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화(5,320자)

방문증

마흔셋 경단녀, 동기는 스물넷 · 여시결

금요일 아침 일곱 시 사십 분⁠, 단희는 해윤의 머리를 땋았다⁠. 석 달 만에 시간이 남는 아침이었다⁠. 세 가닥이 손가락 사이에서 고르게 넘어갔다⁠. 해윤이 거울을 보고 고개를 갸웃했다⁠.

“⁠엄마⁠, 오늘 왜 안 바빠⁠?⁠”

“⁠엄마 회사 끝났어⁠.⁠”

“⁠수료했어⁠?⁠”

“⁠아니⁠. 그냥 끝났어⁠.⁠”

해윤은 거울 속 엄마를 오래 보다가 브로콜리가 아니라서 좋다고 했다⁠. 찬결은 어린이집 문 앞에서 엄마 손을 놓지 않았다⁠. 엄마가 아침에 오는 날이 드물어서였다⁠. 선생님이 찬결을 받으며 오늘은 어머님이 오셨네요⁠, 했다⁠. 단희는 오늘‘⁠은⁠’을 들었다⁠. 경채가 들었다던 소리였다⁠.

아홉 시⁠, 학부모 단톡방에 반장 엄마의 긴 글이 올라왔다⁠. 「⁠다음 주 체육대회 도우미 해 주실 어머님 두 분 구합니다⁠. 평일 오전이라 어려우신 거 알지만⁠…⁠.⁠」 아무도 답하지 않았다⁠. 「⁠넵⁠」도 붙지 않았다⁠. 단희는 손가락을 화면 위에 올렸다가 내렸다⁠. 스마트워치는 아침 내내 한 번도 떨지 않았다⁠. 손목이 가벼워서 단희는 자꾸 손목을 보았다⁠. 구슬 팔찌의 「⁠WOM⁠」만 제자리에서 반짝였다⁠.

*

열 시⁠, 떡집 천막 아래에서 춘례는 단희의 이야기를 끝까지 들었다⁠. 칼질을 멈추지 않았다⁠. 다 듣고 나서야 칼을 내려놓았다⁠.

“⁠잘렸다고⁠?⁠”

“⁠계약 해지래요⁠.⁠”

“⁠같은 말이야⁠.⁠”

춘례의 휴대전화가 울렸다⁠. 상인회장이었다⁠. 방앗간 기계 소리 너머로 상인회장의 큰 목소리가 골목까지 들렸다⁠. 꼬박 대표가 전화를 했다고⁠, 투자사가 데모데이에 실제로 쓰는 고객을 불러 달라 했다고⁠, 상인회에서 대표로 한 사람 보내 달라고 했다고⁠.

춘례가 전화기에 대고 말했다⁠.

“⁠단희 보내⁠.⁠”

“⁠단희 씨는 우리 상인회 사람이 아니잖아⁠.⁠”

“⁠오늘부터 우리 가게 사람이야⁠. 떡집 아르바이트로 써⁠.⁠”

춘례는 전화를 끊고 단희를 보았다⁠.

“⁠들었지⁠? 내일부터 여섯 시 반⁠.⁠”

“⁠사장님⁠, 시급은 얼마예요⁠?⁠”

“⁠떡으로 줄게⁠.⁠”

“⁠떡으로요⁠?⁠”

“⁠은행은 이자를 돈으로 줬지⁠. 나는 떡으로 줘⁠. 이자는 안 붙어⁠.⁠”

반찬가게 이모가 건너다보며 웃었다⁠. 이모는 민성 총각은 요새 왜 안 오느냐고 물었다⁠. 단희는 대답하지 못했다⁠. 춘례가 대신 말했다⁠. 총각은 지금 고르는 중이야⁠. 이모는 둘째 딸 얘기를 꺼내려다 춘례의 얼굴을 보고 그만두었다⁠.

*

토요일 오후⁠, 구로역 앞 키즈카페 구석 탁자에 세 여자가 앉았다⁠. 단희⁠, 나혜율⁠, 표 선생⁠. 탁자 너머 볼풀장에서 찬결이 혜율의 아들과 공을 던지며 놀았다⁠. 혜율의 아들은 아홉 살이었고⁠, 찬결에게 자기 엄마가 엘리베이터 광고에 나온다고 자랑했다⁠. 찬결은 우리 엄마는 손목만 나온다고 맞받았다⁠.

표 선생이 노트북을 펴고 빨간 펜 대신 검은 펜을 들었다⁠.

“⁠상인회 서른한 집 숫자 내가 봤어요⁠. 비 오는 날 쉬어 가기를 시험 서버에서 돌리면⁠, 일수로 넘어갈 뻔한 날이 석 달에 열흘쯤 줄어요⁠. 이건 내가 학원에서 애들한테 가르치던 그래프로 그리면 한 장이에요⁠.⁠”

“⁠한 장에 다섯 글자요⁠?⁠”

“⁠다섯 글자는 무리고⁠.⁠”

혜율은 휴대전화를 내밀었다⁠. 1기 단톡방이었다⁠. 물류센터 야간조에 다니는 1기 동기가 음성 메시지를 보내 와 있었다⁠. 혜율이 재생 버튼을 눌렀다⁠. 지게차 소리 사이로 낮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나도 각서 썼어⁠. 근데 나는 깰래⁠. 혜율이 깨면 나도 깬다⁠. 애한테 엄마는 끝까지 아무 말도 안 한 사람으로 남기 싫어⁠.⁠」

“⁠둘이 깨요⁠.⁠”

혜율이 웃었다⁠. 웃음이 처음으로 아프지 않았다⁠.

“⁠데모데이 아침에 우리 둘이 같이 올릴 거예요⁠. 1기가 받은 거⁠, 수료증하고 모델료하고 각서⁠. 단희 씨가 안에서 말할 때 밖에서도 같은 말이 나오게요⁠.⁠”

볼풀장에서 공 하나가 날아와 표 선생의 노트북 위에 떨어졌다⁠. 표 선생이 공을 집어 던지며 아이들에게 소리쳤다⁠. 거기 이등변삼각형으로 서 있지 말고 흩어져⁠! 아이들은 무슨 말인지 몰라 흩어졌다⁠.

*

일요일 밤⁠, 개봉동 거실 소파에서 경채가 휴대전화를 들고 한참 망설였다⁠. 다음 날부터 석 달 휴직이었다⁠. 단희가 보낸 초대 주소가 화면에 떠 있었다⁠. 3학년 2반 학부모 단톡방이었다⁠.

“⁠들어가면 아빠가 나 하나라며⁠.⁠”

“⁠지금 둘이야⁠. 2반에 아빠 하나 있어⁠.⁠”

“⁠그 아빠도 말해⁠?⁠”

“⁠한 번도 안 했어⁠.⁠”

경채는 숨을 들이켜고 들어갔다⁠. 「⁠배해윤 아빠님이 들어왔습니다⁠」가 떴다⁠. 경채는 한참 자판을 두드렸다 지웠다 하다가 한 줄을 올렸다⁠. 「⁠안녕하세요⁠. 해윤이 아빠입니다⁠. 이번 주부터 등하교 제가 합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일 분 동안 아무 답이 없었다⁠. 경채가 휴대전화를 내려놓으려는 순간 화면이 터졌다⁠. 「⁠넵⁠」⁠, 「⁠환영합니다⁠」⁠, 「⁠넵⁠」⁠, 「⁠아버님 반가워요⁠」⁠, 「⁠넵⁠」 스무 개가 넘었다⁠. 마지막에 반장 엄마의 글이 올라왔다⁠. 「⁠아버님⁠, 혹시 다음 주 체육대회 도우미 가능하실까요⁠? 줄다리기 줄 잡아 주실 분이 필요해요⁠.⁠」

경채는 단희를 보았다⁠. 단희는 웃음을 참느라 쿠션에 얼굴을 묻었다⁠. 경채는 「⁠넵⁠」이라고 쳤다⁠. 경채의 첫 「⁠넵⁠」이었다⁠.

*

월요일 오전 열 시⁠, 가람디지털센터 1층 카페⁠. 단희는 개찰구 바깥에서 실장을 기다렸다⁠. 실장이 개찰구를 나와 맞은편에 앉았다⁠. 탁자 위에 서류 세 장이 놓였다⁠. 날짜를 5월 31일로 맞춘 수료증⁠, 모델료 삼백만 원 지급 확인서⁠, 그리고 비밀 유지 각서⁠.

“⁠수료증도 모델료도 돌려 드릴게요⁠. 해지는 중도 수료로 바꿀게요⁠. 대신 각서 쓰시고⁠, 데모데이에는 오지 마세요⁠.⁠”

“⁠이사회가 뭐래요⁠?⁠”

“⁠트랙을 닫기로 거의 정했어요⁠. 투자 설명서 문구가 문제가 됐으니까요⁠. 단희 님이 각서를 쓰시고 데모데이에 안 나오시면⁠, 제가 투자사에 오해였다고 설명할 수 있어요⁠. 리허설은 인턴 한 분의 돌발 발언이었다고요⁠. 그러면 2기는 살아요⁠.⁠”

“⁠수료로 끝나는 2기요⁠.⁠”

“⁠네⁠. 수료로 끝나는 2기요⁠.⁠”

실장은 커피를 마시지 않았다⁠. 종이컵을 두 손으로 감싸고만 있었다⁠. 카페 창밖으로 점심 전 직원들이 개찰구를 지나갔다⁠. 초록불⁠, 초록불⁠, 초록불⁠.

“⁠실장님⁠, 2기가 수료증뿐인 걸 알고 들어오면 그건 2기가 고른 거예요⁠. 모르고 들어오면 실장님이 고른 거고요⁠.⁠”

“⁠단희 님은 남의 것까지 너무 쉽게 골라요⁠.⁠”

“⁠실장님한테 배웠어요⁠.⁠”

실장의 손이 종이컵 위에서 멈추었다⁠. 한참 뒤 실장은 서류 세 장을 다시 모아 가방에 넣었다⁠. 수료증이 맨 위에 있었다⁠. 단희의 이름이 인쇄되어 있었다⁠.

“⁠모델료 삼백이면 하원 도우미 한 해 넘게 부를 수 있어요⁠. 아시잖아요⁠.⁠”

“⁠알아요⁠. 남편 계산기가 매일 말해 줬어요⁠.⁠”

실장은 일어나면서 덧붙였다⁠.

“⁠민성 님은 오늘 저녁에 대답하겠대요⁠.⁠”

단희는 일어서는 실장을 올려다보며 물었다⁠.

“⁠실장님 아드님은 몇 살이에요⁠?⁠”

실장의 가방끈을 쥔 손이 멈추었다⁠.

“⁠열두 살이요⁠.⁠”

“⁠무슨 운동 해요⁠?⁠”

“⁠농구요⁠. 키가 저보다 커요⁠.⁠”

실장은 대답하고 나서 잠깐 웃었다⁠. 보조개는 없었지만 눈이 웃었다⁠.

“⁠회사에서 그 질문 처음 받아 봐요⁠.⁠”

“⁠다음에 또 물을게요⁠.⁠”

실장은 대답하지 않고 개찰구로 돌아갔다⁠. 초록불이 켜졌다⁠.

*

월요일 오후 세 시⁠, 남구로시장 방앗간 안에서 상인회 임시 모임이 열렸다⁠. 고춧가루 기계를 멈추고 기계 앞에 플라스틱 의자 열댓 개를 놓았다⁠. 상인회장이 단희를 앞에 세우고 말했다⁠.

“⁠데모데이에 우리 상인회 대표로 금단희 씨를 보냅니다⁠. 춘례네 떡집 아르바이트입니다⁠. 반대하실 분⁠?⁠”

건어물 가게 이모가 손을 들었다⁠.

“⁠반대는 아니고⁠, 그 총각도 오는 거야⁠?⁠”

“⁠총각은 회사 사람으로 와⁠.⁠”

“⁠그럼 찬성⁠.⁠”

모두 손을 들었다⁠. 생선 가게 사장은 손 대신 고무장갑을 들었다⁠. 단희는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열한 해 동안 창구에서 숙이던 각도보다 얕게 숙였다⁠. 춘례가 옆에서 정수리 말고 얼굴 보여 주라고 했다⁠.

*

월요일 밤 열한 시 반⁠, 신림사거리점⁠. 단희가 문을 밀자 종이 울렸다⁠. 민성은 계산대 뒤에서 고개를 들고 놀라지 않았다⁠. 올 줄 알았다는 얼굴이었다⁠.

“⁠실장님한테 대답했어요⁠?⁠”

“⁠했어요⁠. 혼자 서요⁠. 서류 받을 거예요⁠. 상환일이 다음 주예요⁠.⁠”

민성은 단희를 똑바로 보았다⁠. 피하지 않았다⁠.

“⁠화나시죠⁠?⁠”

“⁠화났어요⁠.⁠”

“⁠그럼⁠…⁠.⁠”

“⁠그래도 가져요⁠.⁠”

민성의 손이 계산대 위에서 멈추었다⁠.

“⁠민성 씨 엄마 미용실 문 닫은 거 알아요⁠. 다섯 번째 인턴인 것도 알고요⁠. 내가 민성 씨면 나도 가져요⁠. 열 해 전에 나는 더한 것도 가졌어요⁠. 춘례 사장님 서류 돌려주고 받은 월급이요⁠.⁠”

“⁠사장님⁠.⁠”

“⁠대신 하나만 해 줘요⁠. 발표에서 비 오는 날 얘기 틀리지 마요⁠. 쉬어 가는 날 뒤 사흘⁠, 다시 오른 날 전에는 안 받는 거⁠. 그 줄 하나는 춘례 사장님 영수증에서 나왔어요⁠.⁠”

“⁠안 틀려요⁠.⁠”

“⁠그리고 춘례 사장님 얘기는 내가 해요⁠.⁠”

“⁠어떻게요⁠? 출입증도 없으시잖아요⁠.⁠”

“⁠방법 있어요⁠.⁠”

민성은 계산대 아래에서 캔 커피 두 개를 꺼냈다⁠. 지난번 단희가 산 것과 같은 커피였다⁠. 이번에는 민성이 제 카드로 찍었다⁠.

“⁠실장님이 사장님한테도 뭐 내밀었죠⁠? 각서 같은 거⁠.⁠”

“⁠수료증하고 모델료하고 각서요⁠. 안 썼어요⁠.⁠”

“⁠삼백이요⁠?⁠”

“⁠삼백이요⁠.⁠”

“⁠그거면 제 상환 석 달 치예요⁠.⁠”

“⁠내 하원 도우미 한 해 치고요⁠.⁠”

민성이 캔을 따다가 손을 멈추었다⁠. 둘은 같은 숫자를 두고 각자의 쓸 곳을 말했다⁠. 숫자는 하나였고 쓸 곳은 둘이었다⁠. 민성이 캔을 단희 앞으로 밀었다⁠.

문의 종이 울렸다⁠. 넥타이를 반쯤 푼 회사원이 들어와 숙취해소제를 집었다⁠. 지난번에 단희를 사모님이라고 불렀던 회사원이었다⁠. 회사원이 계산대 앞에서 단희와 민성을 번갈아 보았다⁠.

“⁠사모님 또 오셨네요⁠.⁠”

“⁠사모님 아니에요⁠.⁠”

이번에도 둘이 동시에 말했다⁠. 회사원은 고개를 갸웃하며 숙취해소제를 계산했다⁠. 민성이 바코드를 찍다가 처음으로 웃었다⁠. 단희도 웃었다⁠. 웃음이 끝나자 둘 다 말이 없었다⁠.

*

화요일 아침 아홉 시⁠, 가람디지털센터 1층 안내데스크 앞에 세 사람이 모였다⁠. 상인회장⁠, 춘례⁠, 단희⁠. 투자사 심사역이 데모데이 전에 고객과 먼저 만나고 싶다고 했다⁠. 안내데스크 직원이 방문 예약을 확인하고 주황색 줄이 달린 출입증 세 개를 내밀었다⁠. 「⁠방문 — 남구로시장 상인회⁠」

단희는 주황색 줄을 목에 걸었다⁠. 하늘색 줄을 걸던 자리였다⁠. 줄의 무게가 같았다⁠. 춘례는 방문증을 앞치마 끈에 묶었고⁠, 상인회장은 방문증을 뒤집어 뒷면의 주의 사항까지 소리 내어 읽었다⁠. 분실 시 재발급 불가⁠. 상인회장은 고개를 끄덕이며 방문증을 셔츠 단추 구멍에 한 번 더 감았다⁠.

개찰구 너머 엘리베이터에서 실장 엄여란이 내렸다⁠. 실장은 개찰구 앞에서 걸음을 멈추고 단희의 목을 보았다⁠. 주황색 줄이었다⁠.

“⁠단희 님⁠.⁠”

“⁠오늘은 상인회 대리인이에요⁠. 금단희예요⁠.⁠”

단희는 방문증을 개찰구에 댔다⁠. 초록불이 켜졌다⁠. 춘례가 단희의 등을 떡 반죽 치듯 두드렸다⁠. 실장은 비켜서지 않았고⁠, 단희도 돌아가지 않았다⁠. 개찰구 문이 열린 채 둘 사이에서 삐 소리를 냈다⁠.

12화는 어땠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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