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5,068자)
업는 건 괜찮죠
재벌 3세의 경호원은 연애 금지 조항을 어겼다 · 오세림
11월 18일 수요일 아침 여섯 시 반, 한남동 빌라 지하 주차장에는 어제의 승합차 대신 회색 세단 한 대가 서 있었다. 경호업체가 새벽에 보내 준 예비 차량이었다. 은호는 운전석 문을 열기 전에 차 밑에 손전등을 비추고 한 바퀴를 돌았다. 콘크리트 바닥에 무릎을 대자 밤새 고인 냉기가 정장 바지를 뚫고 올라왔다.
“오늘은 제가 몹니다.”
윤세라가 차 키를 쥔 손을 내리지 않았다. 스물일곱, 카레이서가 되려다 돈이 떨어져 경호로 넘어온 사람이었다. 어젯밤 정비소에서부터 그녀는 운전대를 놓지 못하던 자기 손가락을 몇 번이나 내려다보았다.
“제가 못 몰아서 그런 거예요?”
“어제 잘 몰았어. 세라 씨 아니었으면 가드레일이 아니라 한강이었어.”
“그럼 왜요?”
“어제 그 차를 몰던 사람이 오늘 또 몰면, 누가 노리는지 저쪽이 다 알아.”
세라는 키를 넘겼다. 넘기면서 은호의 손바닥에 키를 조금 세게 눌렀다. 은호는 그 힘을 그대로 받았다. 뒤에서 마동구가 커다란 보온병을 들고 내려왔다.
“팀장님, 상무님이 어제 맨발로 주무셨다 캐서, 제가 생강차 끓였습니더. 생강은 껍질 안 깠습니더. 껍질에 약이 다 있다 아입니꺼.”
“동구 씨는 경호원이지 집사가 아니야.”
“집사는 생강 껍질 깝니더. 저는 안 깝니더.”
*
서진은 일곱 시 정각에 내려왔다. 왼손에 서류 가방, 오른손에 어제 잃어버린 구두와 같은 모양의 새 구두를 들고 있었다. 굽이 7센티미터였다.
“오늘 설명회는 취소하셔야 합니다.”
“안 해요.”
“어제 차에 손을 댄 사람이 오늘 가시는 곳을 압니다.”
“연기금 담당자 열한 명이 와요. 국민 노후 자금을 굴리는 사람들이요. 그 사람들이 주총에서 누구 편을 드는지에 따라 오빠 안건이 살기도 하고 죽기도 해요. 제가 오늘 안 나가면, 그 사람들은 제가 벌써 겁먹었다고 적어요.”
“겁먹으셔도 됩니다.”
“겁은 먹었어요. 안 보여 주는 거예요.”
서진은 세단 뒷문을 직접 열었다. 은호가 열어 주기 전에 열었고, 은호는 그것을 막지 않았다. 그녀가 차에 오르면서 구두 굽을 문틀에 한 번 부딪쳤다.
“그 구두는 계단에서 불리합니다.”
“계단 갈 일 없잖아요. 13층이에요. 엘리베이터 타요.”
“그 건물은 한성 소유입니다. 관리와 보안을 한성 경호실이 맡습니다.”
서진이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녀는 그 사실을 알고 있었고, 은호가 그것을 입 밖에 낸 게 싫었다. 한남대교를 건너는 동안 그녀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대신 동구가 건넨 생강차를 한 모금 마시고 얼굴을 찡그렸다.
“이거 생강이에요, 아니면 생강을 씹어 먹으라는 거예요?”
“껍질 째라서 그렇습니더.”
“동구 씨, 다음엔 껍질 까요. 계약서에 넣을게요.”
*
여의도 한성파이낸스타워 13층 컨벤션홀은 창이 남쪽으로 나 있어서, 오전 열 시에 이미 한강 쪽 햇빛이 테이블 위로 길게 들어와 있었다. 연기금과 자산운용사에서 온 사람들이 생수병 뚜껑을 비틀어 열고, 노트북을 펴고, 서로 명함을 바꿨다. 은호는 무대 왼쪽 벽 앞에 섰다. 연단까지 3미터. 백지훈은 뒤쪽 출입문 옆에서 무전기를 붙들고 있었고, 동구는 복도에서 엘리베이터 여섯 대 앞을 오갔다.
열 시 사십 분, 서진이 화면에 그룹 지배구조 그림을 띄웠을 때였다.
천장 스피커에서 화재경보가 울렸다. 높고 끊김 없는 소리였다. 소리가 귀로 들어오는 게 아니라 이 사이로 박히는 것 같았다. 스프링클러는 터지지 않았고, 연기 냄새도 없었다. 은호는 이어폰을 손가락으로 눌렀다.
“동구 씨, 엘리베이터.”
“여섯 대 다 섰습니더. 버튼 눌러도 불이 안 들어옵니더.”
“지훈 씨, 방재실 채널.”
“방재실은 조사 중이라고만 해요. 같은 말을 세 번 했어요. 녹음해 놓은 것처럼요.”
청중이 일어섰다. 생수병이 쓰러지고 의자 다리가 바닥을 긁었다. 은호는 연단으로 올라가 서진의 왼쪽에 붙었다. 1미터. 그녀는 노트북을 덮으며 마이크에 대고 말했다.
“여러분, 질문은 계단에서 받겠습니다. 13층이니까 질문 열두 개는 받을 수 있겠네요.”
몇 사람이 웃었다. 그 웃음 덕분에 출입문 쪽으로 몰리던 걸음이 반 박자 느려졌다. 은호는 그녀를 보았다. 그녀는 은호를 보지 않고 서류 가방을 집었다.
*
비상계단은 콘크리트 벽에 페인트를 덧칠한 좁은 통로였다. 층마다 꺾이는 자리에 초록색 비상구 표시등이 붙어 있었고, 표시등 아래로 사람들이 두 줄로 내려갔다. 위층 사무실에서 쏟아진 사람들까지 섞이자 계단은 금세 어깨와 어깨로 찼다. 땀 냄새와 누군가의 향수와 복사용지 냄새가 계단통 안에서 데워졌다.
열 시 사십사 분. 11층과 10층 사이 꺾이는 자리에서 서진의 왼쪽 구두 굽이 계단 모서리에 걸렸다. 그녀의 몸이 앞으로 기울었고, 은호가 그녀의 팔꿈치를 잡아 세웠다. 구두 한 짝이 계단 사이 틈으로 떨어져 두 층 아래까지 굴러갔다. 서진이 숨을 짧게 들이켰다. 발목이었다.
“디딜 수 있습니까?”
그녀는 한 번 디뎌 보았다. 입술을 깨물었다.
“있어요. 천천히는.”
“천천히는 안 됩니다. 뒤에서 사람들이 밉니다.”
은호는 그녀 앞에서 등을 돌리고 무릎을 굽혔다. 서진은 그 등을 이 초쯤 내려다보았다. 뒤에서 누군가 “앞에 왜 안 가요?” 하고 소리쳤다.
“7조.”
서진이 말했다.
“업는 건 괜찮죠? 업지 말라는 말은 안 썼으니까.”
“쓰신 분이 판단하십시오.”
“판단했어요. 업으세요.”
그녀가 등에 올라왔다. 생각보다 가벼웠고, 생각보다 따뜻했다. 그녀의 팔이 그의 목 앞으로 감겨 들어왔다가 숨이 막힐 만큼 조여 오자 그가 말했다. “어깨를 잡으십시오.” 팔이 어깨로 내려갔다. 그녀의 턱이 그의 왼쪽 귀 바로 옆에 닿았다. 이어폰 줄이 그녀의 뺨에 눌렸다.
“이 테이프는 뭐예요? 까끌까끌해요.”
“나중에 말씀드리겠습니다.”
“나중이 너무 많아요, 팀장님은.”
10층, 9층. 은호는 계단 난간 쪽을 비우고 벽 쪽으로 붙어 내려갔다. 업힌 사람의 머리가 난간 밖으로 나가면 안 됐다. 무릎이 계단 하나를 디딜 때마다 그녀의 무게가 정확히 두 박자 늦게 따라 내려왔다. 이어폰에서 지훈의 목소리가 쉬지 않고 나왔다.
“팀장님, 지금 8층이세요? 7층? 동구 형이 상무님 구두 주웠대요. 한 짝이요. 두 짝 다 들고 있대요. 아니, 한 짝은 원래 들고 있던 거고, 그러니까 지금 동구 형 손에 구두가…….”
“지훈 씨.”
“네.”
“1층 비상구.”
“아, 그게. 1층 비상구 앞에 한성 경호실 사람들이 서 있대요. 동구 형이 봤대요. 사람들을 지하 주차장 쪽으로 돌리고 있대요.”
은호는 걸음을 늦추지 않았다. 등 뒤에서 서진의 숨이 그의 목덜미에 닿았다가 떨어졌다. 그녀가 귀 옆에서 작게 물었다.
“무거워요?”
“아닙니다.”
“거짓말하면 7조 말고 다른 조에 걸려요. 4조. 피경호인에게 거짓 보고를 하지 않는다.”
“조금 무겁습니다.”
“그건 서류 가방이에요.”
뒤를 따라오던 중년 남자 하나가 숨을 헐떡이며 웃었다. 국민연금 쪽 명찰을 단 사람이었다. 그가 계단을 내려가면서 서진에게 물었다. “상무님, 아까 지배구조 그림 셋째 칸은 뭡니까?” 서진이 은호의 등 위에서 대답했다. “셋째 칸은 큰오빠가 가져가고 싶어 하는 칸이에요. 금융이요.” 남자가 고개를 끄덕이며 수첩에 뭔가를 적었다. 계단에서 받은 첫 질문이었다.
*
열 시 오십일 분. 1층 비상구 앞은 철문 하나를 사이에 두고 막혀 있었다. 문 앞에 검은 정장 사내 셋이 서서 손바닥으로 왼쪽 통로를 가리켰다. 지하 주차장으로 내려가는 계단이었다. 그 셋 한가운데에 강철규가 있었다. 흉터 난 눈썹이 비상등 초록빛을 받아 더 하얗게 보였다.
“차 중사. 그쪽 아니다. 1층 밖은 소방차 때문에 막혔어. 지하로 내려가.”
“밖에 소방차 소리 안 납니다.”
“곧 온다.”
“곧 오는 소방차 때문에 지금 문을 막습니까?”
강철규가 은호의 등에 업힌 서진을 보았다. 맨발 한쪽이 은호의 옆구리에서 흔들렸다. 그는 웃지 않았다.
“업고 다니는 것도 경호냐?”
“지하 주차장에 누가 기다립니까?”
“명령 거부는 네 특기였지.”
“문 여십시오.”
“안 열면?”
은호는 서진을 조심스럽게 계단 난간 옆에 내려 세웠다. 그녀가 다친 발을 들고 난간을 붙잡았다. 동구가 뒤에서 구두 두 짝을 든 채 내려와 그녀 옆에 섰다. 은호는 강철규 앞으로 한 걸음 들어갔다. 두 사람의 가슴 사이가 주먹 하나만큼 남았다. 계단을 내려오던 사람들이 그 둘을 보고 멈췄고, 멈춘 사람들 뒤로 사람들이 계속 내려와 쌓였다. 누군가 “밀지 마요!” 하고 소리쳤다.
“실장님 뒤로 지금 백 명이 쌓이고 있습니다. 여기서 누가 넘어지면 실장님이 막은 문 앞에서 넘어진 겁니다. 그 영상은 실장님 얼굴로 나갑니다.”
강철규의 시선이 은호 어깨 너머로 갔다. 계단 위로 휴대전화 수십 개가 들려 있었다. 그의 턱 근육이 한 번 움직였다. 그는 철문 손잡이를 쥐고 있던 부하의 손목을 툭 쳤다. 문이 밖으로 열렸다. 11월 아침 공기가 계단통 안으로 밀려 들어왔다. 차갑고, 매연과 은행잎 냄새가 섞여 있었다.
은호는 서진을 다시 업었다. 문을 지나면서 강철규 옆을 스칠 때 강철규가 낮게 말했다.
“다음엔 문이 안 열린다.”
“다음에도 제가 엽니다.”
*
그날 밤 아홉 시, 한남동 빌라 거실. 서진은 소파에 앉아 얼음주머니를 발목에 대고 있었다. 동구가 껍질을 깐 생강차를 다시 끓여 왔고, 서진이 한 모금 마시고 이번에는 고개를 끄덕였다. 동구가 주방 쪽으로 돌아서며 주먹을 쥐었다.
지훈이 태블릿을 들고 은호 옆으로 왔다. 얼굴이 하얬다.
“팀장님. 이거 그룹 직원 익명 단톡방이에요. 사천 명 넘게 들어가 있는 데요.”
화면 속 사진은 비상계단 초록 불빛 아래에서 찍혀 있었다. 검은 정장 사내의 등에 업힌 여자, 그 여자의 팔이 사내의 어깨에 감겨 있고, 여자의 맨발 한쪽이 흔들리는 장면이었다. 얼굴은 흐렸지만 누군지 아는 사람에게는 충분히 선명했다. 사진 아래에 댓글이 오백 개를 넘어 있었다. 맨 위 댓글은 이랬다.
막내 상무님 경호원 누구임? 경호원이 저렇게 생겨도 됨?
서진이 소파에서 고개를 돌려 화면을 보았다. 얼음주머니에서 물이 한 방울 떨어져 그녀의 발등을 타고 흘렀다.
“두 번째 댓글 읽어 주세요.”
지훈이 침을 삼켰다.
“사진 올린 사람이요. 저거 업무 아닌 거 같은데? 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