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화(5,327자)

출입증

마흔셋 경단녀, 동기는 스물넷 · 여시결

월요일 아침 여덟 시⁠, 대들보건자재 영업2팀 팀장실은 커피 냄새보다 담배 냄새가 짙었다⁠. 건물 안에서 피우지 않은 지 오래인데 팀장의 양복에는 늘 냄새가 배어 있었다⁠. 배경채는 두 장짜리 종이를 팀장의 책상에 내려놓았다⁠. 「⁠육아휴직 신청서⁠」

팀장은 종이를 들지 않고 내려다보기만 했다⁠.

“⁠배 과장⁠, 이게 뭐야⁠?⁠”

“⁠육아휴직 신청서입니다⁠. 석 달입니다⁠.⁠”

“⁠석 달⁠.⁠”

팀장은 숫자를 따라 말하고 의자에 등을 기댔다⁠.

“⁠영업은 관계야⁠. 석 달 비우면 거래처가 다 옆 팀으로 가⁠. 돌아오면 자네 자리는 남아도 자네 거래처는 안 남아⁠. 내가 자네 승진시키려고 작년부터 위에다 얼마나 밀었는지 알아⁠?⁠”

“⁠압니다⁠.⁠”

“⁠알면서⁠?⁠”

“⁠알아서 지금 냅니다⁠. 모르는 척하고 내면 팀장님께 더 죄송할 것 같아서요⁠.⁠”

팀장은 한숨을 쉬었다⁠. 경채는 속으로 셌다⁠. 하나⁠, 둘⁠, 셋⁠. 팀장은 볼펜을 집었다⁠. 넷⁠. 결재 칸에 이름을 썼다⁠. 다섯⁠.

“⁠이번 승진 심사는 접어⁠. 다음 해에도 장담 못 해⁠.⁠”

“⁠알겠습니다⁠.⁠”

“⁠와이프 회사는 어때⁠. 떡집이라며⁠.⁠”

“⁠떡집 아닙니다⁠. 핀테크입니다⁠. 떡집은 고객이고요⁠.⁠”

팀장은 처음으로 웃었다⁠. 웃음 끝에 한숨이 하나 더 붙었다⁠. 여섯 번이었다⁠. 경채는 팀장실을 나와 복도 창문에 비친 제 넥타이를 고쳐 맸다⁠. 다음 주부터는 맬 일이 없는 넥타이였다⁠.

*

같은 날 아침 아홉 시⁠, 3층 교육장⁠. 실장 엄여란은 단희의 책상에 종이 한 장을 놓았다⁠. 「⁠데모데이 캠페인 발표 대본 — 금단희⁠」 목요일 오후 두 시에 15층에서 리허설이 있다고 했다⁠.

“⁠계약서 서명은 리허설 끝나고 하셔도 돼요⁠. 대본 먼저 입에 붙여 두세요⁠.⁠”

대본은 짧았다⁠. 「⁠열 해 동안 저는 엄마였습니다⁠. 꼬박은 제게 다시 출근할 용기를 주었습니다⁠. 저는 수료증만으로도 충분합니다⁠. 이 수료증을 들고 오늘도 아이에게 달려갑니다⁠.⁠」

실장이 나간 뒤⁠, 단희는 의자를 굴려 민성의 책상 앞으로 갔다⁠. 열흘 만이었다⁠.

“⁠대답했어요⁠?⁠”

민성은 화면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데모데이 전날까지 기다려 달라고 했어요⁠. 실장님이 그러자고 했어요⁠.⁠”

“⁠왜 전날까지요⁠?⁠”

“⁠생각이 안 끝나서요⁠.⁠”

“⁠그래요⁠.⁠”

단희는 의자를 굴려 돌아갔다⁠. 민성이 무언가를 더 말하려고 입을 열었다가 닫는 것을 단희는 등 뒤로 들었다⁠. 키보드 소리가 한참 멈추어 있었다⁠.

*

수요일 밤⁠, 개봉동 식탁에서 단희는 대본을 소리 내어 읽었다⁠. 열 번째였다⁠. 스무 번 읽으면 입에 붙는다고 실장이 말했다⁠. 거실 바닥에서 숙제를 하던 해윤이 연필을 내려놓았다⁠.

“⁠엄마⁠, 그거 엄마 말 아니지⁠?⁠”

“⁠왜⁠?⁠”

“⁠엄마는 ‘⁠충분합니다⁠’ 이런 말 안 써⁠. 엄마는 ‘⁠됐어⁠’라고 해⁠. 그리고 엄마는 우리한테 안 달려와⁠. 걸어와⁠. 빨리 걸어와⁠.⁠”

단희는 대본을 내려놓고 해윤을 보았다⁠. 해윤은 연필을 다시 들고 공책 귀퉁이에 사람을 그렸다⁠. 목에 줄을 단 사람이었다⁠. 지난번보다 줄이 길었다⁠.

“⁠엄마 말로 하면 뭐라고 해⁠?⁠”

“⁠몰라⁠. 엄마가 알지⁠.⁠”

단희는 대본을 뒤집었다⁠. 뒷면은 비어 있었다⁠. 단희는 남구로시장 상인회 마흔 집의 숫자를 적었다⁠. 매출 흐름 심사를 받은 집이 서른한 곳이었다⁠. 그중 대출을 받은 곳은 열두 곳⁠, 연체는 아직 한 곳도 없었다⁠. 숫자 아래에 춘례의 말을 적었다⁠. 빌리는 건 내가 정할 때 해⁠. 앱이 정할 때 말고⁠. 경채가 식탁 맞은편에 앉아 뒤집힌 대본을 보았다⁠. 다음 주 월요일부터 휴직인 남편이었다⁠.

“⁠그거 읽으면 잘려⁠?⁠”

“⁠아마⁠.⁠”

“⁠그래도 읽을 거야⁠?⁠”

“⁠응⁠.⁠”

경채는 냉장고에서 보리차를 꺼내 두 잔을 따랐다⁠. 계산기 앱은 켜지 않았다⁠.

*

목요일 오후 두 시⁠, 15층 라운지에 의자 스무 개가 줄을 맞춰 놓였다⁠. 앞줄에 대표⁠, 재무이사⁠, 실장⁠, 그리고 낯선 여자가 하나 앉았다⁠. 마흔 중반쯤에 짧은 커트 머리⁠, 무릎 위에 두꺼운 수첩이 있었다⁠. 대표가 소개했다⁠. 스타트업에 돈을 넣기 전에 회사를 들여다보는 투자사 솔바람벤처스의 심사역이었다⁠. 데모데이 전 사전 점검차 왔다고 했다⁠.

민성이 먼저 기능을 발표했다⁠. 비 오는 날 쉬어 가기⁠. 화면에 이름 없는 가게 수천 곳의 매출이 파도처럼 겹쳤다⁠. 민성은 막힘이 없었다⁠. 심사역이 수첩에 두 줄을 적었다⁠. 발표 화면 마지막 장에 이름이 하나뿐이었다⁠. 「⁠발표 차민성⁠」 단희는 마지막 장을 보았고⁠, 민성은 단희가 보는 것을 알았다⁠.

불이 꺼지고 캠페인 영상이 돌았다⁠. 손목⁠, 구슬 팔찌⁠, 「⁠WOM⁠」 따뜻한 한숨⁠. 영두의 고개 끄덕임 열두 번⁠. 마지막 장면에서 얼굴이 흐린 아이가 수료증을 든 여자에게 달려왔다⁠. 자막이 떴다⁠. 「⁠엄마의 두 번째 출근⁠, 여기까지도 충분히 눈부십니다⁠.⁠」

불이 켜졌다⁠. 단희가 마이크 앞으로 나갔다⁠. 손에 대본이 있었다⁠.

“⁠열 해 동안 저는 엄마였습니다⁠.⁠”

첫 줄은 대본대로 읽었다⁠. 다음 줄에서 단희는 멈추었다⁠. 해윤의 말이 귀에 남아 있었다⁠. 엄마는 달려오지 않아⁠. 빨리 걸어와⁠. 단희는 대본을 뒤집었다⁠.

“⁠대본 속 사람은 제가 아니에요⁠.⁠”

라운지가 조용해졌다⁠. 실장이 앞줄에서 몸을 일으켰다⁠.

“⁠단희 님⁠, 대본대로 해 주세요⁠.⁠”

“⁠금방 끝낼게요⁠, 실장님⁠.⁠”

단희는 뒤집은 종이를 읽었다⁠.

“⁠저는 다시봄 인턴입니다⁠. 다시봄 인턴은 이사회 조건에 따라 정규직 심사 대상이 아닙니다⁠. 수료로 끝납니다⁠. 저는 그 조건을 그림 대본의 포스트잇에서 처음 알았습니다⁠. 그래도 방금 보신 기능은 제가 차민성 씨와 같이 만들었습니다⁠. 이름도 제가 지었습니다⁠. 남구로시장 상인회 마흔 집 가운데 서른한 곳이 이 심사를 받았습니다⁠. 사장님들이 이 앱을 쓰시는 이유는 하나입니다⁠. 빌리는 날을 사장님이 정할 수 있어서요⁠. 앱이 정하지 않아서요⁠.⁠”

심사역이 수첩을 덮었다⁠. 그리고 손을 들었다⁠.

“⁠질문 하나 해도 될까요⁠? 다시봄 트랙이 수료로 끝난다는 건 저희가 받은 투자 설명서에 없던데요⁠. 설명서에는 ‘⁠경력 단절 여성 고용 프로그램⁠’이라고 되어 있어요⁠. 고용이요⁠.⁠”

재무이사가 대표를 보았다⁠. 대표는 실장을 보았다⁠. 실장은 단희를 보았다⁠. 단희는 민성을 보았다⁠. 민성은 노트북 화면을 보고 있었다⁠. 고개를 들지 않았다⁠. 심사역의 질문이 라운지 공기 위에 한참 떠 있었다⁠. 대표가 일어났다⁠.

“⁠답은 데모데이에 드리겠습니다⁠.⁠”

*

오후 네 시⁠, 12층 실장실⁠. 실장은 통유리 창을 등지고 서 있었다⁠. 책상 위에 서류 한 장이 놓여 있었다⁠. 「⁠인턴 계약 해지 통보 — 사유⁠: 회사 내부 조건의 외부 공개⁠, 업무 지시 불이행⁠」 날짜는 오늘이었다⁠.

“⁠투자사 앞에서 이사회 조건을 말하셨어요⁠. 계약 위반이에요⁠.⁠”

“⁠사실이잖아요⁠.⁠”

“⁠사실은 말하는 자리가 있어요⁠. 이사회는 오늘 저녁에 트랙을 닫자고 할 거예요⁠. 투자 설명서에 문제가 생겼으니까요⁠. 단희 님 때문에 2기가 없어질 수 있어요⁠.⁠”

실장의 목소리는 밝지도 낮지도 않았다⁠. 평평했다⁠.

“⁠실장님⁠, 2기가 들어오면 첫날 열네 장째를 먼저 읽어 주세요⁠. 그것만 해 주시면 저는 됐어요⁠.⁠”

“⁠그게 단희 님 마지막 부탁이에요⁠?⁠”

“⁠부탁 아니에요⁠. 실장님도 석 달 만에 복직하실 때 누가 그거 읽어 줬으면 했잖아요⁠.⁠”

실장은 대답하지 않았다⁠. 서류를 단희 쪽으로 밀었다⁠. 서명 칸은 비어 있지 않았다⁠. 실장의 서명이 이미 있었다⁠.

“⁠출입증은 1층에서 받을게요⁠. 제가 직접 내려갈게요⁠.⁠”

실장의 휴대전화가 책상 위에서 떨었다⁠. 실장은 화면을 보고 바로 받았다⁠.

“⁠네⁠, 이사님⁠. 네⁠. 오늘 저녁 여섯 시요⁠. 설명서 문구는 제가 정리해서 들어가겠습니다⁠. 네⁠. 트랙 얘기도요⁠.⁠”

전화를 끊은 실장은 휴대전화를 엎어 두었다⁠. 단희가 첫 주에 식탁 위에 휴대전화를 엎던 손과 같은 손놀림이었다⁠. 단희의 손목에서 스마트워치가 떨었다⁠. 「⁠하원 18⁠:30⁠」 단희는 경채에게 한 줄을 보냈다⁠. 「⁠오늘 하원 내가 가⁠. 일찍 끝났어⁠.⁠」 답은 금방 왔다⁠. 「⁠잘렸어⁠?⁠」 단희는 「⁠응⁠」이라고 쳤다⁠. 다음 답은 조금 늦게 왔다⁠. 「⁠저녁은 내가 해⁠. 라면 말고⁠.⁠」

*

오후 네 시 사십 분⁠, 15층과 14층 사이 비상계단에 민성이 앉아 있었다⁠. 리허설이 끝나고 한 시간 넘게 같은 자리였다⁠. 계단 위 문이 열리고 한정판 운동화가 내려왔다⁠. 길영두였다⁠. 영두는 민성의 두 칸 위에 앉았다⁠.

“⁠너 왜 고개 안 들었어⁠? 심사역 질문할 때⁠.⁠”

“⁠들면 제가 뭐라고 해야 할지 몰라서요⁠.⁠”

“⁠뭐라고 하긴⁠. 같이 만들었다고 하면 되지⁠. 발표 화면에 네 이름만 넣은 것도 너야⁠?⁠”

“⁠실장님이 넣으라고 했어요⁠. 넣지 말라고 안 했어요⁠, 제가⁠.⁠”

영두는 운동화 끈을 풀었다 다시 묶었다⁠.

“⁠나도 처음에 그랬어⁠. 다시봄 얘기 너한테 흘릴 때⁠. 흘리고 나서 아무 말 안 하는 게 편했어⁠. 근데 해커톤 날 서버 열고 나니까 알겠더라⁠. 입 다물고 있던 게 더 쪽팔린 거였어⁠.⁠”

민성은 대답하지 않았다⁠. 영두가 휴대전화를 보더니 일어났다⁠.

“⁠단희 님 다섯 시에 나간대⁠. 1층에서 출입증 반납한대⁠. 실장님이 직접 받는대⁠.⁠”

“⁠해고예요⁠?⁠”

“⁠계약 해지⁠. 같은 말이야⁠.⁠”

영두는 계단을 올라가다 멈추었다⁠.

“⁠민성아⁠, 계단은 내려가는 게 빨라⁠. 엘리베이터는 15층에서 1층까지 일 분 넘게 걸려⁠.⁠”

*

오후 다섯 시⁠, 단희는 종이 상자 하나를 들고 3층 교육장을 나왔다⁠. 상자 안에 꼬박이 인형⁠, 형광펜 투명 파일⁠, 표 선생의 빨간 펜이 들어 있었다⁠. 교육장 사람들이 일어나 인사를 했다⁠. 맨 앞자리는 비어 있었다⁠. 민성은 리허설 뒤로 내려오지 않았다⁠.

1층 로비⁠, 개찰구 앞에서 실장이 기다리고 있었다⁠. 엘리베이터 위 화면에서 손목 광고가 돌았다⁠. 「⁠공정을 고른 경단녀⁠」 광고 속 손목과 상자를 든 손목이 같은 팔찌를 차고 있었다⁠. 로비를 지나던 직원 몇이 화면과 단희를 번갈아 보았다⁠. 단희는 상자를 바닥에 내려놓고 목에서 하늘색 출입증 줄을 벗었다⁠. 석 달 전 아침⁠, 열 해 만에 목에 건 줄이었다⁠. 실장은 손을 내밀었다⁠. 단희는 줄을 실장의 손바닥에 놓았다⁠. 줄이 손바닥 위에서 둥글게 감겼다⁠.

단희는 문득 해윤의 색종이 카네이션을 교육장 책상 서랍에 두고 온 것을 떠올렸다⁠. 손이 저절로 출입증을 찾았다⁠. 출입증은 실장의 손에 있었다⁠. 실장이 출입증을 돌려주며 말했다⁠.

“⁠가져오세요⁠. 기다릴게요⁠.⁠”

단희는 출입증을 개찰구에 댔다⁠. 빨간불이 켜지고 삑 소리가 났다⁠. 화면에 글씨가 떴다⁠. 「⁠출입 권한이 없습니다⁠.⁠」 오후 네 시에 이미 꺼진 출입증이었다⁠. 실장이 출입증을 다시 받아 쥐었다⁠. 둘 다 웃지 않았다⁠.

“⁠제가 가져다 드릴게요⁠.⁠”

“⁠두세요⁠. 서랍에 두세요⁠. 제 자리였다는 표시로요⁠.⁠”

단희는 상자를 들고 몸을 돌렸다⁠. 회전문 유리에 비친 개찰구 너머로 비상계단 문이 벌컥 열리는 것이 보였다⁠. 덥수룩한 갈색 머리가 숨을 몰아쉬며 로비로 뛰어나왔다⁠. 민성은 개찰구 앞에서 멈추었다⁠. 개찰구가 둘 사이에 있었다⁠. 민성은 출입증을 손에 쥐고도 대지 않았다⁠. 단희는 회전문 밖에서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회전문이 한 바퀴 돌아 민성의 얼굴을 가렸다⁠.

11화는 어땠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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