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화(5,048자) · 서린 · 1월 1일

한 뼘, 원래 그 사이

빌린 재능 · 문가온

기말은 십이월 십오일부터 사흘이었다. 나는 시험지를 받고 첫 문제를 읽었다. 둘째 문제로 갔다. 첫 문제가 있었다. 마지막 문제까지 다 있었다. 석 달 동안 그랬으니까 새삼스럽지 않았다. 새삼스러운 건 그게 열엿새 뒤에 돌아간다는 거였다. 나는 시험을 보면서 그 생각을 했다. 이 머리로 보는 마지막 시험이라는 생각. 그 생각도 그 머리로 했다.

성적은 올랐다. 많이. 태오는 조금 내렸다. 조금. 백열둘로 나뉜 뒤로는 눈 뒤가 조이는 게 아니라 뻐근한 정도였다고 태오가 말했다. 조금 내린 것이 그 뻐근함의 값이었다. 태오는 그것을 셈으로 말했다. 나는 그 셈이 싫었는데 태오가 셈으로 말하니까 견딜 만했다.

현수는 안 올랐다. 현수는 그것을 성적표를 들고 큰 소리로 말했다.

“나는 떼어 갈 게 없어서 받을 것도 없어. 영에서 영 빼면 영이야. 이게 수학이지.”

“너 십일월부터 내내 태오 옆에서 만화 그렸잖아.” 민지가 말했다.

“그래도 앉았잖아. 앉은 건 앉은 거야.”

민지는 올랐다. 민지는 그것을 아무한테도 말 안 했다. 반장이라서. 대신 나한테 문제집을 들고 왔다. 십이월 내내. 나는 두 시간을 그렇게 썼다. 마지막 날까지.

백열둘. 설명회 다음 주부터 도서관 열람실은 마흔 자리에 예순이 앉았고 나머지는 우리 학교 야자실로 왔다. 담임이 야자실을 방학 자율학습으로 열었다. 다른 반, 다른 학교, 길 건너 사립 교복까지. 담임은 명단을 만들지 않았다. 「이번 겨울만」이라고 적은 종이를 야자실 문에 붙였을 뿐이다. 그 종이도 누런 테이프로 붙였다.

십이월 삼십일일 밤 열한 시 사십 분에 나는 골목에 있었다.

엄마한테 말하고 나왔다. 삼 년 만에 처음으로 어디 가는지 말하고. 엄마는 마트 마감조였는데 오늘은 일찍 끝났다. 연말이라. 부엌에 앉아 있다가 내가 패딩을 입는 걸 봤다.

“어디 가.”

“가게. 빌린 거 돌려주러.”

“뭘 빌렸는데.”

“집중력.”

엄마가 그 말을 들었다. 그러고는 아무것도 안 물었다. 대신 현관까지 나왔다. 삼 년 동안 없던 일이다.

“열두 시 넘으면 전화해.”

“응.”

셔터가 반쯤 올라가 있었다. 허리 높이. 나는 허리를 굽히고 들어갔다. 이번에는 치마가 안 걸렸다. 굽히는 각도를 아니까.

가게는 밝았다. 형광등 하나가 떨고 있었다. 시월보다 조금 더. 주인이 계산대 앞에 있었다. 장부. 계산기. 켜져 있었다. 그 사람이 고개를 들었다.

“반환일입니다.”

“네.”

“열두 시 십팔 분 전이네요.”

“기다려도 돼요?”

“앉으실 데가 없습니다.”

“서 있을게요.”

나는 계산대 앞에 섰다. 서린이 잡았던 자리, 태오가 잡았던 자리. 지문 위에 지문. 스테인리스가 차가웠다. 주인이 장부를 폈다. 내 이름이 있는 쪽. 서린. 집중력. 석 달. 반환일 일월 일일. 그 아래 한 줄. 출처. 태오. 그 옆 숫자가 바뀌어 있었다. 시월에는 이백칠십육이었다. 지금은 셈이 달랐다. 십일월 중순부터 숫자 옆에 다른 숫자가 붙어 있었다. 나눔. 서른. 마흔하나. 백열둘. 숫자가 늘수록 앞 숫자가 느리게 늘었다.

“이거 다 적으세요?”

“다 적습니다. 틀리면 안 되니까요.”

“누구 것이 틀리면요.”

“누구 것이든요.”

주인이 볼펜을 들었다. 벽시계가 열두 시를 가리켰다. 종이 안 울렸다. 이 가게에 시계 종은 없다. 문에 달린 종뿐이다. 그 사람이 내 줄 끝에 한 글자를 적었다. 반. 그러고는 볼펜을 놓았다.

그게 다였다.

나는 뭔가 빠져나가는 걸 느끼려고 했다. 느껴지지 않았다. 계약자한테서는 안 받는 가게니까, 돌아가는 것도 계약자는 못 느끼는 모양이었다. 나는 벽을 봤다. 액자. 여기서 빌린 것은 반드시 돌아온다. 그 글씨를 읽었다. 첫 글자부터 끝 글자까지. 눈을 감았다. 있었다. 그 문장이 있었다.

“……있어요.”

“뭐가요.”

“읽은 게. 위의 줄이 안 지워졌어요.”

“빌린 건 돌아갔습니다.” 주인이 장부를 덮었다. “학생이 석 달 동안 기른 건 학생 겁니다. 그건 제 것이 아니라서 제가 가져갈 수 없어요. 매일 두 시간씩 남한테 문제를 풀어 주셨죠. 그건 빌린 걸로 한 게 아니라 빌린 걸 가지고 한 겁니다. 다릅니다.”

“사십 분이 아니에요?”

“재 보십시오. 저는 모릅니다.”

나는 재지 않았다. 재면 숫자가 되고 숫자가 되면 셈이 된다. 나는 이 가게 셈에서 하나쯤은 빼 두고 싶었다.

“태오는요.”

“오늘 자정부터 안 나갑니다. 학생 몫은요. 다른 분 몫은 일월 팔일까지.”

하준. 일월 팔일. 일주일 남았다. 그 애는 지금 도서관 계단 밑에 있을 것이다. 열두 시 반까지. 오늘은 삼십일일이라 등이 일찍 꺼졌을 텐데. 열람실은 닫았는데 그 애는 요새 밤에 거기 앉아 있는다. 제일 가까이. 셈이 그렇게 안 되는 걸 알면서.

“한 가지만요.”

“네.”

“사장님 옆에 앉아도 돼요?”

주인이 나를 봤다. 그 사람 눈은 정확했다. 정확한 눈이 잠깐 정확하지 않았다.

“앉으라고 안 했습니다.”

“그러니까 앉는 거예요.”

“앉을 데가 없습니다.”

“바닥 있잖아요.”

나는 계산대를 돌아 들어갔다. 그 사람이 막지 않았다. 계산대 안쪽 바닥. 리놀륨. 차가웠다. 나는 거기 앉았다. 주인 의자 옆. 그 사람 무릎 높이. 삼 미터가 아니라 삼십 센티. 그 사람이 나를 내려다봤다. 내려다보는 얼굴이 계산대 너머로 보던 얼굴과 달랐다. 나이를 알 수 없는 게 아니라, 나이가 없는 것 같았다.

“제 것은 매일입니다.”

“알아요. 매일 하루치 돌려주고 매일 하루치 다시 빌린다고. 윤재형 아저씨가 말해 줬어요.”

“출처가 없어진 평생치는 계약자한테서 나갑니다. 제8조가 못 미치는 자리라서요. 저는 삼십 년째 제 것을 제가 냅니다.” 그 사람이 장부를 폈다. 맨 앞. 누런 쪽. 한 줄. 이름이 있었고 그 이름 옆 출처 칸에 줄이 그어져 있었다. 오래된 줄. “곁에 앉는 사람이 없으면 나뉘지 않습니다. 저는 앉히지 않았고요.”

“이제 앉았잖아요.”

그 사람이 볼펜을 들었다. 자기 줄. 자정이 지났다. 그 사람은 계산기를 안 보고 적었다. 늘 그랬을 것이다. 그런데 적다가 한 번 멈췄다. 볼펜 끝이 종이 위에서 잠깐 떠 있었다.

그때 눈 뒤가 조였다.

나는 그것을 처음 느꼈다. 석 달 동안 태오가 느낀 것. 누가 눈알 뒤에서 나사를 한 바퀴 돌리는 것. 한 바퀴가 아니라 반 바퀴. 백열둘로 나뉜 게 아니라 하나로 나뉜 거니까 반 바퀴는 아니고, 이 사람이 삼십 년 동안 혼자 낸 것을 오늘 처음 둘로 나눈 만큼. 아팠다. 아픈 게 이렇게 정확할 수 있나. 나는 눈을 눌렀다. 엄지와 검지로. 태오처럼. 주인처럼. 눈가에 자국이 남을 것이다.

“아프세요?” 주인이 물었다.

“네.”

“그게 나뉜 겁니다.”

“이게 태오 거였어요? 석 달 동안?”

“그보다 컸습니다. 학생은 두 시간을 다 쓰셨으니까.”

나는 바닥에 앉아서 그 조임을 안고 있었다. 도망가고 싶었다. 안 갔다. 이게 내가 고른 셈이었다. 빼앗긴 게 아니라 내가 앉은 것. 가져가는 쪽이 제도나 저주가 아니라 이 사람인 것. 그 사람이 볼펜을 놓았다. 장부를 덮었다.

“오늘은 계산기를 안 봐도 되겠네요.”

“원래 안 보시잖아요.”

“원래는 안 보는 게 아니라 못 보는 겁니다. 보면 틀려요. 오늘은 봐도 될 것 같아서요.” 그 사람이 계산기를 봤다. 액정. 숫자. 그러고는 껐다. “맞네요.”

열두 시 이십 분에 나왔다. 셔터가 끝까지 내려왔다. 골목에 서서 엄마한테 전화했다. 엄마가 첫 신호에 받았다.

“끝났어?”

“응. 돌려줬어.”

“돌아왔어?”

나는 그 질문이 뭘 묻는 건지 알았다. 엄마는 내 것이 돌아왔냐고 묻는 게 아니었다. 내가 돌아오냐고 묻는 거였다.

“가고 있어.”

정류장에 태오가 있었다. 삼 년 동안 없던 일이 오늘 다 있었다. 플라스틱 의자. 나는 옆에 앉았다. 한 뼘. 태오가 내 눈가를 봤다.

“자국.”

“응.”

“누구 거야?”

“가게 주인 거.”

태오가 아무 말도 안 했다. 그러고는 자기 눈가를 만졌다. 자국이 없었다. 자정부터 없었다. 우리는 그렇게 앉아 있었다. 자국이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 한 뼘. 버스 두 대가 지나갔다. 세 번째 버스에 탔다.

일월 이일 토요일. 야자실.

방학 자율학습 첫날. 아홉 시. 야자실 문에 종이. 이번 겨울만. 누런 테이프. 안에 백열둘. 우리 반 서른. 옆 반. 다른 학교. 사립 교복. 하준. 도서관에서 온 애들 절반. 아저씨는 도서관에 남았다. 나머지 절반이 거기 있다. 담임이 뒤에서 앞으로 걸었다. 안 보면서. 안 보는 걸 이제 완전히 배웠다.

야자실 창밖에 눈이 오고 있었다. 그해 첫눈은 십이월에 안 왔고 일월 이일 아침에 왔다. 운동장이 하얘지는 걸 백열둘이 등지고 앉아 있었다. 난방이 돌아서 창 안쪽에 김이 서렸고, 누가 손가락으로 그 김에 뭘 그렸다가 소매로 지웠다. 형광등은 가게와 같은 흰빛이었다. 나는 그 빛이 오늘은 싫지 않았다. 빛이 같아도 밑에 앉은 사람이 다르면 다른 빛이 된다. 종이 넘기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났다. 백열둘의 사락. 그 소리가 눈 오는 소리 같았다. 눈은 소리가 없는데.

가운데 14번. 태오. 그 옆 13번. 나. 담임이 지정석표를 새로 만들었다. 이번에는 내 자리가 옆이었다. 표를 만든 사람이 그렇게 만들었고 왜 그렇게 만들었는지는 안 물었다. 규정이니까.

한 뼘. 책상 두 개가 붙어 있고 팔꿈치 사이가 한 뼘. 삼 년 하고 석 달. 나는 그 한 뼘을 봤다. 거기 아무것도 없었다. 재는 자도 아니고, 삼 미터도 아니고. 그냥 한 뼘이었다. 원래 그 사이였다.

태오가 필통을 열었다. 검은 천 필통. 지퍼 소리. 지익. 샤프를 꺼냈다. 지우개. 빨간 볼펜. 책상에 놓았다. 아침에 꺼내 놓고 종례까지 안 넣는다. 삼 년 동안 그랬다.

태오는 필통을 닫지 않았다.

열어 둔 채로 문제집을 폈다. 첫 줄. 둘째 줄. 셋째 줄. 한 쪽. 사락. 다음 쪽. 나는 옆에서 그 소리를 들었다. 지퍼 소리는 안 났다. 나는 내 문제집을 폈다. 첫 줄을 읽었다. 둘째 줄로 갔다. 첫 줄이 있었다. 얼마나 있는지는 재지 않았다. 재지 않기로 했으니까.

눈 뒤가 조금 뻐근했다. 기지개를 한 번 켰다. 야자실에서. 두 팔을 위로. 담임이 지나가면서 안 봤다. 태오가 봤다. 봤고, 아무 말도 안 했고, 필통은 열려 있었다.

여기까지가 지금까지 나온 이야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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