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화(5,313자)

보일러가 터진 밤

여군 대대장의 남편이 관사촌에 이사 오자 사모님들이 긴장했다 · 탁기원

끝님은 촬영 단추를 누르지 않았다⁠. 휴대전화를 내리고 산들을 두 팔로 고쳐 안았다⁠.

“⁠만 원은 이번 달 말일에 드릴께예⁠.⁠”

혜옥은 고개를 끄덕였다⁠. 사단 담당이 서류철에 무언가를 적고 나서 포대 하나를 들어 형광등 쪽으로 기울였다⁠. 겉봉 너머의 글자를 한참 들여다보았다⁠.

“⁠사모님⁠, 이건 제 업무가 아닙니다⁠. 위생 점검은 이상 없습니다⁠. 다만 원산지 표시는 농산물 품질 관리 쪽 일이라⁠, 확인 요청은 하겠습니다⁠.⁠”

“⁠하세요⁠.⁠”

혜옥이 말했다⁠. 목소리가 흔들리지 않았다⁠. 담당이 쉼터를 나가자 1대대장 사모가 따라 나갔다⁠. 혜옥은 혼자 남아 세 번째 김치냉장고의 뚜껑을 손수 닫았다⁠. 자물쇠를 채우지는 않았다⁠. 열쇠는 준석에게 있었다⁠.

“⁠준석 씨⁠. 쉼터 열쇠는 계속 가지고 계세요⁠. 우리 거래는 거래예요⁠.⁠”

혜옥은 이 말만 남기고 나갔다⁠. 준석은 닫힌 냉장고 뚜껑에 손바닥을 얹었다⁠. 냉기가 손바닥을 타고 올라왔다⁠. 끝님이 뒤에서 작게 말했다⁠.

“⁠사부님⁠, 저 사진 안 찍은 거 잘한 거지예⁠?⁠”

“⁠왜 안 찍었어요⁠?⁠”

“⁠찍으면 사모님 동생이 잡혀가예⁠. 사모님 동생이 잡혀가면 연대장님이 장군 못 돼예⁠. 연대장님이 장군 못 되면 엘리베이터 경비 아저씨가⁠…⁠.⁠”

끝님은 말을 끝맺지 않았다⁠. 대신 산들의 볼에 코를 비볐다⁠. 산들이 웃었다⁠.

*

10월 셋째 주⁠, 백로연대의 세 대대가 사흘짜리 야외 전술 훈련을 나갔다⁠. 다슬은 떠나는 아침 현관에서 군화를 신으며 날씨 예보를 읽어 주었다⁠.

“⁠모레 밤 영하 사 도⁠. 첫 서리래⁠. 보일러 확인해⁠.⁠”

“⁠영하 사 도면 김장 배추 얼어⁠.⁠”

“⁠아직 김장 안 했잖아⁠.⁠”

“⁠시장 배추 말이야⁠.⁠”

다슬은 웃지 않고 준석의 앞치마 끈을 고쳐 매 주었다⁠. 매 주고 나서 손을 떼지 않았다⁠.

“⁠사모님이 고춧가루 일로 연대장님한테 뭐라고 했을지 몰라⁠. 사흘 동안 아무 일도 만들지 마⁠.⁠”

“⁠일은 사모님이 만들어⁠.⁠”

다슬은 대답 대신 준석의 이마에 이마를 한 번 댔다가 떼고 나갔다⁠. 화약 냄새가 아직 머리카락에 남아 있었다⁠.

*

모레 밤⁠, 예보대로 기온이 내려갔다⁠. 저녁 아홉 시가 넘자 베란다 유리창에 김이 서렸다가 하얗게 얼기 시작했다⁠. 준석은 저녁을 먹고 설거지를 하다가 수도꼭지에서 나오는 물이 미지근해지는 것을 느꼈다⁠. 열 시에는 찬물만 나왔다⁠. 거실 바닥이 손바닥 아래에서 식어 갔다⁠.

열 시 반에 끝님에게서 문자가 왔다⁠.

「⁠사부님 104동 보일러 안 돼예⁠. 관리관님이 101동 지하 보일러실 고장이래예⁠. 네 동 다 같이 쓰는 기라서⁠. 산들이 손 차가워예⁠.⁠」

준석은 베란다로 나가 관사촌을 내려다보았다⁠. 네 동의 창마다 불이 켜져 있었고⁠, 창마다 사람 그림자가 오갔다⁠. 이불을 꺼내는 그림자⁠, 전기장판 코드를 찾는 그림자⁠, 아이를 안고 서성이는 그림자⁠. 101동 지하 보일러실 문 앞에서 관리관의 손전등 불빛이 흔들렸다⁠.

준석은 앞치마를 매고 쉼터 열쇠를 챙겼다⁠.

쉼터는 보일러가 따로였다⁠. 도시가스가 들어오는 공용 부엌이라 가스레인지 넷과 큰 솥 둘이 그대로 살아 있었다⁠. 준석은 솥 둘에 물을 가득 받아 불을 올렸다⁠. 가스레인지 나머지 둘에는 주전자를 올렸다⁠. 솥에서 김이 오르기 시작하자 쉼터 천장 아래로 하얀 김이 고였다⁠. 창문에 이슬이 맺혔다⁠.

준석은 단톡방에 없었다⁠. 끝님에게 문자를 보냈다⁠.

「⁠쉼터 따뜻해요⁠. 오실 분들 오시라고 해 주세요⁠. 담요 하나씩⁠.⁠」

끝님이 단톡방에 문자를 옮겼다⁠. 십 분 뒤 쉼터 문이 처음으로 열렸다⁠. 끝님이 산들을 포대기에 싸서 안고 들어왔다⁠. 뒤이어 군의관 사모가 배를 감싸고 들어왔고⁠, 정보과장 사모가 전기장판을 둘둘 말아 들고 왔다⁠. 고삼 아들을 둔 대위 집 사모는 아들의 문제집을 안고 왔다⁠. 아들은 문제집을 펴고 쉼터 탁자 끝에 앉았다⁠.

열한 시가 되자 스무 집이 넘었다⁠. 자정 무렵에는 서른 집이 쉼터에 있었다⁠. 담요를 깐 바닥에 아이들이 누웠고⁠, 부인들은 탁자에 둘러앉아 솥에서 김이 오르는 것을 보았다⁠. 준석은 솥 하나에 미역국을 끓이고 다른 하나에 보리차를 끓였다⁠. 주황 뚜껑 통은 쉼터 서랍에 스물두 개가 남아 있었다⁠. 준석은 통 대신 쉼터 찬장의 사모회 국그릇을 꺼냈다⁠. 그릇 바닥마다 「⁠백로 사모회⁠」라고 금색 글씨가 찍혀 있었다⁠.

관리관이 자정 반에 쉼터로 내려왔다⁠. 기름때 묻은 장갑을 벗으며 말했다⁠.

“⁠보일러 부품이 의정부에 있습니다⁠. 아침 여덟 시에 옵니다⁠.⁠”

“⁠관리관님 미역국 한 그릇 드세요⁠.⁠”

“⁠근무 중입니다⁠.⁠”

관리관은 대답하고 나서 미역국을 두 그릇 먹었다⁠. 두 그릇째를 비우고 관리관은 빈 그릇을 내려다보며 혼잣말처럼 말했다⁠.

“⁠엘리베이터 앞 종이 말입니다⁠. 제가 쓴 게 아닙니다⁠. 사모님이 손으로 써서 주신 걸 제가 컴퓨터로 다시 쳤습니다⁠. 손글씨가 사모님 거라 다들 알아볼까 봐서요⁠.⁠”

“⁠자제에 굵은 글씨도요⁠?⁠”

“⁠그건 제가 했습니다⁠.⁠”

관리관은 그릇을 개수대에 넣고 직접 씻었다⁠. 씻고 나서 그릇 바닥의 금색 글씨를 행주로 한 번 더 문질렀다⁠.

자정이 넘자 쉼터는 시끄러워졌다⁠. 잠 못 든 아이들이 담요 사이를 기어 다녔고⁠, 부인들은 서로의 남편이 훈련장에서 무엇을 먹고 있을지 내기를 걸었다⁠. 정보과장 사모가 전투식량 비빔밥에 천 원을 걸었고⁠, 인사과장 사모가 컵라면에 이천 원을 걸었다⁠. 끝님은 산들을 무릎에 앉히고 손을 들었다⁠.

“⁠우리 남편은 아무것도 못 묵고 있을 기라예⁠. 관측장교는 산꼭대기에 있어예⁠.⁠”

“⁠그럼 끝님 씨가 이기면 누가 돈 줘요⁠?⁠”

“⁠사부님이예⁠.⁠”

쉼터가 웃음으로 뒤집혔다⁠. 준석은 국자를 든 채 끝님을 보았다⁠. 끝님은 태연하게 산들의 손을 잡고 박수를 쳤다⁠. 고삼 아들이 문제집에서 고개를 들고 처음으로 웃었다⁠.

웃음이 가라앉을 무렵 탁자 끝에서 3대대장 사모가 준석에게 손짓했다⁠. 준석이 다가가자 3대대장 사모가 휴대전화 화면을 내밀었다⁠. 훈련장의 남편이 보낸 사진이었다⁠. 밤 산 능선 위에 텐트 하나가 서리를 맞고 있었고⁠, 텐트 앞에서 군인 셋이 반합 하나를 나눠 들고 있었다⁠. 사진 아래에 한 줄이 적혀 있었다⁠.

「⁠2대대장님이 집에서 가져온 동태전 데워 줌⁠. 연대장님도 한 장 드심⁠.⁠」

준석은 화면을 오래 보았다⁠. 연대장이 한 장 먹었다⁠. 혜옥과의 거래는 연대장에게 아무것도 주지 말라는 것이었다⁠. 다슬은 거래를 몰랐다⁠. 아니⁠, 알면서 동태전을 싸 갔을 수도 있었다⁠. 준석은 아침에 냉동실에서 동태전 봉지가 하나 줄어 있던 것을 그제야 떠올렸다⁠.

“⁠우리 남편이 그러는데⁠, 연대장님이 전 한 장 다 드시고 나서 2대대장님한테 고맙다고 했대요⁠. 대대장 회의 때 말고 처음 봤대요⁠, 그런 얼굴⁠.⁠”

3대대장 사모는 휴대전화를 거두고 낮게 덧붙였다⁠.

“⁠사부님⁠, 이 사진 우리 사모님한테는 안 보여 줄게요⁠.⁠”

*

새벽 한 시⁠, 쉼터 문이 다시 열렸다⁠. 혜옥이었다⁠. 회색 카디건 위에 두꺼운 패딩을 걸치고⁠, 손에 하얀 보자기 하나를 들고 있었다⁠. 혜옥 뒤로 1대대장 사모와 부연대장 사모가 따라 들어왔다⁠.

쉼터 안이 조용해졌다⁠. 바닥에 누운 아이들만 계속 잤다⁠. 혜옥은 문간에서 쉼터를 둘러보았다⁠. 서른 집⁠. 솥에서 오르는 김⁠. 사모회 국그릇에 담긴 미역국⁠. 디귿 자가 아니라 아무렇게나 놓인 탁자들⁠.

혜옥은 보자기를 탁자 위에 풀었다⁠. 안에 묵은지 한 포기가 통째로 들어 있었다⁠.

“⁠우리 집도 보일러가 안 돼요⁠. 김치냉장고는 돌아가니까⁠, 이거라도 같이 먹어요⁠.⁠”

부인들 사이로 작은 숨소리들이 지나갔다⁠. 혜옥은 묵은지를 도마 위에 올리고 칼을 잡았다⁠. 칼질이 빨랐다⁠. 한 해를 묵은 배추가 칼날 아래에서 결대로 갈라졌다⁠. 준석은 솥 앞에 서서 혜옥의 칼질을 보았다⁠. 학원에서 열두 해 동안 가르친 어떤 수강생보다 빨랐다⁠.

새벽 한 시 반⁠, 미역국과 묵은지가 탁자마다 놓였다⁠. 서른 집이 함께 먹었다⁠. 군의관 사모가 묵은지를 한 점 먹고 울 것 같은 얼굴로 웃었다⁠. 입덧 이후 처음 먹는 김치라고 했다⁠. 혜옥이 군의관 사모의 등을 쓸어 주었다⁠. 쓸어 주는 손이 부드러웠다⁠.

준석은 솥 앞에서 자기가 누구 편인지 잠깐 알 수 없었다⁠.

혜옥이 칼을 씻으며 준석 곁으로 왔다⁠. 둘은 솥 하나를 사이에 두고 섰다⁠. 솥 안에서 미역이 천천히 뒤집혔다⁠.

“⁠미역국에 들기름 쓰셨네요⁠.⁠”

“⁠참기름은 향이 위로 날아가서요⁠. 들기름이 바닥에 남아요⁠.⁠”

“⁠우리 시어머니가 그렇게 끓였어요⁠. 화천에서⁠.⁠”

혜옥은 국자를 들어 솥을 한 번 저었다⁠. 남의 솥을 젓는 손에 망설임이 없었다⁠. 준석은 국자를 빼앗지 않았다⁠. 둘은 말없이 김이 오르는 솥을 내려다보았다⁠. 바닥에서 자던 산들이 잠결에 웃었다⁠.

*

새벽 두 시⁠, 혜옥이 일어섰다⁠.

“⁠다들 계신 김에 하나만 말씀드릴게요⁠. 김장 대회 날짜가 정해졌어요⁠. 11월 26일 목요일⁠. 사단장 사모님 일정에 맞췄어요⁠.⁠”

부인들이 수저를 내려놓았다⁠. 26일은 인사과장 사모가 말한 진급 발표 날이었다⁠. 쉼터에 앉은 부인 가운데 남편이 올해 진급 심사에 오른 집이 여섯이었다⁠.

“⁠김장 회비도 오늘 받을게요⁠. 한 집에 십오만 원⁠. 계좌로 보내셔도 되고⁠, 지금 주셔도 되고요⁠. 사단장 사모님이 오시는 해라 배추는 이백오십 포기로 늘렸어요⁠. 고춧가루도 넉넉히 들였고요⁠.⁠”

1대대장 사모가 수첩을 펼쳤다⁠. 몇 사람이 휴대전화를 꺼냈다⁠. 송금 알림음이 쉼터 여기저기서 울렸다⁠. 서른 집 가운데 열 집이 앉은 자리에서 보냈다⁠.

끝님이 일어섰다⁠. 산들은 담요 위에서 자고 있었다⁠. 끝님은 산들의 이불을 한 번 여며 주고 나서 혜옥 앞으로 걸어 나갔다⁠.

“⁠사모님⁠. 고춧가루 얘기 좀 해도 돼예⁠?⁠”

혜옥이 끝님을 보았다⁠. 다정한 눈이었다⁠.

“⁠해요⁠.⁠”

“⁠쉼터 세 번째 냉장고에 있는 고춧가루예⁠. 겉에는 영양 국산이라 캐 놨는데⁠, 속봉지에 다른 나라 이름 있어예⁠. 사부님이 맛봤어예⁠. 단맛이 없대예⁠. 한 근에 삼만 이천 원이라꼬 적혀 있던데⁠, 전곡시장 반찬가게 사장님은 진짜 영양 거 한 근에 이만 원이면 판다 캤어예⁠.⁠”

쉼터가 완전히 조용해졌다⁠. 송금하던 손들이 멈췄다⁠. 1대대장 사모가 수첩을 덮었다⁠.

“⁠사진은 안 찍었어예⁠. 근데 냉장고는 저기 있어예⁠. 열쇠는 사부님한테 있고예⁠.⁠”

끝님이 준석을 돌아보았다⁠. 서른 집의 눈이 끝님을 따라 준석에게로 왔다⁠. 준석의 앞치마 주머니에 놋쇠 열쇠가 들어 있었다⁠. 주머니 안에서 열쇠와 연대장의 쪽지와 주황 뚜껑이 맞닿아 있었다⁠.

혜옥은 끝님을 보지 않았다⁠. 준석을 보았다⁠. 혜옥의 얼굴에 서른 해 동안 쌓인 웃음이 한 겹씩 내려앉았다⁠. 다 내려앉고 나서 남은 얼굴은 생각보다 피곤해 보였다⁠.

혜옥은 준석에게서 눈을 떼지 않고⁠, 쉼터 안의 모든 사람이 들을 수 있는 목소리로 말했다⁠.

“⁠다들 아시죠⁠. 올해 2대대장 문다슬 중령님이 대령 진급 심사에 오르셨어요⁠. 진급 심사에는 연대장님 의견이 들어가요⁠. 우리 집 사람이 쓰는 의견이에요⁠.⁠”

혜옥은 잠깐 말을 멈췄다⁠. 솥에서 보리차가 끓어 넘치는 소리가 났다⁠. 아무도 불을 끄러 가지 않았다⁠.

“⁠준석 씨⁠. 냉장고 열 거예요⁠?⁠”

7화는 어땠나요?

댓글 0

로그인하면 댓글을 남길 수 있습니다.

첫 번째 댓글을 남겨 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