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5,240자) · 스물셋 · 병오년 시월 초사흘
안 쓰겠습니다
다른 이름으로 불러 주세요 · 백해원
만 19세 이상 이용가
윤 판서 댁 뒤꼍 서재는 창이 둘이었다. 하나는 감나무 쪽으로, 하나는 행랑 지붕 쪽으로 나 있었다. 그는 열한 해 동안 그 방에서 윤재겸의 글씨를 썼다. 시월 초사흘 새벽에도 그는 연적에 물을 따르고 먹을 갈았다. 소나무 그을음을 아교로 굳힌 송연먹은 갈수록 냄새가 짙어졌고, 그 냄새가 방 안의 차가운 공기와 섞여 콧속 깊은 데를 찔렀다. 그는 그 냄새를 열한 해째 싫어했다. 싫어하는 냄새 속에서 하루에 윤재겸이라는 석 자를 백 번씩 썼다. 열두 살에 죽은 아이의 글씨체를 곽득수가 남은 서책에서 오려 벽에 붙여 두었고, 그는 그 글씨를 보며 제 손을 거기에 맞췄다.
그는 무엇이든 세었다. 서재 창살은 가로 열둘 세로 여덟이었다. 감나무에 남은 감은 어제 스물일곱, 오늘 스물다섯이었다. 까치가 둘을 먹었다. 서씨 등방에서 온 편지는 여섯 통이었다. 이씨 댁 아가씨의 편지까지 치면 일곱이었다. 그는 그 일곱을 서안 밑 널 틈에 끼워 두었다. 곽득수가 먼저 읽고 넘겨준 것들이었다. 먼저 읽힌 편지도 편지였다.
먹이 반쯤 갈렸을 때 문이 열렸다. 곽득수는 문을 열 때 기척을 내지 않았다. 도포 소매에서 편지 한 통을 꺼내 서안 위에 놓았다. 봉한 자리가 한 번 뜯겼다가 다시 붙어 있었다.
“서씨 댁 셋째가 도련님께 이렇게 썼소. 앞으로는 읽혀도 괜찮은 말만 쓰시라고.”
그는 편지를 펴지 않았다. 곽득수가 그 줄을 먼저 읽었다는 것을, 읽고 얼굴을 찌푸렸다는 것을 그는 곽득수의 입꼬리에서 보았다. 오른쪽이 조금 내려가 있었다. 곽득수는 화가 나면 오른쪽만 내려갔다.
“도련님, 오늘은 서씨 댁에 편지를 하나 쓰시오. 도련님 등은 내가 드린 종이대로 만들라고. 그리고 이제 편지는 그만 주고받겠다고.”
곽득수가 서안 위에 종이를 한 장 펴 놓고 붓을 먹에 적셔 그의 손 앞에 놓았다. 붓대가 서안 위를 굴러 그의 손가락에 닿고 멈췄다.
*
그는 붓을 들지 않았다. 열한 해 동안 곽득수가 놓은 붓을 들지 않은 적이 없었다. 그는 그것도 셌다. 한 번도 없었다.
“그 편지는 안 쓰겠습니다.”
곽득수가 그를 보았다. 눈이 느리게 한 번 감겼다 떠졌다.
“무엇이라 하셨소?”
“쓰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서안 밑 편지 일곱도 안 드리겠습니다. 가지러 오실 줄 알았습니다.”
제 목소리가 방 안에 퍼지는 것을 그는 들었다. 목소리는 떨렸고, 떨리는 것까지 다 들렸다. 그래도 말은 끝까지 나갔다. 곽득수는 그를 한참 보다가 서안 모서리를 짚고 몸을 숙였다. 먹 냄새 사이로 곽득수의 도포에서 나는 쑥 냄새가 끼어들었다. 곽득수는 쑥물에 옷을 헹궜다. 좀이 안 슨다고.
“도련님, 오리골에 동생이 셋 있지요? 위로 둘이 사내고 막내가 계집이오. 어미는 아직 조 비탈을 일구고. 그 집이 열한 해 동안 굶지 않은 게 누구 덕인지 아시오?”
“누구 덕인지 압니다.”
“그럼 됐소, 붓을 드시오.”
그는 붓을 들었다. 곽득수의 어깨가 조금 내려갔다. 그는 든 붓을 연적에 담갔다가, 먹이 아니라 물을 흠뻑 먹인 채로 곽득수가 펴 놓은 종이 한가운데를 눌렀다. 물이 종이에 번졌다. 둥글게, 천천히, 가장자리까지. 종이가 우글쭈글 일어났다.
“종이가 젖어서 못 쓰겠습니다.”
곽득수는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고는 손을 뻗어 서안 밑 널 틈에서 편지 일곱을 꺼냈다. 그가 거기 둔 것을 곽득수는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곽득수는 일곱을 가지런히 모아 들고 화로 쪽으로 갔다. 그중 한 통을 숯불 위에 얹었다.
한지는 먼저 가장자리부터 누렇게 말렸다가 검어졌고, 가운데서 불이 한 번 솟았다. 탄 종이 냄새가 먹 냄새를 덮었다. 그는 그 냄새를 맡으며 어느 편지가 타는지 헤아렸다. 두 번째로 온 편지였다. 창이 셋이라는 편지, 두드려 주셔서 알아들었다는 편지. 그는 그것을 다 외우고 있었다. 외워 둔 것은 곽득수가 태울 수 없었다.
“나머지 여섯은 내가 두겠소. 삼월 혼례가 끝나면 돌려 드리지. 그리고 도련님, 하나 알려 드리리다. 서씨 댁 셋째가 남산 등방에 갔더이다. 거기서 막동이를 만났소.”
그의 손에서 붓이 떨어졌다. 붓이 서안 위에 먹물 없는 자국을 남기고 굴렀다.
“막동이가 살아 있습니까?”
곽득수는 대답 대신 입꼬리를 올렸다. 이번에는 양쪽이 다 올라갔다.
“풀을 잘 갠다 하오. 도련님이 붓을 잘 드시는 것처럼.”
*
사랑채에 윤 판서가 누워 있었다. 예순셋이었고, 지난봄부터 기침이 가래에 걸려 내려가지 않았다. 방 안은 약탕 냄새로 눅눅했다. 감초와 당귀 달인 냄새가 이불에도 병풍에도 배어서, 그는 사랑채 문을 열 때마다 제 옷에서도 그 냄새가 나게 될 것을 알았다.
“재겸이 왔느냐?”
판서가 그렇게 불렀다. 열한 해 동안 한 번도 다른 이름으로 부른 적이 없었다. 그는 그 부름에 대답하는 법을 열두 살 겨울에 익혔다. 곽득수가 가르쳤고, 대답이 반 박자 늦으면 저녁을 굶었다.
“네, 아버님.”
“곽 청지기 말이 네가 붓을 적셨다더구나.”
그는 무릎을 꿇고 앉았다. 판서가 손을 뻗어 그의 손목을 잡았다. 마른 손이었고, 손바닥이 뜨거웠다.
“재겸이가 죽던 날 이 집이 죽을 뻔했다. 외아들이 없으면 대가 끊기고, 대가 끊기면 제사가 끊기고, 제사가 끊기면 이 집에 기대 사는 식솔 백이 흩어진다. 행랑 사람, 부엌 사람, 논 부치는 사람, 그 사람들 새끼들. 너 하나로 그 백이 산다. 나는 그걸 한 번도 잊은 적이 없다.”
“잊지 않으신 것 압니다.”
“그러니 삼월까지만 참아라. 이씨 댁과 혼례만 치르면 궁이 이 집을 안다. 그 뒤로는 네 방에 무슨 편지가 오든 내가 안 본다. 곽 청지기도 안 보게 하마.”
판서의 말은 옳았다. 그는 그것을 알았다. 백 명이 산다는 것도, 그 백 명 가운데 용인댁이 있다는 것도, 용인댁의 손주 둘이 행랑에서 자란다는 것도 알았다. 옳은 말 앞에서 그는 할 말이 없었다. 그래서 다른 것을 물었다.
“아버님, 저를 데려오던 해에 오리골에서 셋을 데려온 것은 아십니까?”
판서의 손이 그의 손목에서 풀렸다. 기침이 한 번 올라왔다가 목에 걸렸다.
“곽 청지기가 알아서 했다. 너를 고르려면 여럿을 봐야 한다고 했다. 나머지 둘은 좋은 데로 보냈다고 들었다.”
“하나는 남산 등방에서 풀을 갭니다.”
“그럼 좋은 데로 간 것 아니냐? 굶지 않고 손에 일이 있으면.”
“하나는 이 집 행랑에서 죽었습니다.”
판서가 눈을 떴다. 누렇게 흐린 눈이 천장을 보다가 그에게로 내려왔다.
“역병이었다고 들었다.”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판서도 더 묻지 않았다. 약탕관이 화로 위에서 끓어 넘쳤고, 그 소리가 방 안을 오래 채웠다.
그는 일어나 약탕관을 화로에서 내리고 사발에 약을 따랐다. 김이 얼굴로 올라와 눈이 따가웠다. 판서를 일으켜 앉히고 사발을 입에 대 주었다. 판서는 세 모금을 삼키고 사발을 밀어냈다. 입가에 흐른 약을 그가 소매로 닦았다. 열한 해 동안 그 일을 몇 번 했는지 그는 세지 않았다. 세지 않은 것은 그것 하나였다.
그가 사발을 들고 물러나려 할 때 판서가 등 뒤에서 말했다.
“재겸이는 활을 좋아했다. 여덟 살에 벌써 과녁을 맞혔지. 너는 활을 싫어하지?”
그는 문고리를 잡은 채 멈췄다. 열한 해 동안 판서는 그에게 활을 권한 적이 없었다. 활터에 가는 날이면 곽득수가 그를 서재에 두고 대신 핑계를 댔다.
“싫어합니다.”
“안다. 줄 튕기는 소리에 어깨가 올라가더구나. 재겸이는 안 그랬다.”
판서는 그 말만 하고 돌아누웠다. 그는 문을 닫고 나와 약사발을 든 채 마루에 한참 서 있었다. 판서가 알면서 모르는 척한 것이 활 하나였는지, 그보다 많았는지 그는 셀 수가 없었다.
*
그날 밤 그는 행랑 광 앞에 섰다. 행랑 끝에 붙은 흙벽 광이었고, 문짝에 쇠고리가 둘 달려 있었다. 열한 해 전 동짓날 밤, 그는 사랑채 건넌방에서 그 쇠고리 소리를 들었다. 쇠고리가 걸리는 소리, 한참 뒤에 다시 풀리는 소리. 그 사이에 무슨 소리가 났는지 그는 기억하지 못했다. 기억하지 못한다는 것을 열한 해 동안 제일 부끄러워했다.
분이는 열세 살이었다. 오리골에서 한양으로 오는 나흘 동안 한 번도 안 울었고, 한양에 온 첫날 밤부터 울었다. 오리골 가는 길을 안다고 했다. 해 지는 쪽의 반대로 가면 된다고 했다. 동짓날 새벽 분이는 행랑 담을 넘었고, 저녁에 곽득수가 끌고 왔다. 이튿날 아침 행랑 마당에 거적 하나가 나왔다. 곽득수는 역병이라고 했지만, 그 겨울 한양에 역병 돈 동네는 없었다. 그는 그것을 그해 겨울에 벌써 알았다. 알고도 열한 해 동안 한 번도 입 밖에 내지 않았다. 입 밖에 내면 제가 앉은 자리가 누구 자리였는지까지 말해야 했기 때문이다.
부엌 쪽에서 발소리가 났다. 용인댁이 누룽지 한 사발을 들고 왔다.
“도련님, 저녁 안 드셨지요? 곽 청지기가 굶기라 했는지 안 했는지는 나는 몰라요. 그냥 누룽지가 남아서요.”
그는 사발을 받았다. 누룽지는 식어서 딱딱했고, 씹으면 탄 쌀 냄새가 났다. 먹 냄새도 종이 탄 냄새도 아닌 냄새였다. 그는 그 냄새가 좋았다. 오리골 가마솥 밑바닥에서 긁던 냄새였다.
“아주머니, 달구라는 아이가 아직 뒷골목에 있습니까?”
“있지요, 엿 받기 전엔 안 가요 그 녀석은. 나머진 나는 몰라요.”
그는 누룽지를 싸 온 한지를 펴서 무릎 위에 놓았다. 붓도 먹도 서재에 있었고, 서재에는 곽득수가 있었다. 그는 부엌 아궁이 앞으로 가서 타다 남은 숯 한 토막을 집었다. 숯은 손끝에 까맣게 묻었고, 먹 냄새가 나지 않았다.
「낭자, 편지 일곱을 빼앗겼습니다. 두 번째 것은 탔습니다. 다 외우고 있으니 괜찮습니다. 이제부터 편지가 끊길 것입니다. 끊겨도 저는 셉니다. 오늘 처음으로 곽 청지기에게 안 쓰겠다고 했습니다. 목소리가 떨렸는데, 떨리는 것도 제 것이라서 그것도 셌습니다. 막동이를 만나셨다지요, 그 아이는 저보다 한 살 많습니다. 저 대신 말씀을 전해 주십시오. 아직 소를 세느냐고.」
숯 글씨는 번지지 않았다. 붓으로 쓸 때처럼 오래 머금을 먹이 없어서, 그는 한 번도 붓을 붙들고 머뭇거리지 않았다. 다 쓰고 나서 보니 글씨가 곧았다. 열한 해 동안 그가 쓴 글씨 가운데 처음으로 윤재겸의 기울기를 따라가지 않은 글씨였다.
용인댁이 그 한지를 앞치마 속에 넣고 부엌문으로 사라졌다. 문틈으로 달구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거 누룽지 냄새 나요, 엿 한 가락 더 줘야 해요.
그는 행랑 광 쇠고리 앞에 조금 더 서 있다가 서재로 돌아갔다. 감나무에 남은 감은 스물다섯이었다. 내일은 몇이 남을지 그는 세지 않기로 했다. 대신 제 손가락에 묻은 숯을 세었다. 다섯 손가락 가운데 셋이 까맸다. 창이 셋이라던 등방 앞채를 그는 그 손가락으로 한 번 헤아려 보고 나서야 누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