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화(5,062자) · 순임 · 11월 3일
금고
검은 화면 십오 초 · 윤재하
만 19세 이상 이용가
십일월 삼일 금요일 아침, 주순임은 매표소에서 표 뭉치 하나의 가운데를 면도칼로 파냈다. 백 장짜리 뭉치였다. 겉에서 스무 장을 남기고 안쪽 여든 장의 가운데를 동그랗게 도려내니, 손바닥에 쏙 들어가는 구멍이 생겼다. 도려낸 종이 부스러기는 난로에 넣었다. 십일월 들어 처음 피운 난로였고, 매표소 안에 연탄 냄새와 종이 타는 냄새가 섞였다.
구멍에 들어간 것은 필름 한 롤이었다. 하태식과 문경섭이 지난 두 주 동안 이어 붙인 계단이었다. 대구, 마산, 진주, 광주, 대전, 울산과 동래에서 온 토막에, 지난주에 새로 온 세 곳의 토막까지 합쳐 삼백사십육 칸이 되었다.
새로 온 세 곳 가운데 하나는 김해였다. 김해 극장 영사실에 순임이 아는 이름이 있었다. 오 년 전까지 창선극장 사장이었던 사람, 서른일곱 먹은 과부를 매표소에 앉히고 매일 몇 장 팔았는지 적으라고 시킨 사람이었다. 그는 극장을 동생에게 넘기고 김해에 내려가 작은 극장 영사실에 들어앉아 있었다. 태식이 편지를 보냈더니 그가 순임 앞으로 답장을 했다. 토막 스물두 칸과 함께 종이 한 장이 들어 있었다. 아직 적나? 그 한 줄이었다.
나머지 둘은 포항과 서울 화곡동이었다. 화곡동은 경섭의 선배 윤기호가 이름을 알려 준 곳이었다. 윤기호의 편지는 경섭이 아무한테도 보여 주지 않았다. 경섭은 그 편지를 받은 날 왼손으로 하늘을 칠하다가 붓을 두 번 떨어뜨렸다.
엮인 영사실은 열하나가 되었다. 칸은 열넷이 모자랐다. 남자의 손이 반쯤 올라갔다가 내려가는 마지막 열네 칸이었다. 어느 극장 토막이든 그 끝자리만은 초산이 먹어 까맣게 녹아 있었다. 잘린 끝에 테이프를 붙였던 자리라서 그렇다고 태식이 말했다.
순임은 필름 롤을 구멍에 넣고, 도려내지 않은 겉장 스무 장으로 덮고, 고무줄을 두 번 감았다. 그러고는 그 뭉치를 팔다 남은 표 뭉치들 사이에 끼워 창구 옆 선반에 올려 두었다. 표 뭉치 스물세 개가 나란히 섰다. 어느 것이 그것인지 순임 말고는 아무도 몰랐다.
*
점심때 경섭이 창구에 얼굴을 들이밀었다. 오른손은 붕대를 풀었지만 가운뎃손가락이 반쯤 굽은 채 펴지지 않았다.
“누님, 오늘 좀 이상합니다. 골목 입구 담뱃가게 앞에 아까부터 흰 셔츠가 둘 서 있습니다.”
“담배 사러 왔겠지.”
“한 시간째 한 갑을 못 고르고 있습니다.”
순임은 창구 옆 선반의 표 뭉치를 한 번 보고 나서 대답했다.
“그라믄 니는 사다리에 올라가 있어라. 사다리 위에서는 아무도 니한테 말 안 건다.”
곽병두는 오후 두 시에 왔다. 이번에는 혼자가 아니었다. 흰 셔츠 둘이 뒤에 섰다. 경섭을 데려갔던 그 두 사람이었다. 곽은 창구 앞에서 담배를 꺼내지 않았다.
“아주머니, 금고 여시죠.”
“금고는 사장님 겁니다.”
“열쇠는 아주머니한테 있잖아요.”
“사장님 금고를 제가 여는 건 도둑질입니다, 형사님.”
곽이 창구 유리에 손바닥을 댔다. 유리가 그 손바닥 모양대로 뿌옇게 흐려졌다가 천천히 걷혔다.
“그러면 사장을 부르세요.”
사장 추만길은 삼십 분 뒤에 왔다. 집에서 누워 있다가 왔는지 윗도리는 양복인데 아랫도리는 줄무늬 잠옷 바지였다. 한 손에는 위장약 병을 들고 있었다. 사장은 곽을 보자 먼저 배를 문질렀다.
“형사님, 제가 요새 속이 안 좋아서.”
“사장님, 금고 여세요. 오늘 안 열면 삼십일 잔금 날까지 이 극장에 사람이 계속 옵니다. 대양개발에서도 그걸 좋아하진 않을 거고.”
사장의 얼굴에서 핏기가 빠졌다. 순임은 그 얼굴을 보았다. 십구 년 동안 본 얼굴 가운데 제일 아파 보였는데, 이번에는 꾀병이 아니었다.
“주 여사, 열어라.”
“사장님.”
“열어라. 잔금 받아야 니 퇴직금도 준다.”
순임은 앞치마 주머니에서 열쇠를 꺼냈다. 열쇠가 손가락 사이에서 한 번 미끄러졌다. 그녀는 허리를 굽혀 금고 앞에 쪼그려 앉았다. 무릎에서 소리가 났다. 열쇠를 돌리자 쇠문이 무겁게 열렸다.
안에는 지폐 묶음 세 개와 동전 자루 하나, 그리고 공책 여섯 권이 있었다. 대구 깡통과 마산 도시락통과 진주 봉투는 지난달에 이미 경섭의 창고 간판 더미 밑으로 옮겨 두었다. 곽이 쪼그려 앉아 금고 안을 들여다보았다. 지폐는 만지지 않았다. 공책 여섯 권을 꺼내 무릎에 올려놓고 맨 위 것을 폈다.
“이게 뭡니까?”
“표 판 거 적은 겁니다.”
곽이 공책을 넘겼다. 날짜와 숫자가 줄줄이 지나갔고, 비와 눈과 정전과 추석이 그 사이로 지나갔다. 곽의 손가락이 어느 줄에서 멈췄다.
“기사 쓰러짐. 칠십오 년 칠월 이십삼일.”
곽이 몇 장을 더 넘겼다. 올해 여름으로 왔다.
“간판쟁이 목 늘어남. 간판쟁이 돌아옴.”
곽이 고개를 들어 순임을 보았다. 순임은 그 눈을 피하지 않았다. 대신 앞치마 끈을 두 손으로 쥐었다. 끈이 손가락에 감겨 손끝이 하얘졌다.
“재밌게 적으셨네. 이건 가져갑니다.”
그때 사장이 입을 열었다. 목소리가 갈라져 있었다.
“형사님, 그건 매표 기록입니다. 극장 서류라 제 겁니다. 가져가시려면 영수증 써 주고 가시소.”
곽이 사장을 보았다. 사장은 위장약 병을 쥔 손을 가슴에 붙이고 있었다. 병 안에서 알약이 달그락거렸다. 곽은 한참 보다가 수첩을 꺼내 한 장을 찢고 뭐라고 적어 사장에게 건넸다.
“여기 있습니다. 영수증.”
사장은 그 종이를 두 손으로 받았다. 받고 나서 배를 문지르지 않았다.
*
곽은 공책 여섯 권을 옆구리에 끼고 창구 옆 선반 앞에 섰다. 표 뭉치 스물세 개가 나란히 서 있었다. 곽이 손가락으로 첫 번째 뭉치를 톡 건드렸다. 뭉치가 기울었다가 도로 섰다.
“표가 많이 남았네요.”
“마지막 주에 다 팝니다. 「젖은 계단」 다시 거니까예.”
곽은 손가락을 두 번째 뭉치로, 세 번째 뭉치로 옮겼다. 순임은 숨을 쉬지 않았다. 창구 밖에서 경섭이 사다리를 붙잡고 서 있었다. 그 손가락 관절이 하얗게 불거졌다. 곽의 손가락이 열한 번째 뭉치 앞에서 멈췄다. 순임의 발가락이 신발 안에서 오그라들었다.
곽은 열한 번째 뭉치를 집어 들었다. 손바닥에 얹고 무게를 쟀다. 그러고는 고무줄을 튕겼다.
“아주머니, 표 한 장 주세요. 삼십일 마지막 회. 맨 뒷줄 가운데.”
“그 자리는 형사님 자리 아닙니까? 표 안 사셔도 됩니다.”
“마지막이니까 사 보지.”
곽이 뭉치를 도로 내려놓았다. 열한 번째 자리가 아니라 열두 번째 자리에 놓았다. 순임은 거스름돈 통에서 동전을 세어 표 한 장을 떼어 주었다. 떼어 준 표는 열여섯 번째 뭉치에서 나왔다. 손은 떨리지 않았다. 떨리지 않게 하느라 팔꿈치를 창구 턱에 붙이고 있었다.
곽이 흰 셔츠 둘을 데리고 나갔다. 골목 끝에서 한 번도 돌아보지 않았다.
사장은 곽이 나간 뒤에도 한참 매표소 안에 서 있었다. 그러다 순임이 앉는 둥근 의자에 털썩 앉았다. 의자 다리가 삐걱거렸다. 사장은 곽이 준 수첩 종이를 폈다. 거기에는 공책 여섯 권, 이라고만 적혀 있었고 서명도 도장도 없었다. 사장은 그 종이를 한참 보다가 접어서 양복 안주머니에 넣었다.
“주 여사.”
“예.”
“내가 열라 캤다.”
“압니다.”
“잔금 때문에 열라 캤다. 그것도 알제?”
“압니다, 사장님.”
사장은 위장약 병 뚜껑을 열었다가 알약을 꺼내지 않고 도로 닫았다. 줄무늬 잠옷 바지 무릎이 떨리고 있었다. 떨리는 무릎 위에 두 손을 얹어 눌렀다.
“영수증 달라 캤는 거, 그건 내가 한 기다.”
“예. 그건 사장님이 하셨습니다.”
사장이 일어섰다. 매표소 문을 나가다가 돌아서지 않고 말했다.
“삼십일에 나는 아플 끼다. 그날 극장에 안 나온다. 무슨 일이 나도 나는 집에서 누워 있었다.”
사장은 잠옷 바지 차림으로 골목을 걸어갔다. 순임은 그 뒷모습을 보고 나서야 금고 문을 닫았다. 빈 금고는 닫는 소리가 가벼웠다.
*
그날 밤 순임은 매표소 불을 켜 두었다. 태식과 경섭이 창구 앞에 섰다. 순임은 표 뭉치들 가운데 열두 번째 자리에 놓인 것을 집어 고무줄을 풀었다. 겉장 스무 장 밑에서 필름 롤이 그대로 나왔다. 세 사람은 한참 그것을 보았다.
“누님.”
경섭이 먼저 말을 꺼냈다가 잇지 못했다. 순임은 필름 롤을 태식 손바닥에 올려 주고 빈 금고를 보았다. 금고 안에 공책 여섯 권이 있던 자리가 네모나게 먼지가 없었다.
“십구 년 치다.”
순임이 말했다. 목소리가 평소와 같았다.
“괜찮다. 내가 그걸 한 번 더하고 끝낸 날이 팔월이다. 사십일만 삼천이백육십.”
“누나.”
“가만 있어 봐라.”
순임은 두 눈을 감았다. 매표소 난로에서 연탄이 가라앉는 소리가 났다.
“쉰아홉 년 칠천팔백십이. 육십 년 이만 이천사백. 그해 사일구 나고 한 달은 사백 장도 안 팔렸다. 육십일 년 이만 사천칠십. 육십이 년 이만 육천.”
태식이 창구 턱을 붙잡았다. 순임은 눈을 감은 채로 해마다 숫자를 불렀다. 칠십 년에서 목소리가 한 번 걸렸고, 칠십이 년 가을 계엄 난 달에서 또 걸렸다. 걸릴 때마다 순임은 입술을 한 번 다물었다가 다시 열었다.
“칠십칠 년 이만 일천. 올해는 아직 안 끝났다.”
순임이 눈을 떴다. 눈가가 젖어 있지 않았다. 대신 손이 앞치마 끈을 쥐고 있었고, 그 끈이 손가락에 세 바퀴 감겨 있었다.
“종이는 가져가도 이건 못 가져간다. 내가 적은 게 아이고, 내가 판 기다.”
경섭이 창구 안으로 손을 넣어 앞치마 끈에 감긴 순임의 손가락을 하나씩 풀었다. 순임은 가만히 있었다. 세 바퀴를 다 풀자 손가락 마디에 붉은 줄이 남았다.
“누님, 삼십일 마지막 회 표는 몇 장이나 파실 겁니까?”
“서른 장 팔면 잘 판 기다. 문 닫는 극장에 누가 오노?”
“그럼 서른 장 파시고, 한 장은 제가 사겠습니다.”
“니는 공짜로 들어오면서 와 사노?”
“공책에 적으시라고요. 누님 새 공책 첫 장에요.”
순임이 경섭을 보았다. 그러고는 서랍을 열어 표 뒤에 끼워 두던 빈 장부 종이를 한 장 꺼냈다. 맨 위에 날짜부터 적었다. 십일월 삼일. 그 아래에 아무것도 적지 않고 종이를 반으로 접어 앞치마 주머니에 넣었다.
“열네 칸 모자라제?”
태식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느 극장에도 없다고?”
“없습니다. 끝자리라 다 녹았습니다.”
순임은 창구 밖 경섭의 오른손을 보았다. 가운뎃손가락이 아직 반쯤 굽은 채였다. 그리고 창고 쪽을, 뒷면을 위로 하고 누운 간판들을 보았다.
“간판쟁이는 없는 걸 그리는 사람 아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