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5,034자) · 태식 · 9월 12일

같은 칸

검은 화면 십오 초 · 윤재하

만 19세 이상 이용가

대구에서 온 것은 구월 십이일 화요일 오후였다. 주순길은 직접 오지 않고 부산역 화물로 부쳤다. 사과 상자 두 개였다. 뚜껑을 여니 사과가 반쯤 들어 있었고, 사과를 들어내니 신문지가 깔려 있었고, 신문지를 걷으니 녹슨 깡통이 세 개씩 나란히 누워 있었다.

주순임이 사과 하나를 들어 치마에 쓱 문질렀다.

“사과는 진짜 사과다.”

“먹어도 됩니까?”

문경섭이 물었다.

“먹으라고 넣었지. 필름만 넣으면 무게가 이상하다고 사과를 넣은 기라. 그놈이 그런 머리는 있다.”

셋이 매표소 안에서 사과를 한 알씩 먹었다. 대구 사과는 알이 작고 단단했다. 하태식은 사과를 씹으면서 상자 바닥에 끼워진 편지를 꺼냈다. 순임의 편지를 받고 태식이 따로 대구에 부친 편지에 대한 답이었다. 태식은 그 편지에 두 줄만 적었었다. 왜 시작하셨습니까? 저는 첫 번째 것을 못 태워서 시작했습니다.

답장도 두 줄이었다.

저는 태웠습니다. 태우고 나서 그 장면이 삼 년 동안 생각나서 시작했습니다.

태식은 그 두 줄을 오래 보았다. 입안의 사과가 씹히지 않고 그대로 있었다. 경섭이 어깨 너머로 읽고 나서 조용히 물었다.

“이분은 한 번 태우셨네요. 그럼 우리보다 나쁩니까?”

“우리보다 무겁습니다.”

태식은 사과를 삼켰다.

“저는 팔 년 동안 태운 기억이 없었습니다. 지난달까지는요. 이분은 그걸 삼 년 먼저 알았습니다. 태운 걸 삼 년 생각한 사람이 그다음부터 안 태운 겁니다.”

순임이 사과 꼭지를 휴지에 싸서 쓰레기통에 넣었다. 넣고 나서 코를 한 번 풀었다. 감기 든 사람처럼 오래 풀었다.

*

깡통을 영사실로 올리는 데 두 번 왕복했다. 계단은 좁고 가팔랐다. 팔 년 동안 태식 혼자 필름 통을 지고 오르내린 계단이었는데, 그날은 경섭이 뒤에서 받쳤다.

“필름이 그림보다 무겁네요.”

“간판은 안 무겁습니까?”

“간판은 크기만 합니다. 크기만 한 걸 사람들은 무겁다고 봅니다.”

대구의 계단 토막은 순길 말대로 반쯤 상해 있었다. 뚜껑을 열자 식초 냄새가 눈을 찔렀다. 필름은 가장자리가 물결처럼 우그러져 있었고, 어떤 칸은 유제가 녹아 사람 얼굴이 번진 물감처럼 흘러내려 있었다. 태식은 확대경으로 한 칸씩 보았다. 쓸 수 있는 칸에는 연필로 작은 점을 찍었고, 못 쓰는 칸은 그냥 지나갔다. 경섭이 옆에서 칸 번호를 받아 적었다. 가장자리 숫자는 대구 것도 부산 것과 똑같았다. 같은 공장에서 찍어 낸 같은 필름을 같은 칸에서 잘랐다.

“아흔하나입니다. 편지에 딸려 온 세 칸까지 아흔넷이요.”

“삼백육십에 아흔넷.”

경섭이 종이에 선을 하나 그었다가, 태식을 보고 연필을 멈췄다.

“선 긋는 건 그만두겠습니다. 칸이 늘면 늘었다고만 적읍시다.”

순길은 편지 끝에 이름 두 개를 적어 보냈다. 마산 강남극장 영사실 하 씨, 진주 중앙극장 영사실 여 씨. 둘 다 태운 적이 없는 사람이라고 했다. 태식은 그날 밤 두 통을 썼다. 날짜를 맨 위에 먼저 썼다.

마산의 하 씨는 사흘 뒤 직접 왔다. 첫차를 타고 와서 극장 뒷문을 두드렸다. 예순이 넘은 사람이었고 손에 알루미늄 도시락통을 들고 있었다.

“하태식이 기사가 누구요? 나도 하가요. 진양 하씨. 그쪽은?”

“진주 하씨입니다.”

“그라믄 같은 하가네.”

도시락통을 여니 밥 대신 필름이 둘둘 말려 있었다. 서른 칸이었다. 하 씨는 반찬 칸에 멸치볶음을 조금 담아 왔다. 멸치는 진짜로 먹으라고 가져왔다.

“버스 옆자리 여편네가 자꾸 도시락 냄새 안 난다고 쳐다보데. 그래서 멸치를 넣었다 아이가. 멸치 냄새 나면 아무도 안 쳐다본다.”

순임이 매표소에서 웃음을 터뜨렸다. 하 씨는 멸치 칸을 순임 쪽으로 밀어 주고 나서 태식을 보았다. 웃음기가 없는 눈이었다.

“나는 안 태운 게 아이고 못 태운 기라. 칠십사 년에 우리 극장에 불이 났다. 영사실에서 필름에 불이 붙어서 조수 아가 하나 죽을 뻔했다. 그 뒤로는 필름에 불 붙이는 걸 내 손으로 못 한다. 그래서 모았다. 이유가 그뿐이다. 거창한 거 없다.”

“이유가 그뿐이면 됩니다.”

“됩니까?”

“저도 그뿐이었습니다.”

하 씨는 고개를 끄덕이고, 올 때처럼 도시락통을 옆구리에 끼고 첫차 다음 차를 타러 갔다. 진주 여 씨의 토막은 등기로 왔다. 열여섯 칸이었다. 대구에서 상한 자리를 마산이 메우고 마산에서 상한 자리를 진주가 메웠다. 누가 그렇게 맞춘 것도 아닌데 초산이 먹은 자리가 극장마다 달랐다.

“백사십 칸입니다.”

엮인 영사실이 넷이 되었다.

*

벽보가 나온 것은 금요일 새벽이었다.

경섭이 대구 토막 가운데 여자 어깨가 움직이는 여섯 칸을 확대경으로 들여다보다가 숨을 멈췄다. 태식은 그 멈춘 숨을 들었다. 좁은 방에서는 숨이 멈추는 것도 소리가 되었다.

“기사님, 이리 좀 와 보십시오.”

배급사 사진에서는 여자 어깨가 벽에 붙은 종이를 가리고 있었다. 영화에서는 여자가 계단에 앉으면서 어깨를 한 번 움츠렸고, 움츠린 여섯 칸 동안 어깨 뒤의 벽이 드러났다. 벽에 종이가 한 장 붙어 있었다. 손으로 쓴 붓글씨였다.

임금 인상하라.

태식은 확대경을 받아 들고 여섯 칸을 차례로 보았다. 한 칸 앞에서는 임 자만 보였고, 두 칸 앞에서는 임금까지 보였고, 여섯 번째 칸에서 다섯 글자가 다 나왔다가 일곱 번째 칸에서 도로 어깨에 덮였다. 사분의 일 초였다.

“이건 미풍양속이 아닙니다.”

“사유 칸에는 그렇게 적혀 있습니다.”

태식이 서랍에서 절단 지시서를 꺼냈다. 등사지는 얇아서 손가락 끝에 잉크가 묻어났다.

“칸이 하나뿐입니다. 무슨 이유든 여기에 네 글자를 적습니다.”

경섭이 확대경을 내려놓았다. 손이 조금 떨렸다. 그는 떨리는 손을 무릎 사이에 끼웠다.

“그럼 이 계단은 기숙사 계단입니다. 여자는 여공이고요. 남자가 손을 반쯤 들었다가 내리는 건.”

“뭘 건네려다 만 겁니다. 아니면 벽보를 떼려다 만 거고요.”

“어느 쪽입니까?”

“모릅니다. 거기서 잘렸으니까요.”

“기사님, 이건 이제 연애 장면이 아닙니다.”

“압니다.”

“연애 장면은 들키면 극장이 벌금을 냅니다. 이건 들키면 사람이 불려 갑니다. 올봄에 인천 어느 공장 여공들이 무슨 일을 당했는지 소문으로는 다 들었잖습니까?”

태식은 들었다. 신문에는 한 줄도 안 났고 시장 사람들 입으로만 돌던 이야기였다. 그 이야기가 돌던 주에 곽병두는 임검석에서 한 번도 졸지 않았다.

“그러면 그만두시겠습니까?”

태식이 물었다. 경섭은 무릎 사이에 끼운 손을 빼서 확대경을 다시 들었다.

“아니요. 한 번 그만둔 적이 있어서, 두 번은 못 합니다.”

두 사람은 한참 말이 없었다. 창밖이 희뿌옇게 밝아 오면서 시장 쪽에서 첫 리어카가 덜컹거렸다. 방이 식어서 벽에서 서늘한 기운이 스며 나왔다. 태식은 서랍 맨 아래에서 손바닥만 한 수첩을 꺼냈다. 한 번도 쓰지 않은 새 수첩이었다.

“적겠습니다.”

“뭘요?”

“대구 주순길, 마산 하 씨, 진주 여 씨. 어느 칸을 누가 줬는지. 안 적으면 나중에 못 모읍니다.”

“기사님은 이름 안 적는다고 하셨잖습니까? 걸리면 증거가 된다고요.”

“문 선생이 그러셨지요. 이름이 있어야 다음 사람이 안다고. 누가 이걸 했다는 걸 알면 자기도 해도 되는 줄 안다고.”

태식은 첫 장 맨 위에 날짜를 먼저 쓰고, 그 아래에 이름 셋을 적었다. 볼펜이 종이를 긁는 소리가 크게 들렸다. 세 번째 이름을 다 적고 나서 태식은 수첩을 덮고 그 위에 손바닥을 얹었다. 팔 년 동안 혼자 지던 것을 처음으로 종이에 내려놓은 손이었다.

*

곽병두가 온 것은 그날 낮이었다. 표를 사지 않고 들어와 사장실에 십 분 있다가 나와서, 매표소 앞에 서서 담배를 꺼냈다. 순임이 재떨이를 창구 밖으로 내밀었다.

“대구에서 사과가 왔다던데.”

“사과 드실랍니까?”

곽은 사양하지 않았다. 순임이 내민 사과를 받아 셔츠에 문지르고 한 입 베어 물었다.

“달다. 대구 문화극장 영사기사 주순길이, 누님 동생이지요?”

순임의 손이 재떨이 가장자리에서 멈췄다.

“동생이 누나한테 사과 보내는 것도 형사님 수첩에 적습니까?”

“부산에도 사과는 있잖아요. 사과 두 상자를 화물로 부치는 동생은 드물지.”

곽은 사과를 두 입 더 먹고 심을 재떨이에 버렸다. 그러고는 계단 쪽으로 걸어갔다. 순임이 뒤에서 이 층을 향해 소리쳤다.

“태식아! 손님 올라간다!”

*

태식은 철문을 열기 전에 방을 한 번 둘러보았다. 대구 깡통 여섯 개와 마산 도시락통과 진주 봉투는 새벽에 경섭이 매표소 금고로 옮겨 두었다. 작업대 위에는 오늘 걸 릴 두 개만 있었다. 수첩은 작업복 안주머니에 있었다. 가슴께가 수첩 두께만큼 딱딱했다.

곽은 들어와서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벽에 걸린 가위를 보고, 아세톤 병을 들어 불빛에 비춰 보고, 서랍을 하나씩 열었다. 반납 확인서 사본 뭉치가 나왔다. 곽은 그것을 넘겨 보지 않았다. 그러고는 방 한가운데로 걸어가 옅은 마루판 위에 섰다. 구두 뒤꿈치로 판을 한 번 굴렀다. 속이 빈 소리가 났다.

“이 판만 소리가 다르네, 하 기사.”

“오래돼서 들떴습니다.”

곽이 쪼그려 앉아 판 틈에 손가락을 넣었다. 판이 들렸다. 아래는 비어 있었다. 먼지 위에 깡통 바닥이 놓였던 동그란 자국이 열세 개 남아 있었다.

곽은 한참 그 자국을 보았다. 그러다 일어서서 무릎을 털었다.

“비었네. 비어 있다는 건 뭐가 있었다는 거지.”

태식은 대답하지 않았다. 목에 건 수건이 등 뒤로 넘어가 있었는데 도로 걸지 않았다. 곽이 철문으로 가다가 돌아섰다.

“하 기사, 간판쟁이한테 전해. 다음 주에 나 좀 보자고. 종로 얘기, 부산에서도 한번 들어 봐야겠어.”

철문이 닫혔다. 태식은 곽이 계단을 다 내려갈 때까지 열아홉 개를 속으로 셌다. 열아홉 번째 발소리가 났을 때 그는 판을 도로 덮고, 그 위에 무릎을 꿇은 채로 한참 일어나지 못했다. 안주머니의 수첩이 가슴에 눌렸다.

아래층에서 순임이 부르지 않았다. 십구 년 동안 한 번도 빠뜨린 적 없는 소리가 그날은 올라오지 않았다. 대신 한참 뒤에 계단 중간쯤에서 누가 멈춰 서는 기척이 났고, 곧 도로 내려가는 발소리가 났다. 태식은 그것이 순임인지 경섭인지 알았다. 발소리가 가벼운데 무릎에서 소리가 났다. 그는 일어나 수건을 목에 도로 걸고, 저녁 회차에 걸 릴을 기계에 끼웠다.

5화는 어땠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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