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5,676자)

고삐를 당겨라

승부조작 경주마 흑진주 · 윤새벽

밤이 되면 나는 네 다리 가운데 셋에 무게를 싣고 하나를 쉬게 한다⁠. 오늘 밤에는 왼쪽 뒷다리가 쉴 차례였다⁠. 발굽 끝만 바닥 깔짚에 대고 무릎을 풀면 몸이 아주 조금 기울고⁠, 기운 만큼 오른쪽 어깨에 칸막이 나무가 닿는다⁠. 나무 너머가 늙은 암말의 칸이다⁠. 암말의 건초 그물은 칸막이 바로 옆에 매달려 있고⁠, 칸막이 아래쪽 판자 하나가 지난여름부터 손가락 두 마디만큼 벌어져 있다⁠.

내 건초는 저녁 여덟 시에 이미 끝났다⁠. 마구간지기가 갈퀴로 던져 넣을 때부터 나는 고개를 처박았고⁠, 마구간지기는 늘 하던 대로 욕을 했다⁠. 이 먹보 새끼⁠, 체하면 네 발로 병원 걸어가라⁠. 나는 체하지 않는다⁠. 다섯 해를 살면서 한 번도 체한 적이 없다⁠.

판자 틈에 윗입술을 밀어 넣었다⁠. 말의 윗입술은 사람 손가락만큼 영리하다⁠. 마른 풀 끝이 입술에 걸려 왔고⁠, 한 가닥이 두 가닥이 되고⁠, 두 가닥이 한 움큼이 되었다⁠. 씹는 소리를 줄이려고 어금니를 천천히 굴렸다⁠. 늙은 암말은 잠들어 있었다⁠. 숨이 길었고 아랫입술이 늘어져 있었다⁠.

세 움큼째에 암말의 귀가 돌아갔다⁠. 귀 하나만 내 칸을 향해 홱 돌았고⁠, 다음 순간 누런 이빨이 판자 틈으로 들어와 내 코끝을 물었다⁠. 나는 뒷걸음질 치다 엉덩이로 뒷벽을 들이받았다⁠. 쾅 소리에 열한 칸의 말들이 일제히 고개를 들었다⁠.

말끼리는 소리를 많이 내지 않는다⁠. 귀를 세우면 무슨 일이냐고 묻는 것이고⁠, 귀를 뒤로 눕히면 비키라는 것이다⁠. 콧김을 길게 부르르 털면 괜찮다⁠, 낮게 흐흥 울면 이리 오라는 것이다⁠. 엉덩이를 돌려 보이면 다음은 발굽이 간다는 경고다⁠. 늙은 암말은 귀를 머리에 착 붙인 채 엉덩이를 내 칸으로 돌렸다⁠. 맞은편 칸에서 절름발이 회색 거세마가 콧김을 길게 털었다⁠. 또 너냐는 소리였다⁠. 나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빈 그물을 핥았다⁠.

사람은 이 말을 하나도 못 듣는다⁠. 나도 사람 말을 반쯤만 듣는다⁠. 뜻으로 아는 소리는 몇 개 안 된다⁠. 워⁠, 가자⁠, 착하지⁠, 밥⁠, 당근⁠, 사과⁠, 그리고 흑진주⁠. 사람들이 나를 부르는 소리다⁠. 나머지 소리는 귀에 담아 두었다가⁠, 같은 소리가 같은 몸의 일과 함께 몇 번 오면 비로소 뜻을 맞춘다⁠. 대신 나는 등으로 듣는다⁠. 등에 앉은 사람이 무거워지는지 가벼워지는지⁠, 무릎이 조이는지 풀리는지⁠, 고삐 끝에서 손이 따뜻한지 차가운지⁠. 사람의 입은 거짓말을 해도 등에 실린 무게는 거짓말을 못 한다⁠.

*

자정이 지나서 언덕 아래에서 차 두 대가 올라왔다⁠. 한 대는 덕춘의 낡은 화물차였다⁠. 엔진이 기침을 하듯 털털거리는 소리를 나는 망아지 때부터 들었다⁠. 다른 한 대는 소리가 거의 없었다⁠. 바퀴가 자갈을 누르는 소리만 났다⁠.

마구간 문이 열리고 덕춘이 먼저 들어왔다⁠. 덕춘에게서는 사과 냄새와 소주 냄새가 같이 났다⁠. 사과는 점퍼 주머니에 있었고⁠, 소주는 입에 있었다⁠. 덕춘은 내 칸 앞을 그냥 지나갔다⁠. 다른 밤 같으면 주머니에서 사과부터 꺼냈을 사람이었다⁠.

뒤따라 들어온 사내는 냄새가 여러 겹이었다⁠. 맨 위에 박하가 있었다⁠. 박하 밑에 비싼 가죽 장갑이 있었고⁠, 장갑 밑에 수많은 다른 마구간의 냄새가 있었다⁠. 낯선 말들의 땀⁠, 낯선 깔짚⁠, 낯선 소독약⁠. 맨 밑바닥에 내가 모르는 냄새가 하나 있었다⁠. 오래 마른 무언가가 쇠에 눌어붙은 냄새였다⁠. 사내가 문턱을 넘자 열한 칸이 다 조용해졌다⁠.

“⁠실장님⁠, 보셨으면 됐잖아요⁠. 애들 자는 시간이에요⁠.⁠”

“⁠사장님⁠, 담보는 눈으로 봐야 합니다⁠. 종이로만 보면 정이 안 들어요⁠.⁠”

실장이라는 소리를 덕춘은 오는 내내 서너 번 했다⁠. 부를 때마다 덕춘의 목소리가 조금씩 낮아졌다⁠. 실장은 칸마다 멈춰 섰다⁠. 회색 거세마의 칸 앞에서 장갑 낀 손을 문 위로 넘겨 거세마의 등을 쓸었다⁠. 목에서 엉덩이까지 한 번⁠, 엉덩이에서 배 밑까지 한 번⁠. 거세마는 사람 손을 좋아하는 말이라 목을 길게 뺐다⁠.

나는 말을 쓰다듬는 손을 많이 안다⁠. 덕춘의 손은 갈기 밑을 긁는다⁠. 조교사의 손은 다리를 훑으며 열을 잰다⁠. 기수의 손은 목을 두드린다⁠. 실장의 손은 셋 다 아니었다⁠. 등뼈 양옆을 누르고⁠, 갈비 위를 누르고⁠, 엉덩이 살을 쥐어 보았다⁠. 두께를 재는 손이었다⁠.

늙은 암말의 칸 앞에서 실장이 손을 넣었다⁠. 암말은 귀를 눕혔지만 물지는 않았다⁠. 실장의 손이 암말의 등을 누르며 내려갔다⁠.

“⁠이 할머니는 사백 킬로는 나오겠네요⁠.⁠”

덕춘이 실장의 손목을 쳐냈다⁠. 장갑이 암말의 갈기에 걸려 반쯤 벗겨졌다⁠. 실장은 화를 내지 않았다⁠. 장갑을 다시 끼며 웃었다⁠. 사람이 웃을 때 나는 숨소리와 화날 때 나는 숨소리가 실장에게서는 똑같았다⁠.

“⁠얘는 내 첫 경주마야⁠. 스무 살이야⁠. 손대지 마⁠.⁠”

“⁠스무 살이면 근수가 정직하죠⁠. 사장님⁠, 제가 오늘 온 건 겁주려는 게 아닙니다⁠. 날짜를 알려 드리려는 거예요⁠.⁠”

“⁠알아⁠. 일요일이야⁠.⁠”

“⁠일요일 대상 경주⁠. 흑진주가 4등 밖으로 들어오면 사장님 종이는 그 자리에서 찢어 드립니다⁠. 삼억 이천⁠, 이자까지 전부요⁠.⁠”

“⁠들어오면⁠.⁠”

“⁠들어오면 월요일 아침 일곱 시에 트럭 옵니다⁠. 여기 열두 마리⁠, 무게대로 넘깁니다⁠. 이 할머니부터요⁠.⁠”

*

실장이 내 칸 앞에 왔다⁠. 박하 냄새가 문틈으로 밀려들었다⁠. 나는 한 걸음 물러섰다가 두 걸음 나갔다⁠. 이 사내는 남의 마구간에 들어와 남의 암말 등에 손을 얹었다⁠. 다른 무리의 수말이 그렇게 하면 이빨과 앞발로 쫓아낸다⁠. 나는 귀를 뒤로 붙이고 앞발로 문을 두 번 찼다⁠. 경첩이 울었다⁠.

실장이 휴대전화 불빛을 켜서 내 몸에 비췄다⁠. 빛이 목에서 어깨로⁠, 어깨에서 엉덩이로⁠, 엉덩이에서 네 다리 끝까지 천천히 내려갔다⁠. 마구간지기가 저녁마다 솔로 문질러 놓은 털이 빛을 받아 미끄러졌다⁠. 빛이 다시 올라와 내 이마에서 멈췄다⁠. 덕춘이 아침마다 엄지로 문지르는 자리⁠, 털이 동전만큼 하얗게 난 자리다⁠.

“⁠더러브렛 다섯 살⁠, 온몸이 새까맣고 다리도 네 개 다 까맣고⁠, 이마에 별 하나⁠. 사진보다 낫네요⁠. 성질도 좋고요⁠. 이런 놈이 져야 배당이 큽니다⁠.⁠”

실장이 장갑 낀 손바닥을 내 코앞에 내밀었다⁠. 손바닥에서 오래 마른 냄새가 훅 올라왔다⁠. 나는 코를 들이밀고 맡다가 저절로 윗입술을 뒤집어 하늘로 말아 올렸다⁠. 처음 맡는 냄새가 코 안쪽에 걸리면 말은 그렇게 한다⁠. 이빨과 잇몸이 다 드러나고 고개가 들린다⁠. 사람들은 이 얼굴을 보고 말이 웃는다고 한다⁠.

“⁠웃네⁠. 사장님⁠, 얘 저 보고 웃는데요⁠.⁠”

“⁠널 비웃는 거야⁠.⁠”

“⁠그럼 더 마음에 드네요⁠.⁠”

덕춘은 웃지 않았다⁠. 실장의 주머니에서 휴대전화가 울렸고 실장은 마구간 통로 끝으로 걸어가 받았다⁠. 휴대전화 화면이 푸르게 빛났고 화면에는 숫자가 줄지어 있었다⁠. 실장이 낮게 말했다⁠. 네⁠, 흑진주 지금 한 점 몇 배요⁠. 바다 건너 사이트는 더 내려갔어요⁠? 일요일까지 그대로 두세요⁠. 나는 숫자를 모른다⁠. 실장의 목소리가 휴대전화에 대고 말할 때만 조금 높아진다는 것을 알 뿐이다⁠.

*

언덕 아래에서 오토바이 소리가 올라왔다⁠. 기수였다⁠. 기수에게서는 귤 냄새가 난다⁠. 몸무게를 줄이느라 밥 대신 귤을 먹고⁠, 껍질을 늘 주머니에 넣고 다닌다⁠. 그다음이 안장 비누 냄새⁠, 그다음이 사람 땀이다⁠. 오늘 밤 기수의 땀은 달리기를 마친 땀이 아니었다⁠. 달리기 전에 나는 땀⁠, 목덜미에서 먼저 솟는 땀이었다⁠.

“⁠형님⁠, 이 시간에 무슨 일이에요⁠?⁠”

기수는 실장을 보더니 걸음을 멈췄다⁠. 안경알에 마구간 불빛이 하얗게 비쳐 눈이 보이지 않았다⁠. 기수의 발이 통로 바닥 시멘트 위에서 반 발짝 뒤로 미끄러졌다⁠. 실장이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기수님⁠, 오랜만입니다⁠.⁠”

기수는 인사를 받지 않았다⁠. 덕춘이 내 칸 문을 열고 기수를 안으로 밀어 넣었다⁠. 기수는 늘 하던 대로 내 목을 두드렸다⁠. 손바닥이 차가웠다⁠. 가을밤이 차서가 아니었다⁠. 오토바이를 타고 온 사람의 손은 손등이 차고 손바닥은 따뜻하다⁠. 기수의 손은 손바닥까지 차가웠다⁠.

덕춘이 칸 문에 팔을 걸치고 기수를 보았다⁠.

“⁠일요일에 4코너에서 고삐를 당겨라⁠.⁠”

기수의 손이 내 목덜미 위에서 멈췄다⁠. 손가락 끝이 내 긴 갈기 밑으로 파고들었다가 빠져나갔다⁠. 기수는 내 어깨에 가슴을 붙이고 섰다⁠. 말에게 기댈 때 사람은 늘 그렇게 선다⁠. 가슴이 닿은 자리로 기수의 심장이 들어왔다⁠. 빨랐다⁠. 내가 출발문 안에서 문이 열리기를 기다릴 때만큼 빨랐다⁠.

“⁠형님⁠, 흑진주는 당긴다고 서는 애가 아니에요⁠. 4코너에서 앞에 아무도 없으면 얘는 재갈을 물어요⁠. 당기면 입이 찢어져요⁠.⁠”

“⁠찢어지게 당겨⁠.⁠”

“⁠관중이 몇 만이에요⁠. 심판위원들이 4코너 화면을 제일 크게 봐요⁠. 대놓고 당기면 저 면허 날아가요⁠.⁠”

“⁠날아가게 생긴 건 열두 마리야⁠.⁠”

“⁠형님이 진 빚이잖아요⁠.⁠”

덕춘이 칸 안으로 한 걸음 들어왔다⁠. 깔짚이 덕춘의 장화 밑에서 눌렸다⁠. 기수의 심장이 한 번 크게 뛰었다⁠. 나는 두 사람 사이에 몸을 넣었다⁠. 머리를 낮추고 덕춘의 점퍼 주머니에 코를 박았다⁠. 사과가 거기 있었다⁠. 덕춘이 나를 밀어내지 않고 주머니에서 사과를 꺼내 내 입에 넣었다⁠. 하나⁠, 그리고 또 하나⁠. 사과를 씹는 동안 두 사람은 말이 없었다⁠.

“⁠내 빚 맞아⁠. 내가 얘들 못 팔아서 진 빚이야⁠. 경주 못 뛰는 말을 열두 마리나 먹이면 누가 돈을 빌려주냐⁠. 저 사람들밖에 없었어⁠.⁠”

“⁠그러니까 저한테 당기라고요⁠?⁠”

“⁠한 번이야⁠. 한 번 지면 얘들 다 산다⁠.⁠”

통로 끝에서 실장이 휴대전화를 내리고 돌아섰다⁠. 웃는 얼굴이었다⁠.

“⁠기수님은 잘하실 겁니다⁠. 하실 줄 아시잖아요⁠.⁠”

기수의 손이 내 목에서 떨어졌다⁠. 차가운 자리가 그대로 남았다⁠.

*

실장은 들어올 때처럼 칸마다 한 번씩 들여다보며 나갔다⁠. 마구간 문이 닫히고 소리 없는 차가 언덕을 내려갔다⁠. 차가 내려가고도 엔진 소리 하나가 남아 있었다⁠. 크고 낮고 굵은 소리였다⁠. 마구간 앞 공터에서 그대로 숨을 쉬고 있었다⁠.

바람이 언덕 아래에서 위로 불었다⁠. 문틈으로 냄새가 들어왔다⁠. 실장의 손바닥에서 맡은 냄새를 백 배로 키운 냄새였다⁠. 쇠와 녹⁠, 오래 씻지 않은 나무판⁠, 맨 밑에 마른 피⁠. 여러 날 전 피⁠, 여러 마리의 피였다⁠.

열한 칸이 한꺼번에 움직였다⁠. 회색 거세마가 절름거리는 다리로 칸 안을 돌았다⁠. 늙은 암말이 낮게 흐흥 울었다⁠. 이리 오라는 소리였다⁠. 무리가 모이라는 소리⁠. 칸막이 때문에 아무도 갈 수 없었다⁠. 나는 판자 틈에 코를 댔다⁠. 암말도 코를 댔다⁠. 아까 나를 문 입이 이번에는 내 코끝에 숨만 불었다⁠.

컨테이너 문이 열리고 마구간지기가 나왔다⁠. 라디오가 컨테이너 안에서 혼자 떠들었다⁠. 일요일 대상 경주 일등 후보 흑진주⁠, 배당은 한 점 몇 배⁠, 전국 장외 발매소에서⁠. 마구간지기가 공터의 트럭에 손전등을 비추며 욕을 했다⁠.

“⁠어떤 놈이 남의 마당에 고기차를 대 놔⁠! 시동 꺼⁠, 이 개놈아⁠!⁠”

트럭 운전석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 굵은 목소리가 대답했다⁠. 실장님이 한 시간만 세워 두라고 하셨는데요⁠. 손전등 빛이 마구간 창으로 들어와 내 눈을 찔렀다⁠. 덕춘이 마구간 문을 열고 나갔다가 들어왔다⁠. 들어올 때 덕춘의 손에 비닐봉지가 들려 있었다⁠. 화물차에 실어 두었던 봉지였다⁠.

덕춘이 내 칸 앞에 서서 봉지를 열었다⁠. 사과였다⁠. 주머니에 든 몇 개가 아니라 봉지 하나 가득⁠.

“⁠먹어⁠. 다 먹어⁠.⁠”

나는 먹었다⁠. 첫 사과를 씹을 때 문틈으로 피 냄새가 들어왔고⁠, 두 번째 사과를 씹을 때도 들어왔다⁠. 사과는 달았다⁠. 덕춘은 내 칸 앞에 쭈그려 앉아 봉지를 들고 있었다⁠. 마구간지기가 트럭에 대고 다시 욕을 했고⁠, 트럭은 꼬박 한 시간을 공터에서 숨 쉬다가 내려갔다⁠. 피 냄새는 트럭보다 오래 남았다⁠. 나는 덕춘의 봉지가 빌 때까지 고개를 들지 않았다⁠. 사과가 이렇게 많은 밤은 처음이었다⁠.

1화는 어땠나요?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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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단풍국2026.10.31· 1화

    말이 다리 하나씩 돌아가며 쉰다는 걸 처음 알았어요. 흑진주 눈으로 마구간을 보니 새로워요.

    • 윤새벽작가2026.10.31

      말들은 선 채로 다리 하나를 쉬게 해요. 흑진주는 왼쪽 뒷다리 차례까지 다 기억합니다.

고삐를 당겨라 · 승부조작 경주마 흑진주 · 나오늘 책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