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화(5,117자) · 태오 · 12월 5일
설명하면 이해되고
빌린 재능 · 문가온
십이월 오일 토요일. 본 입시 겨울 설명회.
기말이 열흘 남았다. 설명회는 기말 앞에 한다. 학부모가 제일 불안한 때. 장소는 학원 건물 지하 강당. 삼백 석. 접이식 의자가 줄맞춰 놓여 있고 앞에 무대, 무대 위에 삼 층짜리 얼굴이 현수막으로 걸려 있었다. 설명하면 이해되고 이해되면 오른다. 그 밑에 진짜 얼굴이 서 있었다. 넥타이. 토요일인데.
나는 뒤에서 세 번째 줄에 앉았다. 옆에 서린. 그 옆에 하준. 그 뒤로 아홉. 도서관에서 온 아홉. 우리는 교복을 입고 왔다. 학부모 설명회에 교복 열두 벌. 안내하는 직원이 우리를 이상하게 봤는데 막지는 않았다. 학생도 온다. 부모랑 같이. 우리는 부모가 없이 왔다는 게 달랐다.
현수와 민지도 왔다. 현수는 자리에 앉자마자 앞줄 학부모 뒤통수를 세고 있었다.
“야, 여기 파마 비율 봐. 삼백 중에 이백은 파마야. 이게 통계지.”
“조용히 해.” 민지가 말했다.
“나 학부모 설명회 처음이야. 우리 엄마 한 번도 안 왔거든. 내가 대신 온 거야. 효도야.”
민지가 현수 옆구리를 찔렀다. 현수가 조용해졌다. 오 초.
맨 뒷줄 구석에 아저씨가 앉았다. 낡은 점퍼. 오늘은 교재를 안 가져왔다. 설명회 날은 아무것도 못 읽는 날이라고 했다. 아저씨는 앉아서 손을 무릎에 놓고 있었다. 그 손이 종이를 짚지 않았다.
삼 주 동안 도서관 구석은 마흔하나였다. 마흔하나가 아저씨를 가운데 두고 앉았다. 아저씨는 한 쪽에서 여덟 쪽이 됐고, 지난주 토요일에는 계단에서 수열 한 문제를 처음부터 끝까지 설명했다. 끊기면서. 한 마디 하고 쉬고. 하준이 그걸 휴대폰으로 찍었다. 아저씨가 찍지 말라고 안 했다.
오늘 그 사람은 한 쪽도 못 읽을 것이다. 무대 위 사람이 두 시간 동안 설명하니까.
구본혁이 마이크를 잡았다. 첫 문장부터 강당이 조용해졌다. 그 사람 목소리는 그런 목소리다. 크고 매끄럽고, 듣는 사람이 자기가 이해하고 있다고 믿게 만드는. 나는 삼 년 동안 그 목소리를 오 층 복도에서 들었다. 오늘은 삼백 명이 들었다. 학부모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끄덕이는 소리가 났다. 사람 삼백이 같이 끄덕이면 소리가 난다.
한 시간 이십 분. 겨울특강. 관리형 독서실. 장학생 제도. 「멘토 장학생이 고객 학생 옆자리에서 학습 습관을 보여 줍니다.」 학부모들이 그 말을 받아 적었다. 나는 그 말이 어디로 들어가는지 봤다. 정확히 들어갔다.
질의응답. 직원이 마이크를 들고 통로를 걸었다. 학부모 손이 올라갔다. 특강 시간표, 결제, 자리. 다섯 번째로 내 손이 올라갔다.
직원이 나를 봤다. 교복. 잠깐 망설였다. 구본혁이 무대에서 나를 봤다. 그 사람은 나를 알아봤고, 알아본 얼굴로 직원한테 고개를 끄덕였다. 마이크를 주라고. 그 사람은 지는 자리에서 웃는 사람이고, 지는 자리를 남한테 안 보이려면 마이크를 주는 수밖에 없다.
“서담고 이학년 태오입니다. 지난달까지 여기 장학생이었습니다.”
강당이 나를 봤다. 삼백.
“장학생은 왜 고객 옆에 앉습니까?”
“방금 설명드렸죠. 멘토링입니다. 학습 습관을.”
“저는 십월 오일부터 고객 옆에 앉았습니다. 그 고객은 십월 팔일에 학원가 뒷골목 가게에서 석 달짜리 계약을 했습니다. 계약서 뒷면 제8조. 이자는 가장 가까운 사람에게서 받는다. 삼 미터 안에서 하루 여덟 시간 가장 오래 앉은 사람. 그게 저였습니다. 대표님이 저를 거기 앉혔습니다.”
강당이 조용했다. 조용한 게 두 가지가 있다. 듣는 조용함과 안 믿는 조용함. 이건 두 번째였다. 학부모들이 서로를 봤다. 뒷골목 가게. 계약서. 이자. 그 말들은 학부모 설명회에 안 어울렸다. 나도 알았다. 알고 했다.
구본혁이 웃었다.
“이 학생은 지난달에 장학이 끊겼습니다. 시간을 못 채워서요. 그래서 오늘 이런 얘기를 하러 온 것 같은데, 학부모님들, 이해하시죠. 열일곱이 장학 끊기면 원망할 데가 필요합니다. 학원 뒤에 가게가 있다는 얘기는 저도 처음 듣습니다.”
학부모들이 웃었다. 조금. 그 조금이 무대 쪽으로 기울었다. 나는 서 있었다. 마이크를 든 채로. 하준이 일어났다.
“저 그 고객입니다. 길 건너 사립 이학년 강하준. 계약서 여기 있습니다.”
하준이 A4를 들어 보였다. 뒷줄에서 앞줄까지 그 종이는 그냥 흰 종이였다. 학부모들이 그 종이를 봤지만 그 종이에 뭐가 적혀 있는지는 못 봤다. 삼백 명한테 A4 한 장은 증거가 아니다. 구본혁이 그것을 알았다.
“학생, 그 종이 누가 만들었는지 저는 모릅니다.”
하준이 앉았다. 얼굴이 빨갰다. 나는 마이크를 내렸다. 진 자리였다. 나는 진 자리에서 웃는 법을 모른다. 그냥 서 있었다.
그때 서린이 일어났다.
나는 서린을 봤다. 서린은 시험을 망치는 것보다 시험을 망칠까 봐 뭘 했다는 걸 남이 아는 게 더 무서운 애다. 작년 시월에 문고리까지 잡고 돌아선 애. 안에 아는 사람이 있을까 봐. 그 애가 삼백 명 앞에서 일어났다. 손톱을 물어뜯은 손으로 내 마이크를 가져갔다.
“서담고 이학년 서린입니다. 저도 빌렸습니다.”
강당이 다시 조용해졌다. 이번에는 첫 번째 조용함이었다. 듣는 조용함. 사람이 자기가 한 걸 말하면 사람들은 듣는다. 남이 한 걸 말하면 안 믿고.
“시월 일일에요. 석 달. 집중력. 저는 여섯 시간 앉아서 사십 분밖에 못 쓰는 애였어요. 그래서 빌렸어요. 뒷면 안 읽고 서명했어요. 그 이자를 삼 년 동안 제 짝이었던 애가 냈어요. 옆자리에 앉아 있었다는 이유로. 저는 그걸 이십 일 동안 몰랐고, 알고 나서도 썼어요. 안 쓸 수가 없어서요. 지금 이 말도 그 애 머리로 하고 있어요.”
서린 목소리가 떨렸다. 떨리는데 안 멈췄다.
“대표님은 그걸 아세요. 지난달에 저한테 그러셨어요. 학생도 빌렸잖아, 나랑 뭐가 다르냐고. 다른 게 있어요. 저는 옆자리를 안 팔았어요. 대표님은 파세요. 장학이라는 이름으로. 그 애들은 몰랐어요. 여덟은 몰랐어요.”
구본혁이 마이크를 잡았다.
“학부모님들, 이 학생들 얘기가 사실이면 저희 학원 장학생 열한 명이 다 그렇겠죠. 그런데 열한 명 중에 지금 여기 온 학생이 몇 명입니까. 여덟? 아홉? 나머지는 지금 오 층에서 공부하고 있습니다. 그 학생들은 왜 안 왔을까요?”
그 사람은 빠른 사람이다. 열하나 중 둘이 남았다는 걸 그 사람은 오늘 무기로 썼다. 남은 둘의 이백을.
그때 맨 뒷줄에서 사람이 일어났다. 낡은 점퍼.
아저씨였다. 그 사람은 통로로 나왔다. 천천히. 도서관 계단을 내려가던 그 걸음으로. 직원이 마이크를 안 줬다. 아저씨는 마이크 없이 말했다. 강당이 조용해서 들렸다.
“구 대표.”
무대 위 사람이 멈췄다. 처음으로. 나는 그 사람이 멈추는 걸 처음 봤다. 계산하는 얼굴이 계산을 못 하는 얼굴이 됐다. 아주 잠깐. 삼백 명은 그것을 못 봤을 것이다. 우리 열둘은 봤다.
“윤 선생.”
“십일 년. 만이네.”
아저씨가 한 문장 하고 쉬었다. 그 쉬는 게 삼백 명 앞에서는 길었다. 그런데 아무도 말을 안 했다.
“나. 본 입시 수학. 윤재형. 저 사람. 짝강사였고. 사무실 책상이. 붙어 있었고. 저 사람이. 십일 년 전에. 평생을. 빌렸고. 그 이자를. 내가. 냅니다. 오늘도. 지금도.”
한 마디마다 끊겼다. 그런데 다 나왔다. 아저씨는 설명회 날에 한 쪽도 못 읽는다. 오늘 저 사람이 두 시간을 설명했으니까. 그런데 말이 나왔다. 마흔하나가 삼 주 동안 옆에 앉은 만큼. 나는 그것을 아저씨가 끊기는 자리마다 셌다. 끊기는 자리가 마흔하나가 채우고 있는 자리였다.
“설명하면. 이해되고. 이해되면. 오른다. 저 문장. 내가. 만들었어요. 십이 년 전에.”
구본혁이 마이크를 놓았다. 놓았다가 다시 잡았다.
“학부모님들, 윤 선생은 십일 년 전에 건강 문제로 퇴사한.”
“건강 문제. 맞아요.” 아저씨가 말했다. “눈 뒤가. 조여서.”
학부모 하나가 일어났다. 앞줄. 그 사람이 아무 말도 안 하고 통로로 나갔다. 그러고는 둘. 셋. 출입문이 열렸다 닫혔다. 서른쯤 나갔다. 삼백에서 서른. 나머지 이백칠십은 앉아 있었다. 나가는 것보다 앉아 있는 게 더 많았다. 그 사람은 그것을 봤고, 다시 웃었다.
“질의응답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특강 등록은 로비에서.”
설명회가 끝났다. 이긴 게 아니었다. 이백칠십이 로비로 갔다. 나는 그것을 봤다. 서린이 마이크를 직원한테 돌려줬다. 손이 떨리고 있었다. 나는 그 손을 봤다. 삼백 명 앞에서 자기가 뭘 했는지 말한 손. 그 손이 그 애 것이었다.
무대 뒤에서 구본혁이 나왔다. 학부모들 사이를 지나서 우리한테 왔다. 넥타이. 그 사람은 아저씨를 먼저 봤다. 그러고는 나를 봤다.
“태오, 너 이겼다고 생각하지 마.”
“안 해요.”
“내 건 안 돌아가. 평생이야. 윤 선생이 저렇게 서 있어도 내 것은 내 거야. 반환일이 없어.”
“알아요.”
“그런데 왜 해.”
“그래서 우리가 옆에 앉는 거예요.” 내가 말했다. “돌아오는 게 없으니까. 나누는 거밖에 없어서.”
그 사람이 나를 봤다. 그 얼굴은 삼 층짜리 얼굴이 아니었다. 빠른 얼굴도 아니었다. 그냥 마흔여섯 살 남자 얼굴이었다. 그 사람이 아저씨한테 뭔가를 말하려다 말았다. 안 나왔다. 그 사람 입에서 말이 안 나오는 걸 나는 처음 봤다. 빌린 것으로는 안 되는 말이 있는 모양이었다.
강당을 나왔다. 계단. 지하에서 일 층. 열둘에 아저씨. 로비에 학부모 이백칠십이 줄을 서 있었다. 그 옆으로 우리가 지나갔다. 아무도 우리를 안 봤다. 안 보는 게 그 사람들이 할 수 있는 최대였다.
밖은 어두웠다. 학원가 간판이 켜져 있었다. 본 입시 오 층. 나는 올려다봤다. 남은 둘이 저기 있다. 나는 그 둘을 나쁘게 볼 수 없었다. 이백이 얼마인지 아니까.
그날 밤 도서관 계단에 사람이 왔다. 열람실은 닫았는데. 설명회에서 나간 서른 중에 열하나. 학생들. 부모가 나가니까 따라 나온 애들. 그리고 오 층에서 여덟 시간 앉던 고객 여섯. 그 애들이 계단 밑에 서 있었다. 어디 앉아야 하느냐고. 아저씨가 계단 등 밑에서 그 애들을 봤다. 오래. 그러고는 말했다. 한 마디씩.
“월요일. 열람실. 자리는. 없어. 앉으면. 있어.”
서린이 셌다. 서린은 세는 걸 못 참는다. 마흔하나에 열일곱. 쉰여덟. 나는 그 숫자를 안 들었다. 대신 서린 손을 봤다. 아직 떨리고 있었다. 나는 그 손을 잡지 않았다. 한 뼘. 그 자리에 놓았다. 내 손을. 삼 년 동안 그 한 뼘에 아무것도 없었다. 오늘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