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5,255자) · 연 · 병오년 구월 초나흘

스물세 번째 주문

내 이름을 쓰지 말아 주십시오 · 백해원

수표교 남쪽 서씨 등방의 작업대는 널판 석 장을 이어 붙인 것이었고, 가운데 이음매에는 삼대 동안 흘린 풀이 굳어 손톱으로 긁어도 안 떨어지는 누런 줄이 나 있었다. 구월 초나흘 새벽, 연은 그 줄 위에 대나무를 눕혀 놓고 칼을 당겼다. 칼끝이 마디를 넘을 때마다 짧게 튀는 소리가 났다. 깎인 살은 작업대 끝에 열여섯 개씩 모였다. 굵기가 하나만 달라도 종이를 바를 때 면이 뜬다.

작업대 저쪽 끝에는 시험 켜기에 쓰는 등 둘이 걸려 있었다. 작은 것은 주황, 큰 것은 분홍이었다. 들기름 먹인 한지가 밤새 식어 뻣뻣했고, 창호지 틈으로 들어온 새벽바람에 두 등이 가로대에서 조금씩 돌았다. 연은 그 둘을 볼 때마다 할머니 말을 떠올렸다. 등은 불을 켜기 전에는 다 같은 종이다.

“누나, 편지요. 아니, 편지가 둘이요. 아니, 하나는 편지고 하나는 무서운 거요.”

달구가 문턱에 걸려 넘어질 뻔하면서 들어왔다. 열한 살이었고, 편지 한 통 나르는 값으로 엿 한 가락을 받았다. 그 엿을 받으려고 수표교 이쪽저쪽 등방 넷을 다 드나들었다. 연은 칼을 내려놓고 손을 행주에 닦았다. 치자물이 든 손끝은 닦아도 누랬다.

무서운 것은 등감에서 왔다. 광화문 밖 등감 마당의 붉은 인이 찍혀 있었다. 올가을 궁에서 정한 혼인 스무 쌍의 등을 서씨 등방에 맡긴다, 값은 팔백 냥, 혼례 사흘 전까지 등감 마당에 걸 것. 연은 끝까지 읽고 종이를 도로 접었다. 팔백 냥이면 광 지붕을 새로 이고도 남았다. 지난여름 장마에 광 서까래 하나가 내려앉아, 할머니는 그 밑에 항아리를 받쳐 놓고 빗물 떨어지는 소리를 세며 잤다.

“다른 하나는요?”

“그게 이상해요. 봉투에 아무것도 안 적혔어요. 보낸 사람도, 받는 사람도요. 북촌 큰 집 부엌어멈이 줬는데요, 내 몰라요, 내 몰라요, 하면서 줬어요.”

“너 뜯어 봤지?”

“풀이 덜 말라서 저절로 열렸어요.”

연이 봉투를 뒤집었다. 풀은 멀쩡히 말라 있었다. 달구는 엿을 받자마자 문 밖으로 튀어 나갔다.

*

한낮이 되기 전에 북촌에서 사람이 왔다. 윤 판서 댁 청지기라고 했다. 쉰 남짓한 사내였고 도포 소매가 깨끗했다. 이름은 곽득수라고 제가 먼저 댔다. 그는 마루에 앉지 않고 선 채로 두루마리 하나를 내밀었다.

“궁에서 정하신 열일곱째 쌍이오. 우리 도련님 윤재겸, 올해 스물셋. 도련님께서 어떤 분이신지는 여기 다 적어 왔소. 좋아하시는 것, 자라신 곳, 읽으신 책. 이대로 만드시면 되오.”

연은 두루마리를 펴 보았다. 반듯한 해서체였다. 북촌 가회방에서 나고 자람, 활쏘기를 즐김, 맹자를 세 번 읽음. 한 사람이 제 입으로 할 말이 아니었다. 남이 써 준 종이는 이렇게 넓다. 웬만한 사람과 다 맞는 모양이다.

“저희 집은 종이로 안 만듭니다. 본인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도련님을 한 번 뵙게 해 주십시오.”

“도련님은 종이로 되오.”

곽득수가 웃지 않고 말했다. 그의 눈이 작업대 끝 두 등에 한 번 갔다가 돌아왔다.

“다른 등방들은 다 종이로 만들던데, 이 집만 유별나오.”

“그러니 궁이 이 집에 맡겼겠지요.”

곽득수는 대답하지 않고 돌아섰다. 마당을 가로지르는 걸음이 조용했다. 연은 그 조용한 걸음이 더 거슬렸다.

*

곽득수가 가고 나서야 연은 이름 없는 봉투를 열었다. 한지 한 장이었다. 글씨가 곽득수의 두루마리와 달리 조금 기울어 있었고, 획 끝마다 붓을 오래 머금었다 뗀 자국이 번져 있었다.

「등방 서씨 댁께. 저는 곧 댁에 등을 맡길 사람입니다. 부탁이 하나 있습니다. 제 이름을 쓰지 말아 주십시오. 편지에도, 장부에도, 등 안쪽 속지에도 쓰지 말아 주십시오. 댁에 가는 종이에 적힌 이름은 제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제 것을 적어 달라는 말씀도 아닙니다. 그러니 다른 이름으로 불러 주십시오. 아무 이름이나 좋습니다. 댁에서 저를 부를 때만 쓰는 이름이면 됩니다.」

연은 그 편지를 두 번 읽었다. 세 번째에는 마지막 문장만 읽었다. 댁에서 저를 부를 때만 쓰는 이름. 등방에 이런 부탁을 한 사람은 삼대 동안 없었다.

할머니가 뒤채에서 나왔다. 일흔여덟이었고 눈이 어두워 등 색을 손으로 더듬어 보았다. 연이 편지를 읽어 드리자 할머니는 한참 입을 다물고 있다가 말했다.

“이름을 쓰지 말라는 사람은 이름이 둘인 사람이다.”

“하나는 곽 청지기가 가져온 거고요.”

“하나는 그 사람이 안 가져온 거고.”

달구가 언제 돌아왔는지 문설주에 기대 엿을 빨고 있었다. 엿 한 가락을 다 먹고 나서도 입에서 막대를 안 뺐다.

“그 편지, 저는 좀 싱겁던데요. 좋아한다는 말도 없고, 보고 싶다는 말도 없고. 수표교 건너 쌀집 아들이 보내는 편지는 첫 줄부터 달이 뜨고 꽃이 펴요. 한 통에 엿 두 가락이에요.”

“너는 남의 편지를 다 읽는구나.”

“안 읽으면 어느 게 급한지 몰라요. 급한 걸 먼저 갖다줘야 엿을 더 받죠.”

“이건 급한 거였어?”

달구가 막대를 빼고 한참 생각했다.

“급한 건 아닌데요, 빨리 갖다주고 싶었어요. 글씨가 좀 울 것 같아서요.”

연은 대꾸할 말을 못 찾았다. 할머니가 먼저 웃었다. 이 없는 입으로 웃어서 바람 새는 소리가 났다. 달구는 칭찬을 들은 줄 알고 엿을 하나 더 달라고 손을 내밀었고, 연은 그 손바닥에 대나무 부스러기를 한 줌 얹어 주었다.

*

해가 기울 무렵 남산 등방 주인 도석우가 왔다. 혼자 오지 않았다. 일꾼 하나가 등 두 개를 장대에 꿰어 어깨에 메고 따라왔다. 도석우는 마흔넷이었고, 말이 크고 매끄러웠다. 서씨 마당에 들어서자마자 할머니에게 절을 하고 연에게는 손을 들어 보였다.

“소문 들었소. 궁에서 스무 쌍이 이리 왔다지요. 축하드리러 왔소.”

“축하는 오래 하시는군요.”

“장사꾼 축하는 뒤가 기오.”

도석우가 손짓하자 일꾼이 마당 한가운데 장대를 세우고 등 둘을 나란히 걸었다. 도석우가 제 손으로 불을 붙였다. 해 질 녘 마당은 반쯤 어두웠고, 두 등에서 나온 빛이 흙벽에 떨어졌다. 한 색이었다. 복숭아 속살 같은 연한 분홍이 벽 한 면에 고르게 퍼졌고, 가장자리까지 번진 데가 없었다. 마당에 있던 사람들이 다 그 벽을 보았다. 달구가 입을 벌렸다.

“곱지요? 이 두 사람, 서로 얼굴도 본 적 없소. 종이만 받아서 만들었소. 색을 좀 빼면 이렇게 되오.”

“흐리게 만드셨군요.”

“흐린 게 아니라 넓은 거요. 사람들은 맞기를 바라오. 등감 감관 나리도 벽이 한 색이면 붓을 편히 놓으시오. 한 색을 파는 게 무슨 죄요?”

도석우가 품에서 종이를 꺼냈다. 궁 주문 스무 쌍을 남산 등방이 반값에 맡겠다는 계약서였다. 서씨 몫으로 백 냥을 떼 주겠다는 줄이 따로 있었다.

“서씨 댁이 손 안 대고 백 냥이오. 할머님 광 지붕도 그걸로 이으시고.”

할머니가 대답하려 했다. 연이 먼저 입을 열었다.

“안 합니다.”

“아직 다 안 들으셨소.”

“다 안 들어도 압니다. 이 벽은 올해는 한 색입니다. 십 년 뒤에 켜 보시지요. 가운데가 갈라질 겁니다.”

도석우가 할머니 쪽으로 몸을 돌렸다. 목소리를 낮췄는데, 마당 끝의 달구까지 다 들리게 낮췄다.

“할머님, 셋째 낭자가 모르시는 게 있나 보오. 서씨 댁도 궁 일을 삼대째 하셨소. 궁에서 온 여든넷을 다 얼굴 보고 만드셨소? 담 너머로 못 본 사람 등은 어떻게 만드셨소?”

할머니의 손이 지팡이 위에서 한 번 조였다. 연은 그 손을 보았다. 할머니는 대답하지 않았고, 대답하지 않는 것으로 대답이 되었다. 연은 그 자리에서 무엇을 물어야 할지 몰라 입을 다물었다. 여든넷이라는 수는 처음 들었다.

“그러니 서로 흉볼 것 없소. 우리는 다 흐린 등을 팔아서 먹고 사오. 나는 그걸 반값에 팔 뿐이고.”

도석우가 웃었다. 지는 자리에서 웃는 사람의 얼굴이었다.

“십 년 뒤에 그 등 켜 보는 사람이 어디 있소? 혼례 날 한 번 켜고 광에 들어가면 그만이오. 낭자, 스무 쌍 가운데 하나라도 등감 마당에서 두 색이 나 보시오. 감관 나리는 벽이 갈리는 걸 제일 싫어하시오. 윤 판서 댁 도련님 것부터 보십시다.”

그는 계약서를 작업대 위에 놓고 갔다. 장대에 꿴 등 둘은 일부러 두고 갔다. 불이 꺼진 뒤에도 한지에서 들기름 탄내가 오래 났다.

*

밤에 연은 윤 판서 댁 두루마리와 이름 없는 편지를 작업대 양쪽 끝에 놓았다. 한쪽은 넓고 반듯했고, 한쪽은 좁고 기울었다. 등은 둘 중 하나로만 만들 수 있었다. 곽득수의 종이로 만들면 도석우의 벽처럼 고울 테고, 편지로 만들면 어떻게 될지 아무도 몰랐다.

할머니가 등잔을 들고 와 옆에 앉았다.

“팔백 냥이다.”

“알아요.”

“광 서까래가 하나 더 내려앉으면 등 스물여섯이 비를 맞는다.”

“그것도 알아요.”

할머니는 등잔 심지를 조금 올렸다. 불빛이 두 종이 위에서 흔들렸다. 할머니는 두루마리 쪽으로 손을 뻗었다가, 방향을 바꿔 편지 쪽을 짚었다. 손끝으로 종이 결을 쓸었다. 눈이 어두운 사람은 글씨 대신 붓 자국을 읽었다.

“이 사람은 붓을 오래 붙들고 있었구나. 쓰기 싫은 게 아니라 틀릴까 봐서.”

연은 먹을 갈았다. 답장은 짧게 썼다.

「부탁하신 대로 하겠습니다. 이름은 쓰지 않겠습니다. 올해 저희 집에 들어온 주문이 스물둘이었고, 그쪽이 스물셋째입니다. 그러니 스물셋이라고 부르겠습니다. 싫으시면 다른 수를 대 주십시오. 다만 저희 집 등은 종이로 안 만듭니다. 그쪽 말로 만듭니다. 그러니 다섯 가지만 여쭙겠습니다. 어릴 때 살던 집에 창이 몇이었습니까? 그 창으로 무엇이 보였습니까? 겨울에 손이 시리면 어디에 넣었습니까? 제일 싫은 냄새가 무엇입니까? 마지막으로 소리 내어 웃은 것이 언제입니까? 답이 틀려도 괜찮습니다. 등은 틀린 것도 색으로 냅니다.」

편지를 봉하고 나서 연은 광에 들어갔다. 천장 가로대 넷에 등 스물여섯이 걸려 있었고, 문을 열자 들어간 바람에 등끼리 부딪혀 마른 소리를 냈다. 연은 실패에서 붉은 실을 한 뼘 끊었다. 한쪽 끝을 아직 만들지 않은 스물셋의 등 자리, 빈 갈고리에 매었다. 다른 쪽 끝을 맬 데가 없었다. 연의 등은 광에 없었다. 만드는 사람은 제 등을 못 만든다고 어머니가 말했고, 어머니는 언니 둘의 등만 만들어 놓고 갔다.

연은 실 끝을 제 손가락에 한 번 감았다가, 가로대 기둥에 박힌 못에 매었다. 빈 갈고리와 못 사이에 실이 하나 걸렸다. 등 없는 자리 둘을 잇는 실이었다.

이튿날 새벽, 달구가 답장을 들고 가다가 돌아와 물었다.

“누나, 스물셋이 이름이에요? 저는 열한 살인데 열한이라고 부르면 좋겠어요?”

“너는 달구야.”

“그럼 그 사람도 좋겠네요. 이름 받아서.”

달구는 엿을 입에 물고 북촌 쪽으로 뛰어갔다. 연은 작업대로 돌아와 대나무를 다시 눕혔다. 칼이 마디를 넘을 때마다 짧은 소리가 났고, 그 소리가 어제보다 조금 빨랐다.

1화는 어땠나요?

댓글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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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백해원작가2026.10.09· 1화

    작가 백해원입니다. 말로 만든 등을 나란히 걸어 혼인을 보는 등방의 이야기입니다. 1화의 스물세 번째 주문을 읽고, 여러분이라면 어떤 이름으로 불리고 싶으신가요?

  • 달밤에책2026.05.08· 1화

    설정이 과하지 않게 깔려서 편하게 따라갔습니다.

    • 백해원작가2026.05.09

      읽어 주셔서 고맙습니다. 그 두 줄은 저도 오래 고쳤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