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화(5,343자)
등으로 올라온 것
승부조작 경주마 흑진주 · 윤새벽
문이 열리면 앞다리보다 뒷다리가 먼저 나간다. 엉덩이 근육이 한꺼번에 땅을 밀고, 밀어낸 힘이 등을 타고 어깨까지 올라와 앞다리를 허공으로 던진다. 기수는 앞다리가 뜨는 순간 갈기를 쥔 손으로 몸을 앞으로 접는다. 접힌 기수의 무게가 내 어깨 뒤 두 점으로 꽂힌다. 오늘 두 점은 같은 깊이로 꽂혔다.
첫 걸음에 흙이 튀었다. 두 번째 걸음에 옆 말들의 어깨가 내 시야 양쪽을 채웠다. 세 번째 걸음부터는 소리가 하나였다. 열여섯 마리의 발굽이 땅을 때리는 소리가 하나로 뭉쳐 내 배 밑으로 굴러갔다.
회색 수말은 왼편에 있었다. 안쪽이다. 회색 수말이 출발이 빨랐다. 반 걸음 앞에서 몸을 오른쪽으로 비틀었다. 회색 엉덩이가 내 앞으로 들어왔다. 나는 오른편으로 비키려 했다. 오른편에는 다른 말의 어깨가 있었다. 회색 수말이 앞에, 낯선 말이 오른쪽에, 내 왼쪽에는 경주로 안쪽 하얀 울타리. 나는 세 면이 막힌 자리에 들어 있었다.
스피커에서 사람 목소리가 울렸다. 흑진주, 안쪽에 갇혔습니다. 나는 흑진주라는 소리만 알아들었다. 관중석에서 한숨 같은 소리가 길게 흘러나왔다.
회색 수말의 뒷발이 흙을 차 올렸다. 흙덩이가 내 얼굴에 날아와 부딪혔다. 눈꺼풀이 저절로 내려왔다. 앞에 다른 말이 있으면 이런 일을 당한다. 흙을 먹고, 남의 꼬리를 보고, 남의 엉덩이 냄새를 맡는다. 회색 꼬리가 바람에 날려 내 콧등을 찰싹 때렸다. 한 번, 또 한 번. 회색 수말은 바나나 한 개를 잊지 않는 말이었다. 무리의 맨 뒤는 언제나 흙을 먹는 자리다. 기수의 고글에도 흙이 튀는 소리가 났다. 기수는 고글을 닦지 않았다. 고글을 닦으려면 손이 고삐를 놓아야 한다.
“참아, 참아. 아직이야.”
기수의 손은 따뜻했다. 고삐 두 줄이 재갈을 고르게 쥐고 있었다. 당기지도 않고 풀지도 않았다. 기다리라는 손이었다. 나는 기다렸다. 앞에 회색 엉덩이를 두고 기다리는 것은 숨을 참는 것과 같다.
*
1코너와 2코너를 도는 동안 무리는 길게 늘어졌다. 맨 앞에 두 마리가 나가 있었고, 회색 수말과 나는 두 마리 뒤 무리 한가운데에 있었다. 2코너를 빠져나오자 맞은편 직선이 시작되었다. 맞은편 직선은 관중석 반대편이다. 관중석의 소리가 멀어지고 바람 소리가 커진다.
바람이 오른쪽에서 왔다. 언덕에서 내려오는 바람이었다. 바람에 말 냄새가 실려 있었다. 언덕 마구간의 냄새, 열두 마리가 겁날 때 내는 땀 냄새. 쇠와 녹과 마른 피가 땀 냄새를 덮을 만큼 짙었다.
나는 고개를 반만 오른쪽으로 틀었다. 말은 달리면서도 옆이 보인다. 경주로 바깥 울타리 너머로 언덕이 비스듬히 올라가 있었다. 언덕 중턱, 처마 한쪽이 내려앉은 지붕. 지붕 앞 공터에 큰 상자. 상자 뒤로 비스듬한 나무판. 나무판 앞에서 작은 덩어리들이 뭉쳤다가 흩어졌다. 사람 덩어리와 말 덩어리를 나는 걸음으로 가른다. 말은 네 다리로 크게 튀어 오르고 사람은 두 다리로 작게 움직인다. 말 덩어리 하나가 나무판 앞에서 크게 튀어 올랐다가 내려앉았다. 사람 덩어리 둘이 튀어 오른 말을 나무판으로 밀었다.
나무판 아래에 무언가 하나가 누워 있었다. 움직이지 않았다. 말 크기였다.
기수의 무릎이 내 어깨를 조였다. 기수도 언덕을 보았다. 기수의 심장이 한 번 크게 뛰었다. 등으로 왔다. 크게, 그리고 빠르게.
“보지 마. 흑진주, 보지 마.”
나는 보았다. 보지 않으려 해도 말의 눈은 옆을 본다.
*
3코너가 다가왔다. 앞의 두 마리가 지치기 시작했다. 숨소리가 거칠어지고 걸음이 짧아졌다. 회색 수말이 앞으로 나가기 시작했다. 회색 수말의 숨은 아직 고르고 깊었다. 회색 수말의 기수가 고개를 돌려 나를 보았다. 아니, 내 기수를 보았다. 회색 수말의 기수가 무어라 소리쳤다. 바람에 다 날아갔다. 따라 나오지 말라는 몸짓이었다. 회색 수말이 안쪽 울타리에 붙은 채 내 앞을 계속 막았다.
3코너가 끝나 갔다. 내 다리가 박자를 바꿨다. 몸은 기억한다. 4코너가 오면 앞이 열린다. 오늘은 앞이 열리지 않았다. 회색 엉덩이가 그대로 있었다.
4코너에 들어서는 순간 기수가 고개를 들었다. 언덕을 보았다. 4코너는 경주로에서 언덕과 가장 가까운 자리다. 울타리 너머 언덕 흙길이 바로 거기서 시작해 위로 올라간다. 흙길이 시작되는 곳에 훈련로로 드나드는 쪽문이 있다. 쪽문이 열려 있었다. 아침에 조교사가 올라간 문이었다.
손이 차가워졌다.
고삐 끝에서 찬 것이 내려왔다. 재갈이 입꼬리를 뒤로 끌었다. 기수의 엉덩이가 안장으로 내려앉으려 했다. 봄의 손이었다. 꽃잎이 날리던 날의 손, 새벽 훈련로의 손. 세 번째로 같은 손이었다. 실장은 4코너에서 당기면 문을 닫겠다고 했다. 기수는 언덕의 나무판을 보고 있었다. 당기면 나무판 앞의 사람 덩어리들이 멈출 것이다. 기수의 손이 그렇게 믿었다. 믿는 손은 차갑다.
나는 재갈을 물지 않았다. 아직.
대신 등을 모았다. 말의 등에는 길고 굵은 근육이 두 줄 있다. 안장 바로 밑, 기수의 무릎이 닿는 자리 아래로 목에서 엉덩이까지 이어진다. 달리기 직전에 말은 이 두 줄을 한꺼번에 당겨 올린다. 등 전체가 활처럼 휘면서 단단해진다. 등 위의 사람은 이것을 무릎으로 느낀다. 안장이 아래에서 위로 솟구치는 것을.
나는 등을 모았다. 언덕에 내 무리가 있었다. 무리가 겁에 질려 있었다. 무리의 우두머리가 나무판 밑에 누워 있었다. 말은 무리가 겁에 질리면 무리를 향해 간다. 맨 앞으로 간다. 맨 앞으로 가야 무리가 따라온다. 경주로의 앞과 언덕의 앞이 내 몸 안에서 하나가 되었다. 맨 앞으로 가는 길이 저 위로 이어져 있었다.
등이 솟았다. 기수의 무릎이 솟는 안장을 받았다.
등이 솟는 사이 언덕에서 소리가 내려왔다. 낮게, 흐흥. 갈라지고 쉰 소리였다. 늙은 암말이었다. 나무판 밑에 누운 말이 고개를 들고 울었다. 이리 오라는 소리였다.
기수의 손이 풀렸다.
한꺼번에 풀렸다. 고삐가 느슨해지면서 재갈이 입 안에서 앞으로 미끄러졌다. 찬 것이 사라지고 따뜻한 것이 고삐 끝에서 밀려 왔다. 기수의 엉덩이가 안장에서 떠올랐다. 몸이 앞으로 접혔다. 기수의 입이 내 귀 바로 뒤에 있었다.
“가자. 흑진주. 가자.”
*
가자는 안다.
기수가 오른쪽 고삐를 살짝 당기며 오른쪽 무릎을 풀었다. 바깥으로 나가라는 몸이었다. 오른편의 낯선 말이 지쳐 반 걸음 처져 있었다. 처진 자리로 내 어깨가 빠져나갔다. 회색 엉덩이가 왼편으로 밀려났다. 앞이 열렸다.
4코너를 빠져나오자 마지막 직선이 앞에 펼쳐졌다. 관중석이 오른편에 있었다. 소리가 벽처럼 덮쳐 왔다. 수만 명의 목소리가 하나의 소리가 되어 경주로 위로 쏟아졌다. 나는 수만 명의 소리를 등으로 들었다. 기수의 등이 떨렸다.
회색 수말이 왼편에서 나란히 붙었다. 회색 수말의 기수가 채찍을 들었다. 채찍이 회색 엉덩이에 닿는 소리가 났다. 회색 수말의 숨이 처음으로 거칠어졌다. 고르고 깊던 숨이 짧게 끊어졌다. 회색 수말의 머리가 내 어깨 옆에 있었다. 내 머리 옆에 있었다. 내 머리보다 반 걸음 앞에 있었다.
기수는 채찍을 들지 않았다. 손으로 내 목을 밀었다. 걸음마다 한 번씩. 목을 밀 때마다 기수의 손바닥이 내 갈기 밑 살갗에 닿았다. 뜨거웠다. 기수의 손이 이렇게 뜨거운 것은 처음이었다.
결승 기둥이 다가왔다. 회색 수말의 머리와 내 머리가 나란했다. 나는 목을 길게 뺐다. 목을 다 빼고, 더 뺐다. 회색 수말도 뺐다. 회색 수말의 콧김이 내 뺨에 닿았다. 회색 수말이 처음으로 나를 향해 귀를 눕혔다. 비키라는 소리였다. 나는 비키지 않았다.
결승 기둥이 내 머리 옆을 지나갔다. 기둥이 지나가는 순간 내 코끝 앞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회색 수말의 코끝은 내 눈 옆에 있었다.
머리 하나였다.
봄에 나는 머리 하나 차이로 졌다. 꽃잎이 날리던 날, 앞 말의 엉덩이와 내 코 사이에 머리 하나가 비어 있었다. 오늘은 같은 머리 하나가 내 앞에 아무것도 없게 했다. 기수가 내 목에 얼굴을 묻었다. 고글이 갈기에 눌려 비틀어졌다. 기수의 등이 들썩였다. 등 위의 사람이 우는 것을 나는 무릎과 엉덩이로 안다. 우는 사람의 무릎은 조였다 풀렸다를 되풀이한다.
“이겼어. 흑진주, 이겼어. 머리 하나로.”
*
결승선을 지나면 말들은 속도를 늦춘다. 기수들이 일어서서 고삐를 당긴다. 회색 수말의 기수가 일어서서 고삐를 당겼다. 회색 수말이 처졌다. 다른 말들도 하나씩 처졌다.
내 기수는 일어서지 않았다. 고삐를 당기지 않았다. 나는 늦추지 않았다.
1코너로 이어지는 굽은 길에서 나는 몸을 비틀었다. 바깥 울타리를 따라 왔던 길을 거꾸로 달렸다. 관중석 앞을 다시 지났다. 관중석의 소리가 바뀌었다. 환호가 흩어지고 사람들이 서로 묻는 소리가 일었다. 스피커에서 목소리가 빠르게 쏟아졌다. 흑진주, 결승선을 지나 멈추지 않습니다. 기수가 말을 제어하지 못하고. 기수는 제어하고 있었다. 오른쪽 고삐와 오른쪽 무릎으로, 바깥 울타리를 따라, 4코너로.
4코너에서 쪽문이 열려 있었다. 기수가 쪽문으로 내 머리를 돌렸다. 나는 쪽문을 빠져나갔다. 경주로의 부드러운 흙이 끝나고 언덕 흙길의 단단한 흙이 발굽 밑에 왔다. 오르막이었다. 엉덩이 근육이 다시 한꺼번에 땅을 밀었다. 숨이 가빴다. 이천 미터를 달린 다리로 오르막을 차고 올라갔다. 뒤에서 사람들이 소리치는 소리, 오토바이 엔진 소리, 호루라기 소리가 따라왔다.
흙길 중간에 물웅덩이가 있었다. 금요일 새벽에 내가 뛰어넘은 웅덩이였다. 나는 뛰어넘지 않았다. 그대로 밟고 지나갔다. 물이 내 배까지 튀었고, 기수의 바지까지 튀었다. 기수가 웃었다. 울면서 웃었다. 두 가지 소리가 동시에 났다.
“이제 물웅덩이도 안 무섭냐, 이 먹보야!”
고개를 반만 틀어 뒤를 보았다. 흙길 아래로 경마장 직원들의 오토바이 두 대가 따라 올라오고 있었다. 오토바이 뒤로 붉은 불빛을 지붕에 단 차 한 대가 쪽문을 빠져나왔다. 불빛이 빙빙 돌았다. 맨 뒤에서 넥타이를 맨 남자 하나가 뛰어오고 있었다. 가슴에서 쇠붙이 배지가 햇빛에 번쩍였다. 검사실 앞에서 조교사가 붙잡았던 심판위원이었다. 4코너 화면을 직접 보겠다던 사람이 화면 밖으로 뛰어나와 있었다.
흙길이 끝나는 자리에서 공터가 열렸다. 쇠와 녹과 마른 피 냄새가 내 얼굴을 덮쳤다. 트럭이 있었다. 짐칸 뒷문이 열려 있었고 발판이 땅에 비스듬히 누워 있었다. 발판 위에 밤색 거세마 하나가 반쯤 올라가 있었다. 사내 하나가 거세마의 굴레를 끌고 있었다. 짐칸 안에서 말 두 마리의 발굽 소리가 쇠벽에 울렸다. 마구간 앞에서 조교사와 마구간지기가 다른 사내 둘에게 팔을 붙잡혀 있었다. 조교사의 조끼 단추가 떨어져 나가 있었다.
발판 밑, 땅바닥에 늙은 암말이 옆으로 누워 있었다. 밤색 옆구리가 오르내렸다. 앞다리 하나가 이상한 각도로 꺾여 땅에 닿아 있었다. 흙에 검은 얼룩이 번져 있었다. 암말의 고개가 땅에서 조금 들려 있었다. 귀가 나를 향해 돌아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