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화(5,066자) · 경섭 · 11월 20일
열네 칸
검은 화면 십오 초 · 윤재하
만 19세 이상 이용가
윤기호의 편지는 날짜로 시작했다. 경섭이 먼저 그렇게 썼고, 선배도 그렇게 썼다.
시월 이십팔일. 대도 됐다는 말, 고맙다. 일 년 반 동안 누가 그 말을 해 주기를 기다렸는데 그게 너일 줄은 몰랐다. 화곡동 극장 영사실에 박 기사가 있다. 나는 요새 왼손으로 그린다. 선이 떨려서 사람들이 옛날 그림 같다고 좋아한다. 기호.
문경섭은 그 편지를 창고 작업대 서랍에 넣고, 서랍 위에 투명 필름 한 토막을 폈다. 하태식이 닷새 동안 락스 물에 불려 유제를 벗겨 낸 빈 필름이었다. 불빛에 비추면 창유리처럼 아무것도 없었다. 가장자리에 톱니 구멍만 줄지어 나 있었다. 그 구멍 사이 네모 한 칸이 가로 스물두 밀리, 세로 열여섯 밀리였다. 경섭은 그 네모 열네 개에 남자의 손을 그려야 했다.
십일월 이십일 월요일 밤이었다. 창고 안은 석유난로 하나로 데워져 있었다. 난로 위 주전자에서 김이 올랐고, 그 김이 전구 둘레를 흐리게 감쌌다. 물감 냄새와 석유 냄새가 섞여 목구멍이 칼칼했다.
*
붓은 쥐 수염 세 가닥을 묶은 세필이었다. 경섭이 서울에서 가져온 붓 가운데 제일 가늘었다. 경섭은 처음에 왼손으로 잡았다. 왼손으로는 하늘이 되었고 산이 되었다. 네모 한 칸에 손가락 다섯 개를 넣는 것은 되지 않았다. 첫 칸을 그리고 확대경으로 보니 손이 아니라 게 발 같았다. 경섭은 그 칸을 솜에 신나를 묻혀 닦아 냈다.
오른손으로 붓을 옮겨 잡았다. 가운뎃손가락이 반쯤 굽은 채 펴지지 않았다. 붓대를 엄지와 검지로만 쥐고, 굽은 가운뎃손가락은 붓대 밑에 받쳤다. 받치는 자리가 누를 때마다 둘째 마디가 욱신거렸다. 그 욱신거림이 붓끝까지 내려와서 선이 한 번씩 튀었다. 경섭은 숨을 멈추고 그렸다. 숨을 쉬면 붓끝이 흔들렸다. 물감은 유화 물감을 테레빈유로 묽게 푼 것이었는데, 너무 묽으면 필름 위에서 방울로 뭉쳤고 너무 되면 기계를 지날 때 긁혀 나간다. 태식이 그 사이 농도를 손가락 끝으로 찍어 보고 정해 주었다.
견본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배급사가 보낸 사진이었다. 칠월에 간판을 그릴 때 쓴 것으로, 남자의 손이 가장 높이 올라간 순간이 찍혀 있었다. 다른 하나는 칠월의 그 간판이었다. 창고 벽에 기대 세워 둔 합판에는 경섭이 팔월에 덧그린 검은 우산이 여자를 덮고 있었는데, 남자의 손은 우산 밖으로 나와 있었다. 경섭은 사진으로 손의 모양을 보고 간판으로 손의 크기를 보았다. 사흘 밤 동안 아홉 칸을 그렸다. 손이 가장 높은 데서 한 칸씩 내려왔다.
“기사님, 손이 다 내려오면 어디에 놓입니까?”
태식은 작업대 옆에 필름 통을 뒤집어 놓고 앉아 있었다. 확대경으로 경섭이 그린 칸을 하나씩 보고 있었다.
“마지막 녹기 직전 칸에서는 허리께였습니다. 그다음은 없습니다.”
“허리에서 멈춥니까, 옆으로 떨어집니까?”
“모릅니다. 거기서 녹았으니까요.”
경섭은 붓을 내려놓고 오른손을 주물렀다. 굽은 마디가 뜨거웠다. 태식이 그 손을 가져가 제 무릎 위에 올려놓고, 엄지로 마디를 천천히 눌렀다. 두 사람은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난로 위 주전자가 끓어 뚜껑이 달그락거렸다.
*
곽병두가 창고 문을 연 것은 목요일 오후였다.
경섭은 작업대 위의 투명 필름을 팔레트 밑에 밀어 넣었다. 팔레트에 짜 놓은 물감이 필름 위를 덮었다. 곽은 들어와서 작업대를 보지 않았다. 벽에 기대 세운 칠월의 간판을 보았다. 우산 밖으로 나온 남자의 손을 보고, 우산 가장자리를 보았다. 경섭은 사흘 전에 우산 가장자리 물감을 칼로 조금 긁어 놓았다. 아래 그림을 보려고 긁었는데, 긁힌 자리로 여자의 치맛자락이 한 뼘 드러나 있었다.
“우산이 벗겨지네.”
“비가 그쳐서요.”
곽이 웃지 않았다.
“문경섭이, 이 간판 왜 아직 갖고 있어?”
“합판은 안 버립니다. 뒤집어서 다시 씁니다.”
“그럼 뒷면을 봐야겠네.”
곽이 합판 모서리를 잡고 뒤집으려 했다. 경섭의 숨이 멎었다. 뒷면의 산수화는 이 합판이 아니었다. 산수화는 창고 안쪽 다른 합판 뒤에 있었다. 이 합판 뒷면은 아무것도 없는 누런 나무였다. 그런데도 경섭의 숨은 멎었다. 곽이 합판을 반쯤 들었다가 놓았다. 무거웠다.
“이건 가져간다. 영화에 없는 장면을 그린 간판이니까. 참고 자료로.”
흰 셔츠 둘이 들어와 합판을 들고 나갔다. 경섭은 작업대 앞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팔레트 밑에 투명 필름이 있었다. 다섯 칸이 비어 있었다. 손이 허리께로 내려와 어디에 놓이는지 보여 줄 견본이 방금 문밖으로 나갔다.
곽이 문턱에서 돌아섰다.
“삼십일 마지막 회에 보자고, 문경섭이. 나는 맨 뒷줄에 있어. 스톱워치 들고.”
*
그날 밤 경섭은 붓을 들지 못했다. 사진 속 손은 가장 높은 데 있었고, 간판은 없었다. 남은 다섯 칸의 손이 어디로 가는지 경섭은 몰랐다.
태식이 창고에 들어와 전구 밑에 섰다.
“문 선생, 보십시오.”
태식이 오른손을 들었다. 어깨높이까지 들지 않고 가슴께에서 멈췄다. 손바닥이 앞을 향했다가 반쯤 돌아갔다. 무엇을 건네려다 만 손 같기도 했고, 벽에 붙은 무엇을 떼려다 만 손 같기도 했다. 그러고는 천천히 내려왔다. 허리께에서 한 번 멈췄다가, 옆으로 떨어지지 않고 허벅지 앞에 가만히 놓였다.
“그 사람이 뭘 하려고 했는지는 모릅니다. 그런데 저라면 이렇게 내렸을 겁니다.”
“왜 그렇게 내리십니까?”
“떨어뜨리면 포기한 겁니다. 이렇게 놓으면 다음에 또 들 수 있습니다.”
경섭은 붓을 잡았다. 태식이 다시 손을 들었다. 가슴께에서 멈추고, 돌리고, 내렸다. 경섭은 확대경 너머로 그 손을 보고 한 칸을 그렸다. 태식이 또 들었다. 경섭이 또 그렸다. 난로가 꺼져 가는 줄도 몰랐다. 창고 안이 식어서 입김이 났다. 태식은 서른 번쯤 손을 들었다 내렸는데, 스무 번째쯤부터 팔이 떨렸다. 경섭은 그 떨림도 보았다. 마지막 칸에는 그 떨림을 조금 넣었다. 허벅지 앞에 놓인 손가락 끝이 아주 조금 벌어져 있었다.
열네 칸이 끝났을 때 새벽 네 시였다. 경섭은 붓을 내려놓고 오른손을 펴 보았다. 가운뎃손가락이 펴지지 않은 채로 떨렸다. 태식이 든 채로 떨던 오른팔을 내리고, 그 손으로 경섭의 손을 잡았다.
“이 손, 문 선생 붓 자국이 남습니다. 곽 형사가 보면 누가 그렸는지 압니다.”
“압니다.”
“그래도 됩니까?”
“선배가 편지에 썼습니다. 떨리는 선을 사람들이 옛날 그림 같다고 좋아한답니다. 저는 제 선이 남는 게 좋습니다. 그 사람이 누구든 이 손은 기사님 손입니다. 그건 곽 형사도 모릅니다.”
*
「젖은 계단」 앙코르는 이십사일 금요일에 걸렸다. 경섭은 앙코르 간판을 새로 그리지 않았다. 사장이 돈을 아끼라고 했고, 경섭도 그리고 싶지 않았다. 극장 정면에는 영화 제목만 붓글씨로 크게 써 붙였다. 순임은 그걸 보고 간판쟁이가 글씨도 쓰네, 하고 한마디 했다.
곽은 매일 저녁 여덟 시 회차에 와서 맨 뒷줄에 앉았고, 오십삼 분에 스톱워치를 눌렀고, 십오 초가 지나면 스톱워치를 멈추고 나갔다. 경섭은 첫날 뒷문 틈으로 그 뒷모습을 보았다. 화면이 까매지자 객석에서 누가 또 기계 고치라고 소리쳤다. 곽의 엄지가 스톱워치 단추 위에서 하얗게 눌렸다가 풀렸다. 곽은 까만 화면을 보는 동안 한 번도 눈을 깜빡이지 않았다.
셋째 날 저녁에는 나영달이 표를 사러 왔다. 순임이 창구에서 그를 알아보고 표를 떼어 주지 않았다.
“지사 양반이 표를 와 삽니까? 공짜로 들어가소.”
“삼십일 마지막 회 걸로 한 장 주소. 공짜로 들어가면 안 들어간 게 됩니다.”
순임이 그를 한참 보다가 표를 떼어 주었다. 영달은 그 표를 지갑에 넣지 않고 윗주머니 담배 옆에 꽂았다. 순임은 그 사흘 동안 표를 하루 스무 장 남짓 팔았다. 새 장부 종이 첫 장에는 여전히 날짜만 적혀 있었는데, 그 아래 작게 한 줄이 늘었다. 지사 양반 표 삼.
이십칠일 새벽 두 시, 태식은 영사실 작업대에서 삼백사십육 칸 끝에 경섭의 열네 칸을 이었다. 아세톤을 바르고 십 초를 눌렀다. 열네 번째 칸 끝에는 아무것도 잇지 않았다. 거기는 삼십일 밤에 「젖은 계단」 2권 릴의 오십삼 분 자리, 검은 필름이 있는 자리에 이어질 끝이었다.
“한 번 걸어 볼까요?”
경섭이 물었다. 태식은 롤을 기계에 걸었다. 그러나 램프 하우스의 불은 켜지 않았다. 스위치를 올리자 릴이 돌았다. 삼백육십 칸이 불 없이 기계를 지나갔다. 이음매마다 필름이 톡 하고 가볍게 튀었다가 제자리로 돌아왔다. 걸리는 데가 없었다. 화면에는 아무것도 비치지 않았다. 객석은 어두운 그대로였다.
“안 보십니까?”
“처음은 관객하고 봅시다.”
경섭은 작업대 끝에 걸터앉았다. 방은 기계가 잠깐 돌았는데도 금세 식어 갔다. 십일월 새벽의 영사실은 칠월과 다른 방이었다. 벽에서 찬 기운이 스며 나왔고, 쇠 냄새가 차가웠다.
“기사님, 삼십일 밤에 그 십오 초가 지나가면 그다음은 어떻게 됩니까?”
“곽 형사가 계단 열아홉 개를 올라옵니다. 제가 세어 보니 그 사람은 이십 초면 올라옵니다.”
“그럼 그 이십 초 안에 뭘 합니까?”
“잘라 냅니다. 삼백육십 칸을요. 까만 필름을 도로 대 놓을 시간은 없습니다. 잘라 낸 자리는 그냥 붙이고, 영화는 계속 돕니다. 곽 형사가 문을 열면 저는 기계 옆에 서 있을 겁니다.”
“잘라 낸 건요?”
태식이 경섭을 보았다.
“창 밖으로 내립니다. 영사실 창 아래가 극장 뒷골목입니다. 거기 누가 서 있으면 됩니다.”
경섭은 대답 대신 오른손을 쥐었다 폈다. 가운뎃손가락은 여전히 다 펴지지 않았다.
“기사님은요?”
“저는 잡혀갑니다.”
그 말이 너무 쉽게 나와서 경섭은 한참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태식은 목에 건 수건을 풀어 접었다. 팔 년 동안 한 번도 풀지 않던 수건이었다.
“팔 년 동안 안 잡혀가려고 혼자 했습니다. 이번에는 잡혀가려고 같이 하는 겁니다. 셈이 다릅니다.”
“무슨 셈이요?”
“혼자 지면 저 하나가 없어지면 다 없어집니다. 같이 지면 저 하나가 없어져도 열하나가 남습니다.”
릴이 다 돌고 끝이 딱딱딱 돌았다. 태식이 스위치를 내렸다. 영사실이 조용해졌다. 경섭은 창고로 내려가 산수화를 그린 합판 뒷면을 폈다. 열한 개의 산이 있었다. 그는 열두 번째 산을 그렸다. 산 아래 집을 그리지 않고, 나무를 그리지 않았다. 대신 산 중턱에 아주 작은 손 하나를 그렸다. 손바닥이 앞을 향했다가 반쯤 돌아간 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