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화(5,610자)

수요일 솥

여군 대대장의 남편이 관사촌에 이사 오자 사모님들이 긴장했다 · 탁기원

준석은 열쇠를 집었다⁠. 놋쇠가 손바닥에 차가웠다⁠. 혜옥의 손가락이 열쇠에서 떨어지는 데 한 박자가 걸렸다⁠.

“⁠알고 가져갈게요⁠.⁠”

혜옥은 대답하지 않고 식탁 위의 주황 뚜껑을 집어 준석의 앞으로 밀었다⁠. 가져가라는 뜻이었다⁠. 준석은 뚜껑을 앞치마 주머니에 넣었다⁠. 혜옥의 부엌을 나설 때 베란다의 장독 열여섯 개가 오후 햇빛을 받아 반들거렸다⁠. 독마다 뚜껑 위에 하얀 면포가 덮여 있었다⁠.

*

밤 열한 시 반에 초인종이 울렸다⁠. 준석은 부엌에 서 있었다⁠. 가스 불 위에서 전복죽이 끓고 있었다⁠. 오늘 아침 전곡시장에서 전복 세 마리를 샀다⁠. 내장을 빼고 살만 얇게 저며 참기름에 볶다가 불린 쌀을 넣었다⁠. 저녁 내내 저었다⁠.

초인종이 한 번 울리고 멈췄다⁠. 준석은 가스 불을 껐다⁠. 죽 끓는 소리가 잦아들자 현관 밖의 숨소리가 들렸다⁠. 계단을 다 올라온 사람이 숨을 고르는 소리였다⁠. 엘리베이터를 타라고 했는데 연대장은 또 계단으로 왔다⁠.

준석은 현관 앞까지 갔다⁠. 손잡이를 잡지 않았다⁠. 렌즈 너머로 트레이닝복 어깨가 보였다⁠. 연대장은 빈 통 하나를 들고 서 있었다⁠. 초인종을 다시 누르지 않았다⁠. 일 분쯤 서 있다가 빈 통을 현관 손잡이 옆 바닥에 내려놓았다⁠. 무릎을 굽히는 동작이 느렸다⁠. 내려놓고 일어서는 데 벽을 짚었다⁠.

계단을 내려가는 슬리퍼 소리가 한 층마다 멈췄다⁠.

준석은 소리가 다 사라지고 나서 문을 열었다⁠. 바닥에 놓인 통 안에 쪽지가 한 장 들어 있었다⁠. 볼펜으로 꾹꾹 눌러쓴 글씨였다⁠.

「⁠들깨죽 잘 먹었습니다⁠. 오늘은 집사람이 고기를 구웠습니다⁠. 맛있었습니다⁠.⁠」

준석은 쪽지를 앞치마 주머니에 넣었다⁠. 주머니 안에 혜옥이 밀어 준 주황 뚜껑이 먼저 들어 있었다⁠. 둘이 맞닿아 바스락거렸다⁠. 전복죽은 냄비째 식어 갔다⁠. 이튿날 아침 준석은 식은 전복죽을 다슬의 아침상에 올렸다⁠. 다슬은 숟가락을 들다 말고 냄비를 보았다⁠.

“⁠전복이네⁠.⁠”

“⁠먹어⁠. 다른 데 갈 데가 없어⁠.⁠”

다슬은 아무것도 묻지 않고 두 그릇을 먹었다⁠.

*

첫 수요일 아침 열 시⁠, 준석은 쉼터 자물쇠에 놋쇠 열쇠를 꽂았다⁠. 끝님이 산들을 업고 뒤에 서 있었다⁠. 열쇠가 한 번에 돌았다⁠. 문이 열리자 쉼터 안의 냉기가 발목을 감았다⁠. 큰 솥 둘이 벽에 기대어 있었고⁠, 김치냉장고 셋이 웅웅 돌았다⁠.

준석은 솥 하나를 가스레인지에 올렸다⁠. 솥 바닥에 오래 묵은 그을음이 동그랗게 앉아 있었다⁠. 서른 해 김장의 그을음이었다⁠. 준석은 그을음을 문지르지 않고 그대로 물을 부었다⁠.

“⁠오늘 메뉴가 뭐라예⁠?⁠”

“⁠무국이랑 멸치볶음⁠, 시금치나물⁠. 다 하얗게 갈 거예요⁠. 냄새 안 나게⁠.⁠”

“⁠관리관님 또 오시겠네예⁠.⁠”

관리관은 열한 시에 왔다⁠. 쉼터 문간에 서서 코를 두 번 들이쉬고 나서 안으로 들어왔다⁠. 솥 앞까지 와서 세 번째로 들이쉬었다⁠.

“⁠무국입니까⁠?⁠”

“⁠한 그릇 드릴까요⁠?⁠”

“⁠근무 중입니다⁠.⁠”

관리관은 대답하고 나서도 솥 앞을 떠나지 않았다⁠. 준석이 국그릇을 내밀자 관리관은 두 손으로 받아 조리대 끝에 서서 마셨다⁠. 마시는 동안 허리가 굽지 않았다⁠. 다 마시고 그릇을 내려놓으며 한마디를 보탰다⁠.

“⁠쉼터는 공용 복도가 아닙니다⁠. 냄새가 나도 됩니다⁠.⁠”

열한 시 반부터 사람이 왔다⁠. 끝님과 정보과장 사모⁠, 군의관 사모⁠, 고삼 아들을 둔 대위 집⁠, 인사과장 사모⁠. 추석 날의 일곱 집이 먼저 왔다⁠. 열두 시가 넘자 처음 보는 얼굴들이 문간에서 머뭇거렸다⁠. 104동 중위 집 둘⁠, 103동 포대장 집⁠, 남편이 장기 파견을 나간 102동 이 층 집⁠. 사람들은 반찬통을 하나씩 받아 들고 쉼터 탁자에 앉아 점심을 먹었다⁠. 디귿 자 탁자의 이름표는 치워져 있었다⁠. 끝님이 아침에 다 걷어서 서랍에 넣었다⁠.

“⁠여기 앉아도 돼요⁠? 자리가 정해져 있었는데⁠.⁠”

103동 포대장 사모가 물었다⁠. 끝님이 대답했다⁠.

“⁠수요일은 정해진 자리 없어예⁠. 밥 먼저 받은 사람이 아무 데나 앉아예⁠.⁠”

열두 시 반에 3대대장 사모가 왔다⁠. 환영회 날 「⁠누구 남편⁠?⁠」 하던 3대대장 집이었다⁠. 3대대장 사모는 쉼터 문간에서 한참 서 있다가 들어와 준석 앞에 섰다⁠.

“⁠우리 남편이 잡채 몰래 먹은 거 아시죠⁠.⁠”

“⁠들었어요⁠.⁠”

“⁠계란말이도 먹어 보고 싶대요⁠. 잡채 넣은 거⁠.⁠”

준석은 웃으며 통을 하나 더 꺼냈다⁠. 3대대장 사모는 통을 받아 들고 탁자에 앉지 않고 바로 나갔다⁠. 나가기 전에 문간에서 고개를 돌렸다⁠.

“⁠사부님⁠. 같은 시각에 101동에서 김장 사전 교육 해요⁠. 사모님 댁 거실에서⁠. 1대대장 사모님이 출석 부르세요⁠. 저는 지금 거기 가요⁠. 반찬은 가방에 넣고요⁠.⁠”

첫 수요일 오후 끝님이 냉장고마다 들어간 주황 뚜껑을 세었다⁠. 열두 집이었다⁠. 다음 주 수요일에는 열다섯 집이 되었다⁠.

*

둘째 수요일 아침⁠, 다슬의 대대는 연천 북쪽 사격장에서 실사격 훈련을 했다⁠. 다슬은 관측소 위에 서서 망원경을 들고 있었다⁠. 10월 중순의 사격장은 억새가 사람 키만큼 자라 있었고⁠, 포가 울릴 때마다 억새 이삭이 한꺼번에 눕고 일어났다⁠. 화약 냄새가 바람을 타고 관측소까지 올라왔다⁠.

세 번째 포대의 다섯 번째 발사에서 무전이 끊겼다⁠. 다시 연결된 무전기에서 포대장의 목소리가 떨렸다⁠.

“⁠장전수 손가락 부상⁠. 오른손 검지⁠. 의무병 투입⁠.⁠”

다슬은 관측소 계단을 뛰어 내려갔다⁠. 포 옆에 이등병 하나가 앉아 있었다⁠. 장갑 낀 오른손을 왼손으로 감싸고 있었고⁠, 장갑 끝에서 피가 배어 나와 흙바닥에 떨어졌다⁠. 의무병이 장갑을 벗기는 동안 이등병은 입술을 깨물고 소리를 내지 않았다⁠. 다슬은 이등병 앞에 무릎을 꿇고 이등병의 왼쪽 어깨를 잡았다⁠.

“⁠이름⁠.⁠”

“⁠이병 정⁠… 정입니다⁠.⁠”

“⁠정 이병⁠. 숨 쉬어⁠. 나 보고⁠.⁠”

이등병이 다슬을 보았다⁠. 검지 첫 마디가 포탄 받침에 끼어 찢어져 있었다⁠. 뼈는 무사했다⁠. 의무병이 거즈로 감싸는 동안 다슬은 이등병의 어깨에서 손을 떼지 않았다⁠.

십 분 뒤 연대장의 지프가 사격장 진입로로 들어왔다⁠. 연대장은 차에서 내리다가 문을 붙잡았다⁠. 다슬이 경례를 하러 다가갔을 때 연대장의 이마는 땀으로 젖어 있었다⁠. 10월 중순⁠, 바람이 차가운 날이었다⁠.

“⁠연대장님⁠, 괜찮으십니까⁠?⁠”

“⁠부상자는⁠?⁠”

“⁠검지 열상입니다⁠. 뼈는 무사합니다⁠. 후송합니다⁠.⁠”

연대장은 고개를 끄덕이고 앰뷸런스 쪽으로 걸었다⁠. 다섯 걸음쯤 걷다가 멈춰 서서 숨을 골랐다⁠. 다슬은 연대장의 손이 배를 누르는 것을 보았다⁠. 연대장은 손을 곧 내리고 다시 걸었다⁠. 따라온 연대 참모들은 아무도 배를 누른 손을 보지 못했다⁠. 다슬만 보았다⁠.

훈련이 끝나고 다슬은 준석에게 문자를 보냈다⁠.

「⁠연대장님 땀⁠. 배 누르심⁠. 어젯밤부터 고기 드셨대⁠. 정보과장이 그러더라⁠.⁠」

준석은 쉼터에서 솥을 젓다가 문자를 보았다⁠. 국자가 솥 바닥에 닿아 그을음 긁히는 소리가 났다⁠.

끝님이 옆에서 시금치를 무치다가 준석의 손을 보았다⁠. 준석은 국자를 놓고 앞치마 주머니에서 쪽지를 꺼냈다⁠. 「⁠오늘은 집사람이 고기를 구웠습니다⁠. 맛있었습니다⁠.⁠」 꾹꾹 눌러쓴 글씨가 주머니 속에서 일주일 동안 접혔다 펴져 보풀이 일어 있었다⁠.

“⁠사부님⁠, 그 쪽지 누가 준 기라예⁠?⁠”

“⁠경비 아저씨⁠.⁠”

“⁠경비 아저씨가 고기 묵고 맛있었다꼬예⁠?⁠”

준석은 쪽지를 다시 접었다⁠. 끝님은 시금치 무친 손을 앞치마에 닦고 준석의 휴대전화 화면을 흘끗 보았다⁠. 「⁠연대장님 땀⁠. 배 누르심⁠.⁠」 끝님의 눈이 커졌다가 천천히 작아졌다⁠. 끝님은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대신 솥에 남은 무국을 국자로 떠서 보온병 하나에 담고 뚜껑을 꼭 잠갔다⁠.

“⁠이거는 제가 경비 아저씨한테 드릴께예⁠. 엘리베이터에서 만나면⁠.⁠”

“⁠끝님 씨⁠, 그건⁠…⁠.⁠”

“⁠사부님이 주는 거 아이잖아예⁠. 제가 주는 기라예⁠. 산들이한테 손 흔들어 준 대가⁠.⁠”

준석은 대답하지 못했다⁠. 거래의 글자는 지켜졌고⁠, 거래의 뜻은 끝님의 보온병 안에서 새고 있었다⁠.

*

둘째 수요일 열한 시 반⁠, 쉼터 문이 열렸다⁠. 혜옥이 들어왔다⁠. 혼자가 아니었다⁠. 뒤에 감색 점퍼를 입은 남자 하나가 서류철을 들고 있었다⁠. 마흔쯤이었고⁠, 점퍼 가슴에 사단 마크가 박혀 있었다⁠. 1대대장 사모가 뒤를 따랐다⁠.

쉼터 안에서 밥을 먹던 사람들이 수저를 내려놓았다⁠. 끝님이 산들을 안고 일어섰다⁠.

“⁠사단 가족지원과에서 나오셨어요⁠.⁠”

혜옥이 부드럽게 말했다⁠.

“⁠관사 공용 공간에서 음식을 나눈다는 신고가 들어와서요⁠. 공용 부엌은 위생 기준이 있잖아요⁠. 여름에 탈 나면 사단까지 일이 커져요⁠. 점검 한 번만 받으시면 돼요⁠.⁠”

“⁠누가 신고했는데요⁠?⁠”

준석이 물었다⁠. 사단 담당이 서류철을 펼치며 대신 대답했다⁠.

“⁠신고자는 안 밝힙니다⁠. 시설만 보고 가겠습니다⁠. 협조해 주십시오⁠.⁠”

담당은 솥을 보고⁠, 가스레인지를 보고⁠, 조리대 밑을 보았다⁠. 끝님이 담당 뒤를 따라다니며 묻지 않은 것에 대답했다⁠. 이 솥은 서른 해 됐어예⁠, 그을음은 원래 있었어예⁠, 행주는 날마다 삶아예⁠. 담당은 대답을 들으며 서류에 무언가를 적었다⁠. 조리대를 다 본 담당이 김치냉장고 앞에서 멈췄다⁠.

“⁠이것도 열어 주십시오⁠.⁠”

준석은 열쇠 꾸러미를 꺼냈다⁠. 놋쇠 열쇠 옆에 작은 열쇠 셋이 함께 달려 있었다⁠. 혜옥이 쉼터 열쇠를 넘길 때 꾸러미째 넘겼다⁠. 첫 번째 냉장고에는 사모회 경조사용 떡이 얼려 있었다⁠. 두 번째에는 작년 김장 김치가 몇 통 남아 있었다⁠.

세 번째 냉장고의 자물쇠에 열쇠를 꽂을 때⁠, 혜옥이 처음으로 앞으로 한 걸음 나왔다⁠.

“⁠그건 김장 재료예요⁠. 열 필요 없어요⁠.⁠”

“⁠점검은 다 봐야 합니다⁠, 사모님⁠.⁠”

담당이 말했다⁠. 준석은 열쇠를 돌렸다⁠. 냉장고 뚜껑이 들리자 안에서 매운 냄새가 확 올라왔다⁠. 냉장고 안에는 비닐 포대가 차곡차곡 쌓여 있었다⁠. 서른 포대였다⁠. 포대 겉면에 붉은 고추 그림과 함께 큼직한 글자가 찍혀 있었다⁠.

「⁠영양 태양초 국산 고춧가루 · 백로관사 사모회 공동구매 · 한 근 32⁠,000원⁠」

준석은 포대 하나를 들어 올렸다⁠. 가볍게 들리지 않았다⁠. 손바닥으로 포대 겉면을 문지르자 겉봉이 조금 미끄러졌다⁠. 겉봉은 한 겹이 아니었다⁠. 안에 투명한 속봉이 하나 더 있었고⁠, 속봉에도 무언가 인쇄되어 있었다⁠. 형광등 빛에 비쳐 글자가 겉봉 너머로 희미하게 떠올랐다⁠. 국산이라는 낱말이 아니었다⁠. 다른 나라 이름이었다⁠.

준석은 포대 귀퉁이를 손톱으로 조금 뜯어 고춧가루를 손등에 털었다⁠. 혀에 대었다⁠. 단맛이 없었다⁠. 매운맛이 혀끝에서 확 올라왔다가 금세 사라졌고⁠, 뒤에 쓴맛과 먼지 맛이 남았다⁠. 영양 고춧가루는 이런 맛이 아니었다⁠. 준석이 열두 해 동안 학원에서 쓴 영양 고춧가루는 단맛이 먼저 오고 매운맛이 뒤에서 오래 남았다⁠.

사단 담당이 포대 겉면을 들여다보았다⁠. 1대대장 사모가 뒤로 반 걸음 물러섰다⁠. 혜옥은 움직이지 않았다⁠. 냉장고에서 올라오는 냉기가 혜옥의 원피스 자락을 흔들었다⁠.

“⁠이건 우리 동생네 공장에서 들여온 거예요⁠.⁠”

혜옥이 담당에게 말했다⁠. 목소리가 여전히 다정했다⁠.

“⁠해마다 쓰던 거고요⁠. 사모님들이 다 아세요⁠.⁠”

준석의 뒤에서 작은 소리가 났다⁠. 휴대전화 카메라를 켜는 소리였다⁠. 끝님이 한 손으로 산들을 안고⁠, 다른 손으로 휴대전화를 들어 냉장고 안을 겨누고 있었다⁠. 화면 속에 포대 서른 개와 겉봉 너머의 다른 나라 이름이 비쳤다⁠. 끝님의 손가락이 촬영 단추 위에 멈춰 있었다⁠.

혜옥이 끝님을 보았다⁠. 끝님도 혜옥을 보았다⁠. 끝님은 사진을 찍지 않았다⁠. 찍지 않고 버티고 있었다⁠.

“⁠끝님 씨⁠.⁠”

혜옥이 이름을 불렀다⁠. 다정한 목소리였다⁠.

“⁠구만 원⁠, 다달이 만 원씩 갚는다고 했죠⁠. 이번 달 만 원은 아직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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