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5,157자) · 연 · 병오년 구월 스무날
남산 등방
다른 이름으로 불러 주세요 · 백해원
만 19세 이상 이용가
구월 스무날 아침, 서씨 등방 마당에 가마 한 채가 들어왔다. 가마꾼 넷이 땀을 닦는 사이 쓰개치마를 쓴 젊은 여자가 먼저 내렸고, 몸종이 뒤따라 내리려다 치맛자락을 밟아 한 번 주저앉았다. 여자는 몸종을 일으켜 세우지 않고 쓰개치마를 걷어 올렸다. 나이는 스물하나, 남쪽 이씨 댁 넷째 이소온이라고 묻기도 전에 제 입으로 댔다.
“종이에 내가 활쏘기를 좋아한다고 쓴 거, 그거 거짓말이에요. 먼저 그 말부터 하러 왔어요. 등이 벌써 다 됐다고 들어서 급했어요.”
연은 대나무를 내려놓았다. 몸종은 그제야 제 힘으로 일어나 마루 끝에 앉았다. 이소온은 마루에 오르지 않고 작업대 앞까지 곧장 걸어왔다. 걸음이 빨랐고, 치맛단이 대나무 부스러기를 쓸고 지나갔다.
“아버지가 그렇게 쓰래서 썼어요. 윤 판서 댁 도련님이 활을 좋아하신다니 맞춰야 한다고요. 나는 활 소리만 들으면 이가 시려요. 오라비가 넷인데 넷이 다 활을 쏴요. 나는 열두 해 동안 과녁 뒤에서 화살을 셌어요.”
“종이에 그것도 쓰셨으니 압니다. 빨리 쓰신 줄에요.”
이소온이 입을 다물었다. 말이 빠른 사람이 입을 다물면 마당이 갑자기 넓어졌다. 몸종이 마루 끝에서 헛기침을 했다.
“그럼 내 등은 어떻게 나왔어요? 거짓말 들어간 걸로 만들었어요, 아닌 걸로 만들었어요?”
“아닌 걸로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색이 뭐였는데요?”
연은 광에서 이소온의 등을 내려 와 작업대 끝 가로대에 걸었다. 낮이라 불을 켜도 벽에 색이 흐리게 앉았다. 그래도 색은 보였다. 짙은 치자색이 벽 한 귀퉁이에 좁고 단단하게 뭉쳐 있었다. 이소온은 한참 그 벽을 보았다. 햇빛이 창호지를 뚫고 들어와 치자색 가장자리를 조금씩 먹었고, 그 사이로 들기름 탄내가 가늘게 올라왔다. 이소온의 몸종이 제 코를 막았다가 주인 눈치를 보고 도로 내렸다.
“되게 좁네요. 나는 좁은 사람이에요?”
“좁은데 그만큼 깊습니다. 좁은 건 본인이 쓰셨기 때문이고, 깊은 건 제 일을 쓰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흠이 아닙니다.”
이소온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손을 뻗어 벽의 치자색을 손바닥으로 덮었다. 색은 손등 위로 올라왔고, 이소온의 손이 그 색 안에서 조금 떨렸다. 그러고 나서 그 손을 치맛자락에 닦았다. 색이 묻지 않았는데도 닦았다.
“흠이 아니라는 말, 처음 들어요. 우리 집에서는 내가 말을 빨리 해서 흠이고, 활을 싫어해서 흠이고, 과녁 뒤에서 화살을 너무 잘 세서 흠이었어요.”
“화살 잘 세는 게 왜 흠입니까?”
“오라비들이 몇 개 빗나갔는지 다 알거든요.”
연은 웃음을 참지 못했다. 이소온도 따라 웃었다. 마루 끝의 몸종만 웃지 않고, 아가씨 또 그러신다고 중얼거렸다.
*
웃음이 가라앉자 이소온이 목소리를 낮췄다. 이번에는 정말 낮췄다.
“그런데 윤 판서 댁 청지기가 어제 남산 등방에 갔대요. 남산 집은 누가 뭘 시켰는지 사흘이면 저자에 돌거든요. 우리 집 찬모가 저자에서 듣고 왔어요. 도련님 등을 거기서 새로 만든대요. 서씨 댁 것 말고.”
“궁 주문은 서씨 댁으로 왔습니다.”
“그러니까 등이 둘이 되는 거죠. 혼례 사흘 전에 등감 마당에 어느 걸 걸지는 감관 나리가 정한대요. 도석우라는 사람이 그 나리 댁 제삿날 등을 해마다 공으로 해 준대요.”
이소온은 작업대 위에 봉투 하나를 놓았다.
“이건 도련님한테 보내는 편지예요. 서씨 댁을 거쳐서 보내 주세요. 우리 집에서 윤 판서 댁으로 바로 보내면 청지기가 먼저 읽는다면서요? 여기서 보내도 읽긴 읽겠지만, 그래도 여기서 나가는 게 나아요. 여긴 색이 제대로 나오는 집이니까.”
“무엇을 쓰셨는지 여쭤도 됩니까?”
“별거 없어요, 활 좋아하시냐고요. 좋아하시면 나랑은 안 맞는다고요. 안 좋아하시면 그 종이 누가 썼느냐고요.”
*
남산 등방은 남산 아래 비탈에 기와집 두 채를 이어 붙여 지은 집이었다. 마당에 장대가 스무 개쯤 서 있었고, 장대마다 흐린 등이 두셋씩 꿰여 볕에 말랐다. 다 같은 분홍이었다. 서씨 등방에서는 등마다 색이 달라 마당이 늘 얼룩덜룩했는데, 여기는 장대 스무 개가 한 빛으로 늘어서서 눈이 쉬었다. 풀 끓이는 가마솥 셋에서 밀가루 풀 냄새가 뭉근하게 올라왔고, 그 냄새에 백반 냄새가 섞여 목구멍 안쪽이 텁텁했다. 한지는 들기름을 반만 먹였는지 볕에 비치는 결이 성겼다. 빨리 마르고 빨리 팔리는 종이였다. 일꾼 여섯이 말없이 손만 놀렸고, 그 가운데 누구도 등 안쪽 속지를 들여다보지 않았다. 연이 대문을 들어섰을 때 막동이 마당 한쪽에서 커다란 풀통을 젓고 있었다. 막동은 연을 보자 풀 묻은 주걱을 들어 인사했다.
도석우는 안채 대청에서 붓을 들고 있었다. 앞에 두루마리가 펼쳐져 있었다. 연이 대청 아래 서자 그는 붓을 내려놓지 않고 말했다.
“서씨 댁 셋째가 남산 문턱을 다 넘으시오? 할머님이 알고 보내셨소?”
“그게 윤재겸 도련님 종이입니까?”
도석우가 두루마리를 연 쪽으로 돌려 보였다. 북촌 가회방에서 나고 자람, 활쏘기를 즐김, 맹자를 세 번 읽음. 곽득수의 두루마리와 같은 말이었다. 다만 글씨는 도석우의 손이었다. 그리고 몇 줄이 더 있었다. 봄날 꽃을 좋아함, 성품이 온화함, 매사에 넉넉함.
“청지기 어른이 가져온 종이가 너무 짧아서 좀 보탰소. 넓게 만들려면 말이 많아야 하오. 없는 말은 지어내면 되고.”
“본인은 한 번도 안 만나셨지요?”
“만나서 뭐 하오? 만나면 등이 좁아지오. 낭자네 등을 봤소. 벽이 쩍 갈렸다지요? 소문이 벌써 여기까지 왔소.”
“그 소문은 누가 냈습니까?”
“벽이 제 입으로 냈지요.”
도석우가 소리 내어 웃고 나서 붓을 내려놓고 대청 끝으로 나와 연을 내려다보았다.
“낭자, 내가 하나 청하겠소. 서씨 댁에 그 열일곱째 종이가 있지요? 도련님이 제 손으로 쓴 편지 말이오. 그걸 좀 빌려주시오. 그러면 지어낼 것도 없이, 그 편지에서 모난 데만 빼서 넓게 만들겠소. 등감 마당에서 한 색이 나고, 도련님 말도 조금은 들어가오. 서로 좋지 않소?”
“그건 못 빌려드립니다.”
“무슨 까닭이오?”
“그 편지에서 모난 데를 빼면 남는 게 없습니다. 그분은 모난 데가 전부입니다.”
도석우의 얼굴에서 웃음이 한 번 멈췄다가 다시 돌아왔다. 돌아온 웃음은 전보다 얇았다.
“그럼 이렇게 되오. 혼례 사흘 전 등감 마당에 등 둘이 들어가오. 서씨 댁 것은 벽을 가르고, 남산 것은 벽을 칠하오. 감관 나리가 어느 걸 거시겠소? 나는 그 나리 댁 제사 등을 열두 해째 공으로 해 드렸소. 낭자는 그 나리 얼굴도 모르지요?”
“얼굴은 모릅니다.”
“그게 서씨 댁이 삼대째 가난한 까닭이오.”
“가난해서 벽이 갈리는 겁니다. 남산은 부자가 되고 나서 벽을 칠하기 시작하셨고요.”
대청 아래서 풀을 젓던 막동이 주걱을 떨어뜨렸다. 주걱이 풀통 가장자리를 치고 마당에 굴렀고, 일꾼 여섯이 일제히 고개를 숙여 손만 더 빨리 놀렸다. 도석우는 막동을 한 번 흘겨보고 나서 연에게 눈을 돌렸다.
“말은 할머님보다 세시구려. 할머님은 그래도 감관 나리 앞에서는 입을 다무실 줄 아셨소.”
연은 대답하지 않고 돌아섰다. 등 뒤에서 도석우가 한 마디를 더 던졌다. 서씨 할머님께 여든넷 얘기는 아직 안 여쭈었느냐고. 연은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멈추면 그 수가 등에 박힐 것 같았다.
*
대문을 나서는데 막동이 풀통을 들고 따라 나왔다. 버리러 가는 척했지만 통은 반이나 차 있었다. 막동은 골목 모퉁이를 돌자마자 통을 내려놓았다.
“낭자, 아까 윤재겸이라고 하셨지요? 북촌 윤 판서 댁 도련님.”
“네, 그 댁입니다.”
“그 집 청지기가 곽득수라는 사람이지요?”
막동의 목소리에서 웃음기가 빠졌다. 연은 그런 막동의 목소리를 처음 들었다. 풀에 분 손등을 막동이 다른 손으로 문질렀다.
“그 사람이 나를 여기 판 사람이에요. 열한 해 전에. 오리골에서 셋을 데려왔는데, 하나는 저고, 하나는 여자아이고, 하나는 모르겠어요. 한양 들어오는 날 그 아이만 가마에 태워서 따로 갔어요. 우리 둘은 걸어서 왔고.”
연은 막동을 보았다. 쥐구멍 창, 화전 비탈, 소 여물 가마솥. 막동이 말한 오리골과 편지 속 동네가 한 자리에 겹쳤다. 연은 그것을 막동에게 말하지 않았다. 말하면 곽득수가 먼저 읽을 편지에 그 말이 들어갈 것 같았다.
“여자아이는 어떻게 됐어요?”
막동은 풀통을 다시 들었다.
“죽었대요, 역병이라고. 그 집 행랑에서요. 그 겨울에 역병 돈 동네는 한양에 하나도 없었는데.”
막동은 비탈 아래로 내려갔다. 걸음이 올 때보다 무거웠다. 반쯤 찬 풀통이 걸음마다 출렁여 넘쳤고, 넘친 풀이 비탈 돌바닥에 하얀 자국을 줄줄이 남겼다. 연은 그 자국이 골목 끝에서 끊길 때까지 서 있었다.
*
이소온의 편지는 이튿날 달구가 가져갔고, 답은 닷새 만에 서씨 댁으로 돌아왔다. 봉투가 둘이었다. 하나는 연에게, 하나는 이씨 댁 넷째에게. 연은 제 것을 먼저 뜯었다. 짧았다. 이씨 댁 아가씨 편지를 곽 청지기가 읽고 한참 웃지도 못하고 서 있더라고, 그 얼굴을 보여 드리지 못해 아쉽다고 적혀 있었다.
이소온에게 가는 봉투는 달구가 가마 타고 온 몸종 편에 넘겼다. 사흘 뒤 이소온이 다시 서씨 마당에 들어섰다. 이번에는 가마 없이 걸어서 왔고, 몸종은 저만치 뒤에서 숨을 헐떡였다. 이소온은 편지를 연의 코앞에 펼쳐 보였다.
「활은 싫어합니다. 줄 튕기는 소리에 저도 어깨가 올라갑니다. 그 종이는 제가 쓰지 않았습니다. 누가 썼는지는 아가씨도 짐작하실 것입니다. 아가씨 종이의 활쏘기 한 줄은 누가 쓰라고 했는지 저도 짐작합니다. 그러니 우리 둘 다 종이에서는 활을 좋아하고, 실은 둘 다 싫어합니다. 이것이 맞는 것인지 안 맞는 것인지 저는 모르겠습니다.」
“이 사람, 웃기네요.”
이소온이 편지를 접었다. 접는 손이 느렸다.
“맞는 건지 안 맞는 건지 모르겠다는 말, 나도 하고 싶었는데 먼저 해 버렸어요. 그래서 좀 분해요.”
연은 대꾸 대신 광 쪽을 보았다. 이소온이 돌아간 뒤 연은 붉은 실을 두 뼘 더 끊었다. 하나는 이소온의 등에서 스물셋의 등 자리로, 하나는 이소온의 등에서 제 못으로 이었다. 가로대 사이에 실 셋이 걸렸다. 사람 셋이면 줄이 셋이었다. 연은 그 셋을 올려다보다가 막동의 풀 묻은 손등을 떠올렸다. 그 손은 아직 어느 실에도 안 매여 있었다. 행랑에서 역병으로 죽었다는 여자아이는 실을 맬 자리조차 없었다.
달구는 두 편지를 다 읽고 한 줄로 평을 했다.
“아가씨는 첫 줄에 싸움을 걸고요, 도련님은 그 싸움을 받아서 웃음으로 돌려줘요. 둘이 합쳐 엿 다섯 가락짜리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