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5,329자) · 태식 · 경섭 · 1978년 7월 25일

간판에는 있고 영화에는 없다

형사는 영사기사를 사랑했다 · 윤재하

영사실은 여름 저녁이면 40도까지 오른다⁠. 탄소봉 두 개를 마주 대고 전기를 흘려 이 사이에 불을 붙이는데⁠, 이 불이 램프 하우스 안에서 쉬지 않고 타는 동안 쇳판이 달아오르고 벽이 달아오르고 사람 목덜미까지 달아오른다⁠.

하태식은 이 불빛이 흔들리는 것을 소리로 안다⁠. 지지직 하고 한 번 씹히면 손을 뻗어 나사를 반 바퀴 돌린다⁠. 화면은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이어진다⁠. 목에 건 수건은 첫 회가 끝나기 전에 이미 젖어 있었다⁠.

“⁠태식아⁠, 물 좀 마시고 해라⁠!⁠”

아래층 매표소에서 주순임이 소리쳤다⁠. 매표소에서 영사실까지는 계단 열아홉 개인데⁠, 순임은 십구 년 동안 이 계단을 거의 올라온 적이 없다⁠. 소리만 올라온다⁠.

“⁠네⁠.⁠”

“⁠대답만 하지 말고⁠!⁠”

태식은 대답만 했다⁠. 그러고는 영사실 벽에 뚫린 작은 창에 눈을 댔다⁠. 창 너머로 빛 기둥이 객석 위를 가로질러 가고⁠, 이 빛 속에서 먼지가 천천히 돌았다⁠. 오늘 거는 것은 「⁠젖은 계단⁠」 2권 릴이었다⁠. 월요일에 들어온 한국 영화였고⁠, 들어올 때 등사지 한 장이 같이 왔다⁠. 릴 번호와 시작 칸과 끝 칸을 적은 절단 지시였고⁠, 사유 칸에는 네 글자가 적혀 있었다⁠.

미풍양속⁠.

태식은 이 칸을 월요일 밤에 잘랐다⁠. 마지막 회가 끝난 뒤 릴을 되감아 작업대에 걸고⁠, 확대경으로 칸 번호를 하나씩 세어 시작 칸에 연필로 점을 찍었다⁠. 끝 칸에도 점을 찍었다⁠. 두 점 사이를 가위로 끊어 내니 삼백육십 칸⁠, 이십이 척 반이었다⁠. 필름 끝을 칼로 얇게 밀어 감광막을 벗기고 아세톤을 발라⁠, 같은 길이로 재 둔 검은 필름을 겹쳐 눌렀다⁠. 십 초를 누르면 두 장이 한 장이 된다⁠. 아세톤 냄새가 코를 찌르는 동안 잘라 낸 토막은 작업대 끝에서 제 무게로 둥글게 말렸다⁠.

검은 필름을 끼우는 것은 중부서 관할 극장에서만 하는 일이었다⁠. 다른 동네 극장은 잘린 자리를 그냥 붙인다⁠. 그러면 여자가 계단에 앉기 직전에서 곧장 다음 장면으로 튀고⁠, 관객은 편집이 거칠다고 생각하고 만다⁠. 이 동네는 까맣게 비운다⁠. 까맣게 비워야 임검석에 앉은 사람이 잘린 것을 제 눈으로 확인할 수 있다고⁠, 삼 년 전 이 사람이 관할에 오면서 정했다⁠.

오십삼 분이 다가왔다⁠. 태식은 손을 무릎에 얹었다⁠.

화면이 검게 비었다⁠. 소리도 같이 끊겼다⁠. 객석 어딘가에서 누가 휘파람을 불었고 누가 기계 고치라고 소리쳤다⁠. 대부분은 가만히 있었다⁠. 십오 초는 사람이 화를 내기에는 짧고 잊기에는 넉넉한 시간이다⁠.

객석 맨 뒷줄 가운데⁠, 등받이에 흰 천을 씌운 의자 하나에 사람이 앉아 있었다⁠. 임검석이었다⁠. 이 사람은 화면을 보지 않고 손바닥을 보고 있었다⁠. 손바닥 안에서 은빛 스톱워치가 작게 반짝였다⁠.

화면이 돌아왔다⁠. 태식은 그제야 숨을 내쉬었다⁠. 발뒤꿈치 아래 마루판 한 장이 다른 판보다 색이 옅었다⁠. 이 위에서 발을 떼지 않았다⁠.

*

마지막 회가 끝나고 삼십 분쯤 지나서 철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순임이 두드리는 소리는 아니었다⁠. 순임은 두드리지 않고 아래에서 부른다⁠.

문을 여니 곽병두가 서 있었다⁠. 중부경찰서 정보과 형사였고⁠, 창선극장 임검석이 순임의 자리였다⁠. 흰 반팔 셔츠 겨드랑이가 젖어 있었는데 얼굴에는 땀이 한 방울도 없었다⁠. 곽은 들어가도 되느냐고 묻지 않고 들어왔다⁠.

“⁠하 기사⁠, 오늘 몇 초였어⁠?⁠”

“⁠십오 초입니다⁠.⁠”

곽이 스톱워치를 내밀었다⁠. 바늘이 십오 초를 조금 넘어 멈춰 있었다⁠.

“⁠십오 초 사⁠. 영 점 사 초는 어디서 났나⁠?⁠”

“⁠탄소봉이 흔들리면 사람 손이 늦습니다⁠. 기계가 오십 년 된 물건이라서요⁠.⁠”

“⁠기계 핑계 대지 마⁠. 검은 걸 길게 끼우면 뭘 더 잘라 냈다는 거고⁠, 짧게 끼우면 뭘 남겼다는 거야⁠.⁠”

곽은 영사실을 한 바퀴 돌았다⁠. 벽에 걸린 가위와 아세톤 병⁠, 필름 통⁠, 목장갑⁠. 아무것도 만지지 않았다⁠. 만지지 않고 오래 보았다⁠. 그러다 태식이 서 있는 자리에서 한 걸음 떨어진 곳에 멈췄다⁠. 옅은 마루판에서 한 뼘 거리였다⁠.

“⁠잘린 토막은⁠?⁠”

“⁠금요일에 배급사로 넘깁니다⁠. 늘 하던 대로요⁠.⁠”

“⁠이번에는 내가 입회한다⁠.⁠”

태식의 목에서 수건이 미끄러졌다⁠. 태식은 수건을 도로 걸었다⁠. 곽이 문으로 가다가 돌아섰다⁠.

“⁠그리고 저 밖에 간판⁠, 누가 그렸어⁠?⁠”

*

문경섭은 사다리 세 번째 칸에 서 있었다⁠. 창고 옆 빈터에서 사흘 동안 그린 간판을 막 극장 정면에 올린 참이었다⁠. 가로 여섯 자⁠, 세로 아홉 자의 합판 위에서 여자가 젖은 계단 세 번째 단에 앉아 있고⁠, 남자가 이 아래서 손을 반쯤 들고 있었다⁠. 계단 돌은 빗물에 번들거렸고 여자의 치맛자락이 두 단을 덮었다⁠. 배경은 온통 파랬다⁠. 배급사가 보내온 사진대로였다⁠.

그림을 걸고 나흘째 되던 금요일⁠, 경섭은 표 받는 일을 거들다가 뒷문 쪽에 서서 영화를 끝까지 보았다⁠. 두 시간 십 분이었다⁠. 계단은 나오지 않았다⁠. 오십삼 분쯤 화면이 까매졌다가 다른 장면으로 넘어갔을 뿐이었다⁠.

이 금요일 밤에 곽병두가 간판 아래 와서 섰다⁠.

“⁠당신이 문경섭이오⁠?⁠”

“⁠그렇습니다만⁠, 표는 저쪽에서 파십니다⁠.⁠”

“⁠저 계단⁠, 영화에 있소⁠?⁠”

경섭은 사다리를 한 칸 내려왔다⁠. 그림 그리는 손은 페인트에 절어 있었고⁠, 셔츠 앞자락에도 파란 물감이 튀어 있었다⁠.

“⁠배급사 사진대로 그렸습니다⁠. 저는 사진 보고 크게 그리는 사람입니다⁠.⁠”

“⁠영화에 없는 걸 걸면 관객을 속이는 거요⁠. 월요일까지 내리시오⁠.⁠”

“⁠그럼 사진을 보낸 배급사부터 잡아가셔야 순서가 맞지 않겠습니까⁠?⁠”

곽이 웃었다⁠. 입만 웃었다⁠. 셔츠 주머니에서 수첩을 꺼내 한 장을 넘겼다⁠.

“⁠문경섭이⁠. 서른넷⁠. 작년 사월 종로 개봉관 간판⁠. 그때도 사진대로 그렸다고 했지⁠.⁠”

경섭은 사다리를 잡은 손가락에 힘이 들어가는 것을 느꼈다⁠. 페인트가 굳어 손마디가 하얗게 갈라졌다⁠. 곽이 수첩을 덮었다⁠.

“⁠같이 그리던 윤기호는 요새 붓을 못 든다더군⁠.⁠”

이때 매표소 유리 창구가 드르륵 열렸다⁠. 순임이 얼굴을 반만 내밀었다⁠.

“⁠형사님⁠, 그 간판 내리면 표 안 팔립니다⁠. 저 치맛자락 보고 들어오는 손님이 반이라예⁠.⁠”

“⁠아주머니는 표나 파세요⁠.⁠”

“⁠표 팔라고 그 간판 거는 깁니다⁠.⁠”

곽은 대답하지 않고 골목으로 걸어갔다⁠. 골목 끝에서 한 번 돌아보았는데⁠, 경섭이 아니라 이 층 영사실 창을 올려다보았다⁠.

경섭은 사다리에서 내려와 매표소 창구 앞에 섰다⁠. 창구 안쪽은 어두웠고 순임의 얼굴은 반만 보였다⁠. 순임은 지폐를 스무 장씩 접어 고무줄로 묶고 있었다⁠.

“⁠누님⁠, 배급사 사진에 있는 걸 영화에서 못 본 적은 제가 십일 년 동안 없었습니다⁠.⁠”

“⁠여기는 부산이다⁠.⁠”

“⁠부산은 영화를 반만 틉니까⁠?⁠”

순임이 고무줄을 튕겼다⁠. 고무줄이 손가락에 감겼다가 풀리는 소리가 작게 났다⁠.

“⁠그런 건 묻는 거 아이다⁠. 문 선생 종로 얘기⁠, 저 사람이 어떻게 아는지 알제⁠?⁠”

“⁠제가 여기 온 걸 누가 적어 보냈겠지요⁠.⁠”

“⁠그라믄 됐다⁠. 그런 거 자꾸 물어보면 여기서 일 못 한다⁠.⁠”

경섭은 이 층 창을 올려다보았다⁠. 기름종이를 바른 유리 너머로 불이 켜져 있었다⁠.

“⁠누님은 무섭습니까⁠, 저 위가⁠?⁠”

순임은 지폐 묶음을 금고에 넣고 잠갔다⁠. 그러고 나서야 대답했다⁠.

“⁠위가 무서운 게 아이고⁠, 위에 있는 게 무섭다⁠.⁠”

*

이날 밤 경섭은 영사실 계단 열아홉 개를 올라갔다⁠. 올라갈수록 더웠고⁠, 철문 손잡이는 해가 진 지 네 시간이 지났는데도 뜨거웠다⁠. 두드리니 안에서 릴 도는 소리가 멈췄다⁠.

태식은 러닝셔츠 차림이었다⁠. 목에 젖은 수건을 걸고 있었고 뒤에서 기계 두 대가 식고 있었다⁠.

“⁠기사님⁠, 계단 장면 말입니다⁠.⁠”

“⁠그 장면은 여기 없습니다⁠.⁠”

“⁠잘랐으면 자른 게 어딘가 있을 거 아닙니까⁠?⁠”

“⁠문 선생⁠.⁠”

태식이 문을 잡았다⁠. 경섭은 문틀에 손을 얹었다⁠. 둘 사이에 문짝 한 뼘이 남았다⁠.

“⁠형사가 월요일까지 간판을 내리랍니다⁠. 저 계단이 뭐길래 그러는지 알고는 내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모르고 내리는 게 낫습니다⁠.⁠”

“⁠기사님은 아십니까⁠?⁠”

태식은 대답하지 않았다⁠. 문이 닫히기 직전에 경섭은 안쪽을 보았다⁠. 기계 두 대⁠, 필름 릴⁠, 벽의 공구⁠, 그리고 바닥⁠. 마루판 한 장이 유독 옅었다⁠. 위에 선 사람의 발이 이 판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

토요일과 일요일⁠, 경섭은 창고에서 나무판 하나를 꺼내 손바닥 두 개만 하게 계단을 그렸다⁠. 여자는 그리지 않고 계단만 그렸다⁠. 간판은 멀리서 보는 그림이라 선이 굵어도 되고 색이 세도 된다⁠. 손바닥만 한 그림은 그럴 수 없어서⁠, 젖은 돌 하나를 젖어 보이게 하려고 이 옆에 마른 돌을 먼저 그리고⁠, 마른 돌의 먼지 낀 모서리를 붓끝으로 세 번 쓸었다⁠. 창고 안은 테레빈유 냄새와 시멘트 바닥의 습기로 눅눅했다⁠.

일요일 밤⁠, 경섭은 판자를 영사실 철문 아래로 밀어 넣고 내려왔다⁠.

열두 시 이십 분에 철문이 열렸다⁠. 태식이 판자를 들고 계단을 내려와 창고 앞에 앉은 경섭 옆에 섰다⁠.

“⁠마음에 안 드시면 버리십시오⁠.⁠”

태식은 버리지 않았다⁠. 판자를 든 채 경섭 옆에 앉았다⁠. 시멘트 바닥이 아직 낮의 열을 품고 있었다⁠. 한참 동안 골목 끝에서 리어카 바퀴 구르는 소리만 났다⁠.

“⁠잘 그리셨습니다⁠. 돌이 젖어 있는 게요⁠.⁠”

“⁠그건 이틀 걸렸습니다⁠. 월요일에 간판은 내리겠습니다⁠. 내리고 그 자리에 우산을 그려 넣을 겁니다⁠. 계단은 우산 밑에 남기고요⁠.⁠”

“⁠형사가 봅니다⁠.⁠”

“⁠우산 밑까지 보는 형사면 그 사람도 그림쟁이 해야지요⁠.⁠”

태식이 처음으로 소리를 내서 웃었다⁠. 아주 짧았고 거의 들리지 않았는데 경섭은 이것을 들었다⁠. 태식은 판자를 무릎에 놓고 젖은 돌을 엄지로 한 번 쓸었다⁠. 물감이 다 말라 있었다⁠.

“⁠이 계단⁠, 보신 적 있습니까⁠?⁠”

“⁠사진으로만 봤습니다⁠. 그런데 그 사진이 이상했습니다⁠. 배급사가 주는 사진은 보통 잘 나온 걸 줍니다⁠. 배우 얼굴 환하고 옷 예쁜 걸로요⁠. 이건 여자 얼굴이 반쯤 그늘이고⁠, 어깨 뒤 벽에 뭐가 붙어 있는데 어깨에 가려 안 보입니다⁠. 이런 걸 왜 줬을까 싶었습니다⁠.⁠”

태식의 엄지가 판자 위에서 멈췄다⁠. 경섭은 이 엄지를 보았고⁠, 보았다는 것을 들키지 않으려고 골목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기사님은 그 장면 보셨습니까⁠?⁠”

“⁠문 선생은 서울에서 왜 내려오셨습니까⁠?⁠”

경섭의 웃음이 조금 늦게 사라졌다⁠.

“⁠일이 없어서요⁠. 기사님도 그건 안 물어보시는 게 좋습니다⁠. 누님이 그런 거 자꾸 물으면 여기서 일 못 한다고 하시던데요⁠.⁠”

“⁠그 양반이 그런 말을 하십니까⁠? 그러면서 다 아십니다⁠.⁠”

“⁠문 선생⁠.⁠”

“⁠예⁠.⁠”

“⁠내일 밤에 올라오십시오⁠. 불 다 끄고 나서⁠. 기계가 안 돌 때는 안 뜨겁습니다⁠.⁠”

태식은 일어나 계단 쪽으로 걸어갔다⁠. 세 계단쯤 올라가다 멈췄다⁠.

“⁠판자는 갖고 계십시오⁠. 여기 두면 안 됩니다⁠.⁠”

경섭은 이 말을 이해하는 데 시간이 걸렸다⁠. 이해하고 나서 등이 서늘해졌다⁠. 한여름 밤이었다⁠. 판자를 창고로 들고 가 물감 통 뒤에 세우고 이 위에 마대를 덮었다⁠. 덮고 나서도 한참 이 앞에 서 있었다⁠.

1화는 어땠나요?

댓글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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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윤재하작가2026.10.09· 1화

    작가 윤재하입니다. 검열로 잘린 자리마다 같은 길이의 검은 필름을 끼우던 영사실 이야기입니다. 1화의 십오 초 동안, 여러분은 화면 밖에서 무엇이 보이셨나요?

  • 밤산책2026.09.30· 1화

    어느 영화든 화면이 한 번씩 까매지는 극장이면 관객들이 항의하지 않나요?

    • 윤재하작가2026.10.01

      항의할 관객이 거의 남지 않은 극장이에요. 형사가 그 까만 순간을 처음으로 이상하게 여긴 사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