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5,161자) · 연 · 병오년 시월 열이틀

광에 있는 것

다른 이름으로 불러 주세요 · 백해원

만 19세 이상 이용가

숯으로 쓴 편지는 누룽지 냄새가 났다. 달구가 코를 대고 킁킁거리며 가져왔고, 연은 그것을 작업대 위에 펴 놓은 채 반나절 동안 대나무를 한 개도 깎지 못했다. 편지 일곱을 빼앗겼습니다. 두 번째 것은 탔습니다. 다 외우고 있으니 괜찮습니다. 연은 그 줄을 읽을 때마다 제가 쓴 두 번째 편지를 떠올려 보았다. 창이 셋이 맞다고, 두드려 주셔서 알아들었다고. 그 몇 줄이 불 속에서 먼저 가장자리부터 말렸을 것이다.

숯 글씨는 곧았다. 먹으로 쓴 편지들은 한결같이 오른쪽으로 기울어 있었는데, 이 편지만은 획이 똑바로 섰다. 연은 손가락으로 그 획을 짚어 보았다. 숯가루가 손끝에 까맣게 묻어났다. 치자물 든 누런 손끝에 까만 가루가 겹쳤다.

마지막 줄은 막동에게 가는 말이었다. 아직 소를 세느냐고.

*

그날 저녁 연은 달구를 남산으로 보냈다. 달구는 엿 세 가락을 받고 가서 막동을 데리고 왔다. 막동은 해가 진 뒤에 뒷문으로 들어왔다. 도석우 몰래 나온 걸음이라 손에 풀통을 든 채였다. 풀을 버리러 나왔다고 둘러대려고 들고 왔다고 했다. 풀통은 이번에도 반이나 차 있었다.

연은 막동을 작업대 앞에 앉히고 숯 편지의 마지막 줄을 읽어 주었다. 이름은 읽지 않았다. 편지에 이름이 없었다.

막동은 한참 아무 말도 없었다. 풀에 분 손등을 다른 손으로 문지르다가, 그 손을 무릎 위에 얹었다.

“그 가마 탄 애네요. 그 애가 도련님이 됐구먼요.”

“그 애를 알아보시겠어요?”

“소 세는 거 물어볼 놈은 그 애 하나예요. 오리골에서 소가 여섯이었는데, 그 애가 날마다 셌어요. 여섯이 다 있나 없나. 하나가 모자라면 해가 져도 비탈을 다시 올라갔어요. 나는 그 뒤를 따라다니면서 욕을 했고요.”

막동이 웃다가 눈가를 손등으로 훔쳤다. 풀이 말라붙은 손등이라 눈가에 허옇게 자국이 남았다. 연은 그 자국을 보고도 모른 척했다. 달구는 모른 척을 못 했다.

“아저씨, 우는 거예요?”

“풀이 눈에 들어갔다.”

“풀이 눈에 어떻게 들어가요?”

“한양 풀은 눈으로도 들어가.”

막동은 달구 머리를 한 번 쥐어박았다. 달구가 머리를 감싸 쥐고 물러나자 막동은 풀통 뚜껑을 열었다 닫았다 하며 열한 해 전 이야기를 했다. 곽득수가 오리골에 온 것은 늦가을 조 거둔 뒤였다고 했다. 비탈 아래 공터에 아이들을 한 줄로 세우고 얼굴을 하나씩 들여다보았다고, 이를 보고 손바닥을 보고 글자를 아는지 물었다고. 글자를 아는 아이는 그 애 하나였다. 어미가 화전 일을 나가며 부지깽이로 흙바닥에 써 준 글자 서른 개를 그 애는 다 외웠다.

“그 애 집엔 쌀 열 섬, 분이네는 닷 섬, 우리 집엔 세 섬이었어요. 나는 세 섬짜리예요. 그래서 한양 오는 나흘 내내 그 애를 열 섬이라고 불렀어요. 분이는 닷 섬이라고 부르면 울었고요.”

막동은 그 말을 하고 나서 한참 뚜껑을 닫은 채로 두었다. 그러고 연을 보았다.

“낭자, 나 글 몰라요. 대신 좀 적어 주시오. 소는 이제 안 센다고. 풀통을 센다고, 하루에 서른둘씩. 그리고 분이 얘기는, 그 애도 알 거라고. 알면서 말 못 하는 거, 나도 그렇다고.”

연은 막동이 부르는 대로 받아 적었다. 막동의 말은 끝을 올리지 않고 툭 떨어뜨렸고, 연은 그 말투를 고치지 않고 그대로 옮겼다. 받아 적은 종이 끝에 막동이 풀 묻은 엄지를 꾹 눌렀다. 글 모르는 사람의 도장 대신이었다.

*

막동이 돌아간 뒤 연은 등잔을 들고 광에 들어갔다. 할머니가 거기 있었다. 광 한가운데 앉은뱅이 의자에 앉아, 천장 가로대에 걸린 등들을 눈으로 보지 않고 귀로 듣고 있었다. 문을 열 때 들어간 바람에 등 스물여섯이 서로 부딪혀 마른 소리를 냈다. 할머니는 그 소리로 어느 등이 어디 걸렸는지 안다고 했다. 한지가 두꺼운 것은 소리가 둔했고, 오래된 것은 바스락거렸다.

광 안은 들기름 냄새와 곰팡이 냄새가 반반이었다. 내려앉은 서까래 밑에 받쳐 둔 항아리에는 지난 비에 고인 물이 아직 남아 있었고, 등잔 불빛이 그 물에 한 번 떨어졌다가 천장으로 튀어 올라 등들의 밑동을 누렇게 비췄다.

연은 등잔을 기둥 못에 걸었다. 그리고 할머니 앞에 서기 전에 가로대를 한 바퀴 돌며 등을 셌다. 열 몇 해 동안 드나든 광이었는데 이렇게 센 적은 없었다. 여덟은 짝을 못 찾은 등으로, 혼담이 깨졌거나 한쪽이 죽어서 한 짝만 남았다. 일곱은 두 색이 나서 맡기고 간 것으로, 켜 본 벽을 잊고 싶은 집들이 도로 가져왔다. 하나는 어머니가 넣은 서란의 첫 등이었다. 아홉은 궁에서 왔다가 혼례가 무산되어 광에 남았다. 그리고 하나는 스물셋의 등이었다. 모두 스물여섯이었다.

연은 그제야 할머니 앞에 섰다.

“할머니, 여든넷이 뭐예요?”

할머니는 대답하지 않았다. 연은 한 번 더 물었다. 이번에는 목소리가 올라갔다.

“도석우가 두 번이나 말했어요. 궁에서 온 여든넷을 다 얼굴 보고 만드셨느냐고. 저만 모르는 걸 남산 등방 주인이 알아요.”

“셋째야, 목소리 낮춰라.”

“숫자만 말해 주세요. 몇을 흐리게 만드셨어요?”

할머니의 손이 지팡이 머리를 쥐었다 놓았다. 등잔 심지가 한 번 튀었다.

“열둘.”

광 안이 조용해졌다. 항아리 물에 천장 물방울이 하나 떨어졌다.

“나머지 일흔둘은 담 밖에서 몇 달씩 지켜보고 만들었다. 그 가운데 스물셋이 두 색이 났다. 열둘은 끝내 얼굴을 못 봤다. 궁에서 보낸 종이 한 장만 있었다. 종이만 보고 좁게 만들 수는 없으니, 넓게 뺐다.”

“그러면 할머니도 도석우랑 똑같잖아요.”

말이 먼저 나갔다. 연은 제 말을 듣고 제가 놀랐다. 할머니는 놀라지 않았다.

“그래, 같지. 다른 게 있다면 나는 그 열둘을 한 번도 잊은 적이 없다는 것뿐이다. 도석우는 백 쌍을 흐리게 만들고 백 쌍을 다 잊는다. 나는 열둘을 흐리게 만들고 열둘을 다 외운다. 그게 나은 건지 더 나쁜 건지는 모른다.”

“열둘을 다 외우신다고요?”

“첫째는 계동 박 참의 댁 둘째 딸이었다. 열여섯이었고, 궁에서 온 종이에는 수를 잘 놓는다고만 적혀 있었다. 나는 그 댁 담 밖을 석 달 돌았는데 그 아이는 한 번도 대문 밖에 안 나왔다. 그래서 수를 잘 놓는다는 말 한 줄로 등을 만들었다. 넓게, 흐리게. 벽은 한 색이 났다. 그 아이는 지금 쉰이 넘었을 거다. 수를 정말 잘 놓았는지는 나는 아직도 모른다.”

할머니는 거기서 말을 멈췄다. 둘째부터 열둘째까지가 할머니 입 안에서 차례를 기다리는 것 같았다. 연은 더 묻지 않았다.

“그럼 왜 궁 일을 안 끊으셨어요?”

“끊으면 이 집이 굶는다. 네 어미가 열넷에 이 집에 왔을 때, 쌀독에 쌀이 한 됫박이었다. 궁 일 하나로 그 독을 채웠다. 너는 그 독에서 퍼 먹고 컸다.”

할머니의 목소리는 끝까지 낮았다. 연은 대꾸할 말이 목에 걸려 나오지 않았다. 할머니 말은 옳았고, 옳은 말이 이렇게 무겁다는 것을 연은 처음 알았다.

“하나만 더 여쭐게요. 어머니도 흐리게 만드셨어요?”

할머니는 지팡이 끝으로 가로대 한쪽을 가리켰다. 맨 안쪽, 서까래가 내려앉은 자리 바로 옆에 등 하나가 걸려 있었다. 다른 등보다 한지가 누랬고, 안쪽 접은 자리가 셋이었다.

“네 작은언니 것이다. 네 어미가 만든 첫 등. 란이 혼인 때는 이걸 안 가져갔다. 네 어미가 하나를 더 만들어 줬지, 흐리게. 신랑 집이 마포 객주라, 얼굴을 한 번도 못 봤다.”

*

작은언니 서란은 이레 뒤에 왔다. 마포에서 배를 타고 수표교까지 올라왔다. 아이 둘을 데리고 왔고, 아이들은 달구가 마당에서 맡았다. 달구는 아이들에게 엿을 한 가락씩 나눠 주고 나서 제 몫이 없어진 것을 알고 오래 억울해했다.

서란은 스물아홉으로, 한 해에 한 번 설날에만 얼굴을 봤는데, 연이 지난달 보낸 편지에 답을 두 줄 보내왔다. 광에 있는 것 보러 가마, 켜지는 말고 두어라. 그 두 줄대로 왔다.

연은 등잔을 들고 서란과 광에 들어갔다. 서란은 스물여섯을 다 올려다보고 나서 어느 것이냐고 물었다. 연이 손가락으로 가리키자 서란은 한참 그 등 아래 서 있다가 손을 뻗어 안쪽 접은 자리를 폈다. 연은 막으려다가 말았다. 그 등은 언니 몫이었다.

폈더니 속지에 어머니 글씨로 석 자가 있었다. 서란이 그것을 읽고 나서 말했다.

“어머니 글씨네.”

그러고는 오래 아무 말도 안 했다. 광 밖에서 아이들 웃는 소리와 달구가 엿을 돌려 달라고 떼쓰는 소리가 들렸다. 서란은 폈던 자리를 도로 접었다. 한 번, 두 번, 세 번. 어머니가 접은 대로 접었다.

“연아, 나는 지금 좋아. 그 사람은 말이 적고 셈이 밝고, 내가 아플 때 배를 안 띄워. 그러니까 이건 그냥 두자.”

“그래도 언니 것인데.”

“내 거니까 두라는 거야.”

서란은 연의 손에서 등잔을 받아 들다가 연의 손끝을 보았다. 치자물 든 누런 손끝에 까만 숯가루가 아직 남아 있었다.

“이건 뭐니? 너 요새 숯으로 등 칠하니?”

“편지가 숯으로 와서요.”

“누가 편지를 숯으로 써?”

“붓을 빼앗긴 사람이요.”

서란이 등잔을 든 채 연을 한참 보았다. 언니의 눈은 어머니를 닮아 가늘었고, 가늘게 뜰수록 많이 보았다.

“그 사람 좋아하니?”

“언니, 그 사람은 삼월에 혼인해요. 제가 등을 만들어 드린 사람이에요.”

“그래서 좋아하느냐고 물었지, 혼인하느냐고는 안 물었어.”

연은 대답하지 못했다. 대신 손끝의 숯가루를 치맛자락에 닦았다. 닦아도 안 지워졌다. 서란은 웃지 않으려고 입술을 깨물다가 결국 웃었고, 그 웃음소리에 마당의 아이들이 광 쪽으로 뛰어왔다.

서란은 등잔을 들고 먼저 광을 나갔다. 연은 혼자 남아 그 등을 올려다보았다. 켜 보지 않은 진짜가 광에 있고, 켜서 맞춘 흐린 것은 마포에 있었다. 언니는 흐린 것으로 잘 살았다. 그러면 어머니가 옳았던 것인가, 연은 그 물음 앞에서 한참 서 있다가 답을 못 한 채 실패를 꺼냈다.

그날 밤 가로대에 실이 일곱 더 걸렸다. 막동이 부른 말과 서란의 두 줄이 이 집을 거쳐 갔고, 이 집을 거쳐 간 편지 안에서 서로의 이름이 한 번이라도 오간 사람끼리 연은 실을 이었다. 사람이 다섯이 되자 줄은 열이 되었다. 막동의 실은 스물셋의 빈 갈고리로 갔고, 서란의 실은 어머니가 만든 첫 등으로 갔다. 할머니는 광 문턱에 앉아 실 거는 소리를 들었다.

“열이구나.”

“보지도 않고 어떻게 아세요?”

“실 당기는 소리가 열 번 났다. 셋째야, 그 열둘도 언젠가는 여기 올 거다. 그때 네가 켜라. 나는 못 켠다.”

할머니는 지팡이를 짚고 일어났다. 연은 그 등에 대고 아무 말도 못 했다. 가로대 끝 못에 매인 제 실 두 가닥이 등잔 불빛에 붉게 떨렸다.

5화는 어땠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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