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화(5,315자)

출발문

승부조작 경주마 흑진주 · 윤새벽

덕춘은 안장을 얹을 줄 모른다⁠. 스무 해 동안 말을 가졌지만 안장은 늘 조교사가 얹었다⁠. 안장 얹는 칸에서 덕춘은 깔개를 거꾸로 깔았다⁠. 털이 붙은 면이 위로 왔다⁠. 내 등에 닿은 것은 미끄러운 천이었고⁠, 미끄러운 천 위에 안장이 놓이자 안장이 왼쪽으로 스르르 미끄러졌다⁠. 나는 등을 한 번 털었다⁠. 안장이 바닥에 떨어졌다⁠.

“⁠아⁠, 이거 왜 이래⁠. 선생님은 한 번에 하던데⁠.⁠”

옆 칸에서 회색 수말의 마필관리사가 웃음을 참다가 결국 터뜨렸다⁠. 와서 깔개를 뒤집어 주었다⁠. 덕춘이 다시 안장을 얹고 뱃대끈을 조였다⁠. 나는 배에 바람을 넣었다⁠. 덕춘은 이 수를 모른다⁠. 무릎으로 배를 치지 않고 그냥 조였다⁠. 나는 숨을 그대로 참고 있었다⁠. 뱃대끈이 손가락 세 개가 들어갈 만큼 헐렁하게 채워졌다⁠.

“⁠됐다⁠. 꽉 조였다⁠.⁠”

나는 숨을 뱉었다⁠. 뱃대끈과 내 배 사이가 더 헐거워졌다⁠. 마필관리사가 덕춘의 어깨를 두드렸다⁠.

“⁠사장님⁠, 기수가 오면 한 번 더 조이라고 하세요⁠. 이대로 뛰면 4코너에서 기수랑 안장이 같이 날아가요⁠.⁠”

덕춘이 4코너라는 소리에 마필관리사를 보았다⁠. 마필관리사는 회색 수말에게 돌아가 다시 트로트를 불렀다⁠.

*

패독은 둥근 길이다⁠. 말들이 길을 따라 천천히 돌고⁠, 길 바깥 울타리에 사람들이 겹겹이 붙어 선다⁠. 울타리 너머 사람 냄새가 파도처럼 밀려왔다⁠. 맥주⁠, 핫도그⁠, 담배⁠, 땀⁠, 향수⁠, 종이⁠. 사람들은 손에 종이를 쥐고 있었고⁠, 종이를 흔들며 내 이름을 불렀다⁠. 흑진주⁠. 흑진주⁠. 이 소리가 이렇게 많이 겹쳐 오는 것은 경주 날뿐이다⁠.

번쩍이는 불빛이 터졌다⁠. 사진기들이었다⁠. 나는 불빛이 좋다⁠. 불빛이 터지면 목을 둥글게 말고 앞다리를 높이 든다⁠. 그러면 불빛이 더 많이 터진다⁠. 덕춘이 굴레 줄을 끌며 투덜거렸다⁠. 얘는 사진만 찍으면 걸음이 바뀌어⁠. 울타리의 사람들이 웃었다⁠.

회색 수말이 내 앞에서 돌았다⁠. 땋은 갈기에 흰 끈을 매달았고⁠, 꼬리를 쳐들었다⁠. 불빛이 회색 수말에게도 터졌다⁠. 회색 수말도 목을 말았다⁠. 우리는 패독 길을 반 바퀴 도는 동안 서로 목을 누가 더 높이 마는지 겨루었다⁠. 사람들은 이걸 보고 말들이 기분이 좋다고 했다⁠.

패독 한가운데 잔디밭에 마주들과 조교사들이 서 있었다⁠. 실장이 모자 쓴 노인 옆에 있었다⁠. 오늘은 짙은 양복에 선글라스를 썼다⁠. 선글라스를 써도 박하는 가려지지 않는다⁠. 내가 실장 앞을 지날 때 나는 걸음을 멈췄다⁠. 덕춘이 줄을 당겼다⁠. 나는 꼬리를 들었다⁠.

말은 긴장하면 배 속을 비운다⁠. 경주 전에는 더 그렇다⁠. 실장의 반짝이는 구두 앞 잔디밭에 김이 오르는 덩어리가 한가득 쏟아졌다⁠. 울타리의 사람들이 한꺼번에 소리를 질렀다⁠. 웃음소리였다⁠. 실장이 한 발 물러섰다⁠. 구두 끝에 무언가가 묻었다⁠. 모자 쓴 노인이 처음으로 소리 내어 웃었다⁠.

“⁠일등 후보가 인사를 하네⁠. 자네한테만⁠.⁠”

실장은 웃지 않았다⁠. 손수건을 꺼내 구두 끝을 닦았다⁠. 닦는 손이 느렸다⁠. 덕춘은 웃음을 참느라 굴레 줄을 쥔 주먹을 입에 댔다⁠.

*

기수가 기수실에서 나왔다⁠. 검은 바탕에 흰 줄이 굵게 들어간 승부복을 입었다⁠. 아침에 내가 씹은 소매 끝이 아직 조금 쭈글쭈글했다⁠. 머리에는 단단한 모자를 썼고⁠, 모자 위에 고글을 올려 두었다⁠. 얼굴에는 안경이 있었다⁠. 기수는 패독에서 내 등에 오르기 직전에 안경을 벗는다⁠. 벗은 안경은 덕춘에게 맡긴다⁠. 세 해 동안 그랬다⁠.

기수가 내 뱃대끈에 손을 넣어 보고 덕춘을 쳐다보았다⁠. 뱃대끈을 두 칸 더 조였다⁠. 이번에는 무릎으로 내 배를 쳤다⁠. 나는 숨을 뱉었다⁠. 한 칸이 더 들어갔다⁠.

실장이 잔디밭을 가로질러 왔다⁠. 구두 끝은 다 닦였다⁠. 실장은 덕춘과 기수 사이에 섰다⁠. 나는 실장의 등 뒤에 있었다⁠. 실장의 등이 내 코앞에 있었다⁠. 등에서는 박하보다 담배가 짙었다⁠. 오늘 실장은 담배를 많이 피웠다⁠.

“⁠사장님⁠, 기수님⁠. 좋은 경주 하세요⁠.⁠”

“⁠볼일 끝났으면 가⁠.⁠”

“⁠사장님이 아침에 물으셨잖아요⁠. 오늘 지면 다음 달에 전화 안 하냐고⁠. 생각해 봤는데⁠, 거짓말은 못 하겠더라고요⁠. 오늘 지시면 다음 달에 또 얘기하죠⁠. 그게 서로 편합니다⁠. 사장님 종이에 남은 이자가 있고⁠, 기수님 휴대전화에 남은 사진이 있으니까요⁠.⁠”

실장은 이 말을 잔디밭의 다른 마주들에게 들리지 않을 만큼 낮게 했다⁠. 내 귀에는 다 들렸다⁠. 덕춘의 귀에도 다 들렸다⁠. 덕춘의 등이 굳었다⁠. 말이 굳는 것과 같은 굳음이었다⁠. 발밑에서 뱀이 나왔을 때 네 다리가 땅에 박히는 굳음⁠.

덕춘이 고개를 돌려 언덕을 보았다⁠. 패독에서는 언덕이 보이지 않는다⁠. 관중석 지붕에 가려 있다⁠. 그래도 덕춘은 언덕을 보았다⁠.

“⁠기수야⁠.⁠”

기수가 고개를 들었다⁠.

“⁠당기지 마라⁠.⁠”

기수의 손이 내 목에 닿아 있었다⁠. 손이 멈췄다⁠.

“⁠형님⁠, 언덕에⁠…⁠.⁠”

“⁠알아⁠. 흑진주한테 맡겨⁠. 얘가 가자는 대로 가⁠.⁠”

덕춘이 실장을 보았다⁠. 선글라스 속 실장의 눈은 보이지 않았다⁠. 덕춘은 실장의 선글라스를 보며 말했다⁠.

“⁠실어 봐⁠. 다음 달도 없고 다음다음 달도 없어⁠. 오늘 다 해⁠.⁠”

실장은 오래 대답하지 않았다⁠. 패독 스피커에서 기수들은 말에 오르라는 소리가 울렸다⁠. 실장이 휴대전화를 꺼냈다⁠. 화면을 한 번 누르고 귀에 댔다⁠. 목소리가 높아지지 않았다⁠.

“⁠네⁠, 저예요⁠. 지금부터 실으세요⁠. 천천히요⁠. 할머니부터⁠.⁠”

실장이 휴대전화를 귀에서 떼고 기수를 보았다⁠.

“⁠4코너에서 당기시면⁠, 거기서 문 닫겠습니다⁠. 당기시는 게 보이면 바로 전화합니다⁠. 실은 말은 그대로 내려 드리고요⁠. 위에서 다 보이실 겁니다⁠, 기수님⁠.⁠”

실장은 노인에게 돌아갔다⁠. 노인의 팔을 붙잡고 패독 출구로 걸었다⁠. 관중석 맨 위⁠, 유리로 덮인 귀빈석으로 올라가는 계단이 거기 있었다⁠.

*

덕춘이 기수의 무릎을 두 손으로 받쳐 들어 올렸다⁠. 기수가 내 등에 내려앉았다⁠. 두 점⁠. 어깨 뒤 양쪽에⁠. 오늘은 왼쪽 점이 무겁지 않았다⁠. 양쪽이 같았다⁠. 기수의 무릎이 내 어깨를 감쌌다⁠. 덕춘이 기수의 안경을 받아 셔츠 앞주머니에 넣었다⁠. 기수가 고글을 내려 썼다⁠. 고글을 쓴 기수의 얼굴은 사람 얼굴이 아니라 커다란 곤충 같았다⁠. 세 해를 봐도 이 얼굴은 낯설었다⁠.

덕춘이 내 이마의 별을 엄지로 문질렀다⁠. 길게⁠. 굴레 줄을 기수에게 넘겼다⁠. 말은 굴레 줄이 넘어가는 순간을 안다⁠. 땅에서 끌던 손이 떨어지고 등 위의 손이 잡는다⁠. 덕춘의 손이 떨어졌다⁠.

“⁠흑진주야⁠. 가자⁠.⁠”

가자는 안다⁠. 나는 걸었다⁠.

경주로에 나서자 바람이 바뀌었다⁠. 패독은 사람 냄새로 막혀 있지만 경주로는 넓어서 바람이 멀리서 온다⁠. 오늘 바람은 언덕에서 내려왔다⁠. 흙과 풀과 말똥과⁠, 아주 희미하게⁠, 쇠와 마른 피⁠.

기수의 심장이 등으로 들어왔다⁠. 빨랐다⁠. 사흘 전 밤 마구간에서보다는 느렸다⁠. 기수의 손은 따뜻하지도 차갑지도 않았다⁠. 기수는 몸을 풀러 가는 짧은 구보 동안 한 번도 노래를 부르지 않았다⁠.

대신 말을 했다⁠. 구보를 멈추고 관중석 앞을 걸어 지날 때였다⁠. 기수는 몸을 숙여 내 귀 뒤에 고글 낀 얼굴을 댔다⁠. 사람들이 손을 흔들었고 기수는 손을 흔들지 않았다⁠.

“⁠흑진주야⁠. 봄에 미안했다⁠. 너는 그날 이겼어야 했어⁠. 내가 네 입을 끌었어⁠. 오늘은 안 끌 거야⁠. 아니⁠, 모르겠다⁠. 4코너에서 위를 보면 나도 모르겠다⁠. 그러니까 네가 정해⁠. 네 등이 정해⁠. 내가 손이 차가워지면 그냥 물어⁠. 재갈 물고 내 팔 끌고 나가⁠. 새벽에 한 것처럼⁠.⁠”

말의 뜻은 하나도 몰랐다⁠. 기수의 목소리가 떨리지 않았다는 것만 알았다⁠. 떨리지 않는 목소리 끝에서 기수의 손바닥이 조금 데워졌다⁠. 데워진 손이 내 목을 두 번 두드렸다⁠.

관중석을 올려다보았다⁠. 맨 위 유리 벽 뒤에 사람 몇이 서 있었다⁠. 하나가 휴대전화를 귀에 대고 있었다⁠. 검은 안경을 쓴 머리가 경주로를 내려다보다가 언덕으로 돌아갔다⁠. 멀어서 냄새는 오지 않았다⁠. 귀에 댄 판의 반짝임과 고개가 도는 모양만으로도 나는 박하를 떠올렸다⁠.

출발문은 경주로 맞은편⁠, 직선이 시작되는 곳 근처에 있었다⁠. 출발문 뒤편으로 경주로 바깥 울타리가 이어지고⁠, 울타리 너머로 언덕이 올라간다⁠. 출발문 앞에서 말들은 둥글게 돌며 차례를 기다린다⁠. 나는 돌면서 언덕을 보았다⁠. 말의 눈은 멀리 있는 것을 또렷하게 보지 못한다⁠. 대신 움직이는 것은 아주 멀리서도 안다⁠. 언덕 중턱⁠, 마구간 울타리 근처에서 무언가가 움직이고 있었다⁠. 작은 덩어리 여럿이 뭉쳤다가 흩어졌다가 다시 뭉쳤다⁠.

회색 수말이 출발문에 먼저 들어갔다⁠. 회색 수말의 기수가 내 기수를 보고 한마디 했다⁠. 오늘 안쪽은 내 거야⁠. 기수는 대답하지 않았다⁠.

*

출발문 안은 좁다⁠. 양옆에 쇠벽이 있고 앞뒤에 쇠문이 있다⁠. 쇠벽과 내 옆구리 사이에 손바닥 하나가 들어갈 틈밖에 없다⁠. 뒷문이 닫히는 소리가 엉덩이 뒤에서 철컥 났다⁠. 앞문은 아직 닫혀 있다⁠. 말은 갇히는 것을 싫어한다⁠. 달려야 사는 몸이라서 그렇다⁠. 나는 세 해 동안 출발문에 수십 번 들어갔고⁠, 들어갈 때마다 다리가 떨렸다⁠. 오늘도 떨렸다⁠.

기수가 내 갈기를 한 줌 쥐었다⁠. 출발할 때 뒤로 넘어가지 않으려고 기수들은 갈기를 잡는다⁠. 갈기를 쥔 손을 통해 기수의 맥이 내 목덜미로 들어왔다⁠.

옆 칸들이 하나씩 차는 소리가 났다⁠. 철컥⁠, 철컥⁠. 회색 수말은 내 왼편⁠, 안쪽 칸이었다⁠. 쇠벽 너머로 회색 수말의 숨소리가 들렸다⁠. 고르고 깊었다⁠. 출발문 안에서도 숨이 고른 말은 많지 않다⁠.

마지막 뒷문이 닫혔다⁠. 관중석의 소리가 한 번 커졌다가 잦아들었다⁠. 잦아드는 소리 속으로 언덕의 소리가 들어왔다⁠.

늙은 암말이었다⁠.

높게 울었다⁠. 무리 전체를 부르는 소리⁠. 이리 오라는 낮은 소리도 아니고 다가오지 말라는 경고도 아니었다⁠. 사흘 전 밤 트럭이 거세마를 싣고 내려갈 때 쉬지 않고 울던 높이와 같았다⁠. 한 번⁠, 두 번⁠. 다른 말들의 울음이 따라 올라왔다⁠. 열 마리가 넘는 목소리가 언덕에서 한꺼번에 흘러내려 왔다⁠. 출발문의 다른 말들이 귀를 세웠다⁠. 회색 수말도 귀를 세웠다⁠.

기수의 손이 내 갈기를 꽉 쥐었다⁠. 갈기 뿌리가 당겨졌다⁠.

암말이 세 번째로 울었다⁠. 울음이 높이 올라가다가⁠, 무언가 무거운 것이 나무판에 부딪히는 소리가 났다⁠. 쿵⁠. 언덕의 땅이 울리는 소리였다⁠. 발판이 땅에 닿을 때 나던 소리와 닮았고⁠, 더 둔했다⁠.

울음이 끊겼다⁠.

다른 말들의 울음은 이어졌다⁠. 암말의 목소리만 없었다⁠. 무리를 부르던 목소리가 빠지자 언덕의 울음들이 서로를 찾느라 제각각 흩어졌다⁠. 나는 출발문 안에서 앞발을 들었다⁠. 쇠벽에 어깨가 부딪혔다⁠. 기수가 내 목에 몸을 붙였다⁠. 기수의 심장이 내 목덜미 바로 위에서 뛰었다⁠. 고글 너머 기수의 숨이 끊겼다 이어졌다⁠.

“⁠흑진주⁠, 흑진주⁠. 착하지⁠. 착하지⁠. 조금만⁠.⁠”

나는 귀를 언덕으로 돌렸다⁠. 언덕에서는 더 이상 암말의 소리가 오지 않았다⁠. 귀 하나를 앞으로⁠, 앞문으로 돌렸다⁠. 앞문 너머로 끝이 보이지 않는 흙길이 있었다⁠.

앞문 쇠붙이가 철컥 하고 풀리는 소리가 났다⁠. 문이 열렸다⁠.

7화는 어땠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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