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화(5,424자) · 연 · 정미년 삼월 열엿새

다른 이름으로

다른 이름으로 불러 주세요 · 백해원

만 19세 이상 이용가

삼월 열엿새 새벽, 서씨 등방 마당에 짐이 열일곱 나왔다. 합등한 옛 궁 등 열다섯과, 스물셋의 등, 이소온의 등이었다. 막동이 장대 셋에 등을 나눠 꿰었다. 막동은 그날 아침 남산 등방에 풀통을 돌려주고 왔다고 했다. 서른두 통째 풀을 저어 놓고, 주걱을 통에 꽂아 둔 채로. 도석우가 뭐라더냐고 연이 묻자 막동은 어깨를 으쓱했다. 주인어른은 등감에 먼저 가셨소, 풀통한테 인사하고 왔소.

할머니는 가마를 탔다. 서란이 마포에서 올라와 가마 옆에 붙어 걸었고, 달구는 이소온의 몸종 노릇을 하느라 이씨 댁 가마 옆에 붙었다. 이소온은 가마 창을 열고 달구에게 엿을 던져 주었다. 연은 맨 앞에서 스물셋의 등을 제 손으로 들었다. 한지가 봄볕에 미지근했다. 청계천을 따라 광교를 지나 운종가로 올라가는 길에 버들이 막 물이 올라 연둣빛이었고, 마른 흙먼지가 장대 끝 등에 앉았다. 장 보러 나온 사람들이 등 열일곱의 행렬을 구경하느라 길가로 비켜섰다.

광화문 밖 등감 마당은 사람으로 찼다. 흰 회벽 앞 대청에 감관 민규헌이 등색록을 펴 놓고 앉아 있었다. 대청 아래 한쪽에 도석우가 윤재겸의 흐린 등을 장대에 걸어 놓고 서 있었다. 곽득수는 마당에 없었고, 정월 보름 밤 이후로 곽득수는 남산 등방 뒷방에 숨어 있다는 소문이 돌았다. 마당 가장자리에 홍씨 부인이 있었고, 계동 최씨 댁 안주인이 있었고, 사직골 김 판관 댁 안주인이 있었다. 열 집의 안주인이 저마다 몸종을 거느리고 와서 서로 곁눈질을 했다. 궁 혼인을 치른 여자들이 한 마당에 모인 것은 백 년 동안 처음일 것이다.

그리고 마당 맨 뒤, 사람들 틈에 비탈 흙빛 얼굴의 여자 하나가 서 있었다. 연은 그 얼굴을 알았다. 막동의 아비가 소를 팔아 노잣돈을 대고 김화에서 나흘을 걸어 모셔 왔다. 연이 정월에 편지를 넣었고, 막동이 그 편지를 제 아비에게 입으로 전하게 했다. 여자는 연을 보고 고개를 한 번 숙였다.

*

민규헌이 붓을 들었다.

“서씨 댁 셋째, 내기를 기억하시오? 흐리게 만든 궁 등 가운데 하나라도 두 색이 나면 서씨 댁 것을 걸겠다고 했소.”

“기억하고 있어서 열다섯을 가져왔습니다.”

막동과 서리들이 장대에 옛 등을 하나씩 걸었다. 연이 첫 등에 불을 붙였다. 계동 최씨 댁 합등이었다. 서른네 해 전 할머니가 수를 잘 놓는다는 한 줄로 만든 등.

흰 회벽이 갈렸다.

서른네 해 전에는 벽 한 면을 고르게 칠했다던 분홍이, 이제 가운데서 쩍 갈라져 한쪽은 옅은 쪽빛으로, 한쪽은 탁한 주황으로 물러나 있었다. 두 색 사이에 금을 그은 경계가 선명했다. 흐린 색은 해가 갈수록 좁아진다는 말이 벽에 그대로 나 있었다. 마당이 술렁이는 사이 최씨 댁 안주인이 벽 앞으로 걸어 나가 두 색을 번갈아 보더니 무릎을 쳤다.

“봐라, 수 잘 놓는 사람이랑 수 못 놓는 사람이 안 맞았다고 하지 않았소!”

마당에 웃음이 터졌고, 그 웃음이 가라앉기 전에 연은 둘째 등에 불을 붙였다. 사직골 김 판관 댁 합등이었다. 벽이 또 갈렸다. 셋째와 넷째도 그랬다. 연이 불을 붙일 때마다 흰 벽에 금이 하나씩 늘었다. 열다섯째 등에 불이 붙었을 때 회벽은 두 색으로 갈린 빛 열다섯 쌍으로 얼룩덜룩했다. 그 벽 앞에서 홍씨 부인이 흐느꼈다. 제 등이 아닌데도 울었다. 김 판관 댁 안주인이 그 어깨를 안았다. 서로 모르는 사이였다.

민규헌은 한참 벽을 보았다. 붓을 쥔 손이 등색록 위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나리, 이 열다섯은 등색록에 다 합으로 적혀 있을 겁니다.”

민규헌은 대답하지 않았다. 등색록을 넘기는 소리만 났다. 한 장, 두 장, 열다섯 장. 넘길 때마다 합이라는 글자가 연의 눈에 들어왔다. 민규헌이 등색록을 덮었다.

“내가 백 년 동안 틀린 적이 없다고 했소. 오늘 열다섯 번 틀렸소.”

*

도석우가 대청 앞으로 나섰다.

“나리, 옛 등은 옛 등이오. 오늘 마당에 걸 것은 윤 판서 댁 도련님 등이오. 당사자 집안이 원하는 것은 남산 것이오.”

그때 마당 입구가 소란해졌다. 가마 한 채가 들어왔다. 가마꾼들이 조심스럽게 가마를 내려놓자, 가마 문이 열리고 윤 판서가 부축을 받아 내렸다. 기침을 하면서도 제 발로 섰다. 뒤에 무명천으로 손을 감은 젊은 사내가 따랐다. 연은 그 사람의 얼굴을 처음 보았다. 키가 컸고, 손이 하얬고, 입술이 조금 달싹거렸다. 걸음을 세고 있었다.

윤 판서 뒤로 포도청 군관 넷이 따라 들어왔다. 군관들은 마당을 가로질러 도석우 앞에 섰다.

“남산 등방 도석우요? 댁 뒷방에 숨은 윤 판서 댁 청지기 곽득수를 방금 포박했소. 형조에서 윤 판서 어른이 직접 진술하셨소. 오리골 아이 셋을 사 온 일, 그 가운데 하나가 맞아 죽은 일. 숨긴 자도 같이 가야 하오.”

도석우의 얼굴에서 웃음이 사라졌다. 지는 자리에서도 웃던 얼굴이 처음으로 웃지 않았다. 군관 둘이 도석우의 팔을 잡았다. 도석우가 끌려 나가며 연을 돌아보았다. 무슨 말을 하려다 말았다. 윤재겸의 흐린 등이 장대에 걸린 채 흔들렸다.

막동이 광 가로대 기둥에서 꺼내 온 종이를 군관에게 내밀었다. 누렇게 바랜 매매 표였다. 연은 그 종이가 군관 손에 넘어가는 것을 보고 마당 한가운데로 걸어 나갔다. 오리골에서 한 약조가 있었다. 연은 숨을 크게 들이쉬고 마당 끝까지 가도록 불렀다.

“분이야!”

마당이 조용해진 가운데 연은 한 번 더 불렀다. 열세 살 아이의 이름이 흰 회벽에 부딪혀 돌아왔다. 막동이 따라 불렀다. 윤 판서가 기침을 멈추고 눈을 감았다. 마당 맨 뒤에서 비탈 흙빛 얼굴의 여자가 입을 막았다.

*

민규헌이 서리에게 손짓했다. 서리가 윤재겸의 흐린 등을 장대에서 내리고, 그 자리에 연이 든 쪽빛 등을 걸었다. 옆 갈고리에 이소온의 치자색 등이 걸렸다. 연이 불을 붙였다.

벽이 갈렸다. 깊은 쪽빛과 짙은 치자색이 좁고 단단하게 제 자리를 지켰고, 둘 사이에 선명한 금이 났다. 쪽빛 한가운데 손바닥만 한 빈 자리가 여전히 비어 있었다.

민규헌이 그를 보았다.

“윤 판서 댁 도련님, 이 등에 대해 할 말이 있소?”

그가 대청 앞으로 한 걸음 나섰다. 입을 열려는 순간 마당 맨 뒤에서 목소리가 먼저 왔다.

두 자였다.

부엌에서 아이를 부를 때처럼 끝을 조금 끌었고, 비탈에 대고 부를 때처럼 앞을 높였다. 그의 몸이 굳었다가 천천히 돌아섰다. 사람들이 길을 텄다. 그 끝에 비탈 흙빛 얼굴의 여자가 서 있었다. 여자가 한 번 더 불렀다.

그는 네, 하고 대답했다. 열한 해 동안 윤재겸으로 대답하던 목소리가 아니었다. 쥐구멍 창 앞에서 대답하던 목소리였다. 그러고는 민규헌에게 돌아서서 제 입으로 그 두 자를 말했다. 오리골 사람이라고, 열두 살에 쌀 열 섬에 팔려 와 윤재겸 노릇을 열한 해 했다고. 이 등은 그 사람의 말로 만든 등이라고.

말을 마치고 그는 마당 뒤로 걸어갔다. 사람들이 다시 길을 텄다. 여자 앞에 선 그는 한참 아무것도 하지 못하다가 무릎을 꿇었다. 여자의 굵은 손마디가 그의 얼굴을 더듬었다. 이마, 눈썹, 광대, 턱. 열두 살 때 얼굴이 아직 거기 있는지 손으로 세는 것 같았다.

“잘 사는 거 맞소? 한양 낭자가 잘 산다 했는데.”

그는 연 쪽을 한 번 돌아보았다. 그러고 어머니에게 대답했다.

“여태는 아니었습니다. 낭자가 저 대신 거짓말을 하셨습니다. 이제부터 잘 살아서 그 거짓말을 갚겠습니다.”

여자는 알아들었는지 못 알아들었는지 그의 머리를 제 가슴에 끌어안았다. 윤 판서가 대청 기둥을 짚고 그 모습을 보았다. 판서는 민규헌에게 한 마디만 했다. 저 아이는 내 아들이 아니라 내가 산 아이라고, 그 죄는 형조에 다 댔다고.

벽 위의 쪽빛 한가운데, 손바닥만 한 빈 자리가 그 순간 조금 흔들렸다. 등잔 심지 탓인지 아닌지 연은 알 수 없었다.

이소온이 앞으로 나섰다. 은비녀가 햇빛에 반짝였다.

“나리, 나는 이 사람하고 안 맞아요. 벽에 그렇게 났잖아요. 궁금한 건 다 풀렸어요. 종이에 적힌 사람이 아니라 이 사람이었고, 이 사람은 나 말고 딴 데를 보고 있어요.”

이소온이 연 쪽을 턱으로 가리켰다. 마당 여기저기서 웃음이 났다. 연의 얼굴이 뜨거워졌다. 민규헌이 붓을 먹에 적셨다. 한참 그대로 있다가 등색록 새 장에 이(離) 한 글자를 적었다. 백 년 만에 궁 혼인 줄에 처음 적힌 글자였다. 민규헌은 붓을 놓고 말했다. 궁에 올라가면 자리를 잃을지도 모르겠다고, 그래도 틀린 것을 틀렸다고 적는 것이 감관 일이었다고.

*

그날 밤 서씨 등방 광에 사람들이 모였다. 할머니, 서란, 막동, 달구, 이소온. 그가 무명천 감은 손으로 등 하나를 들고 광 뒷골목 문으로 들어왔다. 둥근 한지 등이었다. 살이 열여섯, 한지 여섯 면. 풀 바른 자국이 몇 군데 울퉁불퉁했다.

“이건 낭자 등입니다. 만드는 법은 낭자가 적어 주셨고, 무엇을 넣을지는 제가 정했습니다. 창이 셋, 치자물 든 손끝, 화나면 대나무를 깎는 것, 싫은 냄새는 탄 종이, 그리고 마지막으로 소리 내어 웃은 것은 아홉이면 서른여섯이 맞다고 했을 때.”

연은 대답하지 못했다. 달구가 그 말을 받아 셈했다. 엿 열 가락짜리라고. 막동이 달구 머리를 쥐어박으며, 저런 말은 엿으로 못 치는 거라고, 오리골에서는 소 한 마리짜리라고 했다. 서란이 연의 옆구리를 팔꿈치로 찔렀다.

그가 연의 등을 가로대 기둥 못 옆 갈고리에 걸었다. 연이 제 실 두 가닥을 매어 두었던 그 못이었다. 그 옆에 쪽빛 등이 걸렸다. 광의 등은 마흔셋이 되었다. 연은 사다리에 올라 붉은 실을 이었다. 오늘 등감 마당에 등을 들고 온 열 집이 더해져 사람이 서른이 되었고, 줄은 사백서른다섯이 되었다. 실이 가로대 사이를 붉게 덮어서 광 천장이 한 장의 그물처럼 보였다.

그가 두 등에 불을 붙였다.

광 흙벽에 두 색이 났다. 쪽빛과 연의 색이었다. 연의 색은 처음 보는 색이었다. 이른 봄 치자꽃 봉오리 같은 흰빛 도는 노랑이었다. 좁은 것 둘은 안 섞였다. 벽 가운데 금이 났다. 그런데 벽 아래쪽, 두 색의 아랫자락이 흙바닥에 닿는 자리에서 두 빛이 한 뼘쯤 겹쳤다. 겹친 자리만 한 색으로, 연둣빛이 돌았다.

할머니가 벽을 더듬었다. 색은 손에 안 만져졌지만 할머니는 그 자리를 오래 짚었다.

“깊이가 같은 좁은 것 둘이라 바닥이 닿았구나. 삼대 동안 처음 본다.”

연은 칼을 꺼내 가로대 기둥에 날짜를 새겼다. 정미년 삼월 열엿새, 그리고 그 밑에 십 년 뒤 같은 날. 그날 다시 켜 보자고. 그날 맞은 것이 아니라 십 년 동안 맞은 것이어야 한다고.

그가 연을 보았다. 광 등잔 불빛에 그의 얼굴이 반쯤 쪽빛이었다.

“낭자, 이제 뭐라고 부르시겠습니까? 스물셋은 낭자가 지어 주신 이름이라 좋았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그 소리가 닳을까 봐 겁나지 않습니다. 오늘 어머니가 두 번 불러 주셨으니까요.”

연은 대답 대신 숨을 한 번 골랐다. 오리골 방 안에서 들은 소리가 가슴 한가운데 앉아 있었다. 연은 그 소리를 제 목소리로 처음 꺼냈다.

두 자였다.

그가 대답하자 광 천장의 등 마흔셋이 문틈 바람에 한꺼번에 부딪혀 마른 소리를 냈고, 붉은 실 사백서른다섯 줄이 그 소리를 따라 떨렸다.

여기까지가 지금까지 나온 이야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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