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화(5,307자)

전곡 오일장

여군 대대장의 남편이 관사촌에 이사 오자 사모님들이 긴장했다 · 탁기원

준석은 앞치마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열쇠가 손가락에 닿았다⁠. 서른 집이 준석의 손을 보았다⁠. 끝님이 숨을 멈추고 있었다⁠.

준석은 열쇠를 꺼내지 않았다⁠. 주머니에서 손을 빼고⁠, 가스 불로 가서 끓어 넘치는 보리차 불을 줄였다⁠. 행주로 솥 가장자리를 닦고 나서 돌아섰다⁠.

“⁠안 열어요⁠.⁠”

끝님의 얼굴이 하얘졌다⁠.

“⁠냉장고는 사모님 거예요⁠. 사모회 거고요⁠. 저는 사모회가 아니에요⁠. 가족 대표잖아요⁠.⁠”

준석은 쉼터 안의 부인들을 둘러보았다⁠.

“⁠대신 이렇게 해요⁠. 김장 회비 낸 집은 사모님 고춧가루로 담그시고⁠, 안 낸 집은 저랑 같이 시장에서 사요⁠. 전곡시장에 영양 고춧가루 파는 데 알아요⁠. 배추도요⁠. 사단장 사모님은 맛을 보러 오시는 거잖아요⁠. 어느 고춧가루가 맛있는지는 사단장 사모님이 정하시면 돼요⁠.⁠”

쉼터가 웅성거렸다⁠. 혜옥은 준석을 오래 보았다⁠. 웃지 않았다⁠.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좋아요⁠. 그렇게 해요⁠.⁠”

혜옥은 묵은지를 싼 보자기를 접어 들고 쉼터를 나갔다⁠. 1대대장 사모와 부연대장 사모가 뒤를 따랐다⁠. 문이 닫히자 쉼터 안에서 휴대전화 화면이 하나둘 켜졌다⁠. 송금을 취소하는 사람⁠, 아직 안 보낸 것을 확인하는 사람⁠, 남편에게 문자를 보내는 사람⁠.

끝님은 산들을 담요째 안아 올렸다⁠. 준석이 다가가자 끝님이 한 걸음 물러섰다⁠.

“⁠사부님⁠, 열쇠 있었잖아예⁠.⁠”

“⁠끝님 씨⁠.⁠”

“⁠제가 바보같이 다 말했잖아예⁠. 서른 집 앞에서⁠. 사부님 열쇠 믿고⁠.⁠”

끝님은 울지 않았다⁠. 입술을 꽉 물고 산들의 이불깃을 여몄다⁠.

“⁠사부님은 대대장님 진급이 무서운 기지예⁠. 저는 남편 진급 안 무서운 줄 알아예⁠?⁠”

끝님은 쉼터를 나갔다⁠. 계단을 오르는 슬리퍼 소리가 빨랐다⁠. 준석은 솥 앞에 섰다⁠. 보리차가 다 졸아 솥 바닥에 갈색 띠가 앉았다⁠.

*

이튿날 저녁 다슬이 훈련장에서 돌아왔다⁠. 얼굴이 바람에 터서 볼에 붉은 줄이 나 있었다⁠. 다슬은 현관에서 군화를 벗다 말고 거실 바닥에 앉았다⁠. 보일러는 아침에 고쳐졌고 바닥이 다시 따뜻했다⁠.

“⁠쉼터 얘기 들었어⁠.⁠”

“⁠누구한테⁠?⁠”

“⁠사모님이 연대장님한테 전화했어⁠. 훈련장으로⁠. 연대장님이 나한테 그러시더라⁠. 2대대장 남편분이 냉장고 안 열었다고⁠. 고맙다고 전해 달래⁠.⁠”

준석은 대답하지 않았다⁠. 다슬은 군화 끈을 끝까지 풀고 나서 준석을 올려다보았다⁠.

“⁠셰프⁠, 그거 나 때문에 안 연 거지⁠.⁠”

“⁠끝님 씨 남편 때문이기도 해⁠.⁠”

“⁠거짓말⁠.⁠”

다슬은 바닥을 짚고 일어서서 준석의 앞치마 끈을 잡아당겼다⁠. 준석이 끌려가듯 다가갔다⁠. 다슬은 준석의 가슴에 이마를 댔다⁠. 군복에서 억새 냄새와 화약 냄새가 났다⁠.

“⁠연대장님한테 동태전 한 장 드렸어⁠. 셰프가 사모님이랑 무슨 거래 했는지 알아⁠. 정보과장이 술 끊고 나서 말이 많아졌어⁠. 나는 거래 안 했어⁠. 내 동태전은 내 거야⁠.⁠”

“⁠알아⁠. 냉동실에서 봉지 하나 없어졌더라⁠.⁠”

다슬이 준석의 가슴에 이마를 댄 채 웃었다⁠. 웃음이 가슴뼈를 타고 울렸다⁠. 웃음이 그치고 나서 다슬이 한 가지를 더 말했다⁠.

“⁠사단 담당이 확인 요청 넣은 거⁠, 농산물품질관리원까지 갔대⁠. 원산지 조사관이 다음 주에 포천 공장에 나간대⁠. 사단 법무 참모가 연대장님한테 귀띔했고⁠.⁠”

“⁠그럼 사모님 동생은⁠…⁠.⁠”

“⁠그건 사모님 동생 일이야⁠. 셰프가 냉장고 열었으면 셰프 일이 됐겠지⁠. 안 열었으니까 나라 일이 된 거야⁠.⁠”

다슬은 준석의 앞치마에 얼굴을 묻은 채 중얼거렸다⁠. 준석은 아내가 대대장으로서 하는 말인지 아내로서 하는 말인지 가늠하지 못했다⁠. 다슬도 고개를 들지 않았다⁠.

“⁠끝님 씨한테 사과해⁠. 오늘 말고 내일⁠. 오늘은 내가 먼저야⁠.⁠”

다슬은 준석의 앞치마 매듭을 풀었다⁠. 매듭이 손가락 사이에서 미끄러졌다⁠. 앞치마가 바닥에 떨어졌고 다슬은 남편의 손을 잡아 침실 쪽으로 끌었다⁠. 사흘 동안 산에서 언 손이었는데 준석의 손바닥 안에서 금세 데워졌다⁠. 침실 커튼 너머로 포 사격 소리가 한 번 울렸다⁠. 다슬은 포성에 고개도 돌리지 않았다⁠. 이불 아래에서 다슬의 숨이 준석의 목덜미에 닿았고⁠, 사흘 동안 쌓인 서리가 숨결마다 녹아내렸다⁠. 준석은 아내의 등에 남은 군장 끈 자국을 손끝으로 따라갔다⁠. 다슬이 낮게 웃으며 남편의 귀에 대고 대대장 목소리로 말했다⁠.

“⁠셰프⁠, 오늘은 근무 중 아니야⁠.⁠”

*

끝님은 이틀 동안 올라오지 않았다⁠. 사흘째 아침⁠, 준석은 104동 일 층 끝 집 현관 앞에 서서 초인종을 누르지 못하고 있었다⁠. 손에 주황 뚜껑 통 하나를 들고 있었다⁠. 안에는 깍두기가 들어 있었다⁠. 무를 소금에 한 시간 더 재우고⁠, 매실청은 숟가락으로⁠, 설탕은 넣지 않았다⁠.

문이 먼저 열렸다⁠. 끝님이 산들을 안고 서 있었다⁠. 눈이 부어 있었다⁠.

“⁠렌즈로 다 보여예⁠. 십 분째 서 계셨어예⁠.⁠”

“⁠설탕 안 넣었어요⁠.⁠”

준석은 통을 내밀었다⁠. 끝님은 통을 받아 뚜껑을 열고 깍두기 하나를 집어 먹었다⁠. 오래 씹었다⁠. 산들이 엄마 입을 따라 입을 오물거렸다⁠.

“⁠맛없어예⁠.⁠”

“⁠사모님 김치 같은 맛이에요⁠. 사 년⁠, 오 년 같이 사는 사람 김치⁠.⁠”

끝님이 깍두기를 하나 더 먹었다⁠. 이번에는 빨리 씹었다⁠.

“⁠사부님⁠. 시장에서 고춧가루 산다 캤지예⁠. 저도 갈께예⁠. 제 회비 십오만 원 안 낼 끼라예⁠. 그 돈으로 영양 고춧가루 사고 배추 살 끼라예⁠.⁠”

“⁠끝님 씨 집 김장은 한 통이면 돼요⁠.⁠”

“⁠한 통 말고예⁠. 사모님 고춧가루 안 쓰는 집이 몇 집인지 세어 봤어예⁠. 열아홉 집이에요⁠. 거기다 부사관 관사도 있어예⁠.⁠”

*

부사관 관사는 백로관사 담장 너머에 있었다⁠. 1990년대에 지은 오 층짜리 두 동이었고⁠, 엘리베이터가 없었다⁠. 장교 관사와 부사관 관사 사이에는 허리 높이의 시멘트 담장이 있었다⁠. 넘어 다니는 사람은 없었다⁠. 담장 가운데에 쪽문이 하나 있었는데 녹이 슬어 잘 열리지 않았다⁠.

둘째 수요일 이후로 쉼터 솥 앞에 낯선 얼굴들이 섞이기 시작했다⁠. 부사관 관사 부인들이었다⁠. 주임원사 부인이 처음 왔다⁠. 쉰 줄이었고 손등에 오래된 화상 흉터가 있었다⁠. 주임원사 부인은 쉼터 문간에서 한참 머뭇거렸다⁠.

“⁠여기 장교 사모님들 모임이라던데⁠.⁠”

“⁠수요일은 정해진 자리 없어요⁠.⁠”

준석이 국그릇을 내밀었다⁠. 주임원사 부인은 그릇을 받아 들고 쉼터 탁자 맨 끝에 앉았다⁠. 국을 다 먹고 나서 빈 그릇을 씻으려고 개수대로 왔다⁠. 준석이 말리자 주임원사 부인이 웃었다⁠.

“⁠부사관 관사는 사모회가 따로 없어요⁠. 장교 사모회 김장 날 우리가 배추 날라요⁠. 남편들이 시켜요⁠. 서른 해째⁠.⁠”

다음 주 수요일에 주임원사 부인은 혼자 오지 않았다⁠. 부사관 부인 여섯이 쪽문을 밀고 넘어왔다⁠. 녹슨 쪽문이 끼익 소리를 내며 열렸고⁠, 다시 닫히지 않았다⁠. 관리관이 와서 쪽문을 보더니 기름을 쳤다⁠. 닫으려고 친 게 아니었다⁠. 잘 열리라고 쳤다⁠.

10월 넷째 주 수요일⁠, 끝님이 냉장고마다 들어간 주황 뚜껑을 세었다⁠. 장교 관사 스물두 집⁠, 부사관 관사 아홉 집⁠. 서른한 집이었다⁠. 쉼터 서랍의 통이 모자라 준석은 전곡시장 그릇 가게에서 주황 뚜껑 통을 한 상자 더 샀다⁠. 같은 주황색이 없어서 귤색 뚜껑이 섞였다⁠.

*

24일은 전곡 오일장 날이었다⁠. 서리 맞은 뒤라 무 값이 올랐고⁠, 배추는 잎 끝이 단단하게 오그라들었다⁠. 준석은 끝님과 함께 시장 끝 모퉁이 반찬가게로 갔다⁠. 사장은 가게 앞에 배추를 수레째 쌓아 놓고 하나씩 반을 갈라 속을 보여 주었다⁠. 속이 노랗게 차 있었다⁠.

“⁠영양 고춧가루는 우리 큰집 거예요⁠. 한 근에 이만 원⁠. 열아홉 집이면 넉넉히 해 드리고⁠, 배추는 연천 백학 거로 이백 포기까지 대 드릴 수 있어요⁠. 시세대로⁠.⁠”

“⁠절임은요⁠?⁠”

“⁠우리 가게 뒷마당에서 절여 드려요⁠. 사부님이 소금 간 봐 주시면⁠.⁠”

사장은 준석을 처음부터 사부님이라고 불렀다⁠. 끝님이 시장 사람들에게 퍼뜨린 호칭이었다⁠. 끝님은 메모장에 숫자를 적고 있었다⁠. 「⁠고춧가루 이만 × 열아홉 집 = 사모님 거보다 이십몇만 원 쌈⁠.⁠」

계약금 얘기를 꺼낼 때였다⁠. 시장 골목 입구에서 경적이 길게 울렸다⁠. 사람들이 길을 비켜섰다⁠. 흰색 일 톤 트럭 한 대가 장꾼들 사이로 밀고 들어왔다⁠. 트럭 옆면에 「⁠포천 한우물 농산 · 절임배추 · 고춧가루⁠」라고 붉은 글씨로 적혀 있었다⁠.

트럭은 반찬가게 바로 앞에서 멈췄다⁠. 운전석에서 남자 하나가 내렸다⁠. 쉰 줄이었고 등산 점퍼에 금목걸이를 걸고 있었다⁠. 눈매가 혜옥과 닮았다⁠. 웃을 때 끝을 끄는 버릇까지 닮았다⁠.

“⁠누님 관사 김장 배추를 시장에서 사신다는 분이 누구세요⁠?⁠”

준석이 앞으로 나섰다⁠. 남자는 준석의 앞치마를 위아래로 훑었다⁠.

“⁠아⁠, 남자 사모님⁠. 얘기 많이 들었습니다⁠.⁠”

“⁠사부님이에요⁠. 투표로 정해졌어요⁠.⁠”

남자는 대답하지 않고 사장 쪽으로 몸을 돌렸다⁠. 배추 수레를 한 손으로 툭 쳤다⁠. 맨 위의 배추 하나가 굴러 떨어져 길바닥에 반으로 쪼개졌다⁠.

“⁠사장님⁠. 관사 납품은 십이 년째 우리 거예요⁠. 군부대 납품 잘못 손대면 장사 못 하십니다⁠. 이 동네 가게들 다 관사 사모님들이 먹여 살리는 거 아시잖아요⁠.⁠”

사장의 얼굴이 굳었다⁠. 고무장갑 낀 손이 배추 칼 손잡이를 쥐었다 놓았다⁠.

준석은 길바닥의 쪼개진 배추를 주워 들었다⁠. 반으로 갈라진 단면이 노랬다⁠. 준석은 속잎 한 장을 뜯어 입에 넣고 씹었다⁠. 단맛이 났다⁠. 서리 맞은 배추의 단맛이었다⁠. 준석은 배추를 들고 트럭 짐칸으로 걸어갔다⁠. 짐칸에 덮인 방수포 한쪽이 들려 있었다⁠. 안에 절임배추 상자가 쌓여 있었고⁠, 상자 틈으로 소금물이 흘러 짐칸 바닥이 젖어 있었다⁠.

“⁠사장님⁠, 이 배추 언제 절인 거예요⁠?⁠”

“⁠그걸 왜 물어요⁠?⁠”

“⁠상자 밑으로 물이 너무 많이 빠져요⁠. 절인 지 사흘 넘은 배추예요⁠. 숨이 다 죽어서 김치가 무를 거예요⁠. 관사 김장이 11월 26일인데⁠, 이거는 그때까지 못 버텨요⁠.⁠”

남자의 웃음이 멈췄다⁠. 장꾼 몇이 다가와 짐칸을 들여다보았다⁠. 생선 가게 아주머니가 상자 하나를 손가락으로 눌러 보았다⁠. 상자가 물렁하게 꺼졌다⁠.

“⁠이건 시장 배추 아니라예⁠. 사흘 묵은 기라예⁠.⁠”

끝님이 생선 가게 아주머니 옆에서 큰 소리로 말했다⁠. 사투리가 시장 골목을 따라 퍼졌다⁠. 남자의 얼굴이 붉어졌다⁠.

트럭 조수석 문이 열렸다⁠. 혜옥이 내렸다⁠. 회색 카디건에 장바구니를 들고 있었다⁠. 동생 차를 타고 장 보러 나온 사람처럼 보였다⁠. 혜옥은 짐칸 앞에 선 준석을 보고⁠, 끝님을 보고⁠, 반찬가게 사장을 보았다⁠. 웃었다⁠. 끝을 길게 끌었다⁠.

“⁠사장님⁠, 오랜만이에요⁠. 몇 해 전에 우리 관사 배추 대 보시겠다고 오셨었죠⁠.⁠”

“⁠사모님⁠…⁠.⁠”

혜옥은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휴대전화를 꺼냈다⁠. 화면을 몇 번 누르고⁠, 귀에 대지 않은 채 사장 쪽으로 화면을 돌렸다⁠. 통화 연결음이 울리고 있었다⁠. 화면에 뜬 이름은 「⁠수송부 강 하사⁠」였다⁠.

“⁠사장님 아드님이 우리 연대 수송부 하사죠⁠? 올겨울 중사 진급 심사 있고요⁠. 지금 바꿔 드릴까요⁠? 어머님이 관사 김장 배추 대신다고⁠, 축하한다고 말씀드리려고요⁠.⁠”

8화는 어땠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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