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화(5,404자) · 스물셋 · 정미년 정월 대보름

네 이름이 무엇이냐

다른 이름으로 불러 주세요 · 백해원

만 19세 이상 이용가

정월 대보름 아침, 윤 판서 댁 부엌에서는 새벽부터 오곡밥 찌는 김이 올랐다. 찹쌀과 차조와 붉은팥과 수수와 검은콩을 한 시루에 안쳐, 시루 번에 바른 밀가루 반죽이 김에 익어 갈라지는 냄새가 행랑 끝까지 번졌다. 용인댁은 밥을 푸다 말고 호두 세 알을 그의 손바닥에 올려놓았다. 부럼이라고, 이로 깨물어야 한 해 부스럼이 안 난다고. 나는 몰라요, 옛날부터 그렇다니까 그런 거지.

그는 호두 하나를 어금니로 깨물었다. 딱 소리가 부엌 안에 크게 울렸다. 용인댁이 잘했다고, 도련님은 이가 튼튼해서 올해 부스럼은 한 개도 안 나겠다고 웃었다. 옆에서 나물을 무치던 찬모가 도련님이 호두 까는 소리가 제일 크다고 거들었다. 그는 깨진 껍데기 속 알맹이를 꺼내며 용인댁 앞치마에 들어 있는 것을 셌다. 달구가 새벽에 두고 간 봉투 하나였다.

동짓날 이후로 그는 서재와 사랑채 사이만 오갔다. 뒷문 빗장은 다시는 저절로 풀리지 않았다. 편지는 달구가 엿을 받고 부엌 쪽 개구멍으로 밀어 넣었다. 연의 편지는 짧아졌지만 끊기지 않았다. 광의 등이 마흔하나가 되었다는 것, 실이 백아흔 줄이라는 것, 이씨 댁 아가씨가 은비녀를 뽑았다가 도로 꽂았다는 것. 그리고 오늘 온 편지에는 한 줄이 더 있었다. 분이 어머님의 종이는 광 가로대 기둥 속에 넣어 두었습니다. 편지 끝에는 등감 내기 이야기가 있었다. 삼월 열엿새 전까지 흐린 궁 등 하나라도 두 색이 나면 서씨 댁 등이 걸린다고, 이씨 댁 아가씨가 스물두 집을 돌아 열다섯을 모았다고, 그날 켜 볼 거라고. 그리고 마지막 줄은 글씨가 조금 흔들렸다. 그날 그쪽은 윤재겸으로 서시겠다고 약조하셨다지요, 약조는 약조대로 하십시오, 저는 제 등을 걸겠습니다. 그 편지 밑에는 한 장이 더 있었다. 등 만드는 법이었다. 대나무를 고르는 법, 열여섯 살을 같은 굵기로 깎는 법, 풀은 위에서 아래로. 동짓날 발 너머에서 그가 청했고, 연이 답을 미루다가 이제야 보냈다. 낭자 등은 제가 만들겠습니다, 무엇을 넣을지는 제가 정하겠습니다. 그는 법이 오기 전부터, 동짓날 광에서 손으로 더듬어 본 살의 굵기를 떠올리며 서안 밑에 대나무를 숨겨 두고 깎았다. 붓 대신 칼을 든 손을 곽득수는 한 번도 보지 못했다. 살은 이제 열넷이었다.

그는 호두 알맹이를 씹으며 그 줄을 두 번 읽었다. 그리고 용인댁에게 물었다.

“아주머니, 곽 청지기가 어젯밤 행랑 광에서 무얼 꺼내지 않았습니까?”

용인댁의 손이 주걱 위에서 멈췄다. 모른다는 말이 나오지 않았다.

“쇠 장식 달린 궤짝이요. 오늘 밤 달맞이 하느라 다들 나가면 그걸 태운대요. 덕쇠가 술김에 그러더라고요.”

*

그는 사랑채로 갔다. 판서는 정월 들어 더 나빠졌다. 기침에 피가 섞였고, 사흘째 미음만 넘겼다. 약탕 냄새에 쇠 냄새가 섞여 방 안 공기가 무거웠다. 그는 판서의 머리맡에 앉아 부럼 호두 하나를 이불 위에 놓았다.

“아버님, 대보름 부럼입니다.”

“이가 없어 못 깨문다.”

“제가 깨물어 드리겠습니다.”

그는 호두를 어금니로 깨물어 알맹이를 꺼내 판서의 입에 넣어 주었다. 판서가 그것을 오래 씹었다. 삼키고 나서 눈을 감은 채 말했다.

“할 말이 있어 왔구나.”

“네, 있습니다. 열한 해 전 동짓날, 분이라는 아이가 이 집 행랑 광에서 죽었습니다. 역병이 아니라, 도망쳤다가 잡혀 와서 청지기 어른에게 맞아 죽었습니다. 그날 밤 그 소리를 들은 사람이 이 집에 있고, 그 아이 어머니가 받은 매매 표가 한양에 있습니다. 쌀 닷 섬, 곽득수 수결입니다.”

판서의 눈이 떠졌다. 누렇게 흐린 눈이 한참 천장에 머물렀다. 그러고는 그를 보았다.

“너는 그걸 열한 해 동안 알았느냐?”

“알고 있었습니다. 말하면 제 자리가 누구 자리인지까지 말해야 해서 안 했습니다.”

“그럼 왜 지금 하느냐?”

“오늘 밤 청지기 어른이 그 표의 짝을 태운답니다. 이 집에 남은 매매 장부와 역병이라고 적은 장부를요. 그게 타면 분이는 영영 역병으로 죽은 아이가 됩니다.”

판서의 손이 이불 위에서 움직였다. 그의 손목을 찾았다. 마른 손가락이 손목을 잡는 힘이 약했다.

판서가 숨을 몰아쉬었다. 가래 끓는 소리가 가슴 깊은 데서 올라왔다가 가라앉았다.

“내가 아이를 사 오라 했다. 그건 내 죄다. 곽 청지기가 그 아이를 어떻게 했는지는 몰랐다. 모른 것도 내 죄다. 그런데 네 이름이 드러나면 이 집 식솔이 흩어진다. 재겸이 제사는 누가 지내느냐?”

“제가 지내겠습니다. 윤재겸으로서가 아니라, 그 아이 곁에서 열한 해를 산 사람으로요. 그 아이 글씨를 열한 해 따라 썼습니다. 그 아이가 활을 좋아했다는 것도 압니다. 그만큼 아는 사람이 제사를 지내면 되지 않겠습니까?”

판서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눈을 감았다. 감은 눈꺼풀 아래로 물기가 번졌다. 약탕관이 화로 위에서 또 끓어 넘쳤고, 이번에는 그가 일어나 내리지 않았다. 판서의 손이 그의 손목을 놓지 않고 있었다.

*

해가 지자 집안 사람들이 달맞이를 하러 다 뒷동산으로 올라갔다. 행랑 사람, 부엌 사람, 그 새끼들까지 횃불을 들고 줄지어 나갔다. 그는 서재 창으로 그 불줄이 동산 비탈을 올라가는 것을 세었다. 횃불은 스물아홉 개였다. 그리고 행랑 끝 광 쪽에 불빛이 하나 켜지는 것을 보았다.

행랑 광 문은 반쯤 열려 있었다. 쇠고리 둘이 문짝에 늘어져 있었다. 그는 그 쇠고리를 지나 광 안으로 들어갔다. 흙바닥 한가운데 화로가 놓여 있었고, 곽득수가 그 앞에 쪼그려 앉아 쇠 장식 궤에서 종이를 한 묶음씩 꺼내 불에 넣고 있었다. 한지 타는 냄새가 광 안에 가득했다. 종이는 가장자리부터 누렇게 말렸다가 검어졌고, 검은 재가 불기운에 들려 광 천장까지 떠올랐다가 천천히 내려앉았다. 그는 그 재가 내려앉는 흙바닥이 열한 해 전 어떤 자리였는지 알았다.

“청지기 어른, 거기서 무얼 하십니까?”

곽득수가 고개를 들었다. 곽득수는 놀라지 않았고, 입꼬리 오른쪽만 내려가 있었다.

“도련님, 달맞이 안 가셨소?”

“동짓날 한 약조를 기억하십니까? 종이를 찾지 않으시면 윤재겸으로 서겠다고 했습니다. 청지기 어른은 지금 다른 종이를 태우고 계십니다. 그 종이도 제 약조에 들어갑니다.”

“그건 억지시오.”

“청지기 어른께 배운 셈입니다.”

그는 화로로 다가가 불 속에 손을 넣었다. 막 불이 붙은 묶음을 움켜쥐고 꺼냈다. 손바닥이 먼저 뜨거웠고, 뜨거운 것이 순식간에 아픈 것으로 바뀌었다. 그는 종이 묶음을 흙바닥에 내던지고 발로 불을 밟아 껐다. 손바닥 살갗이 오그라들었다. 오리골 가마솥 뚜껑보다 뜨거웠고, 이번에는 떼고 나서도 계속 뜨거웠다.

곽득수가 일어서자 쑥 냄새가 한지 탄내를 뚫고 다가왔다. 곽득수의 손이 그의 멱살을 쥐었다. 등이 광 흙벽에 부딪혔다. 벽에서 마른 흙이 부스스 떨어졌다.

“열한 해를 먹이고 입혔소. 글을 가르치고 이름을 줬소. 도련님이 지금 선 자리가 누구 덕인지 아시오?”

곽득수의 목소리는 여전히 낮았다. 멱살을 쥔 손만 떨렸다.

“그 겨울에 그 계집애가 오리골까지 걸어갔으면 어찌 됐겠소? 한양에서 샀다는 말이 나고, 도련님 자리가 가짜라는 말이 나고, 이 집 백 식솔이 길바닥에 앉았을 거요. 나는 이 집을 지켰소. 판서 어른이 못 하시는 일을 내가 했소.”

“그래서 열세 살 아이를 광에 가두셨습니까?”

“가두고 타일렀소. 타이르는데 울었소. 울음을 그치게 하려다가…”

곽득수는 말을 끝맺지 못했다. 끝맺지 않은 말이 광 안에 떠 있었다. 그는 그 빈자리를 보았다. 이유는 있었다. 그 이유가 아무것도 덮지 못한다는 것도 보였다.

“누구 덕인지 압니다. 그래서 그 자리 밑에 누가 묻혔는지도 압니다.”

그때 광 문 밖이 밝아졌다. 횃불이 하나, 둘, 다섯, 열로 늘었다. 달맞이를 간 줄 알았던 행랑 사람들이 광 앞마당에 서 있었다. 맨 앞에 용인댁이 횃불을 들고 서 있었다. 용인댁의 앞치마에 오곡밥 찌꺼기가 말라붙어 있었다.

곽득수가 멱살을 놓지 않은 채 용인댁을 돌아보았다.

“용인댁, 이게 무슨 짓이오? 동산에 안 가고.”

“청지기 어른, 나는 몰라요. 여태 그렇게 말했지요. 열한 해 동안.”

용인댁의 횃불이 떨렸다. 그 불빛에 광 흙바닥의 재가 붉게 떴다.

“그날 밤 나는 부엌에서 불씨 지키고 있었어요. 광 쇠고리 걸리는 소리 들었어요. 그 사이에 난 소리도 들었고요. 아침에 거적 나오는 것도 봤어요. 나는 다 알아요, 이제는 모른다고 안 해요.”

행랑 사람들 사이에서 누군가 흐느꼈다. 누군가는 횃불을 더 높이 들었다. 곽득수의 손이 그의 멱살에서 천천히 풀렸다. 곽득수는 행랑 사람들을 하나하나 보았다. 판서가 먹여 살린다던 백 명 가운데 스무 남짓이 거기 서 있었다. 곽득수는 궤짝을 두고 광 뒷벽 쪽 쪽문으로 빠져나갔다. 덕쇠가 따라 나갔다. 아무도 그 뒤를 쫓지 않았다. 쫓는 일은 포도청이 할 일이었고, 행랑 사람들은 열한 해 만에 처음으로 그 광 앞에 서 있는 것만으로 할 일을 다 했다.

용인댁이 횃불을 옆 사람에게 넘기고 광 안으로 들어왔다. 그의 손을 잡아 뒤집어 보더니 혀를 찼다. 손바닥 가운데가 붉게 부풀어 있었다. 용인댁은 부엌으로 뛰어가 찬물 한 동이를 들고 와서 그의 손을 거기 담갔다. 정월 우물물은 얼음 같았고, 덴 자리에 찬물이 닿자 뜨거운 것과 차가운 것이 한꺼번에 손목을 타고 올라왔다. 행랑 아이 하나가 동이 옆에 쪼그려 앉아 도련님 손을 들여다보다가, 도련님도 우느냐고 물었다. 그는 우는 게 아니라 물이 튄 거라고 대답했다. 아이는 고개를 끄덕였지만 믿지 않는 얼굴이었다.

그는 동이에서 손을 빼고 흙바닥에 떨어진 종이 묶음을 주웠다. 반쯤 탄 한지 가장자리가 손바닥 덴 자리에 닿았다. 덴 자리가 욱신거렸고, 그는 아픈 것까지 셌다. 매매 문서 셋, 그 가운데 하나가 쌀 열 섬짜리 제 몫이었다. 역병 장부 한 장, 분이 이름이 있는 줄. 그것은 타지 않고 남았다.

*

그날 밤 판서가 그를 불렀다. 그는 덴 손에 용인댁이 감아 준 무명천을 두른 채 머리맡에 앉았다. 대보름 달빛이 창호지에 둥글게 떴다.

판서는 한참 그 달을 보았다. 그러고는 그를 보았다. 열한 해 동안 한 번도 그렇게 본 적이 없는 눈이었다. 재겸이를 겹쳐 보지 않고, 그 자리에 앉은 사람만 보는 눈이었다.

“네 이름이 무엇이냐?”

그는 대답하지 못했다. 열한 해 동안 그 물음을 한 번이라도 들었으면 하고 바랐다. 막상 듣고 나니 목이 막혔다. 무명천 감은 손이 무릎 위에서 떨렸다.

“아버님, 그 이름은 제가 처음 소리 내어 말하는 자리를 정해 두었습니다. 삼월 열엿새, 등감 마당입니다. 아버님도 그날 오시겠습니까?”

판서는 오래 대답하지 않았다. 달빛이 조금 기울었다. 그러고 나서 판서가 말했다.

“그날은 가마를 준비하마. 가는 길에 형조에 먼저 들르겠다. 아이를 산 것은 나다. 그 죄는 내 입으로 대야 한다.”

그는 머리를 숙였다. 이마가 이불에 닿았다. 판서의 마른 손이 그의 뒤통수에 한 번 얹혔다가 떨어졌다. 그 손이 열한 해 동안 얹힌 적이 몇 번이었는지 그는 세지 않았다. 셀 것도 없이 처음이었다.

10화는 어땠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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