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5,216자)
칼 든 손 사이
재벌 3세의 경호원은 연애 금지 조항을 어겼다 · 오세림
11월 28일 밤 열한 시, 본가 별채 2층 복도는 마룻장이 걸음마다 한 번씩 울었다. 서진은 스물다섯에 독립하기 전까지 쓰던 방에서 하룻밤 자기로 했고, 은호는 그 방 문 앞 3미터 지점 의자에 앉아 있었다. 복도 끝 창으로 마당이 내려다보였다. 절여 놓은 배추 더미 위에 비닐을 덮고 벽돌로 눌러 둔 모양이 달빛을 받아 하얀 무덤처럼 보였다.
문이 열렸다. 서진이 남색 코트를 팔에 걸치고 나왔다.
“이거 아까부터 팀장님이 쳐다보던데요. 대청 옷걸이 앞을 세 번 지나갔어요. 코트가 그렇게 좋아요?”
“그 코트, 들고 안으로 들어가십시오. 문 닫고, 창가 쪽으로 가십시오.”
서진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녀는 아무 말 없이 돌아섰다. 은호가 따라 들어가 문을 닫았다. 방은 작았다. 벽지에 붙었던 포스터 자국이 네모나게 바래 있었고, 책상 위 연필꽂이에 이십 년 된 형광펜이 꽂혀 있었다. 은호는 휴대전화 메모장을 열어 한 줄을 쳐서 그녀에게 보여 주었다.
왼쪽 안감 아래, 지훈 씨가 단 단추. 듣는 기계입니다. 말하지 마십시오.
서진은 화면을 오래 보았다. 그리고 자기 휴대전화를 꺼내 답을 쳤다. 손가락이 빨랐고, 오타가 두 개 났다.
확실해요? 지훈 씨가 왜요? 어제 단추 달아 주면서 군대 얘기 삼 분 했어요.
확실합니다. 이유는 내일 알아보겠습니다.
떼요, 당장.
떼면 저쪽이 압니다. 하루만 두십시오.
서진은 휴대전화를 내려놓고 코트를 침대 위에 던졌다. 던지고 나서, 그것이 그녀의 말을 듣고 있다는 게 생각났는지 코트를 이불로 덮었다. 두 겹으로 덮었다. 그래도 모자랐는지 베개를 하나 더 올렸다. 은호는 그 베개를 보다가 입꼬리 한쪽을 썼다. 서진이 그걸 봤다.
웃었다. 지금 웃었죠?
안 웃었습니다.
4조.
조금 웃었습니다.
그녀는 이불 더미를 내려다보다가, 메모장에 마지막 한 줄을 쳤다.
지훈 씨 아버님 편찮으세요. 지난주에 저한테 말했어요.
*
11월 29일 일요일 아침 여덟 시, 본가 부엌과 대청 사이 마루에 긴 상 네 개가 붙어 깔렸다. 상 위에 비닐을 덮고, 그 위에 김칫소 대야 넷과 헹궈 물을 뺀 배추가 올라왔다. 친척 열여섯이 고무장갑을 끼고 둘러앉았다. 무를 채 썰던 칼 여섯 자루가 아직 상 끝 도마 위에 누워 있었다. 고춧가루 냄새가 너무 진해서 숨을 쉴 때마다 콧속이 따끔했다.
“양념은 손바닥으로 바르지 말고 손가락으로 넣어. 잎 사이사이. 배추가 숨을 쉬어야 맛이 들어.”
정 여사가 상 끝에서 말했다. 동구가 그 옆에서 고개를 끄덕였다. 둘은 하룻밤 사이에 사제지간이 되어 있었다.
한태오는 상 맨 끝에서 배추 한 잎에 김칫소를 바르다가 손가락을 핥았다. 정 여사가 보지 못한 줄 알았지만, 정 여사는 고개도 돌리지 않고 “태오야, 손 빨면 김치 맛이 와인 맛 된다” 하고 말했다. 고모들이 웃었고, 태오는 억울한 얼굴로 장갑을 새로 꼈다. 서진도 대청 끝에서 웃었다. 웃는 동안 그녀의 왼손은 무릎 위 코트를 꽉 쥐고 있었다.
은호는 마루와 부엌 사이 문지방에 서 있었다. 거기서 대청 끝 서진과 부엌 안쪽이 다 보였다. 그는 이어폰을 왼쪽 귀에 다시 밀어 넣고, 마루를 따라 아주 천천히 걸었다. 칼을 든 손, 김칫소를 쥔 손, 배추 잎을 들추는 손 사이를 지나갔다. 고모 하나가 칼로 무를 썰다가 그를 올려다보았고, 칼날이 도마를 치는 소리가 반 박자 끊겼다가 이어졌다.
부엌으로 들어서자 잡음이 다시 깔렸다. 어젯밤 코트 앞에서 들은 것과 같은 결이었다. 숨 쉬듯 낮게 길어지는 소리. 그는 싱크대를 지나 냉장고 쪽으로 갔다. 부엌에는 김치냉장고가 세 대 있었다. 가장 오래된 것, 회장 내외가 쓰던 것으로 문짝에 「1996」이라고 매직으로 적혀 있는 것 앞에서 잡음이 가장 커졌다.
은호는 냉장고와 벽 사이 틈에 손을 넣었다. 먼지와 기름이 엉긴 끈적한 벽이 손등에 닿았다. 그 끝에 플라스틱 덩어리 하나가 테이프로 붙어 있었다. 담뱃갑 반만 한 크기였다.
“거기서 뭐 해?”
정 여사가 부엌 문 앞에 서 있었다. 손에 김칫소가 묻은 채였다.
“김치 훔쳐 먹으려고? 경호원이?”
“아닙니다.”
“아니긴. 그 냉장고에 작년 묵은지 있는 거 어떻게 알았어?”
은호는 손을 빼서 등 뒤로 감췄다. 손등에 먼지가 검게 묻어 있었다. 정 여사가 그 손을 보고 혀를 찼다. 그리고 다가와, 김칫소를 한 젓가락 집어 그의 입 앞에 내밀었다.
“간 봐.”
“근무 중입니다.”
“간 보는 것도 근무야. 이 집에서는.”
은호는 입을 벌렸다. 젓갈의 짠맛이 먼저 오고, 생강과 마늘이 따라왔고, 고춧가루의 단맛이 혀 뒤에 오래 남았다. 맵기보다 깊었다. 그의 눈가가 저절로 찌푸려졌다.
“어때?”
“짭니다.”
“짜게 한 거야. 동구가 그러라더라. 날이 차대.”
정 여사가 돌아서 나가다가 문지방에서 멈췄다. 그리고 등을 보인 채 말했다.
“그 냉장고 뒤, 지난주에 전기 기사라고 둘이 왔었어. 승원이네 사람이라더라. 콘센트 갈아 준다고.”
그녀는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나갔다. 은호는 냉장고를 보았다. 이 부엌은 본가의 한가운데였다. 김장 날 일가가 말을 섞고, 명절에 고모들이 지분 이야기를 하고, 정 여사가 오십 년 동안 이 집 사람들의 속을 들은 자리였다. 코트 단추는 서진 한 사람의 귀였다. 이건 본가 전체의 귀였다.
*
열한 시, 부엌문이 열리고 강철규가 들어왔다. 정장 차림에 장갑은 끼지 않았다. 대청에서 고모 하나가 “실장님 오셨네, 부회장님 몫 김치 가지러?” 하고 반갑게 불렀다. 그가 고개를 숙여 인사하고 부엌 안으로 왔다. 도마 위에 삶아 둔 수육 덩어리가 김을 내고 있었다.
“정 여사님이 수육 좀 썰어 달라시더라. 손님 대접이라고.”
강철규는 도마 옆의 칼을 집었다. 날이 긴 부엌칼이었다. 그는 수육을 한 점씩 썰기 시작했다. 고르게, 너무 고르게. 칼날이 도마에 닿는 소리가 일정한 간격으로 부엌을 채웠다. 은호는 김치냉장고 앞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두 사람 사이에 도마 하나와 1미터가 있었다.
“차 중사. 거기 서 있으면 냉장고 문을 못 열잖아.”
“여실 일 있으십니까?”
“없지. 나는 냉장고 뒤는 청소 안 하는 데라고 생각하거든.”
칼이 수육을 썰었다. 기름진 단면이 하나씩 쓰러졌다. 강철규가 칼을 멈추고 칼끝으로 수육 한 점을 집어 은호 쪽으로 내밀었다. 칼끝이 은호의 가슴 한 뼘 앞에 멈췄다.
“먹어. 근무 중이라도.”
은호는 손가락으로 수육을 칼끝에서 집었다. 칼날이 그의 손끝을 스치지 않았다. 강철규가 그만큼 정확하게 칼을 들고 있었다. 은호가 그것을 입에 넣고 씹었다. 강철규가 웃었다.
“너는 예전부터 그게 문제였어. 남이 내미는 건 다 받아먹고, 남이 시키는 건 하나도 안 해.”
“실장님은 남이 시키는 건 다 하시고요.”
“그래서 내가 실장이야.”
강철규는 칼을 도마 위에 내려놓았다. 칼자루를 은호 쪽으로 돌려서. 그리고 썬 수육을 접시에 담아 들고 대청으로 나갔다. 친척들이 박수를 쳤다. 은호는 도마 위 칼자루를 내려다보았다. 자루 끝에 강철규의 체온이 남아 있었다.
*
오후 한 시, 본가 뒤뜰 창고는 장독 뚜껑과 낡은 자전거와 제사상이 쌓인 어두운 곳이었다. 은호가 문을 닫자 먼지 냄새와 묵은 쌀 냄새가 함께 밀려왔다. 지훈은 그 안에 서서 고무장갑을 아직 벗지 못하고 있었다. 장갑 끝에 고춧가루가 빨갛게 말라붙어 있었다.
“팀장님, 왜 부르셨어요? 저 지금 동구 형이 무 채 썰라고 해서…….”
“코트 단추.”
지훈의 입이 열린 채로 멈췄다. 말이 많은 사람의 입이 멈추는 걸 은호는 처음 보았다. 오래 멈췄다. 창고 지붕 위로 까치가 걸어가는 발소리가 들렸다.
“형.”
지훈이 팀장님이 아니라 형이라고 불렀다. 지훈이 형이라고 부른 것은 팀에 들어와 처음 술을 마신 밤 이후로 처음이었다.
“아버지 요양병원, 한 달에 이백팔십이에요. 이 년째예요. 일 년 전에 사채를 썼어요. 처음엔 오백이었는데 지금은 이천이 넘었어요. 이자가 원금을 먹었어요. 지난달에 그 사람들이 병원에 왔어요. 아버지 병실에요.”
“강철규가 언제 왔어?”
“병원 다녀온 그 주에요. 형 만나기 전날에 주차장에서요. 빚을 다 정리해 주겠다고 했어요. 단추 하나만 달라고. 아무도 안 다친다고. 그냥 듣기만 하는 거라고.”
“브레이크는?”
“그건 몰라요! 형, 그건 진짜 몰라요. 저는 그날 차에 같이 타 있었잖아요. 제가 알았으면 제가 탔겠어요?”
지훈이 고무장갑을 낀 손으로 얼굴을 덮었다. 고춧가루가 눈가에 묻었고, 그는 따가워서 더 울었다. 은호는 창고 벽에 등을 기댔다. 판자벽이 차가웠다. 그는 주먹으로 판자벽을 한 번 쳤다. 세게 치지는 않았다. 벽에 걸린 낡은 소쿠리가 흔들렸다.
회사에 보고하면 지훈은 오늘로 잘린다. 계약서에 피경호인 정보 유출은 즉시 해지라고 적혀 있었다. 그리고 지훈이 잘리면, 강철규는 단추가 들켰다는 걸 안다. 다른 단추가 다른 사람의 손으로 들어올 것이다. 이번에는 은호가 모르는 손으로.
“형, 저 신고하실 거예요?”
“아직.”
“아직이요?”
“네가 오늘부터 단추를 몇 번 만지는지, 누구한테 뭘 받는지, 나한테 다 말해. 그게 아직이야.”
지훈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은호는 창고 문을 열었다. 한낮의 빛이 들어와 둘 사이 바닥의 먼지를 비췄다.
*
해가 진 뒤, 별채 마루 끝. 서진은 엄마의 꽃무늬 앞치마를 무릎에 개켜 놓고 앉아 있었다. 은호가 1미터 옆에 앉았다. 마당에서는 김치통을 나르는 사람들 소리와 동구가 정 여사에게 무언가를 배우는 소리가 났다. 둘 사이에 남색 코트가 접혀 있었다. 단추 쪽이 바닥을 향해 있었다.
서진이 휴대전화를 내밀었다. 메모장에 한 줄이 떠 있었다.
부엌에도 있었어요?
은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오래 화면을 보다가 다음 줄을 쳤다.
정 여사님은 오십 년 동안 그 부엌에서 우리 집 얘기를 다 들었어요. 근데 한 번도 남한테 안 옮겼어요. 오빠는 그 부엌에 기계를 붙였어요.
은호는 대답을 치지 않았다. 대신 손을 뻗어, 그녀의 무릎 위 앞치마의 터진 주머니 끝을 바로 놓았다. 그녀가 그 손가락을 보았다. 그리고 마지막 줄을 쳤다.
이제 어떡해요?
은호는 그녀의 휴대전화를 받아 답을 쳤다. 치는 데 오래 걸렸다. 지웠다가 다시 쳤다.
끄지 않습니다. 둘 다 그대로 둡니다. 저쪽이 듣고 싶어 하는 것을 저희가 정해서 들려줍니다.
서진이 화면에서 눈을 들어 그를 보았다. 마당의 불빛이 그녀의 눈에 하나씩 맺혔다. 그녀는 소리 내어 말했다. 코트에 들리도록, 또렷하게.
“팀장님, 다음 주 수요일 여의도 가는 길, 마포대교로 가요. 저 그쪽 길이 좋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