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화(5,911자)
3미터
재벌 3세의 경호원은 연애 금지 조항을 어겼다 · 오세림
12월 21일 월요일 저녁 여덟 시, 한남동 언덕 골목의 가로등은 열한 개였고 그중 하나가 꺼져 있었다. 차은호는 서진의 빌라 대문에서 3미터 떨어진, 꺼진 가로등과 켜진 가로등 사이에 서 있었다. 검정 패딩에 청바지, 운동화. 경호원이 된 뒤로 정장 아닌 옷을 입고 이 골목에 선 것은 처음이었다. 왼쪽 귀가 허전했다. 이어폰 없이 서 있으니 골목의 소리가 전부 들어왔다. 어느 집 보일러가 도는 소리, 개 한 마리가 짖다가 그치는 소리, 언덕 아래 큰길에서 버스가 브레이크를 밟는 소리.
빌라 현관 불이 켜져 있었다. 그 안에 마동구와 윤세라가 아직 있었다. 업체 계약이 끝나는 열 시까지 두 시간이 남아 있었다.
대문 옆 쪽문이 열렸다. 세라가 귤 봉지와 김치통 하나를 들고 나왔다. 그녀는 은호 앞 1미터에 와서 섰다.
“3미터에 서 계시면 저희가 경호 대상을 두 명 봐야 하잖아요. 하나는 집 안에, 하나는 골목에.”
“나는 경호 대상 아니야.”
“해고된 팀장님이 골목에 서 있으면 경호 대상이에요. 사고 칠 사람이요.”
세라가 귤 봉지를 그의 손에 쥐여 주었다. 김치통은 그의 발치에 내려놓았다. 뚜껑에 매직으로 「은호 몫·짜게 했다」라고 적혀 있었다. 정 여사의 글씨였다.
“성북동에서 오늘 오후에 보내셨대요. 상무님 몫 옆에 하나 더 있었어요. 동구 오빠가 그러는데, 정 여사님이 팀장님은 짠 걸 좋아하는 얼굴이래요.”
“짠 거 안 좋아해.”
“그때 짜다고 하셨다면서요. 그게 칭찬인 줄 아셨대요.”
세라는 웃다가 웃음을 멈췄다. 그녀는 대문 쪽을 한 번 돌아보고 목소리를 낮췄다.
“팀장님, 그날 지훈이 일로 화낸 거 미안해요. 지훈이한테 어제 전화 왔어요. 공단 변호사가 붙었대요. 사채 쪽에서 이자 받으러 다시는 병원에 안 온대요. 팀장님이 신고 안 했으면, 그 사람들 아직 병원에 왔을 거예요.”
은호는 귤 봉지를 쥔 손에 힘을 주었다. 봉지가 바스락거렸다.
“지훈이가 뭐래?”
“형한테 말하지 말래요. 형이 또 미안한 얼굴 한다고.”
*
여덟 시 사십 분, 빌라 대문이 열렸다. 서진이 나왔다. 코트 없이 꽃무늬 앞치마를 니트 위에 두르고 있었다. 엄마의 앞치마였다. 김치통을 정리하다 나온 모양이었다. 그녀는 대문 문턱에서 멈췄다. 대문 창살을 사이에 두고, 두 사람은 3미터를 그대로 두었다.
“거기 왜 서 있어요?”
“골목은 회사 건물이 아닙니다. 계약서도 없습니다.”
“그럼 거기 서 있을 이유도 없잖아요.”
“이유가 없어서 서 있습니다.”
서진의 입술이 한 번 움직였다가 닫혔다. 그녀는 대문 창살 하나를 손으로 잡았다. 쇠가 차가웠는지 손가락이 움찔했다.
“12월 9일 아침 아홉 시에 서초동 갔다면서요.”
은호는 대답하지 않았다.
“권 수사관이 보여 줬어요. 진술 조서. 707 그날 무전 내용까지 다 말했다면서요. 자기도 그 자리에 있었다는 것까지. 그게 무슨 말인지 알아요? 팀장님이 그 사람들이랑 같이 재판에 나갈 수도 있다는 거예요.”
“압니다.”
“그걸 막으려고 제가 해고했어요.”
“압니다.”
“알면서 갔어요?”
“상무님이 수첩을 꺼내시면 성북동 부엌에 기자가 옵니다. 정 여사님 부엌에요. 상무님 아버님 병실에도요. 제 진술이면 그 수첩 없이 경호실까지 갑니다. 그래서 갔습니다.”
“그 수첩, 그저께 줬어요.”
이번에는 은호의 입이 닫혔다. 서진은 창살을 잡은 채 웃었다. 웃는 얼굴이 아니었다. 그녀가 고개를 숙였다가 들었다.
“우리 둘 다 4조 위반이에요. 팀장님은 저한테 말 안 하고 갔고, 저는 팀장님한테 거짓말하고 해고했어요. 서로 상대를 안 다치게 하려다가 둘 다 더 위험해졌어요.”
현관 쪽에서 동구가 고개를 내밀었다.
“두 분 다 4조 위반 맞습니더. 그리고 3조도요. 대문 사이에 두고 3미터는 반경으로 안 칩니더.”
“동구 씨, 반경은 그렇게 쓰는 말 아니라니까요.”
“압니더. 근데 지금 아무도 안 웃으니까 제가 한 깁니더.”
서진이 웃었다. 이번에는 웃는 얼굴이었다. 은호도 입꼬리 한쪽을 썼다. 동구는 고개를 끄덕이고 현관 안으로 들어갔다. 문을 닫는 소리가 일부러 크게 났다.
*
아홉 시 반, 은호의 휴대전화가 울렸다. 권도윤이었다. 은호는 대문 창살 앞에서 서진이 들을 수 있게 스피커를 켰다.
“차은호 씨. 오늘 오후 경호실 통화에 새 말이 나왔습니다. 의료원이요. 23일 아침 일곱 시, 한성의료원 구급차 한 대가 대기합니다. 여의도가 아니라 한남동 쪽으로요.”
서진의 손이 창살에서 미끄러졌다.
은호는 첫 출근 날 본사 로비를 떠올렸다. 엘리베이터 앞에서 승원이 웃으며 한 말이 있었다. 주총 날 감기 조심해라. 올해 감기가 독하다더라. 열 나면 그냥 집에 있어. 그리고 혜화동 병원 지하 주차장에서 강철규가 한 말도 있었다. 한성의료원은 우리 그룹이 지었는데, 문을 얇게 지었어.
“사고가 아닙니다.”
은호가 말했다.
“부회장님은 이번엔 사고를 안 만듭니다. 23일 아침에 경호실이 집 안에 있으면, 상무님이 아프다고 하면 됩니다. 열이 난다고, 쓰러지셨다고. 그룹 경호실이 그룹 병원 구급차를 부릅니다. 그룹 병원 의사가 진단서를 씁니다. 상무님은 주총 시간에 병실에 계십니다. 아무도 다치지 않습니다. 기사는 한 줄입니다. 한 상무, 건강 문제로 주총 불참.”
“저 안 아파요.”
“그날 아침에 그걸 증명해 줄 사람이 집 안에 아무도 없습니다.”
권도윤의 목소리가 스피커에서 건조하게 나왔다.
“통화에는 그 정도까지 안 나옵니다. 구급차 대기, 그것뿐입니다. 영장 받을 거리가 안 됩니다.”
“알겠습니다.”
전화가 끊겼다. 골목이 조용해졌다. 서진은 대문 창살 너머에서 은호를 보았다. 앞치마 주머니의 터진 실밥이 바람에 흔들렸다.
“열 시에 그 사람들 와요.”
“압니다.”
“팀장님 지금 민간인이에요. 막으면 업무방해예요. 때리면 폭행이고요. 오빠는 그걸 기다려요.”
“때리지 않겠습니다.”
“맞으면요?”
은호는 대답하지 않았다.
*
밤 열 시 정각, 골목 아래에서 검은 승합차 두 대가 올라왔다. 헤드라이트가 골목 담벼락을 하얗게 쓸고 지나갔다. 차가 대문 앞에 섰고, 검은 정장 사내 여섯이 내렸다. 맨 앞에 강철규가 있었다. 그는 손에 서류 봉투를 들고 있었다. 이사회 결정문 사본이었다.
강철규는 대문 앞 3미터에 선 은호를 보고 걸음을 멈췄다. 그리고 그 앞까지 걸어왔다. 1미터.
“차 중사. 여기서 뭐 하냐?”
“서 있습니다.”
“너 민간인이야. 비켜. 우리 업무 시간이다.”
“민간인이라서 비킬 이유가 없습니다. 이 골목은 구청 땅입니다.”
강철규가 웃었다. 그 뒤의 사내 여섯이 반원으로 벌어졌다. 은호는 그들의 어깨 넓이와 간격을 셌다. 둘은 707이었다. 얼굴을 아는 사람이었다. 하나는 은호와 눈이 마주치자 시선을 내렸다.
“은호야. 진술했다며. 9일 아침에.”
“했습니다.”
“나도 그날 채널에 있었다고 했다며.”
“실장님이 지시하셨다고 했습니다. 정보가 비어 있다고 했다는 것도요. 그리고 실장님이 무전으로 아이 둘 소리를 들으셨다는 것도요.”
강철규의 얼굴이 굳었다. 흉터 난 눈썹이 가로등 빛을 받아 하얗게 떴다. 그가 은호의 패딩 앞섶을 움켜쥐었다. 은호는 손을 들지 않았다. 강철규가 그를 대문 쪽으로 밀어붙였다. 은호의 등이 대문 창살에 부딪쳤다. 쇠가 울렸다. 대문 안에서 서진이 숨을 들이켜는 소리가 들렸다.
“네가 그 집 아이들을 살렸다고 생각하지? 네가 안 쐈으니까?”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럼?”
“그 아이들이 살았다는 건 압니다. 그다음은 모릅니다.”
강철규의 주먹이 은호의 턱을 쳤다. 짧고 정확했다. 은호의 고개가 옆으로 돌아갔다. 입 안에서 쇠 맛이 났다. 아랫입술이 터져 피가 턱으로 흘렀다. 은호는 손을 들지 않았다. 고개를 다시 돌려 강철규를 보았다. 강철규의 주먹이 다시 올라갔다.
“그만해요.”
대문이 열렸다. 서진이 나왔다. 그녀는 강철규와 은호 사이로 들어왔다. 0이었다. 그녀의 등이 은호의 가슴에 닿았다. 앞치마 끈 매듭이 그의 패딩 지퍼에 걸렸다. 그녀의 머리카락에서 마늘 냄새와 샴푸 냄새가 섞여 났다.
“강 실장님. 이사회 결정문 주세요.”
강철규가 손을 내렸다. 서류 봉투를 내밀었다. 서진은 봉투를 열어 결정문을 가로등 불빛에 비춰 읽었다. 천천히, 끝까지 읽었다. 그동안 아무도 움직이지 않았다.
“신변 보호, 21일부터 주총 종료까지. 여기 적힌 건 제 신변이에요. 이 골목에 서 있는 사람의 신변이 아니에요.”
그녀는 결정문을 도로 봉투에 넣어 강철규에게 돌려주었다.
“들어오세요. 집 안은 실장님 사람들이 지키세요. 결정문대로요. 대신 이 사람은 여기 서 있어요. 골목은 구청 땅이니까요. 이 사람한테 다시 손대시면, 그건 결정문에 없는 일이에요. 오늘은 이 골목 창문마다 휴대전화가 있어요.”
그녀가 고개를 들어 골목 위쪽을 가리켰다. 맞은편 집 2층 창가에 휴대전화 불빛 하나가 켜져 있었다. 그 옆 창에도 하나. 강철규가 그쪽을 보았다. 그의 턱 근육이 한 번 움직였다. 그는 사내들에게 손짓했다. 여섯이 대문 안으로 들어갔다. 현관에서 동구와 세라가 비켜섰다. 동구가 그 여섯을 하나씩 내려다보았다. 그중 둘이 동구의 덩치를 보고 반 걸음 돌아서 지나갔다.
강철규는 마지막으로 들어가다가 대문 문턱에서 멈췄다.
“이틀이다, 차 중사.”
“이틀 동안 서 있겠습니다.”
“영하 7도래. 내일 밤엔.”
“압니다.”
*
열 시 반, 대문이 닫히기 전에 서진이 쪽문으로 다시 나왔다. 그녀의 손에 휴지 한 뭉치와 무언가가 들려 있었다. 그녀는 휴지를 은호의 터진 입술에 댔다. 피가 휴지에 번졌다. 그녀의 손가락이 그의 턱 아래에 닿아 있었다. 차가운 손가락이었다.
“팀장님은 진짜 안 때리네요.”
“때리면 상무님이 지는 겁니다.”
“맞아도 제가 질 뻔했어요.”
그녀가 다른 손을 펴 보였다. 이어폰이었다. 검정 절연 테이프가 세 번 감긴 줄. 서재 책상 위 생강차 머그잔 옆에 놓였던 그대로였다.
“이거 두고 갔잖아요. 민간인은 무전 못 쓰죠?”
“못 씁니다. 채널이 없습니다.”
“채널은 없어도 손끝에 걸리잖아요.”
서진이 이어폰을 그의 왼쪽 귀에 끼웠다. 그녀의 손가락이 귓바퀴를 스치고 지나갔다. 아무 소리도 나오지 않는 이어폰이었다. 은호는 줄을 손가락으로 쥐었다. 테이프가 손끝에 걸렸다.
“23일 아침 아홉 시 반이 주총이에요. 저는 그 자리에 걸어서 들어가요. 의장석 앞까지. 그날 아침 여섯 시에 제가 이 대문을 나와요. 열이 나든 안 나든.”
“알겠습니다.”
“3미터예요. 대문에서 주총장까지. 계약은 없어요. 그러니까 7조도 없어요.”
그녀는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돌아섰다. 쪽문이 닫혔다. 현관 불빛 속으로 그녀의 앞치마 끈이 사라졌다. 은호는 혀로 입술의 터진 자리를 눌렀다. 쇠 맛이 아직 남아 있었다.
*
열한 시 반, 기온이 영하 5도까지 내려갔다. 동구와 세라는 열 시 십 분에 짐을 들고 나왔다. 동구는 김치통을 안고 은호 옆에 한참 서 있다가 세라에게 끌려 큰길로 내려갔다. 내려가면서 세 번 돌아보았다. 세라는 한 번도 돌아보지 않았다. 대신 큰길 모퉁이에서 휴대전화 손전등을 켜 머리 위로 두 번 흔들었다.
골목에는 은호 혼자 남았다. 빌라 2층 서재 창에 스탠드 불이 켜져 있었다. 3층 침실 창은 어두웠다. 현관 앞에 경호실 사내 둘이 서서 담배를 피우지 못한 채 손을 비비고 있었다.
골목 맨 끝, 꺼진 가로등 아래에 차 한 대가 서 있었다. 언제 왔는지 은호는 보지 못했다. 그는 그것이 마음에 걸렸다. 검은 세단이었다. 시동이 걸린 채였고, 배기구에서 하얀 김이 낮게 깔렸다.
뒷좌석 창이 내려갔다. 천천히, 끝까지.
한승원이었다. 코트 깃을 세우고, 무릎 위에 무언가를 올려놓고 있었다. 은호는 그것을 알아보았다. 흰 가운이었다. 개켜진 채로, 가슴 주머니에 한성의료원 로고가 박혀 있었다. 승원은 그 가운 위에 손바닥을 얹은 채 은호를 보았다.
그리고 웃었다. 로비 끝에서 끝까지 걸어오는 동안 한 번도 흐트러지지 않던 그 웃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