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화(5,045자) · 태식 · 순임 · 경섭 · 11월 30일
십오 초
검은 화면 십오 초 · 윤재하
만 19세 이상 이용가
십일월 삼십일 목요일 아침 열 시, 한영흥업 부산 지사 뒤뜰의 드럼통은 서리를 맞아 허옇게 얼룩져 있었다. 창선극장의 마지막 소각이었다. 하태식이 가져온 것은 십일월에 잘린 외화 토막 하나였고, 곽병두는 확대경을 대 보지도 않았다.
“넣어.”
태식이 넣었다. 토막은 금방 탔다. 곽은 연기가 다 올라가기도 전에 나영달 쪽으로 돌아섰다.
“나 계장, 오늘이 삼십일이야.”
영달은 도장 주머니를 열었다. 먹지 사본을 판자 위에 펴고, 극장 칸에 태식의 도장이 찍힌 것을 확인하고, 배급사 칸에 제 도장을 눌렀다. 인주가 선명했다. 그러고 나서 도장을 주머니에 넣지 않고 곽에게 내밀었다.
“명부는 없습니다, 형사님.”
곽이 도장을 보았다. 받지 않았다.
“팔 년 치 가짜 소각 확인서, 그거 다 제가 찍었습니다. 이 도장입니다. 그 뭉치 들고 가서 저를 부르소. 딴 사람 부를 거 없습니다. 도장 찍은 놈은 하나니까예.”
영달의 손이 떨리지 않았다. 떨리지 않는 손을 태식은 처음 보았다. 팔 년 동안 영달의 손은 도장을 찍을 때마다 조금씩 떨렸었다.
곽은 한참 그 손을 보다가 도장을 받아 셔츠 주머니에 넣었다. 확대경이 들어 있던 주머니였다.
“나 계장, 딸이 시집간다며.”
“봄에 갑니다.”
“잘 가라고 해.”
곽은 태식에게 고개를 돌렸다.
“오늘 밤에 보자, 하 기사.”
*
주순임은 저녁 일곱 시 반부터 표를 팔았다. 마지막 회였다. 극장 문 닫는다는 것은 신문에 내지 않았는데도 사람들이 왔다. 시장 상인들이 가게 셔터를 내리고 왔고, 동네 노인들이 왔고, 교복 입은 아이 셋이 왔다. 순임은 한 장 뗄 때마다 새 장부 종이에 작대기를 하나씩 그었다. 매표소 난로에는 연탄을 두 장 넣었다. 마지막 날이라 아낄 것이 없었다. 창구 유리에 김이 서려 손님 얼굴이 뿌옇게 보였고, 순임은 손님이 올 때마다 소맷부리로 유리를 한 번씩 닦았다. 교복 아이 셋은 학생 할인을 해 달라고 졸랐다. 순임은 문 닫는 극장에 할인이 어디 있노 하고서는 셋 중 제일 작은 아이 표를 공짜로 떼어 주었다.
문경섭이 한 장을 샀다. 나영달이 윗주머니의 표를 내밀었다. 곽병두는 이 주 전에 산 표를 보여 주지 않고 그냥 들어갔다. 사장 추만길은 오지 않았다. 아침에 사장 부인이 전화해서 그이가 새벽부터 배가 아파 누웠다고 했다. 순임은 수화기를 내려놓으면서 웃었다.
여덟 시에 작대기가 서른하나였다.
맨 마지막으로 들어온 사람은 예순 넘은 남자였다. 낡은 점퍼를 입었고 모자를 벗어 손에 쥐고 있었다. 그는 표를 받으면서 순임을 보았다.
“여기 없어진다면서요?”
“없어집니다.”
“내가 여기 이십 년 왔는데.”
“나는 십구 년 있었습니다.”
남자가 웃었다.
“내가 더 오래 왔네.”
순임도 웃었다. 남자가 들어가고 순임은 창구 문을 잠그지 않았다. 대신 창구 옆 선반에서 가운데를 파낸 표 뭉치 하나를 집어 앞치마 주머니에 넣었다. 뭉치 안은 비어 있었다.
*
오십이 분이 지났다. 태식은 영사실 작은 창에 눈을 대고 있었다. 오후에 「젖은 계단」 2권 릴을 되감아 작업대에 걸고, 넉 달 전 제 손으로 끼운 검은 필름 이십이 척 반을 잘라 냈다. 그 자리에 삼백육십 칸을 이었다. 아세톤을 바르고 십 초를 눌렀다. 이음매 두 곳에 연필로 작은 점을 찍었다. 경섭이 그 점을 보고 첫날 판자에 그린 돌만큼 작다고 했다.
맨 뒷줄 가운데 흰 천 의자에서 은빛이 반짝였다. 곽이 스톱워치를 손바닥에 올려놓았다.
오십삼 분이 되었다.
화면이 까매지지 않았다.
계단이 나왔다. 젖어 있었다. 여자가 세 번째 단에 앉으면서 어깨를 한 번 움츠렸고, 여섯 칸 동안 어깨 뒤 벽이 드러났다. 태식은 그 글씨를 읽지 않았다. 대구 칸이었고, 마산 칸이었고, 진주 칸이었다. 여자의 치맛자락이 계단 두 단을 덮었다. 남자가 손을 들었다. 광주 칸이었고, 대전 칸이었고, 울산과 동래와 김해와 포항과 화곡동 칸이었다. 손이 가슴께에서 멈추고 반쯤 돌아갔다.
그러고 손이 내려왔다. 거기서부터 화면의 결이 조금 달랐다. 필름 입자 대신 붓 자국이 흔들렸다. 손이 허리께에서 한 번 멈췄다가 허벅지 앞에 가만히 놓였다. 손가락 끝이 아주 조금 벌어져 있었다. 태식은 제 오른손이 작업복 바지 앞에서 똑같이 놓여 있는 것을 알았다.
십오 초였다.
객석에서 아무도 기계 고치라고 소리치지 않았다. 앞줄 교복 아이 하나가 옆 아이에게 뭐라고 속삭였다. 맨 뒷줄에서 흰 천 의자가 뒤로 밀리는 소리가 났다.
태식은 스위치를 내렸다. 릴이 섰다. 화면이 까매졌다. 객석이 술렁였다. 태식은 게이트를 열고 연필 점 두 개를 찾아, 첫 점에 가위를 대고 둘째 점에 댔다. 삼백육십 칸이 손바닥 위로 떨어졌다. 계단에서 구두 소리가 올라왔다. 태식은 롤을 둘둘 말아 창문을 열었다. 십일월 밤바람이 영사실 안으로 들이쳤다. 뒷골목 가로등 아래에 사람이 하나 서서 두 손을 모아 들고 있었다.
태식은 롤을 떨어뜨렸다. 손이 그것을 받았다.
철문이 열렸다. 태식은 가위를 작업대에 내려놓고 잘린 두 끝을 겹쳐 쥐고 있었다. 아세톤 병을 따지는 못했다.
곽은 들어오자마자 창이 아니라 기계를 보았다. 멈춘 릴과 열린 게이트와 태식의 손에 쥔 두 끝을 보았다. 숨이 차 있었는데 목소리는 차지 않았다.
“붙여. 돌려.”
태식은 아세톤 병을 땄다. 두 끝을 긁어 바르고 십 초를 눌렀다. 곽은 그 십 초 동안 한 번도 눈을 떼지 않았다. 태식은 필름을 게이트에 다시 걸고 스위치를 올렸다. 탄소봉 사이에 흰 불이 붙었고 릴이 돌았다.
*
문경섭은 뒷골목에서 롤을 받자마자 뒷문으로 들어갔다. 복도를 따라 매표소 뒷문까지 스무 걸음이었다. 순임이 앞치마 주머니에서 속이 빈 표 뭉치를 꺼내 들고 서 있었다. 경섭은 롤을 그 구멍에 넣었다. 순임은 고무줄을 두 번 감고 뭉치를 창구 옆 선반, 표 뭉치 스물두 개 사이에 끼워 세웠다. 경섭의 손이 떨려서 고무줄이 한 번 튕겨 나갔다. 순임이 그것을 주워 다시 감았다.
“가라. 니는 객석에 앉아 있어라. 가운데 줄.”
경섭은 객석 옆문으로 들어가 가운데 줄 빈자리에 앉았다. 화면은 까만 채였고, 영사실 창에 불빛이 흔들렸다. 흰 셔츠 둘이 통로를 뛰어 올라갔다.
일 분쯤 지나 영사실 창이 다시 밝아졌다. 화면에 방금 전 장면의 다음 장면이 나왔다. 기숙사 식당에서 여공들이 밥을 먹고 있었다. 계단은 없었다. 까만 자리도 없었다. 객석에서 누가 휴, 하고 숨을 내쉬었다. 누가 필름을 다시 걸었는지 경섭은 알았다. 곽은 영화가 멈춰 있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영화가 멈추면 사람들이 왜 멈췄는지 묻는다. 곽은 그 물음이 까만 화면보다 무서운 사람이었다.
*
영사실에서 곽은 영화가 다시 도는 것을 창으로 한 번 확인하고 나서야 스톱워치를 작업대에 놓았다. 바늘이 십오 초에 멈춰 있었다.
“몇 초였어, 하 기사?”
“십오 초입니다. 이번엔 영 점 영 초도 안 틀렸습니다.”
“어디 있어?”
“없습니다. 형사님이 원하시던 대로요.”
곽은 창문을 보았다. 창은 닫혀 있었다. 곽은 태식의 두 손을 보았다. 아세톤 냄새가 밴 손을 흰 셔츠 하나가 비틀어 등 뒤로 돌려놓았다. 기계는 옆에서 제 소리를 내며 돌았다. 곽은 태식의 얼굴 가까이 몸을 숙였다.
“하 기사, 삼 년 동안 나는 저 까만 걸 보고 잘린 걸 알았어. 오늘은 뭘 보고 알아야 하지?”
태식은 대답하지 않았다. 곽이 허리를 폈다.
“데려가.”
태식은 계단 열아홉 개를 내려가며 하나씩 셌다. 팔 년 동안 필름 통을 지고 오르내린 계단이었다. 일곱 번째 계단에서 누가 올라오고 있었다. 나영달이었다. 영달은 흰 셔츠 둘과 곽 사이로 태식과 어깨를 스치며 지나갔다.
“기계는 내가 본다. 3권 바꿔 걸어야 할 거 아이가.”
곽이 영달을 돌아보았다. 영달은 돌아보지 않고 철문 안으로 들어갔다. 도장 없는 빈손이었다. 곧 영사실에서 3권 릴을 꺼내는 쇳소리가 났다. 열아홉 번째에서 매표소 창구 불빛이 보였다. 순임이 유리 너머에 서 있었다. 순임은 부르지 않았다.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
마지막 회가 끝나고 서른한 명이 나갔다. 순임이 문에서 한 사람씩 배웅했다. 낡은 점퍼의 남자가 모자를 쓰다가 돌아섰다.
“아까 그거, 가운데쯤에 계단 나온 거 말입니다.”
순임이 그 자리에 섰다.
“이십 년 오면서 거기는 늘 까매졌거든요. 어느 영화든 한 번씩은 까매져요. 이상했는데 물어볼 데가 없었어요. 오늘은 안 까매졌네. 원래 그런 장면이었습니까?”
순임은 앞치마 끈을 쥐지 않았다. 두 손을 앞에 모으고 섰다.
“원래 그랬습니다.”
남자는 고개를 끄덕이고 골목으로 나갔다. 순임은 매표소로 돌아가 새 장부 종이를 폈다. 날짜 아래에 서른하나, 라고 적고, 그 옆에 작게 적었다. 안 까매짐.
*
태식은 스물아홉 날을 구류로 살고 나왔다. 영사기사 일은 이듬해 봄까지 받아 주는 데가 없었다. 창선극장은 십이월에 헐렸다. 선반의 표 뭉치 스물세 개는 순임이 보자기에 싸 들고 나갔다.
이천일 년 오월, 서울 자료원 지하 시사실에서 복원된 「젖은 계단」이 돌았다. 좌석은 여든이었고 사람은 서른 남짓이었다. 하태식은 쉰다섯이었고 가운데 줄에 앉아 있었다. 옆자리의 문경섭은 오른손 가운뎃손가락이 끝까지 펴지지 않았다. 주순임은 칠 년 전에 갔다. 곽이 가져간 공책 여섯 권은 끝내 돌아오지 않았다. 순임은 그 뒤로 해마다 섣달그믐이면 동생에게 편지를 쓰면서 맨 끝에 그해까지 외운 숫자를 적었다. 표 뭉치 스물세 개는 순임의 동생이 대구에서 보관하다가 작년에 자료원으로 보냈다. 그 가운데 하나는 가운데가 파여 있었다.
나영달은 그해 겨울 지사를 그만두고, 이듬해 봄 큰딸을 시집보냈다. 식장에서 신랑 쪽 사람이 장인어른은 무슨 일을 하셨느냐고 물었을 때, 영달은 영사기사였다고 대답했다.
오십삼 분이 되었다. 계단이 나왔다. 여자가 어깨를 움츠렸고 벽의 글씨가 여섯 칸 동안 보였다. 남자의 손이 올라갔다가 내려와, 붓 자국이 흔들리는 열네 칸을 지나 허벅지 앞에 놓였다.
목록 비고란에는 한 줄이 적혀 있다. 1978년 부산 창선극장 절단분. 전국 열두 영사실 기증. 끝 열네 칸은 손으로 그림.
불이 켜지기 전, 태식은 화면을 보지 않고 옆을 보았다. 화면 빛이 경섭의 얼굴에 얹혔다가 걷혔다. 경섭도 옆을 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