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화(5,266자)

신양의 돌풍

보라카이 윈드서핑 · 이수

신양 해변 남쪽 끝에 바위가 검게 누워 있었다⁠.

제주의 바위였다⁠. 불에 녹았다가 굳은 돌이라 구멍이 숭숭 나 있었다⁠. 바위 너머로 섭지코지 언덕이 바다 쪽으로 길게 뻗었다⁠. 언덕 위에 풀이 낮게 깔렸고⁠, 풀이 바람에 한쪽으로 누워 있었다⁠. 해변 북쪽으로는 성산 일출봉이 바다에서 솟아 있었다⁠. 신양 해변은 두 언덕 사이에 반달처럼 안긴 모래밭이었다⁠.

이수는 아침 아홉 시에 해변에 닿았다⁠. 민하가 따라왔다⁠. 구명조끼를 들고⁠.

해변 모래밭에 천막이 줄지어 서 있었다⁠. 축제 현수막이 바람에 펄럭였다⁠. 「⁠신양 해변 축제 — 바다를 여는 날⁠」⁠. 무대 앞에 의자 수백 개가 놓였다⁠. 천막 하나에 「⁠카이트보딩 시범 — 보라카이에서 온 전 국가대표 이대근⁠」이라고 적힌 판이 세워져 있었다⁠.

대근은 천막 앞 모래밭에서 카이트에 바람을 넣고 있었다⁠. 이수의 큰 카이트였다⁠. 이제 대근의 카이트였다⁠. 대근은 이수를 보자 펌프질을 멈추고 손을 들었다⁠. 웃었다⁠. 한 달 만이었다⁠. 얼굴이 그새 더 검었다⁠.

“⁠사장님⁠! 왔어요⁠?⁠”

“⁠네⁠.⁠”

이수는 대근에게 다가가면서 대근의 손보다 모래밭에 놓인 바를 먼저 봤다⁠. 바 가운데 치킨 루프 아래⁠. 검은 혹이 아침 햇빛에 번들거렸다⁠.

“⁠안 풀었네요⁠.⁠”

대근이 바를 내려다봤다⁠. 웃음이 조금 남은 얼굴로⁠.

“⁠오늘 아침에 풀려고 했어요⁠. 칼이 없어서⁠. 비행기에 칼을 못 싣잖아요⁠.⁠”

이수는 주머니에서 접이칼을 꺼냈다⁠. 칼날을 펴서 손잡이 쪽을 대근에게 내밀었다⁠. 대근이 칼을 봤다⁠. 받지 않았다⁠.

“⁠이수 씨⁠!⁠”

천막 쪽에서 사내 하나가 뛰어왔다⁠. 은비의 외삼촌이었다⁠. 목에 축제 명찰을 걸고 있었다⁠.

“⁠이대근 선수⁠! 무대 쪽에서 리허설 한번 하재요⁠. 사회자가 소개할 때 바다에서 손 한번 흔들어 달래요⁠. 군수님도 오시고 도의원님도 오시고⁠.⁠”

대근이 일어섰다⁠. 이수의 칼은 여전히 이수의 손에 있었다⁠.

“⁠시범 끝나고 풀게요⁠.⁠”

“⁠지금 풀어요⁠.⁠”

“⁠사람들 다 보는데 테이프 뜯고 있으면 모양 빠져요⁠. 사장님⁠, 나 오늘 처음 제주 사람들 앞에 서는 거예요⁠. 내 이름 걸린 판 봤어요⁠?⁠”

대근은 외삼촌을 따라 무대 쪽으로 갔다⁠. 바를 들고⁠. 이수는 칼을 쥔 채 모래밭에 서 있었다⁠. 민하가 옆에 와서 섰다⁠.

“⁠형⁠.⁠”

“⁠응⁠.⁠”

“⁠우리 대여점에 반납 날짜 지난 책 가져오는 손님들이 딱 저래요⁠. 「⁠내일 가져올게요⁠」⁠. 내일 가져오는 사람 육 년 동안 한 명도 못 봤어요⁠.⁠”

점심은 해변 천막에서 고기국수를 먹었다⁠. 대근은 국수를 두 그릇 먹었다⁠. 섬에서 석 달 동안 김치찌개만 끓였더니 국물 있는 다른 음식이 그리웠다고 했다⁠. 국수를 먹다 말고 대근이 물었다⁠.

“⁠그 보드 탔어요⁠?⁠”

“⁠아직요⁠. 비닐도 안 벗겼어요⁠.⁠”

“⁠물가에서 벗겨요⁠. 처음엔 꼭 물가에서⁠. 나도 그 보드 처음 받은 날 물가에서 벗겼어요⁠. 열아홉 살 때⁠.⁠”

대근이 국물을 마셨다⁠. 이수는 국수를 다 먹지 못했다⁠.

오전의 신양 바다는 순했다⁠. 바람이 바다에서 고르게 들어왔다⁠. 해변 앞 물결이 낮았다⁠. 은비가 세일을 들고 물에 들어가 한 시간을 탔다⁠. 은비가 타는 모습은 대근과 달랐다⁠. 빠르지 않았다⁠. 대신 한 번도 넘어지지 않았다⁠. 바다와 다투지 않는 몸이었다⁠.

정오가 지나자 은비가 물에서 나왔다⁠. 세일을 모래밭에 눕히고 섭지코지 언덕을 올려다봤다⁠. 언덕 위 풀이 눕는 방향이 바뀌어 있었다⁠. 아침엔 바다 쪽에서 육지 쪽으로 누웠던 풀이 이제 언덕 너머 쪽에서 바다 쪽으로 누웠다⁠.

“⁠바람이 돌았어요⁠.⁠”

은비가 말했다⁠.

“⁠이제 언덕 넘어서 와요⁠. 오후에 이러면 한 번씩 내리꽂혀요⁠.⁠”

“⁠몇 시부터요⁠?⁠”

“⁠지금부터요⁠. 우리 어머니 오늘 물질 안 나갔어요⁠. 아침에 언덕 보고 안 나갔어요⁠.⁠”

은비는 외삼촌에게 갔다⁠. 이수도 따라갔다⁠. 은비가 외삼촌에게 바람 이야기를 했다⁠. 외삼촌은 고개를 끄덕이며 들었다⁠. 다 듣고 나서 무대 쪽을 봤다⁠. 무대 앞 의자가 사람들로 차고 있었다⁠. 시장이 탄 검은 차가 해변 입구에 들어오고 있었다⁠.

“⁠은비야⁠, 세 시 개막이다⁠. 사람들이 카이트 보러 왔다⁠. 신문사 사진기자도 왔고⁠.⁠”

“⁠삼촌⁠, 바람이⁠…⁠”

“⁠선수가 괜찮다잖아⁠. 국가대표였다잖아⁠.⁠”

대근은 천막 그늘에서 하네스를 입고 있었다⁠. 은비가 대근에게 갔다⁠. 이수도 갔다⁠. 은비는 섭지코지 언덕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풀이 눕는 쪽을⁠.

“⁠바람이 돌았어요⁠. 지금 나가지 마세요⁠.⁠”

대근이 언덕을 봤다⁠. 오래 봤다⁠. 대근은 바람을 읽을 줄 아는 사람이었다⁠. 십오 년을 바다에서 바람을 읽었다⁠. 대근의 눈이 언덕의 풀을 따라갔다⁠. 이수는 대근의 눈에서 무언가가 스치는 것을 봤다⁠. 알아본 눈이었다⁠.

이수가 대근의 카이트를 봤다⁠. 모래밭에 누운 큰 카이트를⁠.

“⁠작은 카이트 없잖아요⁠.⁠”

대근의 손이 버클 위에서 멈췄다⁠.

“⁠이 바람이면 작은 걸 띄워야 해요⁠. 큰 카이트는 약한 바람에 쓰는 거예요⁠. 센 바람에 큰 카이트면 사람이 감당을 못 해요⁠. 대근 씨가 세일 줄이는 거랑 같다고 했잖아요⁠.⁠”

“⁠작은 건 보라카이 바다에 있잖아요⁠.⁠”

대근이 말했다⁠. 웃지 않고⁠. 크리스마스이브에 바다로 날아간 작은 카이트였다⁠. 대근이 빨간 손잡이를 처음 당긴 날의 카이트였다⁠.

대근은 하네스 버클을 채웠다⁠.

“⁠이십 분만 할게요⁠. 이십 분이면 돼요⁠. 사람들 앞에서 한 번 뜨고⁠, 손 흔들고⁠, 들어올게요⁠.⁠”

“⁠대근 씨⁠.⁠”

이수가 말했다⁠. 칼을 다시 꺼내 들었다⁠.

“⁠이십 분이면 그거 푸는 데 십 초예요⁠.⁠”

대근이 이수를 봤다⁠. 이수의 칼을 봤다⁠. 무대 쪽에서 사회자의 목소리가 확성기로 울렸다⁠. 「⁠이제 곧 보라카이에서 온⁠…⁠」⁠. 사람들이 박수를 쳤다⁠.

“⁠사장님⁠.⁠”

대근이 웃었다⁠. 보라카이에서 「⁠사장님 돈으로 내 바다를 사겠다는 거예요⁠?⁠」라고 묻던 날과 같은 웃음이었다⁠.

“⁠나 안 놓쳐요⁠.⁠”

대근은 카이트를 하늘로 띄웠다⁠. 큰 카이트가 신양 하늘로 솟았다⁠. 무대 앞 사람들이 일제히 고개를 들었다⁠. 함성이 났다⁠. 아이들이 의자 위로 올라섰다⁠. 대근은 보드에 발을 올리고 물로 미끄러져 나갔다⁠.

처음 십오 분은 대근의 바다였다⁠.

대근은 해변 앞을 오가며 물결을 탔다⁠. 물결 하나를 타고 몸을 띄웠다⁠. 카이트가 대근을 하늘로 끌어 올렸다가 가볍게 내려놓았다⁠. 사람들이 소리를 질렀다⁠. 신문사 사진기자가 물가까지 뛰어 내려갔다⁠. 대근은 무대 앞을 지나며 한 손을 들어 흔들었다⁠. 사회자가 확성기로 대근의 이름을 불렀다⁠. 「⁠이대근 선수⁠! 전 국가대표⁠!⁠」⁠. 대근의 웃는 얼굴이 해변에서도 보였다⁠.

이수는 물가에 서서 섭지코지 언덕을 봤다⁠. 언덕 위 풀이 한꺼번에 바다 쪽으로 누웠다⁠. 누운 채 일어나지 않았다⁠.

“⁠온다⁠.⁠”

은비가 말했다⁠.

바람이 언덕을 넘어왔다⁠. 언덕 위에서 아래로⁠, 바다 쪽으로 내리꽂혔다⁠. 해변의 천막 하나가 기둥째 뽑혀 모래밭을 굴렀다⁠. 현수막이 찢어졌다⁠. 무대 앞 사람들이 비명을 질렀다⁠.

대근의 카이트가 하늘에서 크게 휘청였다⁠. 카이트가 바람의 가운데로 떨어지며 바람을 한가득 먹었다⁠. 대근의 몸이 보드째로 물에서 뽑혔다⁠. 2m⁠, 5m⁠. 대근이 하늘로 끌려 올라갔다⁠. 카이트가 대근을 매단 채 옆으로 날았다⁠. 해변 남쪽 끝으로⁠. 검은 바위 쪽으로⁠.

대근의 손이 바 가운데로 갔다⁠.

이수는 대근의 손을 봤다⁠. 멀었지만 보였다⁠. 대근의 손이 빨간 손잡이가 있던 자리를 잡아당겼다⁠. 검은 혹을 잡아당겼다⁠. 고리가 풀리지 않았다⁠. 끈 열 바퀴와 테이프가 고리를 꽉 물고 있었다⁠. 대근의 손톱이 테이프를 긁었다⁠. 공중에서⁠. 바람에 흔들리면서⁠.

“⁠칼⁠!⁠”

모래밭을 따라 남쪽으로 이수가 칼을 쥐고 뛰었다⁠. 민하가 구명조끼를 들고 뒤따라 뛰었다⁠. 은비가 뛰었다⁠. 축제 사람 둘이 뛰었다⁠.

대근은 하네스 고리에서 바를 빼려고 했다⁠. 카이트가 당기는 힘이 고리에 다 걸려 있었다⁠. 빠지지 않았다⁠. 대근의 몸이 바위 위 하늘에서 떨어지기 시작했다⁠. 바람이 한순간 숨을 골랐다⁠. 카이트가 힘을 잃었다⁠. 대근이 떨어졌다⁠. 검은 바위 위로⁠.

이수의 귀에 소리가 들렸다⁠. 사람이 돌에 부딪히는 소리였다⁠. 해변의 함성보다 작았는데 이수에게는 돌에 부딪히는 소리밖에 들리지 않았다⁠.

바람이 다시 불었다⁠. 카이트가 다시 바람을 먹었다⁠. 바위 위에 쓰러진 대근을 끌었다⁠. 바위를 따라⁠. 구멍 숭숭 난 돌 위를⁠. 대근의 몸이 돌 위에서 미끄러지고 걸리고 다시 미끄러졌다⁠. 대근의 손은 이제 바를 쥐고 있지 않았다⁠. 고리에 걸린 바가 대근을 끌고 갔다⁠.

이수가 바위에 닿았다⁠. 맨발이었다⁠. 신발을 언제 벗었는지 몰랐다⁠. 바위가 발바닥을 찢었다⁠. 이수는 카이트 라인 네 가닥을 붙잡았다⁠. 라인이 이수의 손바닥을 태우며 미끄러졌다⁠. 이수는 칼을 라인에 댔다⁠. 한 가닥⁠, 두 가닥⁠. 세 번째 가닥이 끊기자 카이트가 비틀렸다⁠. 네 번째 가닥이 끊기자 카이트가 대근을 놓았다⁠.

라인이 끊긴 카이트가 하늘로 솟았다⁠. 바람에 실려 섭지코지 언덕 너머로⁠, 바다로 날아갔다⁠. 바다 위에서 한 번 크게 뒤집히더니 점이 되었다⁠.

이수는 날아가는 카이트를 보지 않았다⁠. 대근을 봤다⁠.

대근은 바위 사이 물웅덩이 가장자리에 누워 있었다⁠. 눈을 감고 있었다⁠. 하네스 고리에 바가 그대로 걸려 있었다⁠. 바 가운데 검은 혹이 대근의 배 위에 놓여 있었다⁠. 테이프 한쪽이 대근의 손톱에 긁혀 조금 들려 있었다⁠. 테이프 아래로 빨간색이 손톱만큼 보였다⁠.

은비가 대근의 머리맡에 무릎을 꿇었다⁠. 해녀의 딸이었다⁠. 물에서 건져 올린 사람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아는 손이었다⁠. 은비가 대근의 목에 손가락을 댔다⁠. 은비가 고개를 들어 축제 사람들에게 소리쳤다⁠. 제주 말이었다⁠. 이수는 알아듣지 못했다⁠. 축제 사람 하나가 해변 쪽으로 뛰어갔다⁠.

민하가 구명조끼를 대근의 가슴 위에 덮었다⁠. 물가마다 들고 다니기만 한 조끼였다⁠. 처음으로 누군가의 몸에 닿았다⁠. 민하의 손이 떨렸다⁠.

“⁠형⁠, 형⁠. 이거 맞아요⁠? 이렇게 하는 거 맞아요⁠?⁠”

이수는 대답하지 못했다⁠. 칼을 쥔 채 대근의 손을 봤다⁠. 손톱 끝이 다 갈라져 있었다⁠. 테이프를 긁은 손이었다⁠. 마지막에 대근의 손은 빨간 손잡이로 갔다⁠. 손이 저절로 갔다⁠. 대근이 막으려던 손이었다⁠.

은비가 대근의 가슴에 두 손을 겹쳐 얹고 눌렀다⁠. 세게⁠, 일정하게⁠. 은비의 입에서 숫자가 작게 흘러나왔다⁠. 제주 말로 세는 숫자였다⁠. 이수는 은비의 숫자를 따라 셌다⁠. 마음속으로⁠.

멀리서 구급차 소리가 들렸다⁠. 해변 입구에서 섭지코지 쪽으로 오는 길이 좁았다⁠. 소리가 오래 걸려 다가왔다⁠. 무대 쪽 확성기는 꺼져 있었다⁠. 해변의 사람들이 다 남쪽을 보고 서 있었다⁠. 아무도 말이 없었다⁠. 바람만 언덕을 넘어 계속 내려왔다⁠.

이수는 대근의 배 위에 놓인 바를 들었다⁠. 칼날을 검은 혹에 댔다⁠. 테이프를 갈랐다⁠. 끈을 한 바퀴씩 끊었다⁠. 열 바퀴⁠. 끈이 다 끊기자 빨간 손잡이가 드러났다⁠. 이수는 빨간 손잡이를 당겼다⁠.

고리가 풀렸다⁠. 딸깍⁠. 아주 작은 소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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