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5,204자)

1미터

재벌 3세의 경호원은 연애 금지 조항을 어겼다 · 오세림

한서진은 차은호의 전역 기록을 세 번 읽었다. 경호업체가 보낸 후보 다섯 명의 서류 가운데 그의 것만 한 장이 더 붙어 있었다. 상관 지시 불이행으로 징계, 이후 전역 지원. 업체 대표는 그 장을 빼고 보내려다 실수로 넣었다고 전화로 사과했다. 서진은 사과를 받지 않고 그 사람으로 하겠다고 했다.

11월 20일 금요일 오후 세 시, 혜화동에 있는 그룹 병원 한성의료원으로 가는 차 안에서 서진은 그 장을 다시 떠올렸다. 은호는 운전석에 앉아 있었고, 백미러에 그의 눈이 반쯤 비쳤다. 그는 사이드미러, 백미러, 앞 유리, 다시 사이드미러를 정해진 순서로 보았다. 사흘 동안 그 순서가 한 번도 바뀌지 않았다. 서진은 처음엔 그게 우스웠고, 둘째 날에는 그게 안심이 됐고, 오늘은 그 순서가 깨지는 걸 보고 싶었다.

“팀장님은 운전하면서 노래 안 들어요?”

“안 듣습니다.”

“무슨 노래 좋아하는지만 말해 줘요. 안 틀어도 돼요.”

“군가 말고는 기억나는 게 없습니다.”

조수석의 동구가 고개를 돌렸다.

“팀장님 노래방 가면 애국가 4절까지 부르십니더. 제가 봤습니더.”

“동구 씨.”

“4절 가사 다 아는 사람 처음 봤습니더.”

서진이 웃음을 참지 못했다. 웃다가 접질린 발목이 시트에 닿아 얼굴을 찡그렸고, 백미러 속 은호의 눈이 순서를 건너뛰고 그녀에게 왔다. 반 초였다. 그는 곧 사이드미러로 돌아갔다. 서진은 창밖을 보면서 그 반 초를 손가락으로 세었다.

*

한성의료원 18층 특실 복도는 카펫이 두꺼워서 발소리가 나지 않았다. 소독약 냄새 위에 누군가 갖다 놓은 백합 냄새가 덮여 있었다. 서진은 그 냄새가 싫었다. 엄마 장례식장에도 백합이 있었다.

병실 문 앞에서 그녀는 걸음을 멈췄다. 은호도 3미터 뒤에서 멈췄다.

“오늘은 1미터로 해 주세요.”

그는 이유를 묻지 않았다. 다가와 그녀의 왼쪽 어깨 뒤에 섰다. 정장 천에서 바깥 공기 냄새가 아직 났다. 서진은 손잡이를 잡은 자기 손을 내려다보았다. 손등의 힘줄이 서 있었다. 손을 한 번 펴고 문을 열었다.

아버지 한명규는 침대 위에서 눈을 뜨고 천장을 보고 있었다. 일흔넷. 봄에 쓰러진 뒤로 오른쪽 몸을 못 쓰고, 말은 단어 두셋을 겨우 이었다. 침대 맞은편 창가 소파에서 승원이 일어났다. 그는 사과를 깎고 있었다. 껍질이 한 줄로 길게 늘어져 쟁반 위에 둥글게 쌓여 있었다.

“왔니. 아버지가 너 기다리셨다.”

“오빠가 깎은 사과는 아버지 못 드세요. 씹는 거 아직 안 돼요.”

“알아. 내가 먹으려고 깎았어.”

승원은 사과 한 조각을 입에 넣고, 남은 사과를 접시째 은호에게 내밀었다. 은호는 받지 않았다. 승원이 접시를 협탁에 내려놓고 웃었다.

“경호원이 사과도 안 먹나.”

“근무 중입니다.”

“사과 먹는다고 근무가 깨지나? 계단에서 업는 건 되고?”

서진은 아버지 침대 왼쪽에 앉아 아버지의 손을 잡았다. 마른 손이었다. 손톱이 길게 자라 있었다. 간병인이 깎아 드리지 않은 것이 아니라 아버지가 깎지 못하게 손을 빼는 거라고, 지난주에 간병인이 말했다. 승원이 침대 오른쪽으로 와서 섰다. 아버지를 사이에 두고 남매가 마주 보았다.

“서진아. 간단하게 하자. 위임장 써. 대신 바이오는 네가 가져. 따로 떼어 줄게. 지분 정리까지 내가 다 해 줄게. 너 바이오 좋아하잖아.”

“바이오는 원래 제가 키웠어요. 오빠가 떼어 줄 게 아니에요.”

“주총에서 안건이 통과되면 바이오는 홀딩스 밑에 남아. 홀딩스는 내가 가져. 그럼 네가 키운 회사가 내 밑에 있게 돼. 그게 싫으면 지금 떼어 가라는 거야.”

“통과 안 되면요?”

“통과돼.”

“제가 반대표 던지면 안 돼요.”

“네가 그날 그 자리에 있으면.”

승원이 말을 멈췄다. 말을 멈춘 자리에 강변북로의 가드레일 소리가 들어찼다. 서진은 아버지의 손을 쥔 손가락에 힘을 주었다. 아버지의 눈이 천장에서 내려와 두 자식을 번갈아 보았다. 말을 하려는지 입술이 움직였다. 소리는 나오지 않았다.

“오빠. 그날 밤 브레이크, 오빠가 했어요?”

“무슨 브레이크?”

“강변북로요.”

“너 사고 났어? 왜 말 안 했어? 아버지, 들으셨어요? 얘가 사고가 났대요.”

승원의 목소리가 한 칸 높아졌다. 놀라는 연기가 너무 깔끔해서, 서진은 오히려 손끝이 차가워졌다. 그녀의 어깨 뒤 1미터에서 은호가 아주 작게 자세를 바꿨다. 구두 밑창이 카펫을 누르는 소리도 나지 않았지만, 서진은 그가 움직인 걸 알았다. 그가 거기 있다는 게 등으로 느껴졌다.

“서진아, 내가 걱정돼서 하는 말이야. 너 요즘 이상한 사람을 옆에 두고 다닌다. 저 친구가 군에서 왜 나왔는지는 알아?”

“알아요.”

승원의 눈이 처음으로 웃음 없이 그녀를 보았다.

“알고 뽑았어요. 상관이 시킨 걸 안 한 사람이라서요. 오빠 옆에 있는 사람들은 시키면 다 하잖아요.”

은호가 숨을 들이켰다. 소리가 날 만큼은 아니었다. 서진은 돌아보지 않았다. 돌아보면 그의 얼굴을 보게 되고, 그 얼굴이 무엇을 하고 있을지 그녀는 아직 볼 자신이 없었다.

그때 아버지의 손가락이 움직였다. 서진의 손 안에서, 아버지의 검지가 그녀의 손바닥을 두 번 눌렀다. 아주 약하게, 그러나 두 번. 그녀가 어릴 때 엄마 몰래 사탕을 쥐여 주던 손이 그렇게 눌렀다. 비밀이라는 신호였다.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는 신호였다. 서진은 아버지를 내려다보았다. 아버지는 다시 천장을 보고 있었다.

승원은 그 손을 보지 못했다. 그는 협탁 위 사과 접시를 들고 문 쪽으로 걸어갔다.

“생각해 봐. 주총까지 한 달 남았어. 한 달이면 사람 마음 여러 번 바뀐다.”

문이 닫혔다. 백합 냄새가 그 바람에 한 번 흔들렸다. 서진은 아버지 손을 쥔 채 한참 앉아 있었다. 은호는 1미터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아까 그 말이요.”

그녀가 앞을 본 채 말했다.

“기록 읽은 거. 기분 나빴어요?”

“아닙니다.”

“4조 기억나요? 거짓 보고.”

“기분이 이상했습니다. 나빴던 건 아닙니다.”

“그럼 됐어요.”

*

지하 3층 주차장은 천장이 낮고 형광등 불빛이 누랬다. 서진은 뒷좌석에 앉아 발목에 압박붕대를 다시 감고 있었다. 은호는 차 밖에서 동구에게 엘리베이터 쪽을 맡기고 차 주위를 한 바퀴 돌았다. 그가 운전석 문을 잡았을 때 기둥 뒤에서 강철규가 나왔다.

서진은 창문을 손가락 두 마디만큼 내렸다. 그녀가 들어도 되는 이야기인지 알 수 없었지만, 들어야 하는 이야기라는 건 알았다.

“차 중사. 막내 아가씨가 네 기록을 읽었다더라.”

“들으셨습니까?”

“병실 문이 얇아. 한성의료원은 우리 그룹이 지었는데, 문을 얇게 지었어.”

강철규는 은호 앞 2미터에 서서 담배를 꺼냈다가 주차장 금연 표시를 보고 도로 넣었다. 그 손이 아까운 듯 담뱃갑을 한 번 쥐었다 놓았다.

“그날 내 말을 들었으면 너 지금 소령 달고 있어. 내 옆에서.”

“그날 실장님 말을 들었으면 그 집 사람들이 지금 없습니다.”

서진은 붕대를 감던 손을 멈췄다. 그 집 사람들. 그게 무엇인지 그녀는 몰랐다. 은호의 기록에는 지시 불이행이라고만 적혀 있었고, 무슨 지시였는지는 한 글자도 없었다.

“너는 아직도 그게 네가 옳았다고 생각하지.”

“생각하지 않습니다. 압니다.”

“그래서 네가 지금 어디 있냐? 막내 아가씨 계단에서 업고 다니고, 단톡방에 사진 돌고. 옳았던 사람이 이렇게 산다.”

강철규가 한 걸음 다가왔다. 은호는 물러나지 않았다. 강철규는 은호 어깨 너머로 뒷좌석 창을 힐끗 보았다. 손가락 두 마디만큼 열린 그 틈을 보고, 그는 일부러 목소리를 조금 높였다.

“네 팀에 빈 데가 있더라, 은호야. 사람은 다 빈 데가 있어. 너만 없는 줄 알지.”

그는 돌아서서 걸어갔다. 구두 소리가 낮은 천장에 부딪혀 두 번씩 울렸다. 은호가 운전석에 앉았다. 서진은 창을 다 올렸다. 차 안이 조용해지자 그녀는 들었던 것을 들었다고 말하지 않기로 했다. 대신 물었다.

“팀장님, 애국가 4절이요. 첫 줄이 뭐예요?”

은호가 백미러로 그녀를 보았다. 순서를 건너뛰었다. 이번에는 일 초였다.

“이 기상과 이 맘으로 충성을 다하여.”

“부르지는 마요.”

“안 부릅니다.”

*

저녁 여덟 시, 서진은 빌라 주방 식탁에서 윤세라와 마주 앉아 귤을 까고 있었다. 은호는 거실 창가에서 경호업체 대표와 통화 중이었고, 동구는 현관에, 지훈은 지하 주차장에 있었다. 세라는 귤껍질을 꽃 모양으로 네 갈래 벌려 놓고 알맹이에는 손을 대지 않았다.

“세라 씨는 팀장님이랑 몇 년 일했어요?”

“이 년이요. 근데 오늘 처음으로 운전대 뺏겼어요.”

“그거 화났어요?”

“화났죠. 근데 팀장님 말이 맞아서 더 화났어요.”

서진은 귤 한 쪽을 입에 넣다가 멈췄다. 정비소에서 자기가 했던 생각과 같은 말이었다.

“팀 단톡방 이름이 뭐예요?”

세라가 휴대전화를 뒤집어 보여 주었다. 「3미터」였다. 그 아래 지훈이 오늘 오후에 바꿔 보려다 은호에게 막힌 흔적이 남아 있었다. 지훈 님이 방 이름을 「1미터♡」로 바꾸었습니다. 차은호 님이 방 이름을 「3미터」로 바꾸었습니다. 그 사이가 사십 초였다.

서진은 귤을 삼키고 나서야 웃었다. 세라도 따라 웃다가 목소리를 낮췄다.

“상무님. 팀장님은 원래 저렇게 안 붙어요. 1미터는 계단에서만 하는 거예요. 병원 복도에서 1미터로 서는 거 오늘 처음 봤어요.”

“제가 해 달라고 했어요.”

“알아요. 그래서 말씀드리는 거예요. 저쪽도 그걸 봐요.”

세라는 그제야 귤 한 쪽을 떼어 입에 넣었다. 서진은 거실 창가의 등을 보았다. 통화하는 내내 그 등은 골목 쪽을 향해 있었다.

*

그날 밤 열한 시가 넘어 서진은 침실 창가에서 골목을 내려다보았다. 잠이 오지 않았다. 아버지의 검지가 손바닥을 누른 자리가 아직 간지러웠다. 골목 아래 가로등 밑에서 백지훈이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검은 승용차 한 대가 골목 끝에 섰다가, 지훈이 다가가 창 안으로 무언가를 건네받자 바로 떠났다. 배달 음식이겠거니, 서진은 생각했다. 지훈은 야식을 자주 시켰고, 동구가 그때마다 혀를 찼다.

다음 날 아침 여덟 시, 현관 옷걸이 앞. 지훈이 서진의 남색 코트를 내려 들고 있었다.

“상무님, 이거 안감 단추가 하나 떨어졌어요. 제가 달아 놨어요. 저 바느질 잘해요. 군대에서 배웠어요. 군대에서는 단추 떨어지면 진짜 큰일 나거든요. 그래서 제가 늘 실이랑 바늘을 들고…….”

“고마워요, 지훈 씨.”

서진은 코트를 받았다. 지훈의 손가락이 마지막까지 코트 안감 아래쪽에 남아 있다가 떨어졌다. 그녀는 코트를 입고 단추를 채웠다. 왼쪽 옆구리 안감 아래, 단추 하나가 다른 단추들보다 조금 두껍게 만져졌다.

3화는 어땠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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