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5,088자)
배추 쉰 포기
재벌 3세의 경호원은 연애 금지 조항을 어겼다 · 오세림
성북동 본가 대문은 열 사람이 한꺼번에 지나갈 만큼 넓었고, 문짝은 오래된 느티나무 판으로 짜여 있었다. 11월 28일 토요일 아침 일곱 시, 그 문 안쪽 마당에 배추 쉰 포기가 산처럼 쌓여 있었다. 반으로 갈라 놓은 배추 속이 아침 햇빛에 노랗게 빛났고, 그 옆 고무 대야 여섯 개에서 굵은소금 녹인 물이 찰랑거렸다. 젓갈 냄새가 대문 밖 골목까지 나와 있었다.
은호는 대문을 들어서자마자 마당을 세 구역으로 나눠 머릿속에 넣었다. 배추 더미, 장독대, 안채로 올라가는 돌계단. 사람 스물셋. 그중 일가 친척이 열넷, 본가 일꾼이 다섯, 나머지는 이름 모를 사람들이었다. 서진은 대문 안 3미터 앞에서 발목을 살짝 절며 걸었다. 압박붕대는 풀었지만 아직 오래 서 있지는 못했다.
“거기 넷. 이리 와.”
장독대 앞에서 작은 할머니 하나가 손짓했다. 키가 서진 어깨쯤 오고, 흰머리를 뒤로 단단히 쪽진 채 빨간 고무 앞치마를 두르고 있었다. 정 여사였다. 본가 살림을 오십 년 넘게 맡아 온 사람이었고, 오늘 하루만은 병원에 누운 회장보다 높은 사람이었다. 그녀가 손에 든 고무장갑 네 켤레를 내밀었다.
“여기 들어온 남자는 다 일해. 여자도 일하고. 일 안 하는 건 강아지뿐이야.”
“저희는 근무 중입니다.”
은호가 말했다. 정 여사가 그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근무는 배추 앞에서 해. 배추 앞에서도 아가씨 보여.”
동구가 먼저 장갑을 받았다. 받는 손이 이상하게 반가워 보였다. 그는 정장 윗도리를 벗어 개켜 장독 뚜껑 위에 올리고, 셔츠 소매를 팔꿈치 위까지 걷었다. 팔뚝이 서진의 종아리만 했다.
“할머니, 소금물 몇 도 맞추셨습니꺼?”
정 여사의 눈썹이 올라갔다.
“네가 그걸 왜 물어?”
“날이 차서 오늘은 좀 짜게 가야 됩니더. 배추가 속이 단단하네예. 이건 줄기 쪽에 소금 한 줌 더 쳐야 밤새 숨이 죽습니더.”
정 여사는 대답 대신 배추 한 쪽을 동구 앞으로 던졌다. 동구가 공중에서 받아 대야에 담갔다 꺼내더니, 줄기 사이사이에 소금을 뿌렸다. 손이 빨랐다. 잎을 한 장씩 들추는 손가락 끝이 젖은 종이를 넘기듯 가벼웠다. 소금이 고르게 박힌 배추 한 쪽이 차곡차곡 쌓였다. 정 여사가 팔짱을 꼈다.
“어디서 배웠어?”
“부산 한식당 주방에서 십 년 있었습니더. 김치 담당이었습니더.”
“근데 왜 이런 일을 해?”
“사장님이 가게 문을 닫으셨습니더.”
“됐어. 너는 오늘 내 옆이야.”
지훈은 장갑을 끼다가 손가락 하나를 엉뚱한 구멍에 넣었고, 세라는 장갑을 받자마자 대야 앞에 쪼그려 앉았다. 은호만 장갑을 든 채 서 있었다. 서진이 툇마루 끝에 앉으며 그를 보았다.
“팀장님, 7조에 김장하지 말라는 말은 없어요.”
“3조에 피경호인 반경 3미터를 비우지 않는다고 있습니다.”
“그럼 3미터 안에서 하세요. 저도 할 거니까.”
그녀가 툇마루에서 내려와 대야 하나 앞에 앉았다. 은호는 그 옆 대야에 섰다. 정확히 1미터였다. 그는 장갑을 꼈다. 고무 안쪽에 남은 활석 가루가 손가락 사이에서 미끄러웠다.
*
열 시가 되자 배추 절이는 손이 스무 개를 넘었다. 고모 둘이 장독대 옆에서 무를 채 썰었고, 둘째 오빠 한태오가 안채 대청에서 와인 잔에 막걸리를 따라 마셨다. 서른여섯, 와인 수입사를 한다는 사람이었다. 그는 집안 싸움에 한 번도 끼지 않는 것으로 유명했다.
“서진아, 너 경호원 넷 데려왔다며? 정 여사님이 아주 좋아하셔. 일손이 넷이나 늘었다고.”
“오빠는 일 안 해?”
“나는 맛을 봐. 그게 내 일이야. 와인도 그렇게 팔아.”
정 여사가 대청 쪽으로 무청 한 다발을 던졌다. 한태오의 무릎에 떨어졌다. 그가 무청을 들고 한숨을 쉬더니 마당으로 내려와 장갑을 꼈다. 친척들이 웃었다.
서진은 배추 한 쪽을 대야에서 꺼내다가 손을 떨었다. 11월 아침 소금물은 얼음보다 차가웠다. 장갑 손목 틈으로 물이 들어가 손목이 빨갛게 얼어 있었다. 은호는 그 손목을 보았다. 그리고 자기 대야를 버려두고 부엌으로 들어갔다가, 김이 오르는 주전자를 들고 나왔다. 그녀의 대야에 뜨거운 물을 조금 부었다. 소금물이 미지근해졌다.
“그럼 배추 덜 절여져요.”
“한 대야만 덜 절여도 됩니다.”
“동구 씨가 화낼 거예요.”
멀리서 동구가 배추를 든 채 이쪽을 보았다. 화내지 않았다. 대신 엄지를 들었다가, 정 여사에게 들켜 엉덩이를 한 대 맞았다.
*
점심 무렵, 대문 앞에 검은 차 세 대가 섰다. 한승원이 먼저 내렸고, 강철규와 경호원 둘이 뒤따랐다. 승원은 코트를 벗어 강철규에게 건네고, 그 자리에서 셔츠 소매를 걷었다. 걷은 소매가 너무 깔끔해서 오늘 아침에 다림질했다는 게 보였다.
“정 여사님, 늦었습니다. 제 몫은 남겨 두셨죠?”
“네 몫은 저기 있다.”
정 여사가 마당 구석을 가리켰다. 다 절인 배추를 헹굴 고무 대야 하나가 비어 있었다. 승원이 웃으며 그쪽으로 갔다. 그는 대야 앞에 서기 전에 마당 한가운데에서 걸음을 멈췄다. 친척들이 그를 보았다. 그는 그 시선을 기다렸다는 듯 목소리를 높였다.
“다들 계신 김에 한 말씀 드릴게요. 아버지 안 계시니까 제가 드려야겠어요.”
배추를 뒤집던 손들이 멈췄다. 서진은 대야 앞에서 일어섰다. 배추 더미가 두 사람 사이에 있었다. 승원은 더미 너머에서 동생을 보았다.
“서진이가 요즘 많이 힘들어요. 지난주에 차 사고도 났다고 하고, 계단에서 다쳐서 업혀 나왔다는 사진도 돌고. 직원 단톡방에서요. 다들 보셨을 거예요.”
고모 하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고모는 무를 썰던 칼을 내려놓았다.
“이런 상태로 연말 주총까지 혼자 다 감당하는 건 무리예요. 위임장 하나면 되는데, 얘가 고집을 부려요. 제가 뭐 빼앗자는 것도 아니고요.”
“빼앗자는 거잖아요.”
서진의 목소리가 마당에 퍼졌다. 그녀는 고무장갑을 벗지 않은 채 배추 더미 앞으로 걸어갔다. 장갑 끝에서 소금물이 뚝뚝 떨어졌다. 은호가 1미터 뒤를 따라갔다.
“오빠, 그 사고는 브레이크였어요. 누가 손을 댔어요. 정비사가 그렇게 말했어요.”
마당이 조용해졌다. 장독대 위로 까치 한 마리가 내려앉았다가 날아갔다. 승원의 얼굴에 걱정이 떠올랐다. 너무 빨리 떠올랐다.
“그럼 경찰에 신고했어?”
서진의 입이 닫혔다.
“누가 차에 손을 댔으면 그건 큰 범죄야. 살인미수야. 신고했어야지. 왜 안 했어?”
“그건…….”
“기사 날까 봐? 주총 전에 소란 날까 봐? 서진아, 네 목숨보다 주총이 중요해? 그게 정상이야?”
승원은 친척들을 돌아보았다. 고모 하나가 서진을 안쓰럽게 보았다. 그 눈빛이 서진에게는 가드레일보다 아팠다. 신고하지 않은 것은 서진의 선택이었고, 승원은 그 선택을 그녀의 정신 상태로 바꿔 놓았다. 은호는 서진의 어깨가 아주 조금 내려가는 것을 보았다. 그는 1미터 거리에서 한 걸음 앞으로 나갔다. 배추 더미 바로 앞이었다.
“신고는 제가 막았습니다.”
승원의 시선이 은호에게 옮겨 갔다.
“경호팀 판단이었습니다. 수사가 시작되면 상무님 동선이 수사 기록에 남습니다. 그 기록을 볼 수 있는 사람이 누군지 저희가 모릅니다.”
거짓말이었다. 그 밤 정비소에서 신고하자고 한 사람은 은호였다. 서진이 그를 돌아보았다. 승원은 은호를 한참 보더니, 처음 웃는 것처럼 웃었다.
“경호원이 피경호인보다 주총을 더 챙기네. 계단에서 업는 것도 그렇고. 서진아, 네 경호원 참 충성스럽다.”
“김장 날 싸우면 김치가 쉰다.”
정 여사의 목소리였다. 그녀는 장독대 앞에서 김칫소 대야를 끌어당기며 말했다. 누구 편도 들지 않는 목소리였다.
“승원이 너는 헹궈. 서진이 너는 앉아. 발목 부은 거 다 보여.”
승원은 웃으며 빈 대야 앞으로 갔다. 강철규가 그 뒤에 섰다. 강철규는 마당을 한 번 둘러보다가 지훈과 눈이 마주쳤다. 반 초였다. 지훈이 먼저 눈을 내렸다.
*
오후 세 시, 서진은 장독대 뒤 수돗가에서 장갑을 벗고 손을 씻었다. 은호가 3미터 뒤에 섰다가, 그녀가 손짓하자 1미터로 왔다.
“아까 왜 그랬어요?”
“친척분들 앞에서 상무님이 판단을 못 하시는 사람이 되면, 주총장 가기 전에 지는 겁니다.”
“그럼 팀장님이 판단을 못 하는 경호원이 되잖아요.”
“경호원은 바꾸면 됩니다.”
서진이 수도꼭지를 잠갔다. 물소리가 끊기자 마당의 웃음소리가 담 너머에서 들려왔다. 그녀가 젖은 손을 털다가 은호의 정장 앞자락에 물방울을 튀겼다. 일부러였다.
“4조. 거짓 보고 금지. 팀장님 아까 친척들한테 거짓말했어요.”
“피경호인에게 한 게 아닙니다.”
“그런 해석은 누가 가르쳐 줬어요?”
“상무님이 7조 해석하시는 걸 보고 배웠습니다.”
서진이 웃음을 터뜨렸다. 웃다가 발목을 디디고 얼굴을 찡그렸다. 은호가 반사적으로 손을 뻗었다가, 그녀의 팔꿈치 한 뼘 앞에서 멈췄다. 그녀가 그 손을 내려다보았다. 잡지 않았고, 밀어내지도 않았다.
정 여사가 수돗가로 걸어왔다. 손에 무언가를 개켜 들고 있었다. 빛바랜 꽃무늬 앞치마였다. 주머니 하나가 실밥이 터진 채 비스듬히 매달려 있었다.
“네 엄마 거다. 해마다 이거 입고 저기서 소 버무렸어. 주머니는 네가 일곱 살 때 매달려서 찢은 거야. 네 엄마가 안 꿰매고 그냥 뒀어. 네 손자국이라고.”
서진은 앞치마를 받았다. 받는 손이 젖어 있어서 천에 물자국이 번졌다.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것을 입었다. 끈을 등 뒤로 묶는 손이 두 번 미끄러졌다. 은호가 뒤에서 그 끈을 대신 묶었다. 매듭 하나. 그의 손가락이 그녀의 등에 닿지 않게, 천만 잡았다.
*
해 질 무렵, 김칫소가 대야 넷에 가득 찼다. 고춧가루와 젓갈과 생강과 마늘 냄새가 마당 위에 낮게 깔렸다. 친척들이 대청에 둘러앉아 수육을 기다렸고, 서진은 엄마의 앞치마를 입은 채 대청 끝에 앉아 고모들과 말을 섞고 있었다. 그녀의 남색 코트는 대청 옷걸이에 걸려 있었다.
은호는 마당 가장자리를 따라 걸었다. 대청 옷걸이 앞을 지날 때, 왼쪽 귀의 이어폰에서 지익, 하는 소리가 났다. 팀 채널의 잡음과는 결이 달랐다. 짧게 끊기는 소리가 아니라 낮게 깔리며 숨 쉬듯 길어지는 소리였다. 그는 걸음을 멈추고 한 발 물러섰다. 잡음이 줄었다. 다시 한 발 다가섰다. 잡음이 커졌다.
그는 무전기 송신 버튼을 누르지 않았다. 대청 반대편에서 지훈이 수육 접시를 나르다가 이쪽을 보았다. 지훈의 손에 든 접시가 아주 조금 기울었고, 기름 한 방울이 마루에 떨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