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화(5,634자) · 연 · 병오년 섣달 초이레

합으로 적는다

다른 이름으로 불러 주세요 · 백해원

만 19세 이상 이용가

섣달 초이레 오후, 서씨 등방 문을 열고 여자 손님 하나가 들어왔다. 마흔 남짓이었고 옷이 좋았다. 은가락지 낀 손으로 쓰개치마를 걷더니 작업대 앞에 서서 인사도 없이 물었다.

“우리 등이 한 색이었소, 두 색이었소?”

연은 대나무를 내려놓았다. 여자는 제 이름을 대지 않았다. 대신 열여덟 해 전 삼월, 궁에서 정한 혼인이었다고 했다. 신랑은 종친 댁 셋째였고, 등은 서씨 댁이 만들었다고. 서씨 댁은 장부에 이름을 적지 않았다. 값과 쌍과 날짜만 적었다. 연은 열여덟 해 전 삼월 줄을 짚다가 손을 멈추고 뒤채로 갔다.

할머니는 이불 속에서 여자의 말을 듣고 한참 천장을 보았다. 그러고는 입을 열었다. 무술년 삼월 스무이틀, 사직골 종친 댁 셋째와 안국방 홍씨 댁 맏딸. 담 밖을 두 달 돌았다고 했다. 맏딸은 날마다 해 질 녘에 뒤뜰 장독대에 나와 앉아 있었고, 할머니는 그 장독대 너머 담에 붙어 그 아이가 혼잣말하는 것을 들었다고 했다.

“그 등은 제대로 만들었고, 두 색이 났다.”

연은 작업대로 돌아가 그대로 전했다. 여자는 한참 서 있다가 마루 끝에 앉았다. 은가락지 낀 손을 무릎 위에 포개고 한동안 아무 말도 안 했다. 마당에서 달구가 대나무 부스러기를 쓸다가 빗자루를 멈췄다.

“그럼 내가 모자란 게 아니었구려.”

여자의 목소리가 낮게 갈라졌다.

“열여덟 해 동안 나는 내가 모자라서 그런 줄 알았소. 궁에서 맺어 준 혼인인데 한 번도 맞는 날이 없었소. 등은 한 색이었다고 들었으니, 맞지 않는 건 내 탓이라고. 등감에서 합이라 적었다고 시댁에서 그렇게 말했소.”

“등감에서는 합으로 적었을 겁니다. 궁 혼인은 두 색이어도 합으로 적는다고 들었습니다.”

여자는 은가락지를 빼서 값이라며 작업대 위에 놓았다. 연은 가락지를 도로 여자 손에 쥐여 주었다. 여자가 그럼 무엇으로 갚느냐고 묻자, 연은 광 쪽을 한 번 보고 말했다.

“나중에 한 번 불러 드리면 오셔서, 오늘 하신 말씀을 한 번만 더 해 주십시오. 저 말고 다른 사람 앞에서요.”

여자는 대답 대신 고개를 한 번 숙였다. 그리고 문을 나서면서 제 이름을 댔다. 홍씨라고, 안국방 홍씨 맏딸이라고. 열여덟 해 만에 처음으로 제 입으로 대는 친정 이름이라고 했다.

그날 밤 할머니는 연을 불러 앉히고 우셨다. 소리 없이, 눈이 어두운 사람답게 눈을 감은 채로. 할머니 대에 일곱이 왔고 어머니 대에 넷이 왔다고 했다. 연의 대에는 이 사람이 처음이라고. 연은 할머니 손을 잡고 그 떨림을 오래 쥐고 있었다.

*

이틀 뒤 등감에서 사람이 왔다. 서리 하나가 붉은 인 찍힌 종이를 내밀고 오늘 안으로 감관 나리 앞에 서라고 했다. 연은 두루마기를 걸치고 광화문 밖으로 갔다.

등감 마당은 넓었다. 흙바닥을 다져 판판하게 고른 마당 한가운데 장대 스무 개가 두 줄로 서 있었고, 장대마다 쇠갈고리가 둘씩 달려 있었다. 마당을 둘러싼 흙벽은 해마다 흰 회를 새로 발라 눈이 부셨다. 등 빛이 떨어질 벽이었다. 섣달 바람이 마당을 쓸고 지나가자 빈 갈고리들이 장대에 부딪혀 쇳소리를 냈다. 벽 앞 대청에 쉰여섯의 감관 민규헌이 앉아 있었다. 앞에 놓인 등색록이 두꺼웠고, 겉장이 손때에 반들거렸다.

대청 아래 한쪽에 도석우가 서 있었다. 그리고 그 옆에 곽득수가 있었다. 도석우는 연을 보고 가볍게 목례를 했고, 곽득수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서씨 댁 셋째요?”

민규헌의 목소리는 크지 않았다. 크지 않아도 마당 끝까지 갔다.

“궁 혼인 당사자를 등방 광으로 불러들였다는 말이 들어왔소. 한 쌍을 두 번 만들었다는 말도 들어왔소. 서씨 댁 법에 어긋나는 일인데, 그건 서씨 댁 일이니 내 알 바 아니오. 다만 궁 일에 손을 탄 등방에 궁 주문을 맡길 수는 없소. 스무 쌍은 남산으로 가오.”

연은 대청 아래 섰다. 흰 회벽에서 찬 기운이 등으로 올라왔다.

“나리, 하나만 여쭙겠습니다. 등색록에 궁 혼인이 이로 적힌 적이 있습니까?”

민규헌이 등색록 겉장을 손바닥으로 덮었다.

“백 년 동안 한 번도 없었소.”

“그러면 백 년 동안 궁 혼인은 다 맞았습니까?”

“다 맞게 적었소. 색을 적되 묻지 않는 것, 그것이 이 나라가 혼인으로 백 년을 버틴 방식이오. 궁이 정한 혼인은 궁이 정한 것이오. 벽이 갈렸다고 그 혼인을 무르면 외척과 종친이 흔들리고, 흔들리면 조정이 흔들리오. 나는 벽을 보고, 합이라 적고, 붓을 놓소. 그래서 나는 틀린 적이 없소.”

“적은 적이 없으니 틀린 적도 없는 겁니다.”

도석우가 헛기침을 했다. 곽득수의 입꼬리 오른쪽이 내려갔다. 민규헌은 연을 한참 내려다보았다. 화가 난 얼굴은 아니었다. 오히려 흥미가 생긴 얼굴이었고, 그것이 더 무서웠다.

“그럼 낭자는 무엇을 원하오?”

“삼월 열엿새에 윤 판서 댁 도련님 등으로 서씨 댁 것을 걸어 주십시오. 남산 것 말고요.”

“남산 것이 한 색이 나는데, 내가 왜 벽을 가르는 등을 걸겠소?”

민규헌이 손짓하자 도석우가 등 둘을 들고 나와 장대에 걸었다. 하나는 도석우가 지어낸 종이로 만든 윤재겸의 흐린 등, 하나는 서씨 댁이 만든 이소온의 등이었다. 등감이 궁 주문 등 가운데 하나를 가져다 둔 모양이었다. 서리가 불을 붙였다.

흰 회벽이 한 색으로 물들었다. 연한 분홍이 벽 한 면에 넓게 번졌고, 이소온의 치자색은 그 분홍에 먹혀 벽 한 귀퉁이에서 겨우 누런 기운만 남겼다. 넓고 얕은 것은 웬만한 것과 다 맞는다. 좁은 것 하나를 통째로 먹어 버려도 벽에는 맞은 것으로 났다.

“보시오, 합이오.”

“그 색 안에 도련님은 없습니다. 이씨 댁 아가씨도 귀퉁이에 밀려나 계시고요.”

“벽에는 사람이 안 적히고 색만 적히오.”

연은 벽을 보았다. 분홍 속에서 이소온의 치자색이 한 귀퉁이로 밀려나 누렇게 떨고 있었다. 저 귀퉁이가 활을 싫어하고 과녁 뒤에서 화살을 세던 사람이었다. 그 옆자리에 서 있어야 할 쪽빛은 벽 어디에도 없었다. 창 넷, 쥐구멍 하나, 가마솥 뚜껑, 먹 냄새, 그리고 한가운데 손바닥만 한 빈 자리. 그 모든 것이 지어낸 분홍 한 겹 아래 묻혀 있었다. 연은 치자물 든 손을 주먹으로 쥐었다가 폈다. 벽 앞에서는 주먹이 아무 소용이 없었다.

연은 숨을 한 번 골랐다. 그리고 할머니가 해 준 말을 그대로 했다.

“나리, 흐린 색은 해가 갈수록 좁아집니다. 십 년이 지나면 두 색이 납니다. 지금 합이라 적으신 궁 혼인 가운데 흐린 등으로 맺은 것들을 다시 켜 보시면, 등색록이 틀렸다는 것이 벽에 납니다.”

마당이 조용해진 사이 빈 갈고리 하나가 바람에 흔들려 장대를 쳤다. 도석우가 먼저 웃었다.

“낭자, 십 년 넘은 등을 누가 갖고 있소? 혼례 날 한 번 켜고 다 광에 처박거나 태웠소.”

“혼례를 치르고 나면 두 집 등의 속지를 한 등에 모아 넣습니다. 합등이라고 하지요. 합등한 등은 한 집에 하나씩 남습니다. 태우지 않고 둔 집이 있을 겁니다. 합등한 등은 혼자 켜도 두 사람 색이 같이 나니까요.”

민규헌은 등색록 겉장을 한 번 두드렸다. 두 번, 세 번. 그리고 입을 열었다.

“좋소, 내기를 하나 하십시다. 삼월 열엿새 전까지, 등색록에 합으로 적힌 궁 혼인의 옛 등을 이 마당에 가져오시오. 흐리게 만든 것 가운데 하나라도 두 색이 나면, 그날 윤 판서 댁 도련님 등으로 서씨 댁 것을 걸겠소. 하나도 안 나면 서씨 댁은 이 마당에 다시 못 들어오오. 궁 일도, 사대부 혼인 일도.”

곽득수가 한 걸음 나섰다.

“나리, 그 등은 윤 판서 댁 혼인 등이오. 당사자 집안이 원하지 않는 등을 거는 법이 어디 있소?”

“당사자 집안은 궁이지 청지기가 아니오.”

민규헌은 그 말만 하고 등색록을 들고 일어섰다. 도석우가 곽득수의 소매를 끌어 마당 밖으로 나갔다. 나가면서 도석우가 연에게 말했다. 낭자, 이 내기로 서씨 댁 문 닫는 날을 스스로 받으셨소. 연은 대답하지 않았다.

*

수표교로 돌아오니 광 서까래 하나가 더 내려앉아 있었다. 오후에 진눈깨비가 내렸고, 그 무게를 못 견뎠다고 했다. 달구와 막동이 둘이서 그 밑에 기둥을 받쳐 놓고 있었다. 막동은 남산 몰래 나온 걸음이라 여전히 풀통을 들고 왔다. 등 스물여섯은 할머니가 앉은뱅이 의자를 딛고 하나씩 내려 앞채로 옮겨 놓았다. 앞채 방바닥에 등이 스물여섯, 사람이 넷이었다.

“팔백 냥이 날아갔어요.”

“서리한테 들어서 안다. 지붕은 내년에 이자.”

“내년에도 돈이 없잖아요.”

“그럼 내후년에 이자.”

할머니는 앉은뱅이 의자에 앉아 등 스물여섯의 밑동을 손으로 하나씩 더듬었다. 달구가 옆에서 할머니 손이 닿는 등마다 이건 짝 없는 거, 이건 두 색 난 거, 하고 일러 주었다. 광에 한 번도 안 들어가 본 녀석이 등마다 사연을 다 외우고 있었다. 편지를 다 읽어서였다.

“셋째야, 흐린 열둘이 어느 집에 있는지 대마.”

“그걸 다 기억하세요?”

“다 기억한다고 했잖니. 첫째는 계동 박 참의 댁 둘째 딸. 둘째는 사직골 김 판관 댁 막내아들. 셋째는…”

할머니가 열둘을 불렀다. 집과 사람과 해를 하나씩, 틀리지 않고. 연은 그것을 받아 적지 않았다. 대신 막동이 손가락을 접어 가며 셌다. 열둘째에서 막동의 손가락이 모자라 달구가 제 손가락 둘을 빌려주었다. 할머니가 다 부르고 나서 덧붙였다. 어미 대에 흐리게 만든 궁 혼인이 열이 더 있다고, 어미가 죽기 전에 그것도 일러 주었다고.

“다 합쳐 스물둘이다. 그중에 아직 등을 가진 집이 몇이나 될지는 모른다.”

“그럼 제가 돌겠습니다.”

“너는 안 된다. 등감 내기를 건 등방 셋째가 그 집들 대문을 두드리면, 문이 안 열린다. 도석우가 벌써 한 발 먼저 돌 거다.”

그때 마당 문이 열렸다. 쓰개치마를 쓴 여자가 몸종도 없이 혼자 들어왔는데, 걷어 올린 쓰개치마 아래 얼굴이 이소온이었다. 등감 마당에서 제 등이 먹혔다는 소문을 저녁 먹기 전에 들었다고 했다. 이소온은 방바닥의 등 스물여섯과 사람 넷을 한 번 둘러보더니 신을 벗고 들어와 막동 옆에 앉았다.

“그 스물두 집, 내가 돌게요. 나는 곧 궁 혼인하는 신부잖아요. 궁 혼인했던 집 안사람들이 제일 문 열어 주고 싶은 사람이 나예요. 다들 나한테 할 말이 많을 거예요.”

“아가씨, 그건 아가씨 혼인을 깨자는 일이 될 수도 있습니다. 흐린 등이 두 색으로 나면, 아가씨 혼인 등도 다시 보자는 말이 나옵니다.”

“알아요.”

이소온이 쓰개치마를 무릎 위에 개켰다. 개키는 손이 느렸다. 빨리 말하는 사람이 손을 느리게 놀릴 때는 할 말을 고르는 중이었다.

“낭자, 나는 혼인이 정해진 뒤로 그 사람을 한 번 봤어요. 멀리서요. 등이 두 색이라고 들었을 때 마음이 놓였어요. 안 맞는다니까 안 해도 되는 줄 알았거든요. 그런데 궁 혼인은 그래도 맺는대요. 그 말 듣고 사흘을 울었어요. 그러다가 편지를 받았어요. 활은 싫어한다고, 종이는 제가 안 썼다고. 그 뒤로는 안 울었어요. 궁금해졌거든요. 종이에 적힌 사람하고 살 뻔했는데, 그 사람이 아니라면 누구랑 사는 건지 알고 싶어요. 알고 나서 하든지 말든지 할 거예요.”

방 안이 조용해졌다. 막동이 풀통 뚜껑을 괜히 열었다 닫았다. 할머니가 이 없는 입으로 웃었다. 바람 새는 소리가 났다.

“셋째야, 이 아가씨 등은 좁고 깊다고 했지?”

“네.”

“좁고 깊은 사람은 문을 잘 연다. 제가 먼저 들어가 버리니까.”

달구가 이소온 옆으로 슬그머니 다가앉았다. 엿 없이도 스물두 집을 도느냐고 물었다. 이소온은 달구 머리를 쓰다듬으며 엿은 제가 사겠다고 했다. 달구는 그 자리에서 이소온의 몸종이 되기로 했다.

8화는 어땠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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