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화(5,160자) · 이소온 · 병오년 섣달
스물두 집
다른 이름으로 불러 주세요 · 백해원
만 19세 이상 이용가
이소온은 스물두 집을 돌기로 한 날 아침, 아버지에게 먼저 들켰다. 이 참판은 사랑 툇마루에서 넷째 딸이 쓰개치마를 쓰고 몸종도 없이 대문을 나서는 것을 보고 곰방대를 떨어뜨렸다. 어디 가느냐고 물었고, 이소온은 궁 혼인 선배님들 뵈러 간다고 대답했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이 참판은 그 대답을 곱씹는 동안 딸이 대문 밖으로 사라지는 것을 보았다. 뒤를 쫓으라고 하인을 불렀을 때는 이미 늦었다. 하인은 골목에서 엿을 문 아이 하나에게 길을 물었다가 반대쪽으로 갔다.
엿을 문 아이는 달구였다. 이소온과 달구는 계동으로 먼저 갔다. 박 참의 댁, 흐리게 만든 열둘 가운데 첫째였다.
박 참의 댁 둘째 딸은 쉰이 넘어 있었다. 시집간 곳은 계동 윗골목의 최씨 댁이었고, 이소온이 궁 혼인 앞둔 신부라고 제 입으로 대자 안방까지 들여 주었다. 안방은 아랫목에 깐 두꺼운 요 밑으로 장작 땐 열기가 올라와 따뜻했고, 방 안 가득 볕에 말린 목화솜 냄새가 났다. 장롱 위에 수틀 다섯이 먼지를 쓴 채 포개져 있었다. 이소온은 그 수틀을 보고 할머니가 한 말을 떠올렸다. 수를 잘 놓는다는 말 한 줄로 만든 등.
“혼인 등이야 있지요, 합등해서 장롱 맨 아래 칸에 서른네 해째 들어 있소.”
“한 번 켜 보신 적 있으세요?”
“혼례 날 한 번. 벽이 곱게 한 색이 났지. 그 뒤로는 안 켰소. 켤 일이 없었으니까.”
이소온은 수틀 쪽을 턱으로 가리켰다.
“수 잘 놓으신다면서요? 궁에서 온 종이에 그렇게 적혀 있었대요.”
안주인은 수틀을 한참 보다가 웃음을 터뜨렸다. 웃음이 멈추지 않아서 손바닥으로 무릎을 쳤다.
“아이고, 나 수 못 놓소. 바늘만 잡으면 손가락을 찔러서 친정에서도 포기했소. 우리 어머니가 궁에 종이를 올릴 때 그 한 줄을 넣었지. 그 뒤로 서른네 해 동안 시어머니 앞에서 놓는 척만 했소. 저 다섯 개 다 우리 며느리가 놓은 거요.”
달구가 먼저 웃었고, 이소온이 따라 웃었다. 이소온은 웃으면서 제 종이에 적힌 활쏘기 한 줄을 생각했다. 서른네 해 뒤에 저도 어느 신부 앞에서 과녁 뒤 이야기를 하며 무릎을 치게 될지 궁금했다.
“그 등, 켜 보고 싶지 않으세요? 서른네 해 지나면 색이 바뀐대요. 흐리게 만든 건 해가 갈수록 좁아져서 두 색이 난대요. 수 못 놓는 분하고 수 잘 놓는 분이 서로 안 맞았다는 게 벽에 그대로 드러날 거예요.”
안주인은 웃음을 거두고 이소온을 오래 보았다. 그러고는 일어나 장롱 맨 아래 칸을 열었다.
*
사직골 김 판관 댁은 둘째였다. 이소온과 달구가 대문에 닿았을 때 대문이 이미 열려 있었다. 마당에 낯익은 장대가 하나 서 있었고, 사랑 마루에 도석우가 앉아 있었다. 그 앞에 엽전 꾸러미가 놓여 있었다. 김 판관 댁 안주인이 마루 끝에서 등 하나를 안고 머뭇거리고 있었다.
“닷 냥 드리겠소. 삼십 년 된 등에 닷 냥이면 후한 값이오. 광에 두면 쥐나 먹지.”
도석우가 이소온을 보고 눈썹을 올렸다.
“이씨 댁 넷째 아가씨가 여기까지 웬일이시오? 혼례 앞둔 신부가 남의 집 헌 등을 주우러 다니면 흉이오.”
“남산 등방은 헌 등을 사러 다니시네요. 그건 흉 아니에요?”
“나는 장사꾼이라 헌 등도 쓸 데가 있소.”
“어디다 쓰시는데요, 태우는 데요?”
도석우가 입을 다물었다. 마루 끝의 안주인이 안고 있던 등을 조금 더 꼭 끌어안았다. 이소온은 신을 벗고 마루에 올라섰다. 도석우 맞은편에 앉지 않고 안주인 옆에 섰다.
“마님, 그 등 저 주세요. 저는 닷 냥이 없어요. 대신 이거 드릴게요.”
이소온이 머리에 꽂은 은비녀를 뽑았다. 봉황 머리를 새긴 비녀였고, 봉황 눈에 산호 알이 박혀 있었다. 삼월 혼례 때 꽂으라고 이 참판이 지난봄 종로 은방에서 맞춰 왔다. 비녀를 뽑자 이소온의 쪽머리가 한쪽으로 풀려 어깨에 흘렀다. 달구가 입을 딱 벌렸다.
“아가씨, 그거 혼례 비녀잖아요!”
“그러니까 드리는 거야. 혼례 비녀로 혼례 등을 사는 거니까 셈이 맞잖아.”
도석우가 엽전 꾸러미를 하나 더 얹었다. 열 냥이라고 했다. 이소온은 비녀를 안주인 손바닥에 올려놓았다. 안주인은 비녀와 엽전과 이소온의 풀린 머리를 번갈아 보았다. 그러고는 도석우에게 물었다.
“남산 양반, 이 등 사서 뭐 하시려오?”
“쓸 데가 있다 하지 않았소.”
안주인은 이번에는 이소온에게 물었다.
“아가씨는 이 등 가져가서 뭐 하시려오?”
“켜 보려고요, 삼십 년 동안 무슨 색이 됐는지. 마님은 안 궁금하세요?”
안주인이 한참 등을 내려다보았다. 한지가 누렇게 바랬고, 손잡이 끈이 두 번 기워져 있었다. 안주인은 그 기운 자리를 엄지로 쓸었다.
“궁금하지, 서른 해 동안 궁금했소. 우리 영감하고 나하고 왜 이리 안 맞나. 등은 한 색이었다는데.”
안주인은 등을 이소온에게 내밀었다. 그리고 은비녀를 이소온의 손에 도로 쥐여 주었다.
“비녀는 도로 꽂으시오. 머리가 그리 풀려서야 어디 신부 같소? 등은 그냥 가져가시오. 대신 켜는 날 나도 부르시오. 내 눈으로 볼라오.”
도석우는 엽전 꾸러미를 거두었다. 거두는 손이 거칠어서 꾸러미 끈이 풀렸고, 엽전 몇 닢이 마루 틈으로 굴러 들어갔다. 달구가 그것을 보고 엎드렸다가 이소온에게 뒷덜미를 잡혔다.
*
그날 저녁 이소온이 등 두 개를 안고 대문을 들어서자 이 참판이 사랑 마루에서 내려왔다. 하인 넷이 뒤따랐다. 이 참판은 딸이 안은 헌 등 둘을 보고, 풀렸다가 대충 다시 틀어 올린 쪽머리를 보고, 달구를 보았다. 달구는 그 눈길에 엿 막대를 입에서 뺐다.
“궁 혼인 선배님들을 뵈러 간다더니 헌 등을 주워 왔느냐? 윤 판서 댁에서 이 일을 알면 혼사가 어찌 되는 줄 아느냐?”
“깨지겠지요. 깨져도 괜찮아요.”
“네 입으로 그 말을 하느냐?”
“아버지, 제 종이에 활을 좋아한다고 쓰라고 하셨죠? 그 한 줄 때문에 등감 마당에서 제 색이 귀퉁이로 밀려났대요. 남산 등방이 지어낸 분홍에 먹혀서요. 아버지가 쓰라 한 한 줄하고 남산이 지어낸 열 줄이 저를 벽 귀퉁이에 세웠어요.”
이 참판의 입이 열렸다가 닫혔다. 넷째 딸이 제 앞에서 이렇게 길게 말한 것은 처음이었다. 하인들이 서로 눈치를 보았다. 이소온은 등 둘을 안은 채 아버지 앞을 지나 안채로 걸어갔다. 걸어가다가 한 번 돌아섰다.
“아버지는 과녁 뒤에서 화살 세는 제가 부끄러우셨죠? 저는 그거 잘했어요. 오라비들이 몇 개 빗나갔는지 다 알았어요. 이번에도 셀 거예요. 흐린 등이 몇 개 빗나갔는지.”
이 참판은 대답하지 못했다. 하인 하나가 떨어진 곰방대를 주워 올렸지만 이 참판은 그것을 받지 않고 한참 마당에 서 있었다.
*
열흘 동안 이소온과 달구는 나머지 집들을 돌았다. 어떤 집은 대문도 안 열고 개만 짖게 했다. 어떤 집은 영감이 직접 나와 등을 태운 지 스무 해라고 했다. 태우고 나서 잘 살았다고, 등 따위 없이도 사는 사람은 산다고. 이소온은 그 말에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틀린 말이 아니었다. 청진방의 한 집은 안주인이 등을 내주면서 제 남편 몰래 한 번만 켜 보고 싶다고 울었고, 다른 한 집은 며느리가 시어머니 등을 몰래 들고 뒷문으로 나와 이소온 품에 안겼다. 시어머니가 서른 해 동안 그 등을 쳐다보며 한숨 쉬는 것을 보았다고 했다. 달구는 집집마다 셈을 했다. 문 연 집, 안 연 집, 개 짖은 집, 떡 준 집. 떡 준 집이 셋이라 달구는 그 셋만 두 번씩 셌다.
그렇게 스물두 집을 다 돌았다. 도석우가 먼저 간 집이 다섯이었다. 그중 넷은 벌써 등을 팔았고, 하나는 이소온 이야기를 듣고 도석우가 준 돈을 돌려보냈다. 등을 태운 지 오래인 집이 셋이었고, 등을 가졌어도 끝내 문을 안 연 집이 셋이었다. 그러고 나니 열다섯이 남았다.
열다섯 집 가운데 열 집의 안주인이 켜는 날 오겠다고 했다. 그 가운데 셋은 서씨 등방에 제 손으로 편지를 보내왔다. 연은 그 편지들을 받아 읽고 광으로 갔다.
광 서까래 밑에는 막동이 남산에서 몰래 가져온 긴 기둥 둘이 받쳐져 있었다. 가로대는 다시 걸렸고, 등 스물여섯이 제자리에 돌아가 있었다. 이소온과 달구가 가져온 열다섯이 그 옆에 하나씩 걸렸다. 광의 등은 그렇게 마흔하나가 되었다. 문을 열면 들어간 바람에 마흔하나가 한꺼번에 부딪혀, 전보다 훨씬 오래 마른 소리가 났다.
이소온은 광 한가운데 서서 그 소리를 들었다. 등 사이에 걸린 붉은 실들이 머리 위에서 흔들렸다. 연이 실패를 들고 사다리에 올라 새 실을 걸었다. 홍씨 부인에게서, 계동 최씨 댁 안주인에게서, 사직골 김 판관 댁 안주인에게서. 이 집을 거쳐 간 편지 안에서 서로의 이름이 한 번이라도 오간 사람끼리. 사람이 스물이 되자 줄은 백아흔이 되었다. 실이 너무 많아서 가로대 사이가 붉은 그물처럼 보였다.
“백아흔 줄이에요.”
사다리 밑에서 달구가 셌다. 셈을 틀리지 않으려고 입술이 달싹거렸다. 누구를 닮았는지 연은 알았다.
이소온은 광 안쪽으로 걸어갔다. 맨 안쪽 가로대에 쪽빛 등 하나가 걸려 있었다. 편지로 만든 첫 등의 살과 한지는 그대로 두고, 발 너머 목소리로 적은 속지를 새로 넣은 등이었다. 그 옆 갈고리에 등감 마당에서 돌려받은 치자색 제 등이 있었다. 둘 사이에 실이 하나 걸려 있었고, 쪽빛 등에서 가로대 기둥 못으로 가는 실이 또 하나 있었다. 못에는 등이 없었다.
“낭자, 저 못은 누구 거예요?”
“제 자리인데, 저는 등이 없어서요.”
이소온이 그 못을 오래 보았다. 그러고는 연을 돌아보았다.
“낭자, 그 사람 좋아하죠?”
연은 사다리 위에서 실패를 떨어뜨릴 뻔했다. 달구가 밑에서 실패를 받아 들고 두 사람을 번갈아 보았다. 엿 몇 가락짜리 이야기인지 셈하는 얼굴이었다.
“아가씨, 그분은 아가씨의 정혼자십니다.”
“그건 알아요. 나도 그 사람 편지 좋아해요. 그런데 나는 궁금한 거고, 낭자는 달라요. 낭자는 그 사람 창이 넷인 걸 제 눈으로 보고 왔잖아요.”
이소온은 풀린 쪽머리를 은비녀로 다시 틀어 올렸다. 봉황 눈의 산호 알이 등잔 불빛에 붉게 떴다. 붉은 실 백아흔 줄 아래에서 그 붉은색이 하나 더 늘었다.
등잔 심지가 한 번 튀었다. 연은 사다리 위에서 내려오지 못하고 가로대를 붙든 채 서 있었다. 손끝의 치자물 자국이 붉은 실 사이에서 누렇게 떠 보였다. 아니라고 말하면 거짓말이었고, 그렇다고 말하면 정혼자 앞에서 할 말이 아니었다. 연은 둘 중 어느 쪽도 고르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이소온은 그 입 다문 얼굴을 대답으로 받았다.
“삼월 열엿새에 두고 봐요. 나는 그 벽 앞에서 누구랑 사는지 알고 나서 정할 거예요. 낭자도 그날은 정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