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5,323자)

봄의 4코너

승부조작 경주마 흑진주 · 윤새벽

기수의 손이 내 앞다리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발목을 감싼 손가락이 차가웠다⁠. 차가운 손은 다리 위에 오래 있으면 조금씩 데워져야 한다⁠. 기수의 손은 데워지지 않았다⁠. 내 발목의 열을 빨아 가면서도 그대로 차가웠다⁠.

이런 손을 나는 전에도 한 번 다리에 느꼈다⁠. 언제였는지는 아직 몰랐다⁠. 몸이 먼저 알고 머리가 늦게 따라온다⁠. 말은 그렇게 기억한다⁠.

한 시가 되자 손전등 불빛이 통로를 따라 칸마다 멈췄다⁠. 수의사의 밤 순회였다⁠. 경주 전날 밤에는 수의사가 두 번 돈다⁠. 기수가 내 배 밑에 쪼그려 앉았지만 손전등은 말의 다리 사이를 제일 먼저 비춘다⁠. 불빛이 기수의 운동화에서 멈췄다⁠.

“⁠기수님⁠, 경주 전날 밤에 말 칸 들어오시면 안 되는 거 아시죠⁠?⁠”

“⁠선생님⁠, 오 분만요⁠. 얘가 밤에 혼자 있으면 벽을 차서요⁠. 다리 다칠까 봐⁠.⁠”

“⁠벽은 옆 칸 회색이 더 차던데요⁠.⁠”

수의사가 칸 문을 열고 들어와 내 목에 청진기를 댔다⁠. 청진기 끝은 차갑고⁠, 귀에 꽂은 줄은 고무 냄새가 났다⁠. 고무는 씹으면 질겅거린다⁠. 나는 고개를 돌려 늘어진 줄을 앞니로 물었다⁠. 수의사가 청진기를 당기자 수의사의 귀에서 꽂개가 쑥 빠졌다⁠.

“⁠아야⁠! 이 녀석이⁠, 심장 소리 듣는데 왜 줄을 먹어⁠!⁠”

“⁠얘가 원래 그래요⁠. 입에 들어가는 건 다 먹을 거예요⁠.⁠”

“⁠심장 소리 좋네요⁠. 기수님 심장 소리가 더 크게 들리는 것만 빼면요⁠.⁠”

수의사는 침 묻은 청진기 줄을 바지에 닦고 다음 칸으로 갔다⁠. 기수를 내보내지 않았다⁠. 손전등 불빛이 칸 문 너머로 멀어지는 동안 기수는 내 배 밑에서 숨을 길게 내쉬었다⁠. 기수의 손이 다시 내 앞다리로 왔다⁠.

통로 끝 문에서 출입증을 기계에 대는 소리가 났다⁠.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 박하 냄새가 소독약을 뚫고 들어왔다⁠. 기수의 손이 내 발목에서 튕기듯 떨어졌다⁠. 기수는 몸을 낮춰 내 배 밑으로 숨었다⁠. 칸 안에서 사람이 숨을 곳은 말 뒤밖에 없다⁠.

나는 박하 냄새가 나는 쪽으로 몸을 돌렸다⁠. 낯선 냄새가 오면 말은 머리를 냄새 나는 곳으로 둔다⁠. 내가 돌자 내 엉덩이 뒤에 웅크리고 있던 기수가 칸 문 앞에 고스란히 드러났다⁠.

“⁠흑진주⁠, 너 진짜⁠…⁠.⁠”

“⁠기수님⁠, 거기 계셨네요⁠. 말이 손님 맞을 줄 아네요⁠.⁠”

실장이 칸 문 앞에 섰다⁠. 장갑을 끼고 있었다⁠. 통로 끝 문 옆에서 보안 요원이 출입증 기계를 등지고 서 있었다⁠. 보안 요원은 이쪽을 보지 않았다⁠. 담배 한 갑만 한 두께의 무언가가 보안 요원의 윗옷 주머니를 불룩하게 만들고 있었다⁠.

*

“⁠실장님⁠, 이 시간에 여기 오시면 안 돼요⁠.⁠”

“⁠기수님도 안 되시죠⁠. 우리 둘 다 안 되는 데 와 있으니까 편하게 얘기하겠습니다⁠.⁠”

실장이 칸 문에 팔꿈치를 얹었다⁠. 내 코가 실장의 장갑에 닿을 만큼 가까웠다⁠. 나는 장갑을 맡지 않았다⁠. 귀를 뒤로 붙였다⁠.

“⁠어제 아침 일은 잊겠습니다⁠. 거세마 한 마리로 이자는 받았으니까요⁠. 내일은 어렵게 생각하지 마세요⁠. 봄에 한 대로만 하시면 됩니다⁠. 그때도 4코너였잖아요⁠. 그때는 잘하셨잖아요⁠.⁠”

봄이라는 소리를 나는 모른다⁠. 4코너라는 소리는 이제 안다⁠. 어제 새벽 기수의 손이 차가워진 자리⁠, 회색 수말의 엉덩이가 내 앞에 나타난 자리다⁠. 실장이 4코너라고 말하는 순간 기수의 무릎이 내 옆구리에 닿아 있었다⁠. 무릎이 떨렸다⁠.

떨리는 무릎이 몸 안의 무언가를 건드렸다⁠.

경주로 바깥 울타리를 따라 하얀 꽃잎이 날리던 날이 있었다⁠. 꽃잎은 흙에 떨어지면 금방 발굽에 짓이겨져서 달큰한 냄새를 냈다⁠. 관중석에서 사람들이 소리를 질렀고 나는 무리의 한가운데에 있었다⁠. 3코너를 돌 때 기수의 손은 따뜻했다⁠. 4코너가 오면서 앞이 열리기 시작했다⁠. 내 다리가 박자를 바꿨다⁠.

손이 뒤로 왔다⁠.

고삐 끝에서 찬 것이 내려왔다⁠. 재갈이 입꼬리를 뒤로 끌었다⁠. 기수의 엉덩이가 안장에 내려앉았다⁠. 나는 꽃잎이 날리던 날 재갈을 물지 못했다⁠. 어린 말이었다⁠. 기수의 손을 믿었다⁠. 손이 뒤로 오면 서야 하는 줄 알았다⁠. 다른 말 하나가 내 옆으로 빠져나갔다⁠. 엉덩이가 내 코앞에 있다가 멀어졌다⁠. 결승선에서 내 코는 앞 말의 엉덩이와 머리 하나만큼 떨어져 있었다⁠.

경주가 끝난 밤 덕춘은 마구간 통로에서 소주를 마셨다⁠. 사과를 들고 오지 않았다⁠. 다음 날도⁠, 그다음 날도⁠. 한 달쯤 지나 언덕에 오는 건초 냄새가 바뀌었다⁠. 전보다 마르고 먼지가 많은 건초였다⁠. 그리고 소리 없는 차가 처음으로 언덕을 올라왔다⁠.

나는 이 일들을 따로따로 기억하고 있었다⁠. 꽃잎⁠, 차가운 손⁠, 앞 말의 엉덩이⁠, 소주⁠, 먼지 많은 건초⁠, 박하⁠. 기수의 떨리는 무릎이 이것들을 하나로 꿰었다⁠. 봄의 4코너에서 차가워진 손과 어제 새벽 4코너에서 차가워진 손은 같은 손이었다⁠. 같은 차가움이었다⁠.

*

“⁠사장님⁠, 들어오세요⁠. 거기 계신 거 압니다⁠.⁠”

실장이 통로 끝을 향해 말했다⁠. 사과 냄새가 들어왔다⁠. 소주 냄새도⁠. 덕춘이 통로 끝 그늘에서 걸어 나왔다⁠. 손에 비닐봉지가 들려 있었다⁠. 사과가 든 봉지였다⁠. 덕춘은 내 칸 앞까지 오는 동안 한 번도 실장을 보지 않았다⁠. 기수를 보았다⁠.

“⁠제가 사장님을 불렀습니다⁠. 주차장 화물차에서 주무신다길래요⁠. 내일 같이 일하실 분들끼리 서로 아셔야 할 것 같아서요⁠.⁠”

“⁠무슨 소리야⁠? 봄이 뭐야⁠?⁠”

덕춘의 목소리는 기수에게 하는 소리였다⁠. 대답은 실장이 했다⁠.

“⁠사장님⁠, 봄 경주에 흑진주한테 크게 거셨죠⁠? 그 돈 어디서 빌리셨는지 기억하세요⁠? 저희 사람한테 빌리셨습니다⁠. 그 돈이 저희한테 돌아오는 길을 기수님이 열어 주셨고요⁠. 4코너에서요⁠.⁠”

덕춘이 비닐봉지를 바닥에 내려놓았다⁠. 사과 하나가 굴러 나와 통로 바닥을 굴렀다⁠. 내 칸 문 앞에서 멈췄다⁠. 나는 문 아래 틈으로 입술을 뻗었다⁠. 닿지 않았다⁠.

덕춘이 실장의 멱살을 잡았다⁠. 실장의 몸이 칸 문에 부딪혔다⁠. 문이 흔들렸고 나는 뒤로 물러섰다⁠. 옆 칸 회색 수말이 놀라 깔짚 속의 바나나 껍질 위에서 껑충 뛰었다⁠. 실장은 멱살을 잡힌 채로 손을 들지 않았다⁠.

“⁠치세요⁠, 사장님⁠. 치셔도 내일 경주는 안 없어집니다⁠. 계류장 녀석도 그대로 있고요⁠.⁠”

“⁠네가⁠… 네가 처음부터⁠…⁠.⁠”

“⁠처음부터 사장님이 저희를 찾아오셨어요⁠. 저는 빌려 드렸을 뿐이고요⁠. 봄에 지셨을 때 저는 이자를 깎아 드렸습니다⁠. 기억하시죠⁠? 사장님이 고맙다고 하셨어요⁠.⁠”

덕춘의 손가락이 실장의 셔츠 깃을 쥔 채 하얗게 굳었다⁠. 실장은 손목시계를 보았다⁠.

“⁠내일은 사장님이 직접 시키시는 겁니다⁠. 봄에는 사장님이 모르셨지만⁠, 내일은 아시고 하시는 거예요⁠. 저는 그게 더 마음이 편합니다⁠. 아는 사람끼리 하는 일은 서로 안 틀어지거든요⁠. 내일 전국에서 몇 만 명이 흑진주한테 걸었습니다⁠. 이 녀석 한 마리 4코너에 사장님 빚이 다 실려 있어요⁠.⁠”

덕춘이 손을 놓았다⁠. 실장이 셔츠를 털고 넥타이를 바로 했다⁠. 바닥에 굴러 있던 사과를 주워 들었다⁠. 소매에 한 번 닦고⁠, 내 칸 문 너머로 내밀었다⁠.

나는 사과를 보았다⁠. 사과가 많은 밤에는 나쁜 일이 온다⁠. 오늘 밤 사과는 봉지째로 왔다⁠. 나는 사과가 봉지째 온 줄 알면서도 고개를 내밀어 실장의 장갑에서 사과를 물었다⁠. 먹는 것은 먹는 것이다⁠. 말은 그렇게 생겼다⁠. 씹으면서 실장의 장갑에 침을 잔뜩 묻혀 주었다⁠. 실장이 장갑을 내려다보았다⁠.

“⁠고맙다는 인사로 받겠습니다⁠.⁠”

실장은 장갑을 벗어 주머니에 넣고 통로를 걸어 나갔다⁠. 보안 요원이 비로소 몸을 돌려 출입증 기계 앞에 섰다⁠. 문이 닫혔다⁠.

*

통로에 덕춘과 기수만 남았다⁠. 대기 마방의 다른 말들은 다시 벽을 차고 서로를 불렀다⁠. 회색 수말은 깔짚을 파헤쳐 바나나 껍질이 그대로 있는지 확인했다⁠. 그대로 있었다⁠. 회색 수말이 껍질을 묻은 자리 위에 다시 섰다⁠.

덕춘은 기수를 보지 않고 통로 바닥에 주저앉았다⁠. 내 칸 문에 등을 기댔다⁠. 사과 봉지는 무릎 옆에 두었다⁠. 덕춘의 뒤통수가 칸 문 아래 틈 바로 앞에 있었다⁠. 덕춘은 기수에게 말하지 않고 내 칸 문에 대고 말했다⁠.

“⁠늙은 암말 말이야⁠. 스무 해 전에 처음 샀어⁠. 가게 하나 팔아서⁠. 그해 가을에 세 번 뛰어서 세 번 다 꼴찌 했다⁠. 내가 거기 반해 버렸어⁠. 꼴찌로 들어오면서도 끝까지 안 서더라고⁠. 그래서 못 팔았어⁠. 하나 못 팔고 나니까 다음 놈도 못 팔겠더라⁠.⁠”

나는 문 아래 틈으로 고개를 숙였다⁠. 봉지가 덕춘의 무릎 옆에 있었다⁠. 봉지 입구가 열려 있었다⁠. 윗입술을 틈으로 내밀었다⁠. 사과 하나가 입술에 걸려 왔다⁠. 나는 조용히 씹었다⁠.

“⁠거세마는 다리 부러진 걸 내가 고기차 앞에서 사 왔어⁠. 눈 흐린 백마는 남이 버린 걸 데려왔고⁠. 그렇게 열두 마리야⁠. 먹는 놈이 열둘이고 버는 놈은 너 하나⁠.⁠”

두 번째 사과가 입술에 걸려 왔다⁠. 씹는 소리가 컸다⁠. 덕춘이 고개를 돌렸다⁠. 봉지 속의 사과가 둘 비어 있었다⁠. 덕춘이 나를 올려다보았다⁠. 입꼬리가 아주 조금 움직였다⁠. 사흘 만에 처음 보는 웃는 입이었다⁠.

“⁠너는 이 와중에도 먹냐⁠?⁠”

나는 세 번째를 물었다⁠. 실장의 장갑에서 받아먹은 사과보다 덕춘의 봉지에서 훔친 사과가 훨씬 달았다⁠. 덕춘이 봉지를 내 입 앞으로 밀어 주었다⁠. 남은 사과를 다 먹으라는 손이었다⁠. 기수는 통로에 선 채 우리 둘을 보고 있었다⁠. 덕춘이 봉지에서 손을 떼고 일어섰다⁠. 웃는 입은 일어서는 동안 사라졌다⁠.

기수가 칸 문을 열고 나왔다⁠. 안경을 꺼내 썼다⁠. 손이 떨려서 안경다리가 귀에 한 번에 걸리지 않았다⁠. 덕춘은 비닐봉지를 다시 들었다⁠. 봉지를 쥔 손등에 핏줄이 섰다⁠.

“⁠봄에 당긴 거냐⁠?⁠”

기수는 대답하지 않았다⁠.

“⁠내가 그 경주에 뭘 걸었는지 너 알았냐⁠?⁠”

“⁠알았어요⁠.⁠”

“⁠알면서 당겼어⁠.⁠”

“⁠형님⁠, 저도 빚이 있었어요⁠. 그 사람들한테요⁠. 사이트에서 한두 번 한 게 커져서요⁠. 4코너에서 한 번만 당기면 다 지워 준다고 했어요⁠. 흑진주가 얼마나 지는지 저도 몰랐어요⁠. 머리 하나 차이로 질 줄은⁠…⁠.⁠”

“⁠머리 하나⁠.⁠”

덕춘이 웃었다⁠. 소리가 없는 웃음이었다⁠. 숨이 코로만 나왔다⁠.

“⁠머리 하나 차이로 내가 언덕을 저 사람들한테 넘겼어⁠. 거세마는 지금 계류장에 있고⁠.⁠”

“⁠제가 내일은⁠…⁠.⁠”

“⁠내일 뭐⁠. 내일은 안 당기겠다고⁠? 내일 안 당기면 열두 마리가 간다⁠. 너 그거 알고 지금 하는 소리야⁠?⁠”

기수가 입을 다물었다⁠. 덕춘이 내 칸 문을 열고 들어왔다⁠. 내 이마의 별을 엄지로 문질렀다⁠. 엄지가 떨리지 않았다⁠. 사흘 동안 처음이었다⁠. 떨리지 않는 엄지가 더 무서웠다⁠.

“⁠흑진주야⁠. 너는 봄에 머리 하나 차이로 졌어⁠. 그날 네가 이겼으면 우린 아무 일도 없었어⁠.⁠”

나는 봄이라는 소리를 몰랐다⁠. 이제는 알았다⁠. 꽃잎이 날리던 날⁠, 차가운 손이 처음 내 입을 끈 날이다⁠. 덕춘이 칸 문 밖의 기수를 돌아보았다⁠.

“⁠봄에 당긴 거 맞지⁠.⁠”

기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한 번⁠. 안경알 너머로 기수의 눈이 내 눈을 보았다⁠. 나는 귀를 뒤로 눕혔다⁠. 비키라는 소리였다⁠. 기수는 비키지 않았다⁠. 칸 문 앞에 선 채 고개를 한 번 더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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