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화(5,142자)

이사회실 문 앞

재벌 3세의 경호원은 연애 금지 조항을 어겼다 · 오세림

12월 7일 월요일 아침 일곱 시, 서진은 서재 책상 위에 갈색 가죽 수첩 한 권을 올려놓았다. 손바닥만 한 크기였고, 모서리가 닳아 가죽 속의 판지가 드러나 있었다. 표지 안쪽에 만년필로 이름이 적혀 있었다. 윤혜정. 서진의 어머니였고, 돌아가시기 전까지 한성홀딩스 이사였다.

“엄마는 이사회 때마다 이걸 들고 들어갔어요. 회의록은 법무팀이 고쳐 쓰니까, 자기가 들은 건 자기가 적어야 한다고요.”

은호는 수첩을 만지지 않았다. 서진이 한 장을 넘겼다. 작고 단정한 글씨가 줄을 맞춰 내려가 있었다. 날짜와 안건, 그리고 누가 무엇을 말했는지. 어떤 줄에는 빨간 볼펜으로 밑줄이 한 줄 그어져 있었다.

“권 수사관이 원하는 게 이거예요. 건설 돈이 홀딩스로 넘어갈 때 엄마가 반대했던 기록. 오빠가 무슨 말을 했는지도 다 있어요.”

“오늘 꺼내실 겁니까?”

“몰라요. 꺼내면 오빠는 끝나요. 근데 우리 집도 끝나요. 아버지 병실에 기자들이 와요. 정 여사님 부엌에도요.”

그녀는 수첩을 덮어 핸드백 안쪽 지퍼 주머니에 넣었다. 지퍼를 끝까지 올렸다가, 다시 반쯤 내렸다. 꺼낼 수 있게.

*

여의도 한성홀딩스 40층은 복도가 길었다. 바닥은 소리를 먹는 회색 카펫이었고, 벽에는 창업주 사진부터 회장 한명규까지 역대 회장 사진이 일렬로 걸려 있었다. 복도 끝 이사회실 문은 짙은 호두나무였다. 문 옆에 이사회 사무국 직원이 서서 들어가는 이사들의 이름을 확인했다.

“경호원분은 여기까지입니다.”

직원이 은호 앞에 손바닥을 세웠다. 은호는 문에서 3미터 떨어진 자리에 섰다. 서진은 문 앞에서 한 번 돌아보았다. 그녀는 입 모양으로 무언가를 말했다. 은호는 그것을 읽었다. 4조. 그리고 그녀는 들어갔다. 문이 닫혔다.

복도 반대편 끝에서 강철규가 걸어왔다. 그는 은호 옆 1미터에 서서 이사회실 문을 같이 보았다. 둘은 한동안 서로를 보지 않았다. 복도 공기조절기에서 마른 바람이 나왔다.

“오늘 안건 둘이 통과되면, 23일 아침 주총장 경호는 우리가 맡는다. 21일부터 막내 아가씨 집도 우리가 들어간다.”

“통과 안 되면요?”

“돼. 이사 아홉 중에 다섯이 부회장님 사람이야.”

강철규가 주머니에서 담뱃갑을 꺼냈다가 복도 금연 표시를 보고 도로 넣었다. 그는 담배를 피울 수 없는 곳만 골라 서는 사람처럼 보였다.

“은호야. 나는 네가 싫지 않다. 그날도 싫지 않았어. 화가 났지.”

“그날 실장님이 내린 지시를 저는 지금도 기억합니다.”

“나도 기억해. 그래서 내가 실장이 됐고 너는 막내 아가씨 계단에서 업고 다니는 사람이 됐어.”

“실장님은 그날 그 집에 아이가 둘 있다는 걸 아셨습니다.”

강철규의 얼굴에서 처음으로 무언가가 빠져나갔다. 흉터 난 눈썹 끝이 아주 조금 내려갔다. 그는 이사회실 문을 계속 보고 있었다.

“정보가 그랬어. 비어 있다고.”

“무전으로 들으셨습니다. 아이 둘. 제가 같은 채널에 있었습니다.”

강철규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가 은호 쪽으로 몸을 돌렸다. 두 사람 사이가 1미터에서 반 뼘으로 줄었다. 그의 숨에서 박하사탕 냄새가 났다. 담배 대신 씹는 사탕이었다.

“그 얘기 대표실에서 부회장님 앞에서 꺼냈다며. 진술하겠다고.”

“꺼냈습니다.”

“다시 꺼내면 너도 같이 들어가. 그날 작전에 너도 있었어. 너는 안 쐈지만, 네 기록에는 그날 날짜가 박혀 있어. 진술은 칼이야. 손잡이가 없어.”

“압니다.”

이사회실 문이 열렸다. 사무국 직원이 고개를 내밀었다.

“한서진 이사님 경호팀장님, 들어오시랍니다. 안전 관리 안건 관련해서 이사회가 질문이 있답니다.”

강철규가 물러섰다. 그는 은호의 어깨를 손바닥으로 한 번 털었다. 먼지가 없는 어깨였다.

*

이사회실은 길쭉한 방이었다. 가운데 타원형 탁자에 이사 아홉이 앉아 있었고, 상석의 의장 자리는 비어 있었다. 회장 한명규의 자리였다. 그 오른쪽에 한승원이, 맞은편 끝에 서진이 앉아 있었다. 창밖으로 여의도 빌딩 숲이 회색으로 빽빽했다. 탁자 위 물컵마다 레몬 한 조각이 떠 있었다.

은호는 서진의 의자 뒤 1미터에 섰다. 승원이 그를 보고 웃었다.

“차은호 팀장님. 바쁘신데 모셔서 죄송합니다. 이사회가 확인하고 싶은 게 몇 가지 있어서요.”

“말씀하십시오.”

“한서진 이사님과 맺은 경호 계약서 7조, 피경호인과 연애하지 않는다. 이 조항을 어기셨습니까?”

방 안의 공기가 멈췄다. 이사 하나가 물컵을 들다가 내려놓았다. 서진의 손이 탁자 아래에서 핸드백 지퍼를 쥐었다. 은호는 그 손을 보지 않고도 알았다. 지퍼가 2밀리미터쯤 움직이는 소리가 났다.

“그 조항의 해석은 피경호인이 하십니다.”

“해석이요?”

“계약서 작성자가 해석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작성자는 한서진 이사님입니다.”

승원의 웃음이 그대로 있었다. 그때 탁자 왼쪽 끝에서 백발의 노인이 안경을 벗었다. 집안 사람이 아니라 회사 밖에서 모셔 온 사외이사였다. 일흔은 넘어 보이는 사람이었다. 회의 내내 졸던 사람이었다.

“잠깐. 7조가 뭐라고요? 다시 한번.”

서진이 대답했다.

“피경호인과 연애하지 않는다예요, 이사님.”

“그걸 이사님이 직접 쓰셨어요?”

“네.”

“그리고 이사님이 직접 해석하시고?”

“네.”

백발의 사외이사가 웃음을 터뜨렸다. 기침까지 섞어 웃었다. 그는 물컵의 레몬을 건져 냅킨 위에 놓으며 말했다.

“나도 우리 집사람이랑 결혼할 때 그런 계약서를 썼어야 했는데. 그럼 사십 년 동안 내가 이겼을 텐데.”

이사 몇이 웃었다. 승원도 웃었다. 그러나 승원의 웃음은 사외이사 쪽을 향하지 않았다. 그는 손가락으로 탁자 위 서류를 한 장 밀어 가운데로 보냈다.

“좋습니다. 7조는 이사님 해석에 맡기죠. 그럼 안건 하나로 돌아가겠습니다. 최근 보도와 사고들로 한서진 이사님 신변이 불안정합니다. 주총에서 공정하게 의결권을 행사하실 수 있을지 이사회가 우려합니다. 그래서 제안합니다. 한서진 이사님 지분의 의결권을 주총까지 독립위원회에 맡기는 겁니다. 외부 전문가 세 명으로요.”

서진이 의자에서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그 외부 전문가 세 명은 누가 골라요?”

“이사회가.”

“이사회 다섯은 오빠 사람이고요.”

“서진아, 말 조심해. 여기는 이사회야.”

“그래서 조심해서 말하는 거예요, 부회장님.”

서진은 핸드백 지퍼를 끝까지 내렸다. 갈색 가죽 수첩의 모서리가 핸드백 밖으로 나왔다. 그녀는 그것을 꺼내지 않았다. 모서리만 보이게 탁자 위에 핸드백을 올려놓았다.

“부회장님. 2019년 3월 이사회 기억나세요? 엄마가 반대표 던졌던 날이요. 건설 쪽 돈 건이요.”

승원의 눈이 수첩 모서리로 갔다. 아주 짧게. 그리고 다시 서진에게 돌아왔다. 그 사이 그의 웃음이 처음으로 사라졌다가 돌아왔다. 돌아온 웃음은 전보다 얇았다.

“그게 오늘 안건과 무슨 상관이야.”

“상관없어요. 오늘 안건이 이대로 가면, 제가 그 얘기를 이 방에서 하게 될 것 같아서요. 그럼 오늘 안건이 하나 더 생기거든요.”

방이 조용했다. 백발의 사외이사가 안경을 다시 썼다. 그는 서진의 핸드백과 승원의 얼굴을 번갈아 보았다. 탁자 아래에서 누군가의 구두가 카펫을 긁었다.

“의장 대행.”

사외이사가 말했다.

“안건 하나는 법무 검토가 더 필요해 보입니다. 주주의 의결권을 이사회가 맡길 수 있는지부터. 다음으로 미룹시다.”

승원은 잠시 그 사외이사를 보았다. 그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안건 하나는 보류하죠. 안건 둘로 갑니다. 주총 안전 관리입니다.”

그는 다른 서류를 밀었다.

“한서진 이사님 신변 보호를 21일부터 23일 주총 종료까지 그룹 경호실이 맡습니다. 그룹이 책임지고 지킵니다. 그리고 현 경호팀장은 교체합니다. 사유는 계약 조항 관련 보도, 그리고 이사님 신변이 노출된 데 대한 책임입니다. 표결하죠.”

서진이 일어섰다.

“그건 제 계약이에요. 이사회가 정할 게 아니에요.”

“이사님 계약 아니야. 주총장 안전은 회사 일이야. 주총장은 회사 건물이고, 회사 주주 삼천 명이 와. 그날 사고가 나면 회사가 책임져.”

표결은 손을 드는 것이었다. 다섯 손이 올라갔다. 백발의 사외이사는 손을 들지 않았다. 서진을 포함한 네 손은 탁자 위에 그대로 있었다. 다섯 대 넷이었다.

은호는 서진의 의자 뒤 1미터에서 그 손들을 세었다. 그는 자기 손을 내려다보았다. 주먹을 쥐고 있지 않았다. 펴고 있었다. 펴 놓으려고 힘을 주고 있었다.

이사들이 하나둘 일어나 방을 나갔다. 승원은 서류를 챙기지 않았다. 사무국 직원이 대신 챙겼다. 그는 탁자를 돌아 은호 앞에 와서 섰다. 키는 은호보다 반 뼘 작았는데, 올려다보는 얼굴이 내려다보는 사람처럼 편했다.

“팀장님, 21일 밤 열 시까지예요. 그때 우리 경호실이 들어가요. 짐은 그 전에 빼 주세요. 동생 집에 남의 남자 칫솔이 있으면 그것도 기사가 되거든.”

“칫솔은 없습니다.”

“그럼 다행이고.”

승원은 서진에게 고개를 돌렸다.

“서진아, 수첩은 잘 넣어 둬. 엄마 글씨 아깝잖아.”

서진은 대답하지 않았다. 승원이 나가고 문이 닫히자, 백발의 사외이사가 지팡이를 짚고 일어나 서진 옆을 지나가며 그녀의 어깨를 두 번 두드렸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레몬 조각이 그의 냅킨 위에 말라 가고 있었다.

*

밤 아홉 시, 한남동 빌라. 서진은 현관에서 구두를 벗고, 은호가 들고 들어온 핸드백을 받아 들었다. 지퍼는 다시 끝까지 올라가 있었다. 그녀는 거실 불을 켜지 않았다. 창밖 골목 가로등 빛이 거실 바닥에 길게 누웠다. 동구는 현관 밖에서, 세라는 지하 주차장에서 무전을 보내고 있었다.

“오늘 수첩 꺼내셨으면 안건 둘도 꺾으셨을 겁니다.”

“알아요.”

“왜 안 꺼내셨습니까?”

서진은 대답 대신 소파 팔걸이에 앉았다. 코트도 벗지 않았다. 그녀가 핸드백을 무릎에 올려놓고 지퍼 손잡이를 손가락으로 만졌다. 열지 않았다.

“팀장님은 아까 복도에서 강 실장이랑 무슨 얘기 했어요? 들어올 때 얼굴이 하얬어요.”

“그날 일입니다.”

“그날이 언젠데요?”

은호는 대답하지 못했다. 서진은 그가 대답하지 못하는 얼굴을 한참 보았다. 거실의 어둠 속에서 그녀의 눈이 가로등 빛을 하나씩 받았다.

“내일 아침 아홉 시에 서재에서 봬요. 정장 입고 오세요. 출근할 때처럼.”

“평소에도 정장 입습니다.”

“알아요. 그냥 그렇게 말하고 싶었어요.”

그녀는 일어나 서재로 들어갔다. 문이 닫혔다. 문틈 아래로 스탠드 불빛이 새어 나왔고, 그 불빛은 은호가 현관을 나설 때까지 꺼지지 않았다.

8화는 어땠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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