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화(5,329자)

맨 앞

승부조작 경주마 흑진주 · 윤새벽

나는 공터 한가운데를 가로질렀다⁠. 발굽이 단단한 흙을 때리는 소리에 사내들이 돌아보았다⁠. 경주를 막 끝낸 말은 크다⁠. 땀에 젖은 털이 햇빛에 번들거리고⁠, 콧구멍이 사람 주먹만 하게 벌어지고⁠, 숨소리가 대장간 풀무 같다⁠. 내 등에는 검은 바탕에 흰 줄 옷을 입은 사람이 아직 붙어 있었다⁠. 사내들이 한 걸음씩 물러섰다⁠.

발판 앞에서 나는 멈췄다⁠. 앞다리를 땅에 박았다⁠. 늙은 암말이 내 뒷다리 바로 뒤에 누워 있었다⁠. 암말의 숨이 내 뒷발굽에 닿았다⁠. 발판 위의 밤색 거세마가 나를 보았다⁠. 귀가 앞으로 섰다⁠. 거세마를 끌던 사내가 굴레를 놓쳤다⁠. 거세마가 발판을 뒷걸음질로 내려왔다⁠. 발판이 쿵쿵 울렸다⁠. 내려온 거세마가 내 옆구리 뒤로 들어와 섰다⁠. 말은 무서우면 큰 말 뒤에 숨는다⁠.

기수가 내 등에서 미끄러져 내렸다⁠. 다리가 풀려 땅에 무릎을 찧었다⁠. 기수는 고삐를 쥐지 않았다⁠. 고삐를 내 목에 감아 매듭을 짓고 손을 뗐다⁠. 줄 끝을 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나는 처음으로 아무도 끌지 않는 자리에 서 있었다⁠.

“⁠얘 건드리지 마세요⁠. 얘 지금 아무도 못 잡아요⁠.⁠”

기수가 고글을 이마로 밀어 올렸다⁠. 안경이 없는 맨눈이 작았다⁠.

사내 하나가 막대를 들고 다가왔다⁠. 사흘 전 밤 내 칸 앞에 섰던 사내였다⁠. 담배와 밧줄 냄새⁠. 나는 엉덩이를 돌렸다⁠. 엉덩이를 돌려 보이면 다음은 발굽이 간다⁠. 말끼리 하는 말이다⁠. 사람은 이 말을 못 알아듣는다⁠. 그런데 이번에는 알아들었다⁠. 사내가 막대를 든 채 멈춰 섰다⁠. 사람도 엉덩이를 보면 안다⁠.

다른 사내가 옆으로 돌아왔다⁠. 막대 끝이 내 목 옆으로 들어왔다⁠. 나는 고개를 돌려 막대를 물었다⁠. 막대는 단단하고 쓴 나무였다⁠. 맛이 없었다⁠. 고개를 한 번 휘둘렀다⁠. 사내의 손에서 막대가 빠져나가 공터 끝 풀숲으로 날아갔다⁠. 마구간지기가 조교사 옆에서 붙잡힌 팔을 비틀며 소리쳤다⁠.

“⁠봐라⁠, 이놈은 종이도 먹고 몽둥이도 먹는다⁠! 다음엔 네 손모가지다⁠!⁠”

조교사를 붙잡은 사내의 손이 풀렸다⁠. 조교사가 몸을 빼서 발판 쪽으로 달려왔다⁠. 늙은 암말 옆에 무릎을 꿇고 앉아 암말의 앞다리를 더듬었다⁠. 조교사는 다리를 만지는 사람이다⁠. 무릎⁠, 정강이⁠, 발목⁠. 손이 발목에서 멈췄다가 다시 무릎으로 올라갔다⁠.

“⁠부러진 거 아이다⁠. 접혀서 깔렸다⁠. 어깨는 찢겼고⁠.⁠”

*

트럭 운전석 문이 열렸다⁠. 굵은 목소리의 기사가 내렸다⁠. 키가 크고 배가 나왔고 막걸리 냄새가 났다⁠. 마구간지기가 아침에 준 막걸리였다⁠. 기사는 막대를 들지 않았다⁠. 두 손을 바지 주머니에 넣고 섰다⁠.

“⁠저는 실장님이 실으라면 싣고 말라면 맙니다⁠. 아직 말라는 전화는 안 왔어요⁠.⁠”

흙길에서 소리 없는 차가 올라왔다⁠. 바퀴가 자갈을 누르는 소리만 났다⁠. 차가 공터 끝에 멈추고 실장이 내렸다⁠. 선글라스를 벗어 셔츠 주머니에 꽂았다⁠. 숨이 차 있지 않았다⁠. 귀빈석에서 결승선을 보자마자 계단을 내려왔을 사람이었다⁠. 장갑을 꼈다⁠.

“⁠기수님⁠. 머리 하나로 이기셨더라고요⁠. 축하드립니다⁠.⁠”

뒤이어 덕춘의 낡은 화물차가 털털거리며 올라왔다⁠. 덕춘이 차에서 뛰어내렸다⁠. 셔츠 앞주머니가 불룩했다⁠. 기수의 안경이 거기 있었다⁠. 덕춘은 실장을 지나쳐 발판 앞으로 왔다⁠. 암말을 보았다⁠. 무릎을 꿇었다⁠. 암말의 목을 쓸었다⁠. 암말이 콧김을 길게 털었다⁠. 괜찮다는 소리였다⁠. 덕춘은 알아듣지 못하고 울었다⁠.

“⁠사장님⁠, 우시는 건 나중에 하시고요⁠.⁠”

실장이 발판 앞으로 걸어왔다⁠. 내 엉덩이에서 다섯 걸음 떨어진 자리에서 멈췄다⁠. 실장은 말을 안다⁠. 말이 차는 거리를 안다⁠.

“⁠오늘 진 건 저입니다⁠. 인정합니다⁠. 근데 사장님⁠, 빌린 건 빌린 겁니다⁠. 이 종이는 경주랑 상관이 없어요⁠.⁠”

실장이 접힌 종이를 꺼내 펼쳤다⁠. 덕춘의 엄지 냄새가 나는 붉은 얼룩⁠.

“⁠사장님이 오늘 저한테 지지 않은 대가로 저는 이 종이대로 하겠습니다⁠. 경찰이 와도 똑같이 말씀드릴 겁니다⁠. 그리고 경찰이 오면 저는 봄 경주 얘기를 안 할 수가 없죠⁠. 기수님 4코너 얘기요⁠. 기수님⁠, 그 얘기가 나오면 면허는 끝이고 그다음은 아시죠⁠? 그래도 괜찮으세요⁠?⁠”

기수가 무릎을 털고 일어섰다⁠. 실장을 보았다⁠. 실장의 장갑을 보았다⁠.

“⁠제가 할게요⁠.⁠”

“⁠네⁠?⁠”

“⁠그 얘기⁠, 실장님이 하실 필요 없어요⁠. 제가 할게요⁠.⁠”

*

붉은 불빛을 단 차가 공터로 들어왔다⁠. 경찰 두 사람이 내렸다⁠. 경마장 직원 오토바이 두 대가 뒤따랐고⁠, 맨 마지막에 심판위원이 숨을 몰아쉬며 흙길 끝에서 나타났다⁠. 넥타이가 풀려 목에 걸쳐져 있었다⁠. 구두가 흙투성이였다⁠.

“⁠우승마가 경주로를 이탈해서 쫓아왔습니다⁠. 무슨 일입니까⁠, 이게⁠?⁠”

경찰 하나가 트럭과 발판과 누운 암말과 사내들을 차례로 보았다⁠. 실장이 먼저 앞으로 나섰다⁠. 종이를 내밀었다⁠.

“⁠담보 회수 중입니다⁠. 채무자 동의 서명 있습니다⁠. 이분이 채무자시고요⁠.⁠”

“⁠기수입니다⁠. 흑진주 기수⁠.⁠”

기수가 실장 앞으로 걸어 나갔다⁠. 검은 바탕에 흰 줄 옷이 땀에 젖어 몸에 붙어 있었다⁠. 기수는 심판위원을 보고 말했다⁠. 경찰보다 심판위원을 먼저 보았다⁠.

“⁠올봄 이 경마장 경주에서 흑진주 고삐를 4코너에서 당겼습니다⁠. 이분이 시켰습니다⁠. 여름에 한 번⁠, 추석 지나고 한 번⁠, 지난달에 한 번 더⁠, 다른 말들로 당겼습니다⁠. 오늘도 4코너에서 당기라고 했습니다⁠. 금요일 아침 씻는 자리에서 봉투를 받았습니다⁠. 어제 밤에는 대기 마방에 들어와서 당기라고 했습니다⁠.⁠”

심판위원의 얼굴에서 핏기가 빠졌다⁠. 땀은 그대로 흘렀다⁠.

“⁠기수님⁠, 지금 하신 말씀 무슨 뜻인지 아시죠⁠? 기수님 면허⁠…⁠.⁠”

“⁠압니다⁠.⁠”

실장이 웃었다⁠. 소리가 나지 않는 웃음이었다⁠.

“⁠기수님 말씀만 있죠⁠. 말씀은 말씀이고요⁠. 증거 있습니까⁠?⁠”

조교사가 일어섰다⁠. 암말 옆에서 무릎을 털고⁠, 조끼 가슴 주머니 단추를 끌렀다⁠. 사흘 동안 한 번도 끄르지 않은 단추였다⁠. 접힌 종이 한 장을 꺼내 심판위원에게 내밀었다⁠. 종이 한가운데 반달 모양 자국이 두 개 있었다⁠.

“⁠금요일 새벽⁠, 씻는 자리에서 이 사람이 기수 손에 쥐여 준 봉투에서 나온 돈입니더⁠. 봉투는 흑진주가 씹어 묵었고⁠. 이 자국이 흑진주 앞니 자국입니더⁠. 의심나믄 지금 입 벌려 맞춰 보이소⁠.⁠”

심판위원이 종이를 받아 들었다⁠. 종이와 나를 번갈아 보았다⁠. 나는 심판위원의 손에 들린 종이를 향해 목을 뺐다⁠. 먹으려던 것은 아니다⁠. 내 침 냄새가 나는 종이라서 그랬다⁠. 조교사가 내 콧등을 손바닥으로 막았다⁠.

“⁠이건 증거다⁠. 니 거 아이다⁠.⁠”

심판위원이 웃음을 참는 얼굴로 기침을 했다⁠. 경찰 하나가 웃음을 참지 못했다⁠.

“⁠씻는 자리에는 카메라가 있습니다⁠. 대기 마방 통로에도요⁠. 어제 밤 통로 녹화도 지금 바로 보겠습니다⁠. 실장님⁠, 마주 대리로 출입증 받으셨죠⁠? 출입 기록이 다 남아 있습니다⁠.⁠”

실장은 장갑을 벗었다⁠. 천천히⁠. 한 손가락씩⁠. 벗은 장갑을 양복 주머니에 넣었다⁠. 덕춘을 보았다⁠.

“⁠사장님도 아시고 하신 일입니다⁠. 아시죠⁠? 4코너에서 당기라고 하신 분이 사장님이세요⁠. 저 혼자 가지는 않습니다⁠.⁠”

덕춘이 암말의 목에서 손을 떼고 일어섰다⁠. 실장 앞에 섰다⁠. 실장보다 머리 하나가 작았다⁠.

“⁠맞아요⁠. 내가 시켰어요⁠. 목요일 밤에 마구간에서 기수한테 당기라고 했어요⁠. 나도 갑니다⁠. 같이 가요⁠.⁠”

덕춘이 셔츠 앞주머니에서 안경을 꺼내 기수에게 건넸다⁠. 기수가 안경을 받아 썼다⁠. 안경알 너머로 기수의 눈이 커졌다⁠.

*

경찰들이 사내 둘의 손목에 무언가를 채웠다⁠. 쇠가 맞물리는 소리가 났다⁠. 트럭 기사는 손을 주머니에서 빼서 스스로 내밀었다⁠. 경찰이 기사를 보고 손을 거두었다⁠. 기사는 경찰에게 실장을 가리켰다⁠. 저분이 불렀습니다⁠. 아침 아홉 시에 올라가 있으라고⁠, 결승선 보고 전화하면 실으라고요⁠. 거세마 실은 것도 저고요⁠. 계류장에 있습니다⁠.

“⁠계류장 어디요⁠?⁠”

“⁠도축장 앞이요⁠. 월요일 아침 일곱 시에 첫 순서로 잡혀 있어요⁠.⁠”

경찰이 휴대전화를 꺼내 어딘가에 전화를 걸었다⁠. 기사는 땅을 보았다⁠.

늙은 암말이 움직였다⁠. 깔렸던 앞다리를 빼냈다⁠. 뒷다리 둘로 땅을 밀었다⁠. 반쯤 일어섰다가 주저앉았다⁠. 조교사와 덕춘이 양옆에서 암말의 목과 어깨를 받쳤다⁠. 암말이 다시 땅을 밀었다⁠. 이번에는 네 다리가 다 땅에 닿았다⁠. 앞다리 하나가 땅을 디딜 때마다 머리가 아래로 끄덕였다⁠. 어깨에서 검은 것이 흘렀다⁠. 흙이 묻었다⁠. 암말은 서 있었다⁠.

암말이 고개를 돌려 나를 보았다⁠. 귀가 앞으로 섰다⁠. 나는 엉덩이를 돌리지 않았다⁠. 고개를 낮춰 암말의 코끝에 코를 댔다⁠. 암말이 숨을 불었다⁠. 사흘 전 밤⁠, 판자 틈으로 불어 주던 숨이었다⁠. 내 코끝이 따뜻해졌다⁠.

공터 울타리에 말 다섯 마리가 줄줄이 묶여 있었다⁠. 사내들이 칸에서 끌어내 발판에 올릴 차례를 기다리게 한 말들이었다⁠. 눈 흐린 백마⁠, 문짝을 잘 차는 얼룩 거세마⁠, 쌍둥이처럼 닮은 밤색 둘⁠, 늘 꼴찌로 밥을 먹는 작은 암말⁠. 다섯이 다 울타리 끝으로 몸을 붙이고 떨고 있었다⁠. 마구간지기가 비틀거리며 다가가 매듭을 하나씩 풀었다⁠. 욕을 하면서 풀었다⁠. 이 새끼들아⁠, 다 풀었다⁠, 이제 어디든 가라⁠.

풀린 말들은 가지 않았다⁠. 어디로 가야 하는지 모르는 말은 서서 떤다⁠. 나는 고개를 들고 낮게 울었다⁠. 흐흥⁠. 이리 오라는 소리였다⁠. 늙은 암말이 내던 소리를 내가 냈다⁠. 눈 흐린 백마가 먼저 귀를 세웠다⁠. 한 걸음 왔다⁠. 얼룩 거세마가 따라왔다⁠. 쌍둥이 밤색이 같이 왔다⁠. 작은 암말이 맨 끝에 왔다⁠. 발판에서 내려와 내 옆구리 뒤에 숨어 있던 밤색 거세마가 무리 안으로 들어갔다⁠.

나는 마구간 문으로 걸었다⁠. 뒤를 돌아보지 않아도 말의 눈에는 다 보인다⁠. 다섯이⁠, 여섯이⁠, 내 엉덩이 뒤에 한 줄로 붙어 따라왔다⁠. 늙은 암말이 절름거리며 맨 뒤에 붙었다⁠. 스무 해 동안 무리의 맨 앞에서 걷던 말이 맨 뒤에서 걸었다⁠. 뒤처지는 말이 없는지 보는 자리였다⁠. 무리의 끝자리가 비어 있지 않았다⁠.

마구간 문 앞에서 나는 멈췄다⁠. 무리가 내 뒤에서 멈췄다⁠. 마구간지기가 문을 열었다⁠. 나는 고개를 숙이고 문턱을 넘었다⁠. 맨 앞으로⁠. 무리가 하나씩 제 칸으로 들어가는 소리를 등 뒤로 들으며⁠, 나는 칸에 들어가지 않고 문턱에 도로 나와 섰다⁠. 공터가 다 보이는 자리였다⁠. 마구간지기가 내 목에 감긴 고삐 매듭을 풀다가 그만두었다⁠. 지키는 말은 묶지 않는다고 중얼거렸다⁠.

실장이 경찰 차 뒷문 앞에서 멈췄다⁠. 뒤를 돌아보았다⁠. 마구간 문턱의 나를 보았다⁠.

“⁠회색 거세마는 벌써 계류장에 있습니다⁠. 월요일 일곱 시가 첫 순서예요⁠. 그 사이에 서류 정리가 될지 모르겠네요⁠. 경찰분들 일이 빠르면 좋겠습니다⁠.⁠”

경찰 차 문이 닫혔다⁠. 붉은 불빛이 빙빙 돌며 흙길을 내려갔다⁠. 공터의 해가 기울었다⁠. 트럭 짐칸 안에서 실려 있던 말 두 마리가 발굽으로 쇠벽을 쳤다⁠. 덕춘이 발판을 올라가 굴레를 하나씩 잡았다⁠. 처음으로 덕춘이 발판을 내려오는 말을 끌었다⁠. 말들이 발판을 내려왔다⁠. 발판이 울렸다⁠. 내려오는 발판은 올라가는 발판과 소리가 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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