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5,011자) · 태식 · 8월 9일

관객 없는 상영

형사는 영사기사를 사랑했다 · 윤재하

한영흥업 부산 지사는 중앙동 부둣길 뒤 삼 층 건물이었고⁠, 뒤뜰에 녹슨 드럼통이 하나 서 있었다⁠. 드럼통 옆구리에는 누가 망치로 두들겨 뚫은 구멍이 세 개 있었고⁠, 바닥에는 팔 년 동안 태운 것들의 재가 시멘트 틈마다 검게 눌어붙어 있었다⁠. 바다 쪽에서 비린 바람이 불어와 재를 조금씩 들었다가 도로 내려놓았다⁠.

팔월 구일 수요일 아침 열 시였다⁠. 하태식은 필름 통 세 개를 보자기에 싸 들고 뒤뜰에 섰다⁠. 「⁠젖은 계단⁠」에서 잘라 낸 삼백육십 칸⁠, 다른 두 편에서 잘라 낸 짧은 토막 넷이었다⁠.

나영달이 먼저 나와 있었다⁠. 관리계 직원이었고 쉰이었으며 팔 년 전에는 태식처럼 영사실에 있던 사람이었다⁠. 한 손에 도장 주머니를⁠, 다른 손에 먹지 사본 묶음을 들고 있었다⁠. 영달은 태식과 눈을 맞추지 않았다⁠.

곽병두는 십 분 늦게 왔다⁠. 등사지 한 장과 작은 확대경 하나를 들고 있었다⁠.

“⁠펴 봐⁠.⁠”

태식은 작업용 흰 장갑을 끼고 계단 토막을 판자 위에 폈다⁠. 곽이 확대경을 필름 가장자리에 댔다⁠. 필름 가장자리에는 공장에서 찍어 낸 작은 숫자가 한 자에 하나씩 박혀 있다⁠. 곽은 이 숫자를 등사지에 적힌 시작 칸과 대 보고⁠, 손가락으로 칸을 짚어 가며 끝 칸까지 따라갔다⁠. 입술이 소리 없이 움직였다⁠. 이십이 척 반을 다 짚는 데 십 분이 넘게 걸렸다⁠. 그동안 뒤뜰에서는 갈매기 소리 말고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다⁠.

“⁠맞네⁠. 이번엔 진짜네⁠.⁠”

곽이 허리를 폈다⁠.

“⁠하 기사가 넣어⁠.⁠”

영달이 드럼통에 불을 붙였다⁠. 신문지가 먼저 타고⁠, 이 위에 올린 나무 조각에 불이 옮았다⁠. 태식은 계단 토막을 두 손으로 들었다⁠. 아직 부드러웠다⁠. 월요일 밤에 잘라 보름 넘게 마루판 밑에 있던 필름이었고⁠, 그중 아흐레 밤은 경섭이 전구 밑에 비춰 보던 필름이었다⁠.

태식은 움직이지 않았다⁠.

“⁠넣으라니까⁠.⁠”

“⁠형사님⁠, 이 토막 번호까지 다 맞춰 보셨으면 되지 않았습니까⁠? 태우는 건 영달이 형님 일입니다⁠.⁠”

“⁠하 기사⁠.⁠”

곽이 태식 쪽으로 한 걸음 왔다⁠. 목소리는 높아지지 않았다⁠.

“⁠팔 년 동안 이 드럼통에 들어간 게 정말 필름이었는지 나는 모르겠어⁠. 그러니까 오늘은 자른 사람이 넣어⁠. 넣는 걸 내가 봐야 잘린 게 없어진 걸 알지⁠.⁠”

영달이 도장 주머니를 쥔 손을 허벅지에 붙였다⁠. 영달의 입이 한 번 열렸다가 닫혔다⁠.

“⁠태식아⁠, 넣어라⁠.⁠”

태식은 토막을 드럼통 위로 가져갔다⁠. 불길이 손목을 핥았다⁠. 손을 폈다⁠.

필름은 한 번에 타지 않았다⁠. 가장자리부터 갈색으로 오그라들면서 칸이 하나씩 말려 들어갔다⁠. 시큼하고 매운 연기가 올라왔다⁠. 태식은 눈을 감지 않았다⁠. 세 번째 단에 걸친 치맛자락이 오그라드는 칸을 보았고⁠, 남자의 손이 반쯤 올라간 칸을 보았고⁠, 이 칸이 까맣게 되는 것을 보았다⁠. 십오 초는 태우는 데 사 분이 걸렸다⁠.

“⁠이게 확실하지⁠. 까만 걸 보는 것보다⁠.⁠”

곽이 확대경을 셔츠 주머니에 넣었다⁠. 손수건을 꺼내 손끝을 한 손가락씩 닦았다⁠. 필름을 만진 것은 태식이었는데 닦는 것은 곽이었다⁠.

“⁠간판에 우산은 누구 생각이야⁠?⁠”

“⁠간판쟁이 생각입니다⁠.⁠”

“⁠비가 그쳤는데 우산 쓴 여자라⁠. 이상하지 않나⁠?⁠”

“⁠간판쟁이는 원래 이상합니다⁠, 형사님⁠.⁠”

“⁠이상한 놈은 내가 다 적어 둬⁠. 적어 두면 언젠가 안 이상해지거든⁠.⁠”

곽은 손수건을 네 번 접어 주머니에 넣었다⁠. 영달이 먹지 사본에 도장 두 개를 찍었다⁠. 이번에는 극장 도장 칸에 태식이 직접 찍어야 했다⁠. 태식의 엄지에서 인주가 번졌다⁠.

*

곽이 돌아가고 나서도 영달은 드럼통 옆을 떠나지 않았다⁠. 불이 사그라드는 것을 보며 담배를 한 대 꺼냈다가 불을 붙이지 않고 도로 넣었다⁠. 영사실에서는 안 피운다⁠. 이 버릇이 지사에 와서도 팔 년째 남아 있었다⁠.

“⁠형님⁠.⁠”

“⁠말하지 마라⁠. 나는 오늘 아무것도 몰랐다⁠.⁠”

“⁠지난 팔 년은요⁠?⁠”

영달이 태식을 보았다⁠. 처음으로 눈을 맞췄다⁠.

“⁠팔 년 동안 내 도장은 니 편이었다⁠. 오늘부터는 저 사람 도장이다⁠. 다음 달부터 소각 입회는 매번 저 사람이 온다더라⁠. 서울에서 공문이 내려왔대⁠. 부산이 너무 조용해서 이상하다고⁠.⁠”

“⁠조용하면 이상합니까⁠?⁠”

“⁠조용하면 누가 덮고 있는 거다⁠. 그 사람들 셈이 그렇다⁠.⁠”

영달은 드럼통 뚜껑을 덮었다⁠. 쇠 뚜껑이 닫히며 둔하게 울렸다⁠.

“⁠태식아⁠, 나도 영사기사였다⁠. 알제⁠? 그러니까 부탁한다⁠. 이제 그만해라⁠.⁠”

*

창선극장으로 돌아오니 경섭이 창고 앞에 앉아 있었다⁠. 태식은 경섭 앞을 지나 계단을 올라가려다가 멈췄다⁠. 손에서 연기 냄새가 났다⁠. 장갑을 벗었는데도 손가락 사이에서 났다⁠.

경섭은 묻지 않았다⁠. 일어나서 수돗가로 가 양동이에 물을 받아 왔다⁠. 태식이 두 손을 담그자 물 위에 검은 재가 얇게 떴다⁠.

“⁠사 분 걸렸습니다⁠.⁠”

“⁠예⁠.⁠”

“⁠십오 초가 사 분 동안 탔습니다⁠. 제가 넣었습니다⁠.⁠”

경섭은 물속의 손을 보았다⁠. 엄지에 인주가 번져 붉었다⁠. 자기 손을 양동이에 같이 넣어 태식의 엄지를 문질렀다⁠. 인주는 잘 지워지지 않았다⁠. 두 사람은 한참 동안 물속에서 손을 맞대고 있었다⁠. 수돗물은 한낮이라 미지근했고⁠, 양동이 바닥의 녹이 손끝에 까슬하게 닿았다⁠. 매표소 창구 유리 너머로 순임이 이쪽을 한 번 보더니 신문을 도로 얼굴 앞에 펼쳤다⁠. 신문이 거꾸로 들려 있었다⁠.

“⁠오늘 밤⁠, 틉시다⁠.⁠”

*

수요일은 마지막 회차가 일찍 끝난다⁠. 순임은 아홉 시 반에 매표소 문을 잠그면서 평소보다 오래 열쇠를 만졌다⁠.

“⁠태식아⁠, 전기 아끼라⁠. 그거뿐이다⁠.⁠”

순임이 갔다⁠. 객석 불이 꺼졌다⁠. 사백여든 개의 자리가 어둠 속에 있었다⁠. 경섭은 통로 가운데 서서 뒤를 올려다보았다⁠. 영사실 창이 작은 사각형으로 빛났다⁠. 맨 뒷줄 가운데 흰 천을 씌운 의자는 비어 있었다⁠.

“⁠문 선생⁠, 앉으십시오⁠.⁠”

위에서 소리가 났다⁠.

“⁠기사님도 내려오십시오⁠.⁠”

“⁠한 번은 돌려야 합니다⁠. 걸리는지 봐야 합니다⁠.⁠”

“⁠그러면 저 여기서 못 봅니다⁠. 혼자 보면 그냥 없어진 거라면서요⁠. 기사님이 하신 말입니다⁠.⁠”

영사실 창에서 소리가 멈췄다⁠. 한참 있다가 태식이 말했다⁠.

“⁠앞부분만 돌리고 내려가겠습니다⁠.⁠”

빛이 왔다⁠. 먼지가 이 빛 속에서 움직였다⁠. 화면에 숫자가 지나갔다⁠. 아흐레 동안 두 사람이 이어 붙인 것은 백구십일 토막이었고⁠, 한 릴에 감으니 오십이 분이었다⁠. 계단은 없었다⁠. 계단이 들어갈 뻔한 자리를 태식은 아침에 드럼통 위에서 보냈다⁠.

발소리가 났다⁠. 태식이 통로를 걸어 내려오고 있었다⁠. 손에 아무것도 없었다⁠.

“⁠기계는요⁠?⁠”

“⁠돕니다⁠. 한 번은 안 봐도 됩니다⁠.⁠”

두 사람은 가운데 줄에 앉았다⁠. 태식이 이 극장 객석에 앉은 것은 처음이었다⁠. 열아홉에 들어와 바로 영사실로 올라갔고⁠, 밥도 위에서 먹고 잠도 위에서 잤다⁠. 십삼 년이었다⁠. 의자의 붉은 우단은 닳아서 손바닥 닿는 자리만 반들거렸고⁠, 등받이에서 오래된 담배 냄새와 누군가의 머릿기름 냄새가 났다⁠.

“⁠앞에서 보는 건 어떻습니까⁠?⁠”

“⁠큽니다⁠. 위에서 보면 이만한데요⁠.⁠”

태식이 손가락으로 작은 사각형을 만들었다⁠.

“⁠여기서는 이만합니다⁠.⁠”

오십이 분은 이상한 영화였다⁠. 이야기가 없었고 인물이 계속 바뀌었다⁠. 흑백이었다가 컬러가 됐다가 다시 흑백이 됐다⁠. 소리는 대부분 없었다⁠. 잘릴 때 소리도 같이 잘렸다⁠. 그런데 비슷한 것이 있었다⁠. 사람 둘이 나오는 장면이 많았다⁠. 마주 보거나 나란히 있거나⁠,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을 보고 있었다⁠.

스무 번째 장면쯤에서 여자 하나가 울었다⁠. 흑백이었고⁠, 소리가 없었고⁠, 삼 초였다⁠. 태식의 등이 의자에서 조금 떴다⁠.

“⁠아는 장면입니까⁠?⁠”

“⁠칠십 년 봄에 제가 처음 자른 겁니다⁠. 태우려고 드럼통 앞까지 들고 갔는데⁠, 불을 붙이려다 손에 든 게 뭔지 봤습니다⁠. 우는 얼굴이 한 칸에 하나씩 스물네 개 있었습니다⁠. 그게 불에 들어가면 스물네 개가 다 없어진다는 생각이 들어서⁠, 그날 도로 들고 왔습니다⁠.⁠”

“⁠그 뒤로 계속이요⁠?⁠”

“⁠계속입니다⁠. 안 하면 제가 태운 사람이 되니까요⁠. 그런데 오늘 아침에 태웠습니다⁠.⁠”

경섭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화면에서 여자의 울음이 끝나고 어느 골목이 지나갔다⁠.

마흔 번째 장면쯤에서 태식의 손이 팔걸이에 있었다⁠. 경섭의 손이 같은 팔걸이에 있었다⁠. 누가 먼저 움직였는지는 나중에도 서로 말하지 않았다⁠. 손등이 닿았고⁠, 그대로 있었고⁠, 화면이 두 번 바뀔 동안 아무도 손을 빼지 않았다⁠.

“⁠여기 앉으니까 보이는 게 다릅니다⁠. 위에서는 화면만 보입니다⁠.⁠”

태식이 고개를 돌렸다⁠. 두 사람의 얼굴이 화면 빛을 받아 밝아졌다가 어두워졌다⁠.

“⁠여기서는 옆이 보입니다⁠.⁠”

*

필름이 다 풀리고 릴 끝이 딱딱딱딱 돌았다⁠. 두 사람은 일어나지 않았다⁠. 화면은 하얀 채로 남아서 빈자리 사백일흔여덟 개를 비췄다⁠.

“⁠기사님⁠, 형사가 들고 온 종이 말입니다⁠. 칸 번호가 적혀 있었다고 하셨지요⁠?⁠”

“⁠릴 번호⁠, 시작 칸⁠, 끝 칸이요⁠.⁠”

“⁠그 종이는 서울에서 한 장 만들어서 똑같이 등사해 돌리는 거지요⁠? 그럼 대구도 광주도 같은 칸에서 자르겠네요⁠.⁠”

태식은 대답하지 않았다⁠. 경섭이 팔걸이 위에서 손을 뒤집었다⁠. 손바닥이 위로 갔다⁠.

“⁠그럼 그 계단은 부산에만 있던 게 아닙니다⁠. 어느 영사실에 또 한 토막이 있을 겁니다⁠. 안 태운 사람이 있다면요⁠.⁠”

“⁠있다면요⁠.⁠”

“⁠기사님이 계셨으니까 또 있을 겁니다⁠. 그걸 받아서 저 화면에 다시 겁시다⁠. 까만 자리에요⁠.⁠”

태식의 손이 경섭의 손바닥 위에 얹혔다⁠. 쥐지는 않았다⁠. 얹기만 했다⁠.

*

새벽 세 시에 두 사람은 영사실로 올라갔다⁠. 필름을 되감고 통에 넣어 마루판 밑에 넣었다⁠. 내려가려는데 철문 아래에 하얀 봉투 하나가 밀어 넣어져 있었다⁠. 올라올 때는 없었다⁠.

안에 열쇠가 하나⁠, 종이가 한 장 들어 있었다⁠. 날짜가 맨 위에 있었다⁠.

팔월 구일⁠. 매표소 금고⁠. 여름에는 시원하다⁠. 순임⁠.

경섭이 먼저 웃었다⁠. 웃다가 목이 메어 그만두었다⁠. 태식은 열쇠를 쥐었다가 손을 폈다가 다시 쥐었다⁠.

“⁠그 양반은 편지를 쓰면 늘 날짜부터 씁니다⁠. 사람 이름보다요⁠.⁠”

“⁠누님은 사람이 안 변하는 건 알고 날이 가는 건 못 믿는 분입니다⁠.⁠”

태식은 종이를 접다가 접힌 자리를 손톱으로 한 번 눌렀다⁠. 아침 드럼통 앞에서 번진 인주가 엄지에 아직 조금 남아 있었고⁠, 이 붉은 자국이 날짜 위에 옅게 묻었다⁠.

3화는 어땠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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