

“⁠캠페인은 제 이사 자리였어요⁠. 이사회에 들고 갈 그림이었어요⁠.⁠”

“⁠알아요⁠.⁠”

“⁠알면서 접으라고 하세요⁠?⁠”

“⁠알아서 말씀드려요⁠. 모르는 척하고 말하면 실장님한테 더 미안할 것 같아서요⁠.⁠”

실장이 처음으로 웃었다⁠. 소리 없이 어깨만 한 번 흔들렸다⁠. 실장은 멸치를 내려놓고 포스트잇을 손톱으로 긁어 떼었다⁠. 접착 자국이 탁자에 남았다⁠.

“⁠좋아요⁠. 캠페인 접을게요⁠. 대신 제 조건도 들으세요⁠.⁠”

“⁠네⁠.⁠”

“⁠2기 다시봄은 수료로 끝나지 않아요⁠. 채용 트랙으로 바꿔요⁠. 이사회는 제가 다시 설득해요⁠. 이번엔 세 줄 말고 한 줄로요⁠. 투자 조건이라고요⁠. 대신 2기가 들어오는 첫날⁠, 서류 열네 장을 단희 님이 같이 읽어 주세요⁠. 처음부터 끝까지요⁠. 단희 님이 2기 선배예요⁠.⁠”

단희는 대답 대신 손목 보호대를 고쳐 맸다⁠. 받을 수 있는 조건이었다⁠. 단희가 물었다⁠.

“⁠출근은요⁠? 투자자들 앞에서 아침 여섯 시 반에 나오겠다고 했어요⁠.⁠”

“⁠그건 안 돼요⁠. 정규직은 근로기준법이 있어요⁠. 여덟 시 반부터 네 시 반⁠. 시장 현장 나가는 날만 여섯 시 반에 나오시고⁠, 그날은 한 시 반에 퇴근하세요⁠.⁠”

“⁠계산이 빠르시네요⁠.⁠”

“⁠열 해 동안 제 시간표만 짰거든요⁠.⁠”

실장이 덧붙였다⁠.

“⁠정규직 둘을 올리면 일반 트랙에서는 민성 님 한 명이에요⁠. 3조 친구는 떨어져요⁠. 그 친구도 세 번째 인턴이에요⁠. 그건 단희 님이 아셔야 해요⁠.⁠”

“⁠알고 있을게요⁠.⁠”

“⁠그리고 하나 더⁠. 이건 조건 말고 부탁이에요⁠.⁠”

실장은 휴대전화를 꺼내 화면을 단희 쪽으로 돌렸다⁠. 아들과 주고받은 메시지였다⁠. 「⁠엄마 진짜 와⁠? 토요일⁠?⁠」 메시지 아래에 실장이 방금 친 답이 있었다⁠. 「⁠간다⁠. 맨 앞줄⁠.⁠」 전송 버튼은 아직 눌리지 않았다⁠.

“⁠토요일에 농구 결승이 있어요⁠. 혹시 제가 이걸 지우면⁠, 단희 님이 월요일에 물어봐 주세요⁠. 결승 어땠느냐고⁠.⁠”

단희는 고개를 끄덕였다⁠. 실장은 전송을 눌렀다⁠. 화면에 「⁠전송됨⁠」이 떴다⁠. 실장은 휴대전화를 엎지 않고 탁자 위에 바로 놓았다⁠.

휴대전화가 곧바로 울렸다⁠. 아들이 아니라 이사였다⁠. 실장은 단희를 앞에 둔 채 받았다⁠.

“⁠네⁠, 이사님⁠. 캠페인 접습니다⁠. 대행사에는 오늘 밤 알리겠습니다⁠. 예산은 채용으로 돌립니다⁠. 정규직 둘이요⁠. 투자 조건입니다⁠. 트랙은 닫지 않습니다⁠. 이름도 그대로 둡니다⁠. 다시봄이요⁠.⁠”

수화기 너머에서 목소리가 커졌다⁠. 실장은 휴대전화를 귀에서 한 뼘 떼었다가 다시 붙였다⁠.

“⁠네⁠. 제 이사 승진 건은 올해 안 올리셔도 됩니다⁠. 네⁠. 알고 드리는 말씀입니다⁠.⁠”

전화를 끊은 실장은 떡 상자에서 백설기 한 조각을 집었다⁠. 반듯한 네모였다⁠. 실장은 떡을 들어 단희에게 보였다⁠.

“⁠이거 단희 님이 자른 거죠⁠?⁠”

“⁠어떻게 아세요⁠?⁠”

“⁠사장님이 자른 건 더 반듯하던데요⁠. 아까 라운지에서 하나 먹어 봤어요⁠.⁠”

*

오후 여섯 시 사십 분⁠, 1층 로비⁠. 개찰구 안쪽에 민성이 서 있었다⁠. 흰 셔츠 소매를 걷어 올린 채였다⁠. 단희는 개찰구 바깥에서 주황색 방문증을 벗었다⁠.

“⁠둘 다래요⁠.⁠”

민성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개찰구 위에 두 손을 얹고 고개를 숙였다⁠. 한참 뒤 고개를 들었을 때 안경알이 뿌옜다⁠. 민성은 안경을 벗어 셔츠 자락으로 닦았다⁠.

“⁠상환일이 사흘 남았어요⁠. 첫 월급은 다음 달 이십오 일이고요⁠.⁠”

“⁠계산이 안 맞네요⁠.⁠”

“⁠확정 통보서 있으면 유예 신청이 된대요⁠. 팀장님이 알아봐 줬어요⁠. 운동화 신고 은행 갔대요⁠.⁠”

“⁠팀장님은 은행에도 운동화를 신고 가요⁠?⁠”

“⁠한정판이라 은행원들이 다 쳐다봤대요⁠. 그래서 빨리 해 줬대요⁠.⁠”

둘이 동시에 웃었다⁠. 로비를 지나던 경비원이 둘을 돌아보았다⁠. 로비에서 인절미를 세 개 받아먹은 보안요원이었다⁠. 민성이 웃음을 그치고 말했다⁠.

“⁠사장님⁠.⁠”

“⁠이제 사장님 아니에요⁠.⁠”

“⁠그럼 뭐라고 불러요⁠?⁠”

“⁠동기요⁠. 같은 날 들어온 사람⁠.⁠”

“⁠같은 날 아닌데요⁠. 6월 1일이요⁠. 저는 확정 통보가 내일 나오고⁠, 사장님은⁠…⁠.⁠”

“⁠그러니까 같은 날 들어오자고요⁠. 6월 1일에⁠.⁠”

민성은 개찰구 위에서 손을 거두었다⁠.

“⁠그럼 내일 일곱 시 반에 9층에서 인수인계해요⁠. 실장님이 그러래요⁠.⁠”

“⁠여덟 시 반이요⁠. 등원하고 갈게요⁠.⁠”

민성은 입을 열었다가 닫았다⁠. 석 달 전 같으면 여덟 시 십오 분이라고 했을 입이었다⁠.

“⁠그럼 여덟 시 반이요⁠.⁠”

*

5월 31일 월요일 새벽 여섯 시 반⁠, 떡집 시루에서 김이 올라왔다⁠. 단희는 마지막으로 아르바이트 앞치마를 둘렀다⁠. 춘례는 단희가 자른 백설기를 보지도 않고 상자에 담았다⁠. 다 담고 나서 무지개떡 한 상자를 따로 리본으로 묶어 단희에게 내밀었다⁠.

“⁠첫 출근 떡이야⁠. 시급이야⁠. 이자는 없어⁠.⁠”

“⁠사장님⁠, 저 내일 출근이에요⁠.⁠”

“⁠알아⁠. 내일 아침엔 너 여기 안 오잖아⁠. 그러니까 오늘 줘야지⁠.⁠”

춘례는 휴대전화를 꺼내 꼬박페이를 열었다⁠. 처음으로 대출 신청 화면까지 넘어갔다⁠. 한도 아래의 버튼 앞에서 춘례의 엄지가 멈추었다⁠.

“⁠손녀 등록금⁠, 이번엔 내가 정해서 빌린다⁠. 앱이 정해서 말고⁠.⁠”

춘례가 엄지로 눌렀다⁠. 화면이 잠깐 돌고 「⁠신청이 접수되었어요⁠」가 떴다⁠. 춘례는 화면을 단희 얼굴 앞에 들이밀었다⁠. 열 해 전 창구에서 단희가 돌려준 서류와 같은 높이였다⁠. 이번에는 단희가 고개를 숙이지 않았다⁠. 반찬가게 이모가 건너편에서 둘째 딸은 아직 미혼이라고 외쳤다⁠.

*

6월 1일 화요일 아침 일곱 시 사십 분⁠, 개봉동 아파트 화장실 거울 앞에서 경채가 해윤의 머리를 땋았다⁠. 휴직 아흐레째였다⁠. 세 가닥이 손가락 사이에서 미끄러지지 않고 넘어갔다⁠. 해윤은 거울을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아빠⁠, 브로콜리 졸업⁠.⁠”

“⁠다음은⁠?⁠”

“⁠다음은 양 갈래⁠.⁠”

냉장고 문에는 새 시간표가 자석 넷에 눌려 있었다⁠. 빨간 선이 아침 일곱 시 사십 분과 오후 네 시 사십 분에 어린이집과 학교로 갔다⁠. 노란 선은 여덟 시 반에 9층으로 갔다가 네 시 반에 돌아왔다⁠. 선이 넷 다 서로를 지나갈 자리가 있었다⁠.

여덟 시 이십 분⁠, 가람디지털센터 엘리베이터 화면에 새 광고가 돌았다⁠. 얼굴이 없었다⁠. 흰 바탕에 빗방울 그림 하나와 글씨 한 줄⁠. 「⁠비 오는 날은 쉬어 가세요 — 꼬박페이⁠」 손목 광고는 내려가 있었다⁠. 작년의 혜율 광고도 없었다⁠. 휴대전화가 떨었다⁠. 혜율이었다⁠. 「⁠아침에 아들 데려다주고 그 건물 앞을 지나갔어요⁠. 엘리베이터 화면에 이제 아무 얼굴도 없대요⁠. 경비 아저씨가 알려 줬어요⁠. 저 다음 주에 2기 지원서 낼 거예요⁠. 열네 장 같이 읽어 주세요⁠.⁠」 단희는 「⁠네⁠」라고 쳤다⁠. 단희는 9층에서 내렸다⁠. 목에서 남색 출입증 줄이 흔들렸다⁠. 손목에는 보호대와 구슬 팔찌가 있었다⁠. 「⁠WOM⁠」은 그대로였다⁠.

9층 개발팀 맨 끝 두 자리에 이름표가 붙어 있었다⁠. 「⁠금단희⁠」⁠, 「⁠차민성⁠」 민성은 이미 앉아 있었다⁠. 노트북 옆에 편의점 삼각김밥 포장지가 한 장 접혀 있었다⁠. 여덟 시 이십구 분이었다⁠.

“⁠일 분 전이네요⁠.⁠”

“⁠여덟 시 반 전이잖아요⁠.⁠”

길영두가 운동화를 신고 지나가다 둘의 책상에 서류철 하나를 던져 놓았다⁠. 「⁠2기 다시봄 채용 트랙 — 첫날 안내 서류 14장⁠」 맨 위에 실장의 글씨로 포스트잇이 붙어 있었다⁠. 「⁠같이 읽어 주세요⁠. 처음부터 끝까지⁠.⁠」 영두가 돌아보며 덧붙였다⁠.

“⁠네 시 반 회의는 세 시로 당겼어⁠. 단희 님 때문에 다들 킹받았대⁠. 좋은 뜻으로⁠.⁠”

“⁠팀장님⁠, 그거 아직도 틀렸어요⁠.⁠”

“⁠알아⁠. 일부러야⁠.⁠”

단희는 가방에서 무지개떡 상자를 꺼내 리본을 풀었다⁠. 개발팀 사람들이 하나둘 모여들었다⁠. 영두가 제일 먼저 두 개를 집었다⁠. 민성은 하나를 집어 반으로 갈라 무지개 층을 세어 보고는 단희에게 말했다⁠. 일곱 줄이에요⁠. 층마다 색이 달랐고⁠, 칼자국은 반듯했다⁠.

*

오후 네 시 반⁠, 단희는 노트북을 덮었다⁠. 민성은 화면에서 눈을 떼지 않고 손만 흔들었다⁠.

“⁠내일 여덟 시 반이요⁠.⁠”

“⁠여덟 시 반이요⁠.⁠”

엘리베이터 화면에서 빗방울 광고가 돌았다⁠. 1층 개찰구에 남색 출입증을 대자 초록불이 켜졌다⁠. 단희는 버스 정류장까지 걸었다⁠. 뛰지 않았다⁠. 빨리 걸었다⁠.

네 시 오십 분⁠, 개봉동 아파트 상가 이층 어린이집 문 앞에 경채가 서 있었다⁠. 한 손에 해윤의 손⁠, 한 손에 찬결의 가방⁠. 찬결은 문 안쪽 신발장 앞에서 신발을 거꾸로 신는 중이었다⁠. 경채가 계단을 올라오는 단희를 보고 손을 들었다⁠.

“⁠일찍 왔네⁠.⁠”

“⁠네 시 반에 나왔어⁠.⁠”

찬결이 신발을 거꾸로 신은 채 뛰어나와 단희의 다리에 매달렸다⁠. 그리고 엄마의 목에서 흔들리는 줄을 잡아당겼다⁠.

“⁠엄마⁠, 줄 색깔 바뀌었다⁠.⁠”

“⁠응⁠. 남색⁠.⁠”

“⁠하늘색이 더 예쁜데⁠.⁠”

“⁠엄마는 이게 더 좋아⁠.⁠”

찬결은 남색 줄을 놓고 단희의 손목을 잡았다⁠. 작은 손가락이 구슬 팔찌를 하나씩 굴렸다⁠. 빨강⁠, 노랑⁠, 초록⁠, 그리고 뒤집힌 M⁠. 해윤이 경채의 손을 놓고 엄마의 다른 손을 잡았다⁠. 경채가 찬결의 신발을 바로 신겨 주려고 무릎을 꿇었다⁠. 오른발⁠, 왼발⁠. 경채가 두 번 말했고⁠, 찬결은 두 번 다 반대 발을 내밀었다⁠. 넷은 상가 계단을 한 칸씩 내려갔다⁠. 6월의 해가 아직 높았고⁠, 계단참 창문으로 들어온 빛이 단희의 손목 위에서 구슬 하나하나를 차례로 지나갔다⁠.

여기까지가 지금까지 나온 이야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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