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화(5,202자)
해고
재벌 3세의 경호원은 연애 금지 조항을 어겼다 · 오세림
12월 8일 화요일 아침 여덟 시 오십칠 분, 한서진은 서재 책상 앞에 앉아 계약서 일곱 쪽을 가지런히 놓았다. 종이 귀퉁이를 세 번 맞췄다. 맞출 것이 없는데도 맞췄다. 책상 왼쪽 끝에 머그잔 하나가 있었다. 커피가 아니라 동구가 끓여 둔 생강차였고, 껍질을 깐 생강이었다.
밤새 그녀가 한 일은 하나였다. 휴대전화로 707 특수임무대대에 관한 기사를 찾아 읽고, 군 기록 정정 절차와 군사법원 판례를 찾아 읽었다. 새벽 세 시쯤 그녀는 강철규가 복도에서 한 말을 짐작으로나마 이해했다. 진술은 진술한 사람도 다치게 했다. 그날 작전 기록에 이름이 박힌 사람은 쏘지 않았어도 증인석이 아니라 피고인석 옆에 앉게 될 수 있었다. 은호가 오빠 앞에서 진술하겠다고 한 것은, 그 칼을 쥐겠다는 말이었다.
아홉 시 정각에 노크 소리가 났다. 두 번. 언제나 두 번이었다.
“들어오세요.”
은호는 정장 차림이었다. 넥타이 매듭이 평소보다 반 센티쯤 높게 매어져 있었다. 출근할 때처럼 입고 오라는 그녀의 말을 그는 넥타이 매듭으로 받았다. 서진은 그 매듭을 보다가 눈을 내렸다. 보고 있으면 할 말을 못 할 것 같았다.
“앉으세요.”
“서 있겠습니다.”
“앉으라는 말도 안 듣는다고 오빠가 그랬다던데요.”
은호가 앉았다. 책상을 사이에 두고 1미터였다. 서진은 계약서 맨 위 장을 그에게 돌려 놓았다.
“오늘부로 계약 해지할게요. 사유는 7조 위반이에요.”
은호는 계약서를 내려다보지 않았다. 그녀를 보았다.
“지난주 목요일 아침, 상무님이 이 식탁에서 단발성 사건은 위반이 아니라고 해석하셨습니다.”
“해석을 바꿨어요. 작성자가 해석한다고 이사회에서 팀장님이 그랬잖아요.”
“왜 바꾸셨습니까?”
“이사회 결정이에요. 21일부터 그룹 경호실이 들어와요. 팀장님이 남아 있으면 오빠가 또 7조를 꺼내요. 계약 위반 경호원을 끼고 주총장 들어오는 이사. 그거 하나로 기관투자자 셋이 돌아서요.”
“그건 이사회 결정 때문입니다. 7조 때문이 아닙니다.”
“둘 다예요.”
“아닙니다.”
은호의 목소리가 처음으로 반 칸 올라갔다. 그는 그것을 알아차리고 숨을 한 번 골랐다. 서진은 그 숨소리를 들었다. 손이 책상 아래에서 계약서 둘째 장 끝을 구겼다.
“4조입니다. 피경호인에게 거짓 보고를 하지 않는다. 그 조항은 제가 지키는 조항이지 상무님이 지키는 조항이 아니라서, 상무님은 거짓말을 하셔도 됩니다. 그래도 여쭙겠습니다. 진짜 이유가 뭡니까?”
서진은 대답하지 않았다. 창밖에서 까치가 울었다. 두 번. 아버지가 병실에서 그녀의 손바닥을 누르던 횟수와 같았다. 비밀이라는 신호. 그녀는 그 신호를 거꾸로 쓰기로 했다.
“팀장님이 군에서 왜 나왔는지, 저 아직 못 들었어요. 나중에 말해 준다고 했죠. 나중이 너무 많다고 제가 그랬고요.”
“지금 말씀드리겠습니다.”
“아니요.”
서진이 고개를 저었다.
“지금 들으면 제가 해고 못 해요.”
은호의 입이 닫혔다. 그는 오래 그녀를 보았다. 그녀는 그 눈을 피하지 않으려고 손톱으로 손바닥을 눌렀다. 아버지의 검지가 눌렀던 바로 그 자리였다. 그녀는 아버지가 그때 무슨 비밀을 쥐여 주려 했는지 아직도 몰랐다. 그래도 지금 자기가 무엇을 쥐고 있는지는 알았다.
“알겠습니다.”
은호가 일어섰다. 그는 계약서 일곱 쪽을 집어 들었다. 셋째 장에서 손가락이 멈췄다. 그가 그어 놓은 밑줄 두 줄 위였다. 2밀리미터 간격으로 나란한 두 줄. 그는 그 장을 펴 들고 한참 보더니, 셋째 장만 조심스럽게 떼어 내 반으로 접었다. 그리고 정장 안주머니에 넣었다.
“그건 회사 서류예요.”
“해지된 계약서는 회사 서류가 아닙니다. 해석은 상무님이 하십시오.”
그는 이어폰을 귀에서 뺐다. 검정 절연 테이프가 세 번 감긴 줄을 손가락에 둘둘 감아 책상 위 생강차 머그잔 옆에 놓았다.
“이 테이프, 말씀드린다고 했습니다.”
“말하지 마요.”
“그날 무전으로 아이가 둘 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 뒤로 이어폰 줄에 테이프를 감습니다. 손끝에 걸리게요. 걸리면, 귀에 들어온 말을 한 번 더 생각합니다.”
서진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 테이프가 계단에서 자기 뺨에 까끌까끌하게 눌리던 감촉이 지금 뺨에 다시 왔다. 은호가 고개를 한 번 숙였다. 군인처럼도, 경호원처럼도 아닌 각도였다. 그리고 그는 서재를 나갔다. 문이 두 번 노크하듯 딸깍, 딸깍 닫혔다.
서진은 책상 위의 이어폰을 보았다. 생강차가 식어 가는 동안, 그녀는 그것을 만지지 않았다.
*
오전 열한 시, 서진은 침실 창가에 서서 골목을 내려다보았다. 은호가 빌라 대문을 나섰다. 종이 상자는 없었다. 그는 아무것도 들고 있지 않았다. 대문에서 3미터. 그는 거기서 한 번 멈췄다. 뒤를 돌아보지는 않았다. 그리고 걸었다. 5미터, 10미터.
골목 모퉁이에 검은 승용차가 서 있었다. 강철규가 내려 은호 앞을 막아섰다. 서진은 창문을 열었다. 들리지 않았다. 12월 공기만 방 안으로 들어왔다. 두 사람은 1미터를 두고 서 있었다. 강철규가 무언가를 말했고, 손바닥을 위로 펴서 승용차 뒷문 쪽을 가리켰다. 은호는 그 손을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고개를 저었다. 한 번. 강철규가 한 번 더 말했다. 은호가 한 번 더 고개를 저었다.
“아이고, 저 양반 또 왔네예.”
뒤에서 동구의 목소리가 났다. 언제 들어왔는지, 그는 침실 문간에 커다란 김치통을 안고 서 있었다. 성북동 정 여사가 보낸 김치였다. 뚜껑 위에 매직으로 「서진 몫·많이 먹어」라고 적혀 있었다.
“동구 씨, 저 사람이 뭐라고 하는지 알아요?”
“팀장님이 아까 엘리베이터에서 말해 줬습니더. 그쪽 실장이 경호실 부실장 자리 준다꼬 했답니더. 23일 아침에 주총장 1층을 맡으라꼬. 팀장님이 그 자리 안 간다꼬 했답니더.”
“왜요?”
“팀장님이 그러대예. 그 자리 서면 상무님 3미터 안에 못 들어간다꼬. 1층에 서야 되니까.”
서진은 창틀을 붙잡았다. 골목에서 강철규가 차에 올랐다. 차가 떠났다. 은호는 모퉁이에 혼자 서 있다가, 다시 걷기 시작했다. 그녀는 그가 큰길로 나가 사라질 때까지 창문을 닫지 않았다. 손가락 끝이 얼어 감각이 없어질 때까지.
“상무님, 창문 닫으이소. 고뿔 걸립니더. 팀장님이 그러면 저를 잡아 죽입니더.”
“팀장님 이제 동구 씨 팀장 아니에요.”
“그래도 잡아 죽입니더. 해고된 사람이 더 무섭습니더.”
세라가 동구 뒤에서 고개를 내밀었다. 눈가가 빨갰다. 그녀는 아무렇지 않은 척 말했다.
“상무님, 저희도 21일 밤 열 시까지래요. 업체 계약 자체가 끝난대요. 이사회 공문이 업체로 갔어요.”
“미안해요.”
“사과하지 마세요. 대신 하나만 알아 두세요. 저희 팀장님은 해고되면 더 붙어요. 원래 그래요. 이 년 같이 일해 보면 알아요.”
*
그 뒤의 열하루를 서진은 혼자 셌다. 회의 일곱 번, 기관투자자 면담 열한 번, 아버지 병실 세 번. 병실에서 아버지는 한 번도 그녀의 손바닥을 누르지 않았다. 승원은 병실에 오지 않았다. 대신 사과 바구니가 왔다. 껍질을 깎지 않은 채였다.
12월 14일, 열한 번의 면담 가운데 여덟째에 서진은 그 남자를 다시 만났다. 비상계단에서 숨을 헐떡이며 지배구조 그림 셋째 칸을 물었던, 국민연금 명찰의 중년 남자였다. 그는 서진의 발목부터 보았다.
“다 나으셨습니까? 그날 업혀 내려가시면서 대답하시던 거, 저 아직 수첩에 있습니다.”
“그날 업어 준 사람은 이제 없어요.”
“기사 봤습니다.”
남자는 그 말만 하고 서류를 넘겼다. 그리고 덮었다.
“상무님. 저희 내부 지침은 당일 출석한 주주의 설명을 듣고 정합니다. 위임장으로 온 표에는 설명이 없어요. 23일에 직접 나오시면, 저희는 그 자리에서 듣겠습니다. 안 나오시면 안 들은 걸로 하고요.”
면담이 끝나고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 동안, 서진은 자기 왼쪽 뒤 3미터를 돌아보았다. 동구가 서 있었다. 그는 정확히 3미터를 지키고 있었고, 그 자리가 원래 누구 자리였는지 아는 얼굴로 엘리베이터 숫자만 올려다보고 있었다.
12월 19일 토요일 오후 세 시, 서초동 서울중앙지검 맞은편 이층 카페. 창가 자리에 권도윤이 먼저 와 있었다. 회색 점퍼에 낡은 서류 가방. 그는 이번에도 커피를 시키지 않았다. 서진이 앉자 그가 메뉴판을 그녀 쪽으로 밀었다.
“드세요. 저는 카페인 끊었습니다. 수사관이 커피 끊으면 잠은 더 못 잡니다.”
“그럼 왜 끊었어요?”
“잠 못 잘 거면 심장이라도 안 뛰게요.”
서진은 웃지 않았다. 웃을 뻔했는데, 웃으면 울 것 같았다. 그녀는 핸드백에서 갈색 가죽 수첩을 꺼냈다. 원본이었다. 사본을 만들려고 이틀 밤을 고민하다가 그만두었다. 엄마 글씨는 복사하면 기울기가 달라졌다.
“2019년 3월부터 2021년 9월까지 이사회 기록이에요. 엄마가 직접 쓴 거예요. 오빠 말도 다 있어요.”
권도윤은 수첩을 바로 받지 않았다. 그는 수첩 위에 손바닥을 얹어 두기만 했다.
“이걸 주시는 대가로 뭘 원하십니까?”
“한 사람이요. 차은호 씨를 그 사건에서 빼 주세요. 707 때 일이요. 오빠 쪽 경호실장 진술이 나오면 은호 씨 이름도 나오잖아요. 이게 있으면 은호 씨 진술은 필요 없잖아요. 그 사람은 증인석에 안 앉아도 돼요.”
권도윤의 손바닥이 수첩 위에서 멈췄다. 그는 창밖을 보았다. 검찰청 정문에서 사람들이 드나들었다. 그가 천천히 말했다.
“상무님. 그 사람을 빼 드리려면, 그 사람이 들어와 있지 않아야 합니다.”
“무슨 말이에요?”
“주총 날 아침 이야기부터 하겠습니다. 저희가 듣는 경호실 통화에서 23일 아침 한 시간이라는 말이 여러 번 나옵니다. 여의도 주총장 지하 2층 주차장에서 엘리베이터까지 가는 길입니다. 그 한 시간 동안 그 길의 카메라가 꺼집니다. 무엇을 하려는지는 아직 모릅니다.”
서진의 손가락이 탁자 모서리를 쥐었다.
“그리고 차은호 씨는.”
권도윤은 서류 가방을 열었다. 서류 한 장을 꺼내 수첩 옆에 놓았다. 진술 조서 첫 장이었다. 맨 위에 차은호라는 이름이 있었고, 날짜는 12월 9일이었다. 그가 해고된 다음 날이었다.
“해고되신 다음 날 아침 아홉 시에 혼자 오셨습니다. 707 그날 무전 내용, 지시를 내린 사람, 같은 채널에 있던 사람 이름까지 다 말하고 갔습니다. 자기도 그날 그 자리에 있었다는 것까지요. 상무님 수첩 얘기는 한 마디도 안 했습니다. 상무님은 엄마 글씨를 안 꺼내도 되게 하겠다고요.”
카페 스피커에서 크리스마스 캐럴이 흘러나왔다. 종소리가 박자를 맞춰 울렸다. 서진은 그 종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그녀의 귀에는 아침 서재 문이 딸깍, 딸깍 닫히던 소리만 남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