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화(5,181자) · 스물셋 · 병오년 동짓날
발을 치고
다른 이름으로 불러 주세요 · 백해원
만 19세 이상 이용가
동짓날 새벽, 윤 판서 댁 뒷문 빗장이 저절로 풀렸다. 용인댁은 그렇게 말했다. 부엌 아궁이에 불을 넣으러 나왔더니 빗장이 풀려 있더라고, 누가 풀었는지 나는 모른다고, 곽 청지기는 오늘 등감에 가서 해 지기 전에는 안 온다고, 그것도 나는 모른다고. 용인댁은 모른다는 말을 다섯 번 하는 동안 그의 손에 누비 토시 한 벌과 주먹밥 두 덩이를 쥐여 주었다.
그는 열한 해 만에 혼자 북촌 골목을 걸었다. 가마 안에서 본 적은 있었다. 발 걷힌 틈으로 담장과 대문과 사람들의 갓 끝을 보았다. 걸어서 보는 골목은 달랐다. 돌바닥이 발바닥으로 올라왔고, 새벽 서리가 깔린 자리는 짚신 밑에서 버석거렸다. 집집마다 동지 팥죽을 쑤느라 굴뚝마다 연기가 올랐고, 팥 삶는 달큼한 김이 담을 넘어 골목에 고였다. 그는 그 냄새 속을 걸으며 발걸음을 셌다. 가회방에서 수표교까지 삼천사백 걸음이었다. 중간에 한 번 길을 잘못 들어 백스무 걸음을 되돌아갔고, 그것도 셈에 넣었다. 되돌아간 걸음까지 셈에 넣는 사람은 한양에 저 하나뿐일 것 같아서, 그는 팥죽 김이 고인 골목 한가운데서 혼자 조금 웃었다. 지나가던 물장수가 미친 사람 보듯 그를 돌아보았다.
수표교는 돌다리였다. 난간 돌기둥마다 물높이를 새긴 눈금이 있었고, 동짓날 개천은 바닥이 드러날 만큼 말라 돌 틈에 살얼음이 끼어 있었다. 다리 아래서 빨래하던 아낙들이 방망이를 멈추고 낯선 도포 자락을 올려다보았다. 그 난간 앞에서 아이 하나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열한 살쯤이었고 입에 엿 막대를 물고 있었다. 아이는 그를 위아래로 훑어보더니 코를 킁킁거렸다.
“누룽지 냄새는 안 나네요. 그래도 스물셋 맞지요? 낭자가 키 크고 손 하얗고 걸음 셀 것 같은 사람 오면 데려오라 했어요.”
“걸음 셀 것 같은 사람은 어떻게 알아봅니까?”
“걸음 셀 때 입술이 달싹거리거든요, 지금도 그러고요.”
그는 입을 다물었다. 달구는 앞장서 걸으며 한 번도 돌아보지 않고 말했다. 도련님 편지는 첫 번째가 싱거웠고 두 번째부터 엿 두 가락이었고 누룽지 편지는 세 가락이었다고. 그는 제 편지 값이 오르는 것을 들으며 웃음을 참았다.
*
서씨 등방 광에는 문이 둘이었다. 하나는 마당 쪽, 하나는 뒷골목 쪽이었다. 달구는 그를 뒷골목 문으로 들여보내고 저는 마당으로 돌아갔다. 광 안은 어두웠다. 천장 가로대에 등들이 걸려 있었고, 문을 열자 들어간 찬바람에 등들이 부딪혀 마른 소리를 냈다. 그 소리가 머리 위에서 오래 잦아들었다. 들기름 먹은 한지 냄새가 곰팡이 냄새와 반반으로 섞여 있었다. 그리고 광 한가운데에 발이 드리워 있었다. 가는 대오리를 엮은 발이었고, 저편에 등잔 하나가 켜져 있어서 발 틈으로 불빛이 가늘게 새어 나왔다.
“거기 앉으신 분이 스물셋이십니까?”
발 저편에서 목소리가 왔다. 담 너머로 한 번 들은 목소리였다. 그때보다 가까웠고, 그때보다 떨리지 않았다.
“네, 그렇게 불리는 사람입니다. 발 건너가 낭자십니까?”
“얼굴은 안 보겠습니다. 등은 얼굴이 아니라 말로 만듭니다. 오늘은 앉아서 하고 싶은 말씀을 하십시오. 저는 들으면서 속지를 적겠습니다.”
그는 발 앞에 놓인 방석에 앉았다. 발 너머로 먹 가는 소리가 났다. 그는 그 소리에 코를 한 번 찡그렸다가, 이상하게도 그 먹 냄새가 싫지 않다는 것을 알았다. 서재의 송연먹과 냄새가 달랐다. 들기름과 치자 냄새가 섞인 먹이었다.
“하나 여쭤도 됩니까? 등은 벌써 편지로 만드셨다고 들었습니다. 서씨 댁은 한 쌍을 한 번만 만든다고 들었는데요.”
“그래서 할머니께 여쭸는데, 한 번뿐인 법은 두 번 받으려고 첫 번째를 대충 만들까 봐 세운 울타리랍니다. 그래서 이번에는 값을 안 받기로 했습니다. 그러면 된다고 하셨습니다.”
그는 소리 내어 웃었다. 발 너머에서도 짧은 웃음이 따라왔다. 그 웃음이 광 천장의 등들 사이를 지나가는 동안 그는 소리 내어 웃은 것으로는 이것이 열한 해 만에 두 번째라고 세었다.
*
그는 세 시진 동안 말했다. 처음에는 순서가 없었다. 오리골 비탈의 불 놓는 날, 불이 산등성이를 타고 올라가는 소리, 그 밤에 어미가 부지깽이로 흙바닥에 써 준 글자 서른 개. 가마에 태워져 한양에 들어온 날, 가마 발 틈으로 본 막동과 분이의 뒷모습. 그리고 동짓날 밤의 쇠고리 소리. 그는 그 소리 이야기를 할 때 한참 말을 멈췄다. 발 너머의 붓도 멈췄다. 광 안에 등잔 심지 타는 소리만 남았다.
그는 윤재겸 이야기도 했다. 하루에 석 자를 백 번씩 쓰는 일, 벽에 붙은 죽은 아이의 글씨에 제 손을 맞추는 일, 활터 가는 날마다 서재에 남겨지는 일. 그리고 지난달 판서가 등 뒤에서 한 말. 너는 활을 싫어하지? 그 말을 옮기면서 그는 제 목소리가 조금 올라가는 것을 들었다. 화가 난 것이 아니었다. 열한 해 동안 아무도 모르는 줄 알았던 것을 한 사람은 알고 있었다는 사실이, 이상하게도 그를 더 외롭게 했다.
“처음 편지에 이름을 누가 부르면 어머님 소리가 지워질 것 같다고 쓰셨지요?”
“열한 해 동안 제 귀에 남은 제 이름은 어머니 목소리 하나뿐입니다. 곽 청지기가 부르면 곽 청지기 목소리가 덮이고, 판서 어른이 부르면 판서 어른 목소리가 덮일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아무도 못 부르게 했습니다. 윤재겸이라고 불리는 동안에는 그 소리가 안 닳았습니다.”
발 너머의 붓이 오래 멈춰 있다가 다시 움직였다. 붓 끝이 종이를 긁는 소리가 조금 느려졌다. 그는 그 느려진 소리를 들으며 제가 방금 한 말이 속지 어디쯤에 앉는지 헤아렸다.
“기억이 안 납니다. 쇠고리가 걸리고 풀리는 사이에 무슨 소리가 났는지. 오늘이 열한 해째 되는 그 동짓날입니다.”
발 너머에서 한참 아무 소리도 안 났다. 그러다 목소리가 왔다.
“저는 지난달에 오리골에 다녀왔습니다.”
그는 숨을 멈췄다.
“창은 넷이었고, 쥐구멍에도 한지가 발려 있었고요. 가마솥 뚜껑이 손때로 반들반들했습니다. 막내가 큰오라비는 한양 가도 활 못 쏜다고 했다며 손뼉을 쳤습니다. 그리고 마당에 등이 하나 걸려 있었습니다. 저희 할머니가 만든 것이었습니다. 어머님이 열한 해 동안 비 오면 들이고 개면 내놓으셨답니다.”
그는 무릎 위에 올린 손을 쥐었다.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들었다.
“어머님께 이름을 한 번만 불러 달라고 청했습니다. 어머님이 불러 주셨고, 저는 그것을 들었습니다. 글자로 적지는 않았습니다. 소리로만 가지고 있습니다.”
그는 낭자, 하고 부르고 나서 뒷말을 잇지 못했다.
“그 소리는 제가 가지고 있겠습니다. 언젠가 직접 들으셔야 할 소리라서, 제 목소리로 먼저 들려드리지는 않겠습니다.”
그는 한동안 말을 못 했다. 발 틈으로 새어 나오는 등잔 불빛이 그의 무릎 위에 가는 줄로 떨어져 있었다. 그 줄이 흔들렸다. 그의 손이 떨려서였다.
“어머님이 그 애 잘 사느냐고 물으셨습니다. 잘 산다고 했습니다.”
“낭자, 저는 잘 살지 않습니다.”
“알고 있어서 거짓말을 했습니다. 그쪽 대신 한 거짓말이라, 언젠가 그쪽이 갚으셔야 합니다. 정말로 잘 살아서요.”
발 너머의 붓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는 그 소리를 들으며, 얼굴을 한 번도 본 적 없는 사람을 이만큼 안다는 것이 가능한지 헤아려 보았다. 그 사람의 창은 셋이었고, 손끝은 치자물에 누랬고, 화가 나면 대나무를 깎는다고 달구가 일러 주었다. 그리고 그 사람은 제 등이 없었다. 그는 그 수를 다 셌는데도 모자랐다.
*
해가 기울 무렵 연이 광 천장의 실 이야기를 했다. 그는 고개를 들어 가로대를 보았다. 어두워서 잘 보이지 않았지만, 등과 등 사이에 붉은 줄들이 거미줄처럼 걸려 있었다.
“지금 몇 줄입니까?”
“지금 서른여섯 줄입니다. 할머니, 분이 어머님, 용인댁, 그리고 달구가 들어왔습니다. 달구는 어제 막동 아저씨한테 처음으로 제 편지를 썼습니다. 엿 값 올려 달라는 편지였습니다.”
“아홉이면 서른여섯이 맞습니다.”
발 너머에서 웃음이 터졌다. 그는 셈이 맞는다고 했을 뿐인데 연은 한참 웃었다. 그도 따라 소리 내어 웃었고, 그것이 세 번째였다.
그때 마당 쪽이 소란해졌다. 대문을 두드리는 소리, 달구가 무어라 소리치는 소리, 그리고 막동의 목소리. 아이고, 풀통이 엎어졌네, 이거 밟으면 한 달 안 지워지는데. 누군가 풀을 밟고 미끄러지는 소리가 났다. 이어서 곽득수의 목소리가 마당을 가로질러 왔다. 화가 없고, 그래서 더 차가운 목소리였다.
“서씨 댁 셋째 낭자, 광 문을 여시오. 궁 혼인 당사자를 빼돌린 죄가 무엇인지 등감에서 방금 알아보고 오는 길이오. 그리고 오리골 과부 반닫이에서 가져간 종이도 내놓으시오.”
발 너머에서 붓이 멈췄다. 연이 일어서는 기척이 났다. 그는 연보다 먼저 일어섰다.
“낭자, 속지는 다 적으셨습니까?”
“다 적었으니 이제 접기만 하면 됩니다.”
“그럼 저는 이제 나가도 됩니다.”
그는 뒷골목 문으로 나갔다. 담을 돌아 대문 앞으로 걸어갔다. 대문 앞 돌바닥에 풀이 허옇게 엎질러져 있었고, 덕쇠가 그 위에 엉덩방아를 찧은 채 일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막동이 빈 풀통을 든 채 그를 보았다. 열한 해 만이었다. 막동의 입이 벌어졌다가 다물렸다가, 다시 벌어졌다.
“열 섬, 오랜만이다.”
“세 섬, 아직 풀 개냐?”
“하루 서른두 통. 너는 아직 소 세냐?”
“까치밥으로 남긴 감을 센다. 시월에 스물다섯이던 게 오늘 아침엔 셋이더라.”
막동이 빈 풀통을 옆구리에 끼고 웃었다. 까치가 많이 먹었다고, 한양 까치는 오리골 까치보다 염치가 없다고 말하며 웃었다. 웃는 얼굴 위로 풀 자국이 허옇게 말라 있었다. 덕쇠가 풀 위에서 둘을 번갈아 보며 뭐라고 하려다가 다시 미끄러졌다. 그는 막동에게 고개를 한 번 끄덕이고 곽득수 앞에 섰다.
“청지기 어른, 제 발로 돌아가겠습니다. 이 집에는 손대지 마십시오.”
곽득수가 그를 보았다. 입꼬리가 양쪽으로 다 올라갔다.
“도련님이 제 발로 오시니 수고를 덜었소. 그런데 종이가 남았소.”
“그 종이를 찾으시면, 저는 삼월 열엿새 등감 마당에서 제 이름을 대겠습니다. 찾지 않으시면 윤재겸으로 서겠습니다. 둘 중에 고르십시오.”
곽득수의 눈이 느리게 한 번 감겼다 떠졌다. 마당이 조용해져서, 덕쇠가 풀 위에서 몸을 뒤척이는 소리만 났다.
“윤재겸으로 서시겠다, 그게 약조요?”
“네, 약조입니다.”
곽득수가 돌아서자 덕쇠가 네 발로 기어 풀 밖으로 나왔다. 그는 곽득수의 뒤를 따라 걷기 전에 한 번 광 쪽을 돌아보았다. 마당 문 틈에 치자물 든 손 하나가 문설주를 쥐고 있었다.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그는 그 손을 셌다. 하나였고, 하나면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