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5,535자)

추석 토란국

여군 대대장의 남편이 관사촌에 이사 오자 사모님들이 긴장했다 · 탁기원

끝님은 봉투를 내려다보았다⁠. 하얀 봉투 위에 「⁠오끝님 사모 김장 회비⁠」라고 볼펜으로 반듯하게 적혀 있었다⁠. 혜옥의 글씨였다⁠. 끝님은 봉투에 손을 대지 않았다⁠. 대신 손을 들어 눈가를 소매로 한 번 훔쳤다⁠.

“⁠사모님⁠. 석 달 회비 구만 원⁠, 제가 갚을께예⁠.⁠”

“⁠갚을 필요 없다니까요⁠.⁠”

“⁠갚을께예⁠. 다달이 만 원씩⁠. 아홉 달⁠.⁠”

임원들 가운데 누군가 숨을 짧게 들이쉬었다⁠. 웃음이 터질 뻔한 소리였다⁠. 끝님은 웃음 섞인 숨소리에도 고개를 들고 있었다⁠.

“⁠김장은 안 해도 돼예⁠. 근데 조원 얘기는 없던 걸로 못 합니더⁠. 사부님한테 밥 배우는 것도 계속할 깁니더⁠.⁠”

끝님은 봉투를 탁자 위에 그대로 두고 돌아섰다⁠. 쉼터 문을 밀고 나오다가 문틈에 선 준석과 눈이 마주쳤다⁠. 끝님은 아무 말 없이 산들을 받아 안았다⁠. 산들이 엄마 목에 얼굴을 묻었다⁠. 둘이 복도 끝 계단으로 사라지는 동안 쉼터 안에서는 의자 하나 움직이는 소리도 나지 않았다⁠.

혜옥이 문가로 나와 준석을 보았다⁠. 화가 난 얼굴이 아니었다⁠. 혜옥의 얼굴은 더 다정해져 있었다⁠.

“⁠준석 씨⁠. 끝님 씨가 다달이 만 원씩 갚으면⁠, 그 만 원은 산들이 분유값이에요⁠. 아시죠⁠?⁠”

*

추석 연휴 첫날 아침⁠, 다슬은 새벽 다섯 시에 전화를 받고 나갔다⁠. 텔레비전 화면 아래로 속보 자막이 흘렀다⁠. 북쪽이 동해로 탄도 미사일을 쏘았다는 소식이었다⁠. 국방부는 전군에 경계 태세를 높였다⁠. 화면 속 기자는 「⁠휴전선 인근 부대들이 추석 연휴 비상 대기에 들어갔다⁠」고 했다⁠.

다슬은 현관에서 군화 끈을 묶으며 짧게 말했다⁠.

“⁠연휴 내내 부대⁠. 시댁엔 셰프가 전화해⁠.⁠”

“⁠어머니가 송편 부쳐 주신대⁠.⁠”

“⁠택배로 받아⁠. 내 몫까지 먹어⁠.⁠”

문이 닫히고 군화 소리가 계단을 내려갔다⁠. 준석은 베란다로 나가 관사촌 주차장을 내려다보았다⁠. 새벽 어스름 속에서 자동차 문 닫히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났다⁠. 대대장⁠, 포대장⁠, 참모⁠, 중위들⁠. 남편들이 차례로 차에 올라 정문으로 빠져나갔다⁠. 트렁크에 고향 갈 짐을 싣다 말고 다시 내리는 집도 보였다⁠.

아홉 시가 되자 단톡방에 공지가 올라왔다⁠. 끝님이 캡처해 보냈다⁠.

「⁠추석 비상 대기로 고생하시는 남편분들 대신 우리끼리 추석 지내요⁠. 25일 낮 열두 시 101동 쉼터⁠. 차례상 함께 차리고 점심 같이 합니다⁠. 연대장님께서 잠깐 들르십니다⁠. 한 집도 빠짐없이 오시기 바랍니다⁠.⁠」

「⁠한 집도 빠짐없이⁠」에 굵은 글씨가 들어가 있었다⁠. 끝님은 캡처 아래에 한 줄을 달았다⁠.

「⁠사부님 우리도 가야 돼예⁠?⁠」

준석은 답하지 않고 냉장고 문을 열었다⁠. 토란 한 상자가 들어 있었다⁠. 시장 반찬가게 사장이 추석 앞이라고 덤으로 얹어 준 상자였다⁠.

*

연휴에 관사촌에 남은 집은 열한 집이었다⁠. 나머지는 남편 없이도 시댁이나 친정으로 내려갔다⁠. 남은 열한 집에는 저마다 까닭이 있었다⁠. 아이가 수험생이거나⁠, 시댁과 사이가 나쁘거나⁠, 내려갈 차비가 없거나⁠, 내려가 봐야 아무도 반기지 않거나⁠.

준석은 열한 집을 다 알지 못했다⁠. 끝님이 알았다⁠. 끝님은 산들을 업고 관사촌을 한 바퀴 돌며 불 켜진 창을 세어 왔다⁠. 끝님의 메모장에 새 줄이 생겼다⁠. 「⁠103동 3층 군의관님 댁 — 사모님 혼자⁠, 입덧⁠. 104동 2층 — 대위님 댁 아들 고삼⁠. 102동 맞은편 — 인사과장님 댁⁠, 사모님 다리 깁스⁠.⁠」

“⁠맞은편이 인사과장 댁이었어요⁠?⁠”

“⁠예⁠. 맨날 문에 귀 대고 있는 집⁠.⁠”

“⁠다리 깁스는 언제부터요⁠?⁠”

“⁠한 달 됐어예⁠. 그래서 맨날 집에 있는 기라예⁠. 귀 대는 거 말고는 할 게 없어서⁠.⁠”

준석은 토란을 깠다⁠. 토란 껍질에서 나오는 진이 손을 가렵게 했다⁠. 준석은 장갑을 끼지 않고 소금물에 손을 담가 가며 깠다⁠. 가려운 손으로 토란을 까야 토란이 손에 붙어 덜 미끄러웠다⁠. 학원 수강생들에게도 그렇게 가르쳤고⁠, 수강생들은 다 장갑을 꼈다⁠.

토란국은 들깨를 갈아 넣고 소고기 양지로 국물을 냈다⁠. 하얀 국이라 냄새가 복도로 덜 나갔다⁠. 전은 동태전과 애호박전을 부쳤다⁠. 끝님이 계란 물 입히는 일을 맡았다⁠. 끝님이 입힌 동태는 계란이 한쪽으로 몰렸지만⁠, 몰린 쪽이 노릇하게 부풀어 보기에는 오히려 좋았다⁠.

“⁠사부님⁠, 이거 열한 집 다 돌려예⁠?⁠”

“⁠가고 싶은 집만요⁠. 쉼터 가실 분들은 쉼터 가셔야죠⁠.⁠”

준석은 통 열한 개에 국과 전을 나눠 담고⁠, 쇼핑백 열한 개를 거실 바닥에 늘어놓았다⁠. 쇼핑백마다 끝님이 사인펜으로 동과 호수를 적었다⁠. 시간은 열한 시 반이었다⁠. 쉼터 모임은 열두 시였다⁠. 준석은 앞치마를 벗지 않은 채 쇼핑백을 들었다⁠.

*

101동 앞마당에서 혜옥과 마주쳤다⁠. 혜옥은 쉼터로 내려가는 계단 입구에 서서 큰 대나무 바구니를 두 손으로 들고 있었다⁠. 바구니 위에 하얀 면포가 덮여 있었고⁠, 면포 아래로 송편 냄새가 났다⁠. 솔잎 냄새였다⁠.

준석의 양손에는 쇼핑백 여섯 개씩이 들려 있었다⁠. 끝님은 산들을 업고 남은 쇼핑백을 들었다⁠. 셋이 서로를 보았다⁠. 열두 시까지 이십 분이 남아 있었다⁠.

“⁠준석 씨⁠. 같이 내려가요⁠. 자리 마련해 뒀어요⁠. 가족 대표 자리⁠.⁠”

“⁠배달부터 하고요⁠.⁠”

“⁠배달이요⁠?⁠”

혜옥이 쇼핑백 하나에 적힌 글씨를 읽었다⁠. 「⁠103-3 군의관⁠」 혜옥의 눈이 가늘어졌다⁠.

“⁠군의관님 사모님은 입덧이 심해서 오늘 못 오신다고 했어요⁠. 다 알아요⁠. 내가 오후에 따로 들고 갈 거예요⁠.⁠”

“⁠그럼 사모님 거랑 제 거랑 두 개 드시겠네요⁠. 입덧할 때는 먹을 수 있는 게 하나라도 있으면 다행이에요⁠.⁠”

“⁠준석 씨⁠.⁠”

혜옥은 바구니를 내려놓지 않았다⁠. 바구니를 든 팔이 떨리지 않았다⁠. 서른 해 동안 바구니를 들어 온 팔이었다⁠.

“⁠관사에서 추석은 다 같이 지내는 거예요⁠. 남편들이 전방에 있는 날⁠, 집집이 따로 문 닫고 있으면 무슨 일이 나도 몰라요⁠. 작년에 한 집에서 사모님이 혼자 쓰러졌는데 사흘 뒤에 알았어요⁠. 그래서 모이는 거예요⁠. 반찬을 문고리에 걸고 가는 게 아니라⁠.⁠”

준석은 처음으로 대답할 말을 찾지 못했다⁠. 혜옥의 말이 맞았다⁠. 문고리에 걸어 둔 쇼핑백은 쓰러진 사람을 일으키지 못했다⁠.

계단 아래 쉼터 문이 열리고 사람들이 하나둘 올라왔다⁠. 각자 반찬 그릇을 들고 쉼터로 내려가던 부인들이 계단 입구에서 걸음을 멈췄다⁠. 혜옥과 준석 사이에 쇼핑백 열한 개와 대나무 바구니 하나가 놓여 있었다⁠. 정보과장 사모가 맨 뒤에서 올라왔다⁠. 손에 아무것도 들고 있지 않았다⁠.

혜옥이 정보과장 사모를 불렀다⁠.

“⁠정보과장님 사모님⁠, 마침 잘 오셨어요⁠. 연대장님 오시면 정보과장님 대신 인사 좀 드려 주세요⁠. 정보과장님이 요즘 회식 자리에서 연대장님 옆에 계속 계시잖아요⁠. 사모님도 옆에 계셔야죠⁠.⁠”

정보과장 사모가 준석을 보았다⁠. 준석의 손에 들린 쇼핑백 가운데 하나에 「⁠101-6 정보과장⁠」이라고 적혀 있었다⁠. 사흘째 현관 손잡이에 매달려 있던 하얀 콩나물국의 집이었다⁠. 정보과장 사모는 쇼핑백을 한참 보았다⁠. 사람들이 정보과장 사모를 보았다⁠.

정보과장 사모가 손을 내밀었다⁠. 준석의 쇼핑백을 받았다⁠. 사람들 앞에서였다⁠.

“⁠사모님⁠. 이건 남편 거예요⁠. 남편이 연휴 내내 부대에서 연대장님 모시고 술을 마셔요⁠. 아침마다 이걸 마시고 출근해요⁠. 사흘 동안 이거 아니면 못 일어났어요⁠.⁠”

정보과장 사모는 쇼핑백을 가슴에 안고 혜옥에게 고개를 숙였다⁠. 그러고는 쉼터 계단으로 내려갔다⁠. 쉼터 모임에는 갔다⁠. 다만 손에 준석의 쇼핑백을 든 채로 갔다⁠.

혜옥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혜옥의 웃음이 처음으로 끝을 끌지 않고 짧게 끊겼다⁠.

*

25일 오후 준석의 통은 일곱 집 냉장고로 들어갔다⁠. 군의관 사모는 토란국을 두 숟가락 먹고 처음으로 속이 편하다며 사진을 보내왔다⁠. 고삼 아들이 있는 대위 집에서는 아들이 동태전을 다 먹었다며 빈 통에 볶은 땅콩을 담아 왔다⁠. 인사과장 사모는 깁스한 다리로 현관문을 열고 쇼핑백을 받더니 준석을 오래 보았다⁠.

“⁠맞은편에서 다 들었어요⁠. 처음부터⁠.⁠”

“⁠윤 중위님 왔던 날도요⁠?⁠”

“⁠그날 제일 잘 들렸어요⁠.⁠”

인사과장 사모는 웃지도 않고 말했다⁠. 통을 받아 들고 문을 닫기 전에 한마디를 보탰다⁠.

“⁠우리 남편이 인사과장이에요⁠. 진급 서류 다 거쳐 가요⁠. 말 조심하세요⁠, 준석 씨⁠. 나한테 말고⁠, 복도에서⁠.⁠”

쉼터 모임이 끝났을 때 끝님이 들은 이야기를 전했다⁠. 연대장은 열두 시 반에 들렀다가 오 분 만에 나갔다⁠. 차례상에 절을 하고 부인들에게 고생한다고 한마디 하고 나갔다⁠. 혜옥이 송편을 권했는데 받지 않았다⁠. 혜옥이 토란국을 따로 끓여 왔는데 그것도 받지 않았다⁠.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혜옥은 웃으며 국그릇을 도로 덮었다⁠.

“⁠사모님 토란국도 들깨 넣었는데예⁠. 쪼매 봤어예⁠. 사부님 거랑 비슷했어예⁠.⁠”

끝님이 말했다⁠. 준석은 행주로 조리대를 닦으며 연대장이 받지 않은 국그릇을 생각했다⁠. 윤 중위가 말한⁠, 간부식당에서 그대로 내놓는 식판도 생각했다⁠.

*

밤 열 시에 다슬이 전화를 걸어왔다⁠. 수화기 너머로 무전기 소리와 누군가 상황판을 두드리는 소리가 섞여 들렸다⁠. 다슬의 목소리는 낮에 나갈 때보다 한 층 쉬어 있었다⁠.

“⁠북쪽은 조용해⁠. 근데 연휴 끝날 때까지는 못 나가⁠. 병사들이 송편 얘기만 해⁠. 취사장에서 송편 대신 떡국 떡을 쪄 줬대⁠.⁠”

“⁠전 남았어⁠. 동태전 서른 장⁠.⁠”

“⁠서른 장 갖고 대대 못 먹여⁠. 당직 병사 열두 명⁠.⁠”

“⁠그럼 열두 명 몫 부칠게⁠. 내일 아침에 위병소에 맡기면 돼⁠?⁠”

다슬이 잠깐 말이 없었다⁠. 무전기에서 누군가 숫자를 부르는 소리가 났다⁠.

“⁠셰프⁠. 낮에 쉼터 앞에서 사모님하고 붙었다며⁠.⁠”

“⁠누가 그래⁠?⁠”

“⁠정보과장이⁠. 술 냄새 대신 콩나물 냄새 풍기면서 그러더라⁠. 사모님한테 이긴 거 처음 봤대⁠.⁠”

“⁠이긴 거 아니야⁠. 사모님 말이 맞는 데가 있었어⁠. 문고리에 거는 걸로는 쓰러진 사람 못 일으켜⁠.⁠”

다슬은 대답 대신 짧게 웃었다⁠. 웃음 끝에 목소리가 다시 대대장으로 돌아왔다⁠.

“⁠동태전⁠, 연대 상황실에도 열 장 보내⁠. 연대장님 계셔⁠. 이름 쓰지 말고⁠, 2대대에서 보냈다고만⁠.⁠”

“⁠연대장님은 안 드신다며⁠.⁠”

“⁠안 드시니까 보내는 거야⁠. 안 받으시면 상황병들이 먹어⁠.⁠”

전화를 끊고 준석은 다시 계란을 풀었다⁠. 밤 열한 시가 넘도록 부엌 환풍기가 돌았다⁠. 동태전 스물두 장이 식힘망 위에 줄지어 놓였다⁠. 맞은편 집 현관 안쪽에서 깁스한 다리가 바닥에 닿는 소리가 났다가 멀어졌다⁠.

*

자정이 조금 넘어 초인종이 울렸다⁠. 다슬이면 비밀번호를 눌렀을 것이었다⁠. 끝님이면 문자를 먼저 보냈을 것이었다⁠. 준석은 불 끈 부엌에서 나와 현관 렌즈로 밖을 보았다⁠.

복도에 마른 남자가 서 있었다⁠. 쉰다섯쯤 되어 보였고⁠, 회색 트레이닝복에 슬리퍼를 신고 있었다⁠. 머리는 짧게 깎았는데 정수리가 하얗게 셌다⁠. 남자는 초인종을 한 번 누르고 나서 맞은편 인사과장 집 현관을 돌아보았다⁠. 맞은편 문은 조용했다⁠.

준석은 문을 열었다⁠. 남자의 얼굴은 낮에 텔레비전에서 본 적이 있었다⁠. 지역 방송 추석 위문 보도에서 백로연대 연대장으로 나온 얼굴이었다⁠. 화면에서보다 볼이 더 꺼져 있었다⁠.

연대장은 준석에게 경례하지 않았다⁠. 고개를 조금 숙였다⁠. 숙인 고개를 들기 전에 목소리부터 나왔다⁠. 낮고 쉰 목소리였다⁠.

“⁠2대대장 남편분이시죠⁠. 늦은 시간에 죄송합니다⁠.⁠”

연대장은 숨을 한 번 고르고⁠, 맞은편 문을 한 번 더 돌아보고 나서 말했다⁠.

“⁠낮에 정보과장이 마시던 하얀 국 말입니다⁠. 그 토란국⁠, 남았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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