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5,034자) · 나루 · 10월 26일
출처요
내가 일등을 하자 짝꿍이 망가졌다 · 문가온
월요일 아침에 하빈이 먼저 와 있었다. 삼 년 동안 내가 먼저 왔다. 하빈은 늘 조회 오 분 전에 뛰어 들어왔다. 오늘은 앉아 있었다. 문제집을 안 펴고. 손을 책상 위에 올려놓고. 손톱 끝이 빨갰다.
“왔어.”
“어.”
나는 앉았다. 팔꿈치 한 뼘. 나는 그 한 뼘을 봤다. 하빈도 보고 있었다. 우리는 삼 년 동안 그 한 뼘을 한 번도 얘기한 적이 없었다. 얘기할 게 아니었으니까. 책상 두 개가 붙어 있으면 그 사이는 그냥 그 사이다. 지금은 그 한 뼘이 뭔가를 재는 자였다. 삼 미터 안. 여덟 시간.
일교시 국어. 나는 지문을 읽었다. 첫 줄. 둘째 줄. 첫 줄이 없어졌다. 필통을 열었다. 옆에서 하빈이 숨을 멈추는 게 들렸다. 나는 닫았다. 하빈이 숨을 쉬었다.
점심시간에 하빈이 말했다. 급식실이 아니라 교실에서. 애들이 다 나가고 둘만 남은 교실. 창문이 열려 있었고 운동장에서 공 차는 소리가 났다.
“나루, 할 말 있어.”
“나도.”
“내가 먼저.”
하빈이 손을 무릎에 놓았다. 그러고는 말했다. 시월 일일. 학원가 골목. 간판 없는 가게. 형광등. 계산기. 석 달. 서명. 뒷면. 제7조. 제8조. 삼 미터. 여덟 시간. 이백칠십육 분. 하빈은 순서대로 말했다. 하나도 안 빼고. 다 말하고 나서 손을 봤다. 나를 안 봤다.
“그래서 네 눈이 그런 거야. 내가 그런 거야.”
나는 하준 문제집에서 나온 종이 얘기를 했다. 토요일. 접힌 자리. 다섯 번째 조항. 나는 이미 알고 있었다고 말했다. 하빈이 고개를 들었다.
“알고 있었어?”
“토요일부터.”
“그런데 왜 아무 말도.”
“네가 먼저 하나 보려고.”
그 말이 나쁜 말이었다는 걸 나는 하면서 알았다. 하빈 얼굴이 그렇게 됐다.
“왜 말 안 했어.” 내가 말했다. “알고 나서 닷새 동안.”
“말하면 네가 갈 거잖아. 가게에.”
“가겠지.”
“가서 서명할 거잖아. 뒷면 읽고도.”
“그럴 수도 있고.”
“그러니까 말 못 했지.”
“하빈, 도와 달라고 하면 됐잖아.” 나는 그 말을 하려고 삼 년을 기다린 사람처럼 말했다. 그렇게 나왔다. “가게 가기 전에. 시월 일일에. 여섯 시간 앉아서 사십 분밖에 못 쓴다고 나한테 말했으면 됐잖아. 내가 옆에 있었잖아. 삼 년을.”
“네가 뭘 해 주는데.”
“몰라. 뭐라도.”
“너도 나한테 아무 말도 안 하잖아.” 하빈 목소리가 올라갔다. 하빈 목소리가 올라가는 걸 나는 처음 들었다. “너네 엄마 야간 이틀 연속 서는 거, 네가 새벽에 편의점 나가는 거, 장학 못 채우면 학원비 없는 거. 너 한 번 말하고 다시는 안 했어. 삼 년 동안 옆에서 문제집만 풀었어. 나한테 뭘 물어본 적 없잖아. 그런 사람이 나한테 도와 달라고 하라고?”
나는 대답이 없었다. 있었으면 했다.
“나는 너처럼 못 해.” 하빈이 말했다. “너처럼 앉아 있는 걸로 뭘 해결 못 해. 그래서 빌렸어. 그게 잘못이야. 아는데. 근데 네가 그렇게 말하면 나는.”
하빈이 말을 끊었다. 창밖에서 누가 골을 넣었다. 환호.
“가지 마.” 하빈이 말했다. “가게에.”
“가.”
“가지 마.”
오후 수업 내내 우리는 아무 말도 안 했다. 준기가 뒤에서 그걸 알아챘다. 준기는 그런 걸 잘 알아챈다. 오락부장이 되는 애들은 반의 기압을 잰다.
“너네 싸웠냐.”
“아니.”
“싸웠네. 삼 년 만에 처음이지. 야, 민지야, 나루 하빈이 싸웠어.”
“조용히 해.” 민지가 말했다.
“나 이런 거 처음 봐. 얘네 싸우는 거 보려고 삼 년 기다렸어. 근데 뭘로 싸워? 둘 다 말을 안 하는데.”
“그러니까 조용히 하라고.”
준기가 조용히 했다. 오 초. 그러고는 내 등을 손가락으로 찔렀다.
“나루, 너 요새 필통 계속 여닫더라. 그거 하빈이 때문이야? 하빈이가 네 지우개 훔쳐 가?”
나는 대답 안 했다. 하빈도. 준기는 자기가 던진 말이 어디에 떨어졌는지 몰랐다. 모르는 사람이 던진 말이 제일 정확하게 떨어진다. 훔쳐 간 게 아니었다. 하빈은 훔친 적이 없다. 그냥 옆에 앉아 있었다. 나도.
나는 갔다. 오후 수업이 다 끝나고. 야자를 빼고. 하빈이 담임한테 병원이라고 했다는 그 거짓말을 나도 했다. 담임이 나를 봤다. 나루가 야자를 빼는 건 처음이었다. 담임은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학원가는 저녁 일곱 시였다. 하빈이 말한 그대로였다. 본 입시 오 층. 나는 그 오 층을 올려다봤다. 내 자리 창이 저기 어디에 있다. 오늘 세 시간을 안 채우면 실장이 원장한테 올린다. 나는 그것을 알고 골목으로 들어갔다.
골목으로 들어가기 전에 스터디 본 일 층 로비를 지났다. 유리문 너머 모니터. 장학생 이름이 위에서 아래로. 내 이름 옆에 00:00. 오늘 처음으로 저 숫자가 안 올라간다. 실장이 데스크에서 나를 봤을지도 모른다. 나는 안 봤다.
실외기. 상자. 문. 종이. 있는 것을 빌려드립니다. 손님은 하루에 셋만 받습니다. 종이는 누런 테이프로 네 귀를 붙였는데 왼쪽 아래 하나가 떨어져서 바람에 조금 들렸다. 나는 그 귀를 눌러 붙였다. 왜 그랬는지 모르겠다. 들어가기 전에 뭔가 하나는 제자리에 놓고 싶었던 것 같다.
가게는 밝았다. 하빈 말이 맞았다. 계산기가 제일 무서웠다. 주인은 소매를 걷고 있었다. 나를 봤다. 처음 보는 얼굴인데 아는 얼굴이었다. 그 사람은 내 이름을 안 물었다.
“세 번째 손님이시네요.”
“손님 아닙니다.”
“그럼 뭐로 오셨습니까?”
“출처요.”
주인이 볼펜을 놓았다. 그 사람은 내가 그 말을 할 줄 알았던 것 같았다. 그래도 볼펜을 놓았다. 그게 이 사람이 놀라는 방식인 것 같았다.
“하빈이 계약 취소해 주세요.”
“계약자가 아닙니다.”
“그럼 이자 저한테 받으세요. 지금도 저한테 받잖아요.”
“지금 받는 건 학생 것이 아니라 학생한테서 나가는 겁니다. 학생이 내는 게 아니에요. 다릅니다.”
“뭐가 달라요.”
“내는 건 고르는 겁니다. 나가는 건 안 고르는 거고요. 이 가게는 고른 사람한테서만 받습니다. 그래서 계약자한테서는 안 받고요.”
나는 그 말이 이해가 안 됐다. 이해가 안 되는데 틀린 데가 없었다. 이 가게 말은 다 그랬다. 알아듣기 전에 맞아 버린다.
“그럼 저도 빌릴게요.”
“뭘요.”
“집중력요. 석 달. 하빈이 반환일하고 같이.”
“학생 것은 지금 나가는 중입니다. 나가는 중인 것을 빌려드릴 수는 없어요. 물이 빠지고 있는 통에서 물을 퍼 드릴 수는 없습니다.”
“그럼 다른 거요. 뭐든.”
주인이 나를 봤다. 아주 잠깐, 그 사람 입꼬리가 움직였다. 웃은 건 아니었다.
“학생한테 지금 남아 있는 건 고집입니다. 그건 빌려 드려도 이자 낼 사람이 없어요. 학생 곁에 그만큼 고집 센 사람이 없어서.”
“돈으로 낼게요.”
“돈은 안 받습니다.”
“그럼 뭘 받아요.”
“말씀드렸습니다. 같은 종류로요.”
나는 계산대를 잡았다. 차가웠다. 하빈이 잡았던 자리일 것이다. 스테인리스에 지문이 남아 있었다. 작은 지문. 나는 그 위에 내 손을 놓았다.
“다섯 번째 조항요.”
“네.”
“곁에 스스로 앉는 자가 있으면 그 자에게 나뉜다. 그게 무슨 뜻이에요.”
“학생이 읽으셨으니 학생이 아십니다.”
“설명 안 해 주는 거 알아요. 규칙은 설명하면 사장님 말이 되니까. 그거 하빈이한테 들었어요. 그러니까 규칙 말고 사실만요. 나뉘면 어떻게 돼요.”
주인이 장부를 봤다. 안 펴고. 표지만.
“나뉘면 한 사람 몫은 가볍습니다. 눈 뒤가 조금 뻐근한 정도. 기지개 한 번이면 되는 정도.”
“누가 제 곁에 앉는데요.”
“그건 제가 정하지 않습니다. 앉히지도 않고요. 앉힌 사람한테는 안 나뉩니다. 제 발로 앉은 사람한테만.”
“제 발로.”
“네.”
“지금 저한테서 두 줄 나가고 있죠. 하빈이 거랑, 하준이 거랑.”
“말씀드리지 않습니다.”
“하준이 옆에 원장이 저를 앉혔어요. 그건 앉힌 거잖아요. 그런데 왜 나가요.”
“출처는 앉힌 사람이어도 됩니다. 나눔은 안 되고요. 앉히는 건 쉽고 앉는 건 어렵습니다. 그래서 나눔에만 그 조건이 붙어요.”
나는 그 사람이 지금 규칙을 설명한 건지 사실을 말한 건지 알 수 없었다. 그 사람도 모르는 얼굴이었다. 형광등이 윙 울었다. 벽에 액자. 여기서 빌린 것은 반드시 돌아온다. 나는 그 글씨를 읽었다. 그 글씨는 안 지워졌다. 이 가게 안에서는 아무것도 안 지워지는 것 같았다.
“사장님도 빌렸어요?”
주인이 처음으로 대답을 늦게 했다.
“네.”
“뭘요.”
“말씀드리지 않습니다.”
“기간은요.”
“평생입니다.”
“곁에 누가 앉아요.”
“아무도 안 앉습니다.” 그 사람이 볼펜을 들었다. “제가 앉히지 않으니까요. 앉히면 안 나뉘고, 안 앉히면 안 앉으니까요.”
그 말은 규칙 같지 않았다. 하빈이 시 같다고 한 게 이런 거였나 보다. 나는 가게를 나왔다. 종이 두 번 울렸다.
정류장에 하빈이 앉아 있었다. 교복 위에 패딩. 플라스틱 의자. 나는 옆에 앉았다. 한 뼘. 여기는 책상이 없는데도 한 뼘이었다.
“서명했어?”
“빌려줄 게 없대.”
하빈이 숨을 쉬었다. 길게.
“나 내일 담임한테 자리 바꿔 달라고 할 거야.”
“그래 봤자 출처는 안 바뀌어.”
“알아.”
“그럼 왜.”
“네 옆에 앉아서 네가 잘 보는 거 보고 있는 게 싫어.” 나는 앞을 봤다. 본 입시 오 층. 켜져 있었다. “내 걸로 네가 잘 보는 거. 그거 보면서 필통 여닫는 거. 나는 못 해.”
하빈이 아무 말도 안 했다. 버스가 왔다. 하빈은 안 탔다. 나도 안 탔다. 오늘 세 시간을 못 채웠다. 실장이 올릴 것이다. 나는 그것도 알면서 앉아 있었다. 눈 뒤가 조였다. 옆에서 하빈이 잘 보고 있었다. 나는 하빈이 지금 뭘 보고 있는지 알았다. 나를 보고 있었다. 잘.
두 번째 버스가 왔다. 하빈이 탔다. 나는 편의점으로 갔다. 엄마 근무 시작 십 분 전. 엄마가 조끼를 입고 있었다. 이름표. 나는 카운터 안으로 들어가서 바랜 고무 매트 위에 섰다. 엄마가 나를 봤다.
“왜 왔어.”
“그냥.”
“오 층은.”
“오늘 안 갔어.”
엄마가 아무 말도 안 했다. 온장고 앞에 그 사람이 서 있었다. 아무것도 안 사고. 나는 오늘 처음으로 그 사람을 봤다. 그 사람이 나를 봤다. 그 사람 눈가에 손가락 자국이 있었다. 빨갛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