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5,312자)
밑줄 두 줄
재벌 3세의 경호원은 연애 금지 조항을 어겼다 · 오세림
2026년 11월 17일 화요일 아침 일곱 시, 한남동 언덕 꼭대기 빌라 3층 식탁에는 커피 두 잔과 계약서 한 부가 놓여 있었다. 한 잔은 김이 오르고 있었고, 다른 한 잔은 손도 대지 않은 채 식어 가고 있었다. 식은 쪽이 차은호 몫이었다.
“일곱 쪽이에요. 다 읽으셨어요?”
한서진은 묻지 않는 사람처럼 물었다. 회색 니트 소매를 손목까지 걷어 올린 채, 볼펜 한 자루를 식탁 위로 밀어 보냈다. 볼펜은 은호의 손등 앞에서 정확히 멈췄다. 몇 번 연습해 본 솜씨였다.
“다 읽었습니다.”
“7조 펴 주세요.”
은호는 셋째 장을 넘겼다. 종이가 두꺼웠다. 법무팀이 쓰는 매끈한 종이가 아니라, 손으로 넘길 때 결이 느껴지는 미색 종이였고, 조항마다 끝에 작은 점이 하나씩 찍혀 있었다. 누가 한 줄씩 소리 내 읽으면서 마침표를 다시 눌러 쓴 자국이었다. 7조는 한 줄이었다.
피경호인과 연애하지 않는다.
“밑줄 그으세요. 두 줄로.”
“한 줄짜리 조항에 밑줄 두 줄입니까?”
“중요한 건 두 번 긋는 거예요. 학교 다닐 때 안 그랬어요?”
“학교 다닐 때는 안 그었습니다.”
“그럼 오늘부터 그으세요.”
은호는 볼펜 뚜껑을 뺐다. 첫 줄은 곧았고, 둘째 줄은 첫 줄과 2밀리미터 떨어져 나란히 갔다. 서진이 고개를 기울여 그 두 줄을 들여다보았다. 자로 잰 듯한 간격을 보고 그녀의 입꼬리가 아주 조금 올라갔다가 내려왔다.
“군대에서 줄 긋는 것도 가르쳐요?”
“사격장 표적지에 탄착점을 적을 때 씁니다.”
“그 얘기는 아침 식탁에서 안 하는 걸로 해요. 8조에 넣을까요?”
“넣으십시오.”
현관 쪽에서 쿵 소리가 났다. 마동구가 신발장 위 화분을 어깨로 건드린 소리였다. 키 190센티미터에 어깨가 문틀에 거의 닿는 사내가 화분을 두 손으로 받쳐 든 채 얼어붙어 있었다.
“상무님, 이거 안 깨졌습니더. 흙만 쪼매 쏟아졌습니더.”
“그거 엄마가 키우던 거예요.”
동구가 화분을 끌어안듯이 신발장에 다시 올리고, 쏟아진 흙을 손바닥으로 쓸어 담았다. 흙 한 줌을 화분에 도로 넣는 손길이 지나치게 정성스러워서 서진이 웃음을 참느라 커피잔을 입에 댔다. 은호는 그 화분을 한 번 보았다. 잎 가장자리가 누렇게 말린 산세비에리아였다. 물을 준 지 오래된 흙 냄새가 났다.
계약서 첫 장 맨 위에는 경호 기간이 적혀 있었다. 오늘부터 12월 23일 임시주주총회가 끝나는 시각까지. 그 아래에는 서진이 손으로 덧쓴 한 줄이 있었다. 주총장 의장석 앞까지 걸어서 들어간다. 위임장 없음.
“3미터예요?”
서진이 물었다.
“기본은 3미터입니다. 사람이 많은 곳이나 계단에서는 1미터로 붙습니다.”
“0은요?”
“몸으로 막아야 할 때뿐입니다.”
“그럼 0은 7조 위반이 아니겠네요. 업무니까.”
그녀는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일어났다. 코트를 집어 드는 손에 망설임이 없었다. 은호는 식은 커피를 한 모금에 비우고 계약서를 서류철에 넣었다. 쓴맛이 혀뿌리에 오래 남았다.
*
경호 차량은 검정 승합차였다. 뒷좌석 가죽 시트에서 새 차 냄새와 누군가 오래전에 흘린 방향제 냄새가 섞여 올라왔다. 운전석의 윤세라가 백미러로 서진을 확인하고 “출발합니다, 상무님” 하고 짧게 말했다. 조수석에는 은호가 앉았고, 맨 뒷줄에서 백지훈이 무전기 세 대의 채널을 맞추면서 쉬지 않고 떠들었다.
“팀장님, 오늘 한남대교 북단에서 공사합니다. 차선 하나 막혀요. 그래서 제가 반포대교로 돌자고 하려다가, 반포는 또 아침에 막히니까, 그럼 강변북로 타고 바로 가는 게 낫겠다 싶어서, 세라 씨한테 말했더니 세라 씨가…….”
“지훈 씨.”
“네.”
“결론.”
“강변북로요.”
서진이 뒷좌석에서 서류를 넘기다가 고개를 들었다.
“저분은 원래 저렇게 말이 많아요?”
“통신 담당입니다. 말이 많아야 합니다.”
“팀장님은요?”
“저는 말이 적어야 합니다.”
“웃는 건요? 웃는 것도 담당이 따로 있어요?”
세라가 운전대를 잡은 채 어깨를 떨었다. 지훈이 맨 뒷줄에서 손을 들었다.
“저요. 웃는 것도 제가 합니다.”
은호는 앞 유리 너머 차선만 보았다. 왼쪽 귀에 낀 이어폰 줄에 감아 둔 검정 절연 테이프가 손끝에 걸렸다. 군에서부터 세 번씩 감던 테이프였고, 그 습관을 아무도 묻지 않아서 아직 설명해 본 적이 없었다. 강변북로 위로 늦가을 햇빛이 비스듬히 들어왔다. 한강 물이 철판처럼 납작하게 빛났다.
*
여의도 한성그룹 본사 로비는 천장이 4층 높이까지 뚫려 있었다. 대리석 바닥에 구두 소리가 울렸다가 천장에서 한 번 더 울려 내려왔다. 은호는 서진의 왼쪽 뒤 3미터에서 걸으며 출입 게이트, 경비 데스크, 엘리베이터 여섯 대의 문을 차례로 눈에 넣었다. 회전문 옆에 정장 차림의 사내 넷이 서 있었다. 어깨 넓이와 서 있는 간격만 보고도 특수부대에서 몸을 만든 사람들이라는 걸 알았다.
그 넷 사이로 한승원이 걸어 나왔다.
마흔하나. 한성그룹 부회장이자 한성건설 대표. 남색 코트 깃을 세운 채 휴대전화를 귀에서 떼며 웃었는데, 그 웃음이 로비 끝에서 끝까지 걸어오는 동안 한 번도 흐트러지지 않았다. 그는 서진이 타려던 엘리베이터 앞에 멈춰 섰다. 문이 열렸다가, 아무도 타지 않자 도로 닫혔다.
“서진아. 아침은 먹었니?”
“오빠가 엘리베이터 앞에 서 있어서 아직 못 올라가고 있어요.”
“주총 날 감기 조심해라. 올해 감기가 독하다더라. 열 나면 그냥 집에 있어. 아무도 뭐라 안 해.”
“오빠네 현장 안전이나 조심해요. 올해 사고가 많다던데.”
승원의 웃음이 그대로 있었다. 그는 코트 안주머니에서 접힌 종이 한 장을 꺼내 서진 쪽으로 내밀었다. 은호는 종이가 나오는 순간 1미터 안으로 들어가 서진의 왼쪽 어깨 옆에 섰다. 종이였다. 위임장 양식이었다.
“이거 하나면 다들 편해. 너도 연말에 여의도까지 안 나와도 되고.”
“위임장은 안 써요. 어머니 지분이에요.”
“엄마 지분이니까 하는 말이야. 엄마는 집안 싸우는 거 싫어했어.”
“그래서 엄마가 그 지분을 오빠한테 안 주고 저한테 줬잖아요.”
로비에 있던 직원 몇이 걸음을 늦췄다. 누군가 휴대전화를 꺼냈다가 경비원과 눈이 마주치자 도로 넣었다. 승원은 위임장을 다시 접어 주머니에 넣었다. 그때 승원 뒤에 서 있던 사내 하나가 앞으로 나왔다. 머리를 짧게 깎은 마흔다섯쯤의 사내였는데, 왼쪽 눈썹 끝에 하얀 흉터가 비스듬히 지나가 있었다.
“차 중사. 오랜만이다.”
은호는 대답하지 않았다. 육군 대테러 부대인 707 특수임무대대에서 은호가 중사 계급장을 달고 있던 때, 이 사내는 그의 상관이었다.
“전역할 때 인사도 안 하고 가더니, 여기서 보네. 막내 아가씨 옆이라. 자리 잘 잡았다.”
“강 실장님은 부회장님 옆이시군요.”
“나는 원래 높은 사람 옆에 있었지. 너는 원래 말 안 듣는 쪽에 있었고.”
강철규가 한 걸음 더 들어왔다. 어깨가 은호의 어깨를 스쳤다. 스친 것이 아니라 밀었다. 은호의 구두 뒤축이 대리석 위에서 반 뼘 미끄러졌다가 멈췄다. 은호는 물러서지 않고, 서진과 강철규 사이에 몸 하나만큼의 자리를 그대로 두었다. 두 사내 사이의 공기에서 같은 브랜드의 면도 크림 냄새가 났다. 군 매점에서 팔던 싸구려였다.
“철규야.”
승원이 이름만 불렀다. 강철규가 뒤로 물러났다. 승원은 서진에게 손을 흔들고 회전문 쪽으로 걸어갔다. 엘리베이터 문이 다시 열렸다.
서진은 엘리베이터 안에서 숫자가 올라가는 걸 보면서 낮게 말했다.
“아는 사이예요?”
“같은 부대였습니다.”
“그것만은 아닌 것 같은데요.”
“그것만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계약서 몇 조에 그런 말 하지 말라는 게 있어요?”
“없습니다.”
“그럼 언젠가 말해 주세요.”
엘리베이터가 31층에 섰다. 서진이 먼저 내렸고, 은호는 3미터 뒤로 돌아갔다.
*
밤 열 시 반, 승합차는 강변북로 하행선을 달리고 있었다. 서진은 뒷좌석에서 구두를 벗어 발끝을 시트 아래로 밀어 넣은 채 투자자 명단을 넘겼다. 하루 종일 회의실 다섯 곳을 돌았다. 지훈은 뒷줄에서 졸다가 무전기 잡음에 깨기를 되풀이했다. 차창에 빗방울이 하나둘 붙기 시작했다.
한남대교 북단 출구까지 1킬로미터가 남았을 때 세라가 처음으로 말을 더듬었다.
“팀장님. 페달이…….”
은호는 세라의 오른발을 보았다. 브레이크 페달이 바닥까지 들어가 있었다. 속도계 바늘은 시속 80킬로미터에서 내려오지 않았다.
“세라 씨, 기어 낮춰. 천천히. 비상등.”
세라가 기어를 한 단씩 내렸다. 엔진이 짐승처럼 울었다. 은호는 몸을 돌려 뒷좌석으로 팔을 뻗었다. 서진의 안전벨트를 한 번 당겨 잠긴 걸 확인하고, 그 팔을 그녀의 쇄골 앞에 가로로 댔다. 서진의 숨이 그의 팔뚝에 닿았다. 뜨거웠다.
“지훈 씨, 뒤차들한테 손전등.”
“네, 네!”
바늘이 60으로, 40으로 내려왔다. 세라가 갓길 쪽으로 핸들을 아주 조금씩 꺾었다. 오른쪽 차체가 가드레일에 닿았다. 금속이 금속을 긁는 소리가 이를 뽑는 소리처럼 길게 이어졌고, 불꽃이 빗방울 사이로 튀었다. 승합차는 가드레일을 따라 이십 미터쯤 긁고 나서 멈췄다.
엔진 소리가 사라지자 와이퍼 소리만 남았다. 서진이 은호의 팔을 내려다보았다.
“이거 7조 위반 아니에요. 안전벨트예요.”
“네.”
“팔이 떨리네요.”
은호는 팔을 거뒀다. 떨리고 있었다. 그는 손을 주먹 쥐었다 폈다.
“다친 데 있습니까?”
“구두를 못 찾겠어요. 그게 제일 큰 피해예요.”
맨 뒷줄에서 지훈이 손전등을 든 채 숨을 몰아쉬었다. 세라는 운전대에서 손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은호가 세라의 손등을 두 번 두드렸다. 세라가 그제야 손가락을 하나씩 폈다.
*
자정 무렵, 성수동 골목의 이십사 시간 정비소는 형광등 하나가 깜박이고 있었다. 엔진오일 냄새와 석유난로 냄새가 섞인 공기 속에서 정비사가 차 밑에 누웠다 나왔다. 장갑을 벗는 손이 검게 젖어 있었다.
서진은 정비소 구석 플라스틱 의자에 은호의 점퍼를 덮고 앉아 있었다. 구두는 끝내 시트 밑에서 한 짝만 나왔다. 그녀는 맨발 한쪽을 점퍼 자락 안에 넣은 채 은호를 올려다보았다.
“경찰 부르면 내일 아침 기사 나와요. 한성가 막내, 강변북로 사고. 그다음 기사는 주총 불참설이고요.”
“부르셔야 합니다. 차에 손을 댄 거면 살인미수입니다.”
“그걸 누가 했는지 경찰이 주총 전에 밝혀 줘요?”
은호는 대답하지 못했다. 그녀가 맞았다. 그래서 더 화가 났고, 화가 났다는 것이 턱에 들어간 힘으로 드러났다. 서진이 그 턱을 보고 말했다.
“팀장님 원칙은 알아요. 제 원칙은 12월 23일까지 기사 한 줄도 안 나는 거예요.”
정비사가 두 사람 사이로 걸어왔다. 그는 검게 젖은 장갑을 작업대에 내려놓고, 손바닥을 바지에 문질러 닦았다. 말을 고르는 사람의 얼굴이었다.
“사장님들. 이거 닳은 거 아니에요.”
“그럼요?”
“누가 만졌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