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5,063자) · 경섭 · 7월 31일

식초 냄새

형사는 영사기사를 사랑했다 · 윤재하

기계가 멈춘 영사실은 다른 방이었다⁠. 낮에는 릴 도는 소리가 벽에 붙어 있어서 이 소리가 방의 크기를 정해 주는데⁠, 소리가 빠지니 방이 반으로 줄었다⁠. 문경섭은 문턱에 서서 이 좁아진 방을 한참 보았다⁠. 쇠 냄새와 탄 냄새⁠, 이 밑에 깔린 시큼한 냄새가 한꺼번에 코로 들어왔다⁠.

“⁠앉으십시오⁠.⁠”

의자가 하나였다⁠. 하태식은 빈 필름 통을 뒤집어 이 위에 앉았다⁠.

“⁠의자에 앉으시지요⁠, 기사님⁠.⁠”

“⁠저는 이게 편합니다⁠. 팔 년 앉았습니다⁠.⁠”

경섭은 의자에 앉았다⁠. 앉으니 눈높이가 기계와 같았다⁠. 검은 쇳덩이 옆구리에 은색 글씨로 심플렉스라고 박혀 있었다⁠.

“⁠이거 오래된 겁니까⁠?⁠”

“⁠미국 겁니다⁠. 오십 년대 물건인데 아직 돕니다⁠. 하루에 한 번은 고장 납니다⁠.⁠”

“⁠매일 나면 그건 고장이 아니라 성질이지요⁠.⁠”

태식의 입꼬리가 아주 조금 올라갔다⁠.

“⁠문 선생은 말을 재밌게 하십니다⁠.⁠”

“⁠누님은 시끄럽다고 하십니다⁠.⁠”

“⁠그것도 맞습니다⁠.⁠”

경섭은 오늘 오후에 간판을 내렸다⁠. 내린 간판을 창고 옆 빈터에 눕혀 놓고⁠, 여자 머리 위로 검은 우산을 하나 그려 넣었다⁠. 우산이 여자 얼굴과 어깨를 가렸고 계단은 우산 그늘 밑에 그대로 남았다⁠. 저녁 회차 전에 다시 올려 걸었을 때⁠, 골목 입구에 흰 반팔 셔츠가 서 있다가 아무 말 없이 돌아갔다⁠. 곽병두는 매일 저녁 여덟 시 회차에 와서 표를 사지 않고 들어가 맨 뒷줄 흰 천 의자에 앉았고⁠, 오십삼 분이 지나면 일어나 나갔다⁠. 영화의 나머지는 보지 않았다⁠. 순임 말로는 삼 년 동안 한 편도 끝까지 본 적이 없다고 했다⁠.

“⁠간판⁠, 보셨습니까⁠?⁠”

“⁠창으로 봤습니다⁠. 우산이 좋습니다⁠.⁠”

“⁠비 그친 계단에 우산 쓴 여자는 좀 이상하지요⁠. 형사님이 그림을 볼 줄 몰라서 다행입니다⁠.⁠”

경섭은 웃었는데 태식은 웃지 않았다⁠. 태식의 눈이 바닥으로 한 번 내려갔다가 올라왔다⁠. 옅은 마루판이었다⁠.

*

“⁠기사님⁠, 하나 여쭙겠습니다⁠.⁠”

“⁠여쭈십시오⁠.⁠”

“⁠어제 왜 올라오라고 하셨습니까⁠?⁠”

태식이 목에 건 수건을 만졌다⁠. 기계가 안 도는데도 수건을 걸고 있었다⁠.

“⁠그림이 좋아서요⁠. 그게 답니다⁠.⁠”

“⁠그러면 판자는 왜 여기 두면 안 됩니까⁠?⁠”

태식은 대답하지 않았다⁠. 경섭은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의자 다리가 마루를 긁는 소리가 좁은 방에서 크게 울렸다⁠.

“⁠저 오늘 간판 내렸습니다⁠. 모르고 내렸습니다⁠. 모르고 내린 값은 제가 치렀으니까⁠, 이제 알 차례 아닙니까⁠?⁠”

“⁠문 선생⁠.⁠”

“⁠간판 그리는 사람은 영화를 안 봅니다⁠. 사진만 봅니다⁠. 십일 년 사진만 보다 보면 이상한 걸 알게 됩니다⁠. 없어지는 장면은 늘 비슷합니다⁠. 어두운 데서 두 사람이 가까이 있거나⁠, 누가 무슨 말을 세게 하거나요⁠. 그런데 이 계단은 두 사람이 아무 말도 안 합니다⁠. 그런 걸 왜 자릅니까⁠?⁠”

“⁠자르는 이유는 자르라는 사람이 압니다⁠. 저는 자르고 붙이는 사람입니다⁠.⁠”

“⁠붙이려면 잘린 걸 만지셔야 하잖습니까⁠? 만지면서 보셨을 거 아닙니까⁠?⁠”

태식이 일어섰다⁠. 필름 통이 뒤로 굴렀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십시오⁠.⁠”

경섭은 일어나지 않았다⁠.

“⁠기사님⁠, 무섭습니까⁠?⁠”

“⁠예⁠.⁠”

경섭이 놀란 것은 대답의 속도였다⁠. 망설임이 없었다⁠.

“⁠무엇이 무섭습니까⁠?⁠”

“⁠문 선생이 여기서 일 못 하게 되는 게요⁠. 저는 팔 년 여기 있었고 앞으로도 있을 겁니다⁠. 문 선생은 넉 달입니다⁠. 넉 달짜리가 알 일이 아닙니다⁠.⁠”

“⁠넉 달짜리라서 알아야겠습니다⁠. 팔 년짜리는 이미 다 알고 계시니까요⁠.⁠”

경섭은 일어나 문 쪽으로 가는 대신 옅은 마루판 앞으로 걸어갔다⁠. 태식이 한 걸음 따라 나왔다가 멈췄다⁠.

“⁠그 판 밑에 뭐 있습니까⁠?⁠”

방이 완전히 조용해졌다⁠. 창밖 골목에서 개가 두 번 짖고 그쳤다⁠. 태식은 오래 서 있다가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손가락을 판 틈에 넣으니 판이 소리 없이 들렸다⁠.

*

아래에 깡통이 있었다⁠. 셀 것도 없이 열둘이었고⁠, 이 옆에 아직 녹이 슬지 않은 새 깡통 하나가 비스듬히 끼워져 있었다⁠. 번호도 이름도 적혀 있지 않았다⁠.

“⁠열어 보시겠습니까⁠? 한 개만요⁠.⁠”

경섭이 녹슨 깡통 하나를 들어 뚜껑을 열었다⁠. 식초 냄새가 확 올라왔다⁠. 눈이 따가울 만큼 시었다⁠.

“⁠필름은 오래되면 초산이 나옵니다⁠. 그러면 우그러지고 결국 못 씁니다⁠. 서늘한 데 둬야 하는데 여기는 40도까지 오릅니다⁠. 제일 오래된 게 칠십 년 겁니다⁠.⁠”

깡통 안에는 필름 토막이 감기지 않고 뭉쳐 있었다⁠. 한 뼘도 안 되는 것도 있었고 팔 길이만 한 것도 있었다⁠. 경섭이 한 토막을 들어 전구에 비추니 작은 사각형이 줄줄이 이어졌고⁠, 칸마다 사람이 있었다⁠. 여자가 창가에 서 있었다⁠. 계단은 아니었다⁠.

“⁠이게 전부 잘린 겁니까⁠? 배급사로 넘겨서 태웠다고 도장 찍은 것들이요⁠?⁠”

“⁠태운 건 있습니다⁠. 못 쓰게 된 빈 필름을 길이만 맞춰서요⁠. 배급사 사람이 보고 도장을 찍었습니다⁠.⁠”

“⁠보고도요⁠?⁠”

“⁠그 사람도 영사기사 하다가 배급사로 간 사람입니다⁠.⁠”

경섭은 새 깡통을 가리켰다⁠. 태식은 이것을 직접 집어 뚜껑을 열었다⁠. 거기서는 식초 냄새가 나지 않았다⁠. 아세톤 냄새가 옅게 남아 있었다⁠.

“⁠월요일에 자른 겁니다⁠.⁠”

경섭은 확대경을 받아 토막 끝을 전구 밑에 댔다⁠. 젖은 돌이 있었다⁠. 세 번째 단에 치맛자락이 걸쳐 있었다⁠. 남자의 손이 칸마다 조금씩 올라가다가⁠, 어느 칸에서 멈추고⁠, 다시 내려갔다⁠. 이틀 걸려 젖게 그린 돌이 실제로 그렇게 젖어 있었다⁠. 경섭은 확대경을 쥔 손이 떨려서 한 번 내려놓았다가 다시 들었다⁠.

“⁠기사님⁠, 이건 보셨습니까⁠?⁠”

“⁠안 봤습니다⁠. 팔 년 동안 잘린 걸 받아 넣기만 했습니다⁠. 이어 보지도 않았습니다⁠.⁠”

“⁠왜요⁠? 팔 년을 모았으면서요⁠.⁠”

태식이 깡통 뚜껑을 덮었다⁠. 덮는 손끝이 테두리를 두 번 헛짚었다⁠.

“⁠혼자 보면 그냥 없어진 겁니다⁠.⁠”

경섭은 이 말을 알아들었다⁠. 알아듣고 나서 목이 막혔다⁠. 한참 뒤에야 말이 나왔다⁠.

“⁠제가 같이 보면 됩니까⁠?⁠”

태식이 고개를 들었다⁠. 두 사람은 마루 위에 무릎을 대고 마주 앉아 있었고⁠, 깡통 열세 개가 이 사이에 있었다⁠.

“⁠이건 태우라고 되어 있는 물건입니다⁠. 갖고 있는 것만으로 걸립니다⁠.⁠”

“⁠압니다⁠.⁠”

“⁠모르십니다⁠. 다음 주 수요일에 소각이 있습니다⁠. 형사가 입회합니다⁠. 절단 지시서를 들고 와서 칸 번호를 대 볼 겁니다⁠. 빈 필름으로는 이번엔 안 됩니다⁠.⁠”

“⁠그러면 수요일까지는요⁠?⁠”

“⁠예⁠?⁠”

“⁠수요일까지 아흐레 남았습니다⁠. 아흐레는 우리 거 아닙니까⁠?⁠”

*

이때 계단에서 발소리가 났다⁠. 두 사람이 동시에 굳었다⁠. 태식이 마루판을 덮었고⁠, 경섭이 이 위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았다⁠. 철문이 열렸다⁠.

주순임이었다⁠. 손에 주전자를 들고 있었고 숨이 턱까지 차 있었다⁠.

“⁠보리차⁠. 계단 열아홉 개 올라왔다⁠, 내가⁠.⁠”

순임은 방을 둘러보았다⁠. 두 사람을 보고⁠, 바닥을 보고⁠, 판 위에 어정쩡하게 앉은 경섭의 엉덩이를 보고⁠, 다시 두 사람을 보았다⁠. 그러고는 주전자를 작업대 위에 놓았다⁠.

“⁠문 선생⁠, 거기 편하나⁠?⁠”

“⁠예⁠, 누님⁠. 아주 시원합니다⁠.⁠”

“⁠40도 방에서 시원하다는 사람 처음 본다⁠.⁠”

순임은 문 쪽으로 가다가 돌아서지 않고 말했다⁠.

“⁠태우라니까 진짜 태울 줄 알았나⁠? 컵 두 개는 아래 있다⁠. 갖고 올라와라⁠.⁠”

철문이 닫혔다⁠. 경섭은 판 위에서 일어나지도 못하고 태식을 보았다⁠. 태식은 이마를 손바닥으로 덮고 있었는데⁠, 손바닥 밑으로 어깨가 흔들렸다⁠. 웃고 있었다⁠.

“⁠누님은 언제부터 아셨을까요⁠?⁠”

“⁠삼 년쯤 됐습니다⁠. 그 양반이 저 계단을 올라온 건 오늘이 두 번째입니다⁠. 첫 번째는 제가 여기서 쓰러졌을 때였습니다⁠.⁠”

*

이어 붙이는 일은 이날 밤부터 시작했다⁠. 팔 년 동안 뭉쳐 있던 필름은 제 모양대로 굳어 있어서 손으로 펴면 갈라졌다⁠. 태식이 작업대에 눕히고 무게추로 눌렀다⁠. 하루를 눌러 두면 조금 눕는다고 했다⁠. 이어 붙이는 데는 아세톤을 썼다⁠.

“⁠칼은 각도가 안 맞으면 손톱 밑으로 들어갑니다⁠. 이렇게 잡으십시오⁠.⁠”

작업대 앞은 한 사람이 서는 자리였다⁠. 두 사람이 서니 어깨가 닿았다⁠. 태식이 경섭의 손등 위에 손을 얹었다⁠. 칼을 쥔 손 위로 다른 손이 겹쳤다⁠.

“⁠힘 빼십시오⁠. 긁는 게 아니라 미는 겁니다⁠.⁠”

경섭은 칼을 미는 데 마음을 두려고 했지만 잘 되지 않았다⁠. 기계가 멈춰 방이 식어 가는데도 손등만 뜨거웠다⁠. 필름 끝이 하얗게 벗겨졌다⁠.

“⁠됐습니다⁠.⁠”

태식이 손을 뗐다⁠. 두 사람 다 작업대를 보고 있었고 서로를 보지 않았다⁠.

“⁠아세톤 주십시오⁠. 기사님⁠, 손 떨리십니까⁠?⁠”

태식이 아세톤 병을 잡았다⁠. 병 속 액체가 아주 조금 출렁였다⁠.

“⁠여름이라 그렇습니다⁠.⁠”

“⁠지금 기계 안 돕니다⁠.⁠”

“⁠그러면 문 선생이 옆에 서 계셔서 그렇겠지요⁠. 여기는 원래 한 사람 자리입니다⁠.⁠”

경섭은 대꾸할 말을 찾다가 못 찾고 칼을 내려놓았다⁠. 칼날이 작업대 쇠판에 닿으며 작은 소리를 냈다⁠. 태식이 먼저 입을 열었다⁠.

“⁠이거 다 이어 붙이고 나면⁠, 그다음엔 뭘 합니까⁠?⁠”

“⁠봐야지요⁠. 이어 붙였는데 안 볼 겁니까⁠?⁠”

“⁠여기서는 못 틉니다⁠. 상영 기록이 남습니다⁠. 몇 회를 돌렸는지 사장님 장부에 다 적힙니다⁠.⁠”

“⁠문 닫고 나서요⁠. 관객 없이⁠, 우리 둘만⁠.⁠”

두 사람 사이에서 필름 한 토막이 무게추 아래 눌려 있었다⁠. 이것이 아주 천천히 펴지고 있었다⁠.

“⁠그건 상영이 아닙니다⁠. 기록에 안 남습니다⁠.⁠”

“⁠그러면 됐습니다⁠. 기사님⁠, 그러면 되는 거 아닙니까⁠?⁠”

태식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 대신 다음 토막을 작업대에 올렸다⁠.

이날 밤 두 사람은 새벽 세 시까지 필름을 폈다⁠. 스물두 토막이 작업대 위에 눌렸다⁠. 계단 토막은 펴지 않았다⁠. 이것은 굳을 틈 없이 아직 부드러웠다⁠.

경섭이 내려갈 때 태식이 철문 앞까지 따라 나왔다⁠.

“⁠문 선생⁠, 계단 판자 말입니다⁠. 다시 갖고 오십시오⁠.⁠”

“⁠여기 두면 안 된다면서요⁠?⁠”

태식이 방 안쪽 마루판을 돌아보았다⁠.

“⁠밑에 두면 됩니다⁠.⁠”

경섭은 계단 열아홉 개를 내려가며 하나씩 셌다⁠. 올라올 때는 세지 않았던 계단이었다⁠. 골목은 새벽 세 시에도 식지 않아서 아스팔트에서 낮의 열이 발바닥으로 올라왔고⁠, 시장 쪽 어딘가에서 얼음 가게 셔터 올리는 소리가 났다⁠. 창고 문을 열고 마대를 걷으니 판자 속 젖은 돌이 어둠 속에서도 번들거렸다⁠. 이것을 겨드랑이에 끼고 다시 열아홉 개를 올라갔다⁠. 철문은 아직 잠겨 있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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