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화(5,120자) · 연희 · 사월 보름
산문 밖 샘
목욕탕 장부의 이름들 · 백해원
만 19세 이상 이용가
사월 열나흘 아침, 샘가에 물지게보다 사람이 많았다. 물 긷는 차례를 셈 노인이 밤새 새로 짰다. 찬탕은 탕 물이 너무 뜨겁다며 찬물을 뜨러 나왔고, 두 수건은 헹굴 빨래를 광주리째 이고 나왔고, 부엌어멈은 나물을 씻는다며 바구니를 들고 나왔다. 더운탕은 핑계를 못 찾아 그냥 따라 나왔다. 산문에서 쇠돌이 나무토막에 금을 긋다가 열한 번째에서 막혀 뒤집었다.
샘 돌확에 아침 해가 비스듬히 들어와 물 밑 자갈이 하나하나 보였다. 물 위로 김 대신 찬 기운이 얇게 떠 있었고, 쇳내가 콧속을 싸하게 긁었다. 벼랑 아래 계곡에서 물소리가 올라와 사람 목소리를 반쯤 덮었다. 그게 좋았다. 산문 안까지는 안 들릴 것이다.
연희는 셈 노인 곁에 섰다. 품에서 패를 꺼냈다. 제가 들 이름이었다. 소리 내어 읽었다.
“춘보.”
노인이 물동이를 내려놓았다. 한참 입술만 달싹이다가 제 무릎을 짚고 섰다.
“다시.”
“춘보 영감님.”
“…오냐.”
노인의 눈가가 경련하듯 떨렸다. 그러고는 손가락을 하나 접었다.
“뭘 세세요?”
“스물두 해 만에 불린 거. 하나.”
그다음은 연희가 패를 받아 하나씩 읽어 주었다. 읽는 것은 연희였고, 부르는 것은 패를 쥔 사람이었다. 큰수건이 제 오른쪽, 큰지게의 패를 내밀었다. 연희가 읽었다.
“덕쇠.”
샘가가 조용했다가 터졌다. 큰수건이 배를 잡고 웃었다. 부엌어멈이 나물 바구니를 떨어뜨렸다. 큰지게가 얼굴이 벌게져서 소리쳤다.
“왜 웃소! 덕쇠가 어때서!”
“아니, 덕이 쇠래.” 큰수건이 눈물을 닦았다. “덕쇠야!”
“오냐!”
큰지게가 성내며 대답했다. 대답이 너무 커서 벼랑 아래 계곡이 오냐, 오냐, 하고 한 번 되받았다. 그러고 나서 큰지게는 성낸 얼굴 그대로 가만히 섰다. 제 가슴을 둥, 둥 두 번 쳤다. 북소리가 아니라 다른 소리였다. 덕쇠가 큰수건을 돌아봤다. 이번엔 큰수건 차례였다. 덕쇠 손에 들린 패를 연희가 읽었다.
“분이.”
“분이야.”
덕쇠가 그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가 생각보다 낮았다. 큰수건은 웃다가 멈췄다. 노름꾼 영감 대신 떡 좋아하는 물지게가 제 이름을 처음 불렀다. 큰수건은 대답을 못 하고 고개만 끄덕였다. 앞치마 끈을 쥔 손마디가 하얘졌다.
막동, 말순, 월이. 하나씩 샘가에 이름이 났다. 작은수건 차례가 오자 연희는 제 패를 받아 들었다. 제 이름을 제 입으로 읽어 주는 것은 부르는 것이 아니었다. 그래도 목이 막혔다.
“연희.”
작은수건이 입속으로 따라 했다. 한 번, 두 번. 그러고는 연희를 보고 처음으로 소리를 냈다.
“연희 언니.”
“응.”
대답하고 나니 발끝이 조금 가벼웠다. 산 쪽이 아니라 산 아래쪽으로 몸이 한 뼘 기우는 것 같았다.
마지막이 개동이었다. 개동은 패를 두 손으로 쥐고 연희를 올려다봤다. 연희가 읽었다.
“차돌.”
개동이 곰보지게를 봤다. 곰보지게는 물동이 곁에 쪼그려 앉아 있었다.
“차돌이 형!”
“…”
“차돌이 형!”
“…오냐, 개동아.”
곰보지게가 개동의 이름을 불렀다. 곰보지게 손에는 개동의 패가 쥐어져 있었다. 한 바퀴를 도는 동안 연희가 제일 먼저 읽어 준 패였다. 개동은 그때 제 이름이 처음 불리는 소리를 듣고도 대답을 못 했었다. 형 이름을 부를 차례만 기다리느라 제 이름이 불린 줄도 몰랐던 것이다. 둥글게 앉으면 끝이 없다고 셈 노인이 말했었다. 맨 마지막 사람이 부르는 이름은 맨 처음 불린 사람 몫이었다. 한 바퀴가 닫히자 샘가 열 사람이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숨을 내쉬었다.
*
쇠돌이 샘가로 뛰어 내려온 것은 그때였다. 나무토막 네 면이 금으로 꽉 차서 더 셀 데가 없자 이상하다고 여긴 것이다. 쇠돌 뒤로 탁문경이 천천히 내려왔다. 초록 유리 등을 들고 있지 않은 원주는 처음이었다. 낮에 보니 얼굴에 잔주름이 많았다.
“손에 든 거 내놓으시오.”
아무도 움직이지 않았다. 쇠돌이 개동 손에서 패를 비틀어 뺐다. 개동이 매달렸다가 떨어져 엉덩방아를 찧었다. 쇠돌이 패를 샘가 바위에 내리쳤다. 소나무 패가 두 쪽이 났다. 쇠돌은 다음 패로 손을 뻗었고, 덕쇠가 제 패를 입에 물었다. 쇠돌이 덕쇠 턱을 잡고 흔들었다. 덕쇠는 이가 하나 흔들린다던 것도 잊고 패를 물고 버텼다.
“계를 깼으니 열 사람 다 한 섬씩이오.” 탁문경이 말했다. 목소리는 여전히 부드러웠다.
연희가 앞으로 나섰다. 발밑에서 샘물이 넘쳐 흙이 질척였다.
“원주 어른 계는 안에서 묻지도 말하지도 말라는 거였어요. 여기는 산문 밖이에요. 안에서 부르면 안에 묶인다고, 그래서 묻지 않는 게 자비라고 하셨잖아요. 밖에서 부르는 건요? 밖에서 부르면 밖으로 기운다는 건 왜 말씀 안 하셨어요?”
샘가가 조용해졌다. 계곡 물소리만 올라왔다. 탁문경의 입가가 한 번 굳었다가 풀렸다.
“아궁이는 셈이 빠르구먼. 그런데 셈 하나를 빼먹었소. 내일이 보름이오. 곰보지게 이름이 돌아오든 말든, 개경 수레는 오오. 문서에는 이미 곰보지게라고 적혀 있소.” 원주가 부서진 패를 발끝으로 밀어 샘물에 빠뜨렸다. “그리고 막내지게는 산문 밖에서 날뛰었으니, 기한 한 해를 더하오.”
개동이 엉덩방아를 찧은 채로 원주를 올려다봤다. 입술이 파랬다.
“부서져도 돼요.” 개동이 말했다. 목소리가 갈라졌다. “외웠어요.”
원주가 산문으로 올라간 뒤, 열은 샘가에 남아 물을 길었다. 물을 긷는 척하면서 입속으로 이름을 굴렸다. 패는 여섯이 부서졌고 넷이 남았다. 덕쇠는 입에 물고 있던 패를 퉤 뱉어 소매에 닦았다. 이빨 자국이 넷 나 있었다.
“이제 떡 소리는 안 하오.” 덕쇠가 말했다. “이게 떡보다 질기오.”
셈 노인이 차례를 불렀다. 이번에는 패 없이였다. 오른쪽 사람을 보고, 이름을 대고, 대답을 듣는다. 한 바퀴에 열이 불렸다. 두 바퀴째에는 셋이 막혔다. 막힌 사람 옆 사람이 입 모양으로 첫 소리를 일러 주었다. 세 바퀴째에는 아무도 안 막혔다. 노인이 손가락을 셋 접었다.
“외운 게 서른이오. 열 이름을 세 번.”
“영감님, 서른 번 불렀으니까 서른 겹 두꺼워졌어요?”
“그건 모르겠고, 서른 번 대답한 건 확실하오.”
물동이를 지고 산문을 넘을 때 연희는 입을 꼭 다물었다. 모두가 그랬다. 문턱 안쪽에서는 이름이 한 마디도 새지 않았다. 쇠돌이 새 나무토막을 들고 서서 그 얼굴들을 차례로 봤다. 들어가는 얼굴이 나올 때 얼굴과 달랐다. 쇠돌은 그걸 셀 줄 몰랐다.
*
그날 밤 개동은 잠을 못 잤다. 물지게 방 구석에 누워 천장 널판 틈을 봤다. 입 안에서 두 음절이 굴렀다. 뱉으면 안 되었다. 여기는 안이었다. 안에서 부르면 형 이름이 안으로 기운다. 개동은 입술을 깨물었다. 피 맛이 났다. 그래도 머릿속으로는 불렀다. 머릿속은 안도 밖도 아니었다.
바로 옆에서 곰보지게가 돌아누웠다. 형도 안 자고 있었다. 형의 숨소리가 개동 뒤통수에 닿았다. 형이 뭔가 말하려다 삼키는 소리가 났다. 개동은 형도 입 안에서 무언가를 굴리고 있다는 걸 알았다. 제 이름일 것이다. 둥글면 끝이 없다.
*
보름 아침, 산문 앞에 수레가 서 있었다. 소 두 마리가 끄는 수레였고, 마종이 가마에서 내려 그 곁에 섰다. 원주는 곰보지게를 장부실로 불렀다. 기한 날의 일은 장부실에서 했다. 서기가 줄 끝에 還을 적고, 본인이 손을 얹는다.
쇠돌이 물지게 방 문 앞을 막아섰다. 개동은 방 안에 갇혔다. 연희는 아궁이채에 갇혔다. 원주는 셈을 빼먹는 사람이 아니었다.
아궁이채 문에는 밖에서 빗장이 질렸다. 연희는 열두 아궁이 사이를 오갔다. 불을 볼 수밖에 없었다. 여섯째 아궁이 불이 누렇게 가라앉아 있어서 장작을 밀어 넣었다. 흰빛이 오르는 동안 벽 너머로 탕채의 소리를 들었다. 발소리 몇, 장부실 문 여닫는 소리, 마종의 부채 펴는 소리. 연희는 아궁이 앞에 쪼그려 앉아 두 손을 깍지 꼈다. 땀이 손가락 사이로 흘렀다. 불 앞이라 흐르는 땀이 아니었다. 샘에는 지금 아무도 없었다. 부를 사람이 산문 밖에 하나도 없으면 이름은 안 돌아온다.
하람이 붓을 들었다. 곰보지게 줄 끝에 還 한 자를 적었다. 먹이 종이에 스몄다. 곰보지게가 떨리는 손을 그 위에 얹었다.
그때 산문 밖에서 소리가 났다. 담장 너머, 샘 쪽이었다.
“차돌이 형!”
개동이었다. 물지게 방 봉창을 뜯고 뒷담을 넘은 것이다. 담 너머 벼랑길을 돌아 샘에 선 것이다. 쇠돌이 문 앞에서 뒤를 돌아봤다. 방은 비어 있었고, 뜯긴 봉창 틈으로 아침 볕이 비스듬히 들어와 흙바닥에 떨어진 문종이 조각을 비추고 있었다. 쇠돌은 그 조각을 세려다 말고 입을 벌린 채 서 있었다.
“차돌이 형! 대답해!”
곰보지게가 장부 위에 손을 얹은 채 고개를 들었다. 입이 열렸다.
“오냐!”
종이가 따뜻해졌다. 하람이 보았다. 차돌이라는 두 자가 종이 결 속에서 떠올라 가장자리부터 옅어졌다. 먹빛이 잿빛이 되고, 잿빛이 종이 빛이 되었다. 곰보지게, 아니, 차돌이 손을 떼며 휘청였다. 원주가 그의 팔을 잡았는데, 차돌은 그 팔을 뿌리치고 입을 열었다.
“나는 차돌이오. 예성강 아래 밤골 김 서방네 둘째 차돌이오. 어미 이름은 막례요. 뒷산에 밤나무가 백 그루요.”
말이 한꺼번에 쏟아졌다. 방 밖에 선 마종이 그 소리를 들었다. 마종은 수레를 봤다가 원주를 봤다.
“제 마을과 어미 이름을 대는 양인을 수레에 태우면, 요즘 개경 공기로는 시끄럽소.” 마종이 부채를 접었다. “오늘은 한 사람 빠졌다 칩시다. 원주 어른, 셈을 다시 해 보시오.”
차돌은 해가 넘어가기 전에 산문을 나갔다. 발이 돌아서지 않았다. 샘가에서 개동이 그 앞을 막아섰다. 둘은 한참 서로 이름을 불렀다. 산문 밖이었다.
그날 저녁 원주는 개동의 장생고 줄에 한 해를 더 적었다. 빗장이 풀린 아궁이채 문으로 연희가 나오자, 하람이 장부실 앞 평상에 앉아 있었다. 초록 유리 등 아래라 얼굴이 푸르스름했다.
“돌아갔습니다. 차돌.” 하람이 장부를 펼쳐 보였다. 줄 끝 還 자 곁, 이름이 있던 자리에 오목한 붓 자국만 남아 있었다. “열이 부른 이름 가운데 하나가 나갔습니다.”
“막내지게는요?”
“한 해 늘었습니다.”
연희는 평상 끝에 앉았다. 옷에서 송진 냄새가 났다. 한 해는 개동의 몫이었다. 그 아이가 담을 넘은 값이었다. 연희는 그 값을 대신 질 수 없다는 것을 알았고, 그래서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벽 너머 물지게 방에서 개동이 코를 고는 소리가 났다. 한 해가 늘어난 아이가 그 집에서 제일 먼저 잠들어 있었다. 코 고는 소리가 유난히 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