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5,229자) · 연 · 병오년 구월 열하루

종이로 됩니다

다른 이름으로 불러 주세요 · 백해원

만 19세 이상 이용가

답장은 이레 뒤에 왔다. 달구는 그 이레 동안 아침마다 북촌 윤 판서 댁 뒷골목을 돌았고, 부엌어멈 용인댁은 이레째 되는 날에야 앞치마 속에서 봉투를 꺼냈다. 내 몰라요, 나는 암것도 몰라요, 하면서 달구 손에 쥐여 주고는 부엌문을 등으로 밀어 닫았다고 했다.

연은 작업대를 치우고 편지를 폈다. 지난번보다 길었다. 글씨는 여전히 기울어 있었지만 번진 자국이 적었다. 붓을 덜 붙들고 쓴 글씨였다.

「스물셋이라는 이름, 받겠습니다. 싫지 않습니다. 저를 스물셋째로 세어 주신 분은 처음입니다. 여쭈신 다섯 가지를 답합니다. 창은 넷이었습니다. 그중 하나는 쥐가 뚫은 구멍이었는데, 어머니가 거기에 한지를 발라 창이라고 부르셨으니 넷으로 칩니다. 그 창으로는 비탈이 보였습니다. 봄에 불을 놓아 조를 심는 비탈이었고, 어머니가 삼베를 널어 두면 바람에 그게 산 쪽으로 누웠습니다. 겨울에 손이 시리면 소 여물 끓이는 가마솥 뚜껑 위에 올렸습니다. 뜨거워서 금방 떼야 했고, 떼면 또 시려서 다시 올렸습니다. 제일 싫은 냄새는 먹 냄새입니다. 지금 이 편지도 코를 막고 씁니다. 마지막으로 소리 내어 웃은 것은 댁의 편지를 받은 날입니다. 싫으시면 다른 수를 대 주십시오, 하셨는데, 저는 수를 대는 일은 잘합니다. 그런데 이 다섯을 적다가 알았습니다. 열한 해 동안 저는 남의 것은 잘 세었는데 제 것은 한 번도 안 세어 보았습니다. 창이 넷이었다는 것도 오늘 처음 세었습니다.」

연은 편지를 내려놓고 한참 창호지를 보았다. 등방 앞채 창은 셋이었다. 연은 그것을 한 번도 세어 본 적이 없었다. 셀 까닭이 없었기 때문이다. 연은 붓을 들고 편지 끝에 적힌 한 줄을 다시 읽었다. 제 것은 한 번도 안 세어 보았습니다.

그 사람이 사는 곳은 북촌 가회방의 솟을대문 집이었다. 곽득수의 두루마리에는 그렇게 적혀 있었다. 가회방 솟을대문 집에는 화전 비탈도 쥐구멍 창도 소 여물 가마솥도 없었다.

*

사흘 뒤 연은 북촌으로 갔다. 편지만으로도 등은 만들 수 있었다. 제 손으로 쓴 글이니 본인 말이었다. 그래도 서씨 댁 법은 말을 듣는 것이었고, 할머니는 늘 소리가 글보다 한 겹 더 깊다고 했다. 연은 한 번이라도 그 사람 목소리를 듣고 싶었다. 그 이유가 법 때문만은 아니라는 것도 가는 길에 알았다.

윤 판서 댁 뒷골목은 담이 높았다. 기와 얹은 담 위로 감나무 가지가 넘어와 있었고, 익은 감 하나가 떨어져 골목 돌바닥에 붉게 터져 있었다. 부엌 쪽에서 장작 타는 연기와 된장 끓는 냄새가 담을 넘어왔다. 용인댁이 부엌문을 반만 열고 얼굴을 내밀었다.

“아이고, 낭자가 직접 오면 어떡해요. 나는 몰라요. 암것도 몰라요.”

“도련님께 한 마디만 여쭙게 해 주세요. 얼굴은 안 봐도 됩니다. 담 너머로 소리만 들으면 됩니다.”

“도련님은 요 시각이면 뒤꼍 서재에 계시긴 하는데요, 나는 몰라요.”

용인댁은 모른다고 하면서 턱으로 담 모퉁이를 가리켰다. 연은 모퉁이로 가서 담에 등을 대고 섰다. 담 너머에서 책장 넘기는 소리가 났다. 한참 뒤에 기침 소리가 한 번 났다. 연은 담에 대고 낮게 말했다.

“스물셋이라는 분이 거기 계십니까?”

책장 소리가 멈췄다. 담 너머가 조용해졌고, 감나무 가지에서 까치 한 마리가 푸드덕 날아갔다. 그리고 목소리가 왔다.

“창이 셋이십니까? 댁은.”

낮고, 끝이 조금 떨렸다. 연은 대답하려고 숨을 들이켰다. 그때 골목 저쪽에서 발소리가 났다.

곽득수였다. 도포 소매는 여전히 깨끗했고, 걸음은 여전히 조용했다. 그가 연 앞에 섰다. 담 너머에서는 다시 아무 소리도 안 났다.

“서씨 댁 셋째 낭자가 남의 집 담에 붙어 무엇을 하시오?”

“도련님 말씀을 들으러 왔습니다. 등은 말로 만듭니다.”

“도련님은 종이로 되오. 지난번에 말씀드렸소.”

“종이로 만들면 그 종이를 쓴 사람의 등이 됩니다. 청지기 어른 등이 나옵니다. 궁에서 청지기 어른을 혼인시키려는 건 아니잖습니까?”

용인댁이 부엌문 안에서 무슨 소리를 냈다. 웃음을 삼킨 소리였다. 곽득수는 그쪽을 보지 않고 연만 보았다.

“도련님 편지는 내가 먼저 읽소. 이 집에서 나가는 종이는 한 장도 빠짐없이 내 손을 거치오. 댁이 도련님께 창이 몇이냐 물은 것도 읽었소.”

연의 목덜미가 식었다. 곽득수의 목소리에는 화가 없었다. 그래서 더 차가웠다.

“그러면 답장도 읽으셨겠군요.”

“읽었소. 도련님이 요즘 옛날이야기를 지어내는 재미를 붙이셨나 보오. 가회방에 쥐구멍 창이 어디 있겠소.”

곽득수가 한 발 다가섰다. 감 터진 자리를 밟지 않으려고 발을 비켜 디뎠다. 그 조심스러움이 이상하게 무서웠다.

“낭자, 이렇게 합시다. 도련님 등은 내가 드린 종이대로 만드시오. 그러면 서씨 댁 스무 쌍은 무사하오. 싫다 하시면 등감 감관 나리께 편지 한 줄 넣겠소. 서씨 댁이 궁 혼인 당사자 집 담을 넘본다고. 스무 쌍이 통째로 남산으로 가오.”

“그러시지요.”

“무엇이라 하셨소?”

“편지를 넣으시라고 했습니다. 저는 본인 말로 만듭니다. 등감에서 물으면 청지기 어른 종이가 왜 도련님 말이 아닌지도 말씀드리겠습니다.”

곽득수는 한참 연을 보았다. 그러고는 뒷문을 열고 들어가 안에서 빗장을 걸었다. 쇠 빗장이 걸리는 소리가 골목에 오래 울렸다. 용인댁이 부엌문 틈으로 손을 내밀어 연의 소매를 잡았다.

“낭자, 나는 몰라요. 근데 도련님이 방금 서재 창을 세 번 두드렸어요. 그게 무슨 뜻인지 나는 몰라요.”

연은 알았다. 셋이었다. 연의 창이 셋이냐고 물은 사람이 제 손으로 셋을 두드렸다.

*

돌아오는 길에 수표교 난간 앞에서 누가 연을 불러 세웠다. 남산 등방 일꾼이었다. 지난번 도석우를 따라와 장대를 메었던 사내로, 스물너덧쯤 되어 보였고 손등이 풀에 불어 허옜다. 오늘도 등 넷을 장대에 꿰어 메고 있었다.

“서씨 댁 셋째 낭자 맞지요? 우리 주인어른이 낭자 얘기를 하루에 열 번은 해요. 욕을 아홉 번 하고 한 번은 칭찬을 하는데, 그 한 번이 제일 길어요.”

“무슨 칭찬을요?”

“고집이 소 같다고요. 그게 칭찬인지는 저도 몰라요. 우리 동네에서는 소가 제일 귀했거든요.”

말끝이 서울 말이 아니었다. 끝을 올리지 않고 툭 떨어뜨렸다. 연이 어디서 왔느냐고 묻자 사내는 장대를 고쳐 메며 북쪽이라고만 했다. 강원도 김화, 산골짜기 오리골이라고. 이름은 막동이라고 했다. 열세 살에 한양에 와서 남산에서 풀만 열한 해를 갰다고, 그래서 제 손은 이제 풀 반 살 반이라고 했다.

“오리골이요?”

“모르시지요? 아무도 몰라요. 귀틀집 열한 채에 소가 여섯이에요. 아니, 제가 나올 때 여섯이었어요.”

막동은 웃으며 다리를 건너갔다. 장대 끝에 매달린 흐린 등 넷이 걸음마다 한 색으로 흔들렸다. 연은 그 자리에 서서 오리골이라는 이름을 입속으로 한 번 굴려 보았다. 쥐구멍 창과 소 여물 가마솥이 있는 동네가 어디쯤일지 처음으로 생각했다.

*

그날 밤 연은 등을 만들었다. 대나무 열여섯 개는 벌써 깎아 두었다. 둥글게 굽혀 위아래 테를 잡고 세로살을 끼웠다. 한지는 들기름에 반나절 재워 두었던 것을 꺼냈다. 기름 먹은 종이는 손바닥에 올리면 미지근했고, 불빛에 비추면 결이 물고기 비늘처럼 겹쳐 보였다. 풀은 위에서 아래로 발랐다. 아래에서 위로 바르면 풀이 흘러 자국이 남는다.

속지에는 그의 다섯 답을 옮겨 적었다. 창 넷, 쥐구멍 하나, 비탈과 삼베, 가마솥 뚜껑, 먹 냄새, 그리고 댁의 편지를 받은 날. 이름은 쓰지 않았다. 적은 속지를 세 번 접어 등 안쪽 바닥에 붙였다. 서씨 댁 등은 접은 자국이 셋이다.

이씨 댁 넷째의 등은 사흘 전에 끝냈다. 남쪽 이씨 댁은 딸에게 종이를 직접 쓰게 했다. 연은 그 종이를 보고 조금 놀랐다. 좋아하는 것, 활쏘기. 싫어하는 것, 없음. 그 두 줄만 반듯했고 나머지는 글씨가 빨랐다. 빨리 쓴 줄에 그 사람이 있었다. 겨울에는 버선을 두 켤레 겹쳐 신는다, 오라비들이 활을 쏘면 과녁 뒤에 숨어 화살 세는 일을 맡았다, 제일 싫은 소리는 시위 튕기는 소리다. 연은 그 마지막 줄을 읽고 활쏘기를 좋아한다는 첫 줄을 다시 보았다. 한 종이 안에서 한 사람이 서로 다른 말을 하고 있었다. 반듯한 줄은 누가 불러 준 대로 쓴 줄이었고, 빨리 쓴 줄은 제 손이 먼저 간 줄이었다. 연은 빨리 쓴 줄만 속지에 옮겼다.

할머니가 등잔을 들고 왔다. 연은 두 등을 작업대 끝 가로대에 나란히 걸었다. 표지처럼 걸어 둔 시험 등 둘을 내리고 그 자리에 걸었다. 심지에 불을 붙였다.

벽이 갈렸다.

왼쪽은 깊은 쪽빛이었다. 겨울 저녁 산그늘 같은 색이었고, 가운데에 손바닥만 한 빈 자리가 있어서 그 부분만 벽이 맨살로 드러났다. 오른쪽은 짙은 치자색이었다. 좁고 단단하게 뭉쳐 벽의 한쪽 귀퉁이만 물들였다. 두 색 사이에 금을 그은 듯한 경계가 있었고, 그 경계는 등이 흔들려도 섞이지 않았다.

“좁은 것 둘이다.”

할머니가 벽을 더듬었다. 색은 손으로 만져지지 않았지만, 할머니는 늘 그렇게 했다.

“둘 다 제 말로 만든 등이다. 그러니 안 섞인다. 궁 장부에는 두 색으로 올라가겠구나.”

“궁은 두 색이어도 맺잖아요.”

“맺지. 그런데 감관은 벽이 갈리는 걸 싫어한다. 도석우 말이 틀린 건 아니다.”

연은 빈 자리를 보았다. 쪽빛 한가운데 손바닥만 한 구멍. 거기만 색이 없었다.

“할머니, 이 빈 데는 뭐예요?”

할머니는 대답 대신 등잔을 들어 빈 자리 가까이 가져갔다. 불빛이 겹치자 빈 자리가 더 하얗게 떴다.

“뭔가 들어갈 자리를 비워 둔 사람의 색이다. 제 입으로 말은 했는데, 제일 중요한 걸 안 말한 사람.”

연은 속지를 떠올렸다. 이름을 쓰지 말아 달라던 사람. 적지 않은 두 자가 거기 구멍으로 남아 있었다.

불을 끄고 나서도 연은 한참 작업대 앞에 앉아 있었다. 곽득수가 등감에 편지를 넣으면 스무 쌍이 남산으로 간다. 도석우라면 이 등을 흐리게 다시 만들어 벽을 한 색으로 칠할 것이다. 빈 자리는 메워지고, 그 자리에 들어갈 두 자는 영영 안 들어간다.

연은 새 종이를 꺼내 답장을 썼다. 창은 셋이 맞다고 썼다. 두드려 주셔서 알아들었다고 썼다. 그리고 한 줄을 덧붙였다. 등을 켜 보니 가운데가 비어 있더라고. 그 자리에 무엇이 들어갈지는 여쭙지 않겠다고. 그리고 청지기 어른이 편지를 먼저 읽는다는 것을 오늘 알았으니, 앞으로는 읽혀도 괜찮은 말만 쓰시라고 적었다. 쓰고 나서 보니 그 말이야말로 읽히면 안 되는 말이었다. 연은 그 줄을 지우지 않았다. 곽득수가 이 줄을 읽고 얼굴을 찌푸리는 모습을 떠올리니 손끝이 조금 따뜻해졌다.

달구가 이튿날 그 편지를 받아 들고 불빛에 비춰 보더니 입을 삐죽였다.

“이번 건 안 싱겁네요. 엿 두 가락이에요.”

2화는 어땠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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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종이배2026.05.09· 2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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