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5,227자) · 단향 · 사월 초이틀
옅어진 한 줄
이름을 맡기면 일자리를 주는 목욕탕 · 백해원
원주의 거처는 온수각 아래채였다. 탕채보다 지붕이 한 뼘 높았고, 방바닥은 아궁이 열둘 가운데 맨 끝 아궁이의 열을 끌어다 데웠다. 단향은 그 방에 들어갈 때마다 발바닥이 먼저 더웠다. 온수각에서 방바닥이 따뜻한 방은 그 방 하나였다.
삼월 스무닷새 밤, 단향은 장부를 두 손으로 받쳐 들고 그 방 문턱을 넘었다. 탁문경은 등잔 둘을 켜 놓고 앉아 있었다. 장부실은 등잔이 하나였고 원주 방은 늘 둘이었다. 단향은 예순한 해 동안 그 차이를 세 본 적이 없었는데, 그날은 셌다. 아궁이라면 셌을 것 같아서였다.
“뒤쪽을 펴 보시오.”
단향은 뒤쪽 묶음을 폈다. 맨 아래, 사 년 전 줄. 강목이라는 두 글자가 거기 있었는데, 먹빛이 달랐다. 옆줄의 이름들은 검게 가라앉아 있는데 그 두 자만 물에 한 번 헹군 것처럼 잿빛으로 옅어져 있었다. 가장자리는 종이 결 속으로 스며 번져 나갔고, 가운데 획은 거의 비어 있었다. 등잔 불빛을 비스듬히 받자 글자가 있던 자리에 오목한 붓 자국만 남은 게 보였다.
탁문경이 손가락 끝으로 그 자리를 쓸었다. 먹이 묻어나지 않았다.
“누가 불렀소?”
“나루의 아이가 불렀답니다. 그 사람 딸입니다.”
“딸이 아비 이름을 어떻게 아오? 사 년 동안 널이었는데.”
단향은 대답하지 않았다. 원주는 대답을 기다리지 않았다.
“아궁이가 가르쳤겠지. 아궁이는 그 이름을 어디서 봤겠소? 이 방 말고 이 장부를 펼 수 있는 방이 어디요?”
“장부실 청소는 원주 어른께서 아궁이 몫으로 정하셨습니다.”
탁문경이 단향을 봤다. 오래 봤다. 그러고는 부드럽게 웃었다.
“서기가 말대꾸를 다 하는구먼. 예순한 해 만에 처음이지?” 원주가 장부를 덮었다. 덮는 손이 조용했다. “서기, 당신이 왜 여기 있는지 아오? 기한이 없어서가 아니오. 당신 이름이 이 안에서 불렸기 때문이오. 묵재 영감이 날마다 불렀지. 그 영감이 가고 나서 아무도 안 부르는데도 당신 이름은 아직 이 안에 기울어 있소. 그러니 당신은 여기 있소. 서기 자리를 누가 당신한테 맡겼는지 잊지 마시오.”
“잊은 적 없습니다.”
“그러면 됐소. 아궁이 쉬는 날은 기한까지 없소. 쇠돌을 산문에 세우겠소. 그리고 보름에 개경에서 손님이 오오.”
*
단향은 장부실로 돌아와 등잔을 켜고 앉았다. 원주 방에서 옮겨 온 온기가 발바닥에서 빠져나가는 동안 그는 묵재를 떠올렸다.
예순한 해 전 을사년 봄, 단향은 열아홉이었다. 아비가 절 장생고에서 보리 열 섬을 꾸었고, 갚을 길이 없어 아들을 석 달 보냈다. 그때 장부실 서기가 묵재였다. 등이 굽은 노인이었고 먹을 갈 때 혼잣말을 했다. 단향은 첫날부터 먹 가는 일을 맡았는데, 노인은 날마다 이름을 불렀다.
“단향아, 먹이 너무 묽다.”
“단향아, 등잔 기름 좀 부어라.”
“단향아, 너는 손이 곱다. 글씨를 배워라.”
노인은 외로웠다. 식구가 다 홍수에 쓸려 갔다고 했다. 그래서 날마다, 하루에도 몇 번씩, 곁에 있는 아이의 이름을 불렀다. 그 부름에 악의는 한 방울도 없었다. 석 달이 끝나는 날 단향은 장부 앞에 섰고, 노인이 줄 끝에 글자를 적었고, 단향이 손을 얹었다. 이름은 돌아왔다. 이름은 돌아왔는데 해가 넘어가자 발이 산문 안으로 돌아섰다. 이름이 이 안으로 너무 많이 기울어 있었다.
노인은 그날 밤 장부실 바닥에 이마를 대고 울었다. 그다음부터 묵재는 단향을 부르지 않았다. 아가, 너, 이보게. 스무 해를 그렇게 부르다가 죽었다. 단향은 노인의 붓과 장부를 물려받았다. 서기는 기한이 없었다. 누군가 이 장부를 대신 들 때까지는.
그는 붓을 들었다 놓았다. 노인의 목소리가 떠올랐다. 먹이 너무 묽다고 할 때 끝을 조금 올리던 소리, 기름을 부으라고 할 때 목에서 쉰 숨이 섞이던 소리. 그 소리 끝에 붙어 있던 두 음절이 있었다. 앞은 목구멍을 열고 뒤는 입술을 닫는 소리, 하아, 람이었다. 단향은 등잔 앞에서 입술을 닫았다. 제 이름은 제가 불러도 어디로도 기울지 않는다. 그래도 노인 목소리로 들은 그 소리는 예순한 해가 지나도 귀 안에 그대로 있었다. 그는 등잔 불을 오래 보았다. 눈이 따가웠는데 연기 탓이 아니었다.
*
이튿날부터 쇠돌이 산문에 섰다. 원주는 쇠돌에게 목침만 한 나무토막을 주고 드나드는 사람을 거기 칼로 금 그어 세라고 했다. 쇠돌은 금을 열 개까지 긋고는 막혔다. 열한 번째 사람이 지나가자 나무토막을 뒤집어 반대쪽에 다시 하나부터 그었다.
셈 노인이 산문 기둥 곁 제 자리에 앉아 그걸 지켜봤다.
“자네 그러면 스물하나가 오면 어쩔 텐가?”
“옆면이 있소.”
“스물다섯이 오면?”
“그럼 밑면이 있소.”
“서른이면?”
쇠돌이 나무토막을 한참 돌려 보다가 노인을 노려봤다. 노인은 제가 이긴 수를 입속으로 하나 보탰다. 단향은 물동이를 지고 올라오는 물지게들 틈에서 그 둘을 보았다. 웃음이 났다. 소리 없이 웃는 법은 예순한 해 동안 익혔다.
아궁이는 그날 새벽부터 쇠돌을 한 번도 보지 않았다. 불만 봤다. 아궁이채 문을 지나가다 보니 열두 아궁이 불빛이 전부 흰빛이었다. 누런 불이 하나도 없었다. 아궁이가 화가 나면 불이 잘 오르는 모양이었다. 단향은 그것을 장부에 적지 않았다. 적을 칸도 없었다.
*
사월 초이틀 낮, 개경에서 손님이 먼저 왔다. 보름에 온다던 사람이 열사흘을 앞당겨 왔다. 심 시중 댁 집사 마종이었다. 마흔쯤이었고, 모시 두루마기 소매가 넓었다. 나루에서 가마를 타고 올라왔다고 했는데 가마꾼 넷이 산문 앞에 주저앉아 한참 숨을 몰아쉬었다.
단향은 원주 방에 차를 들였다. 마종은 차를 한 모금 마시고 찻잔을 들여다봤다.
“금이 갔구먼. 온수각은 찻잔도 오래 쓰오?”
“서기 방 찻잔입니다. 원주 방 것은 성합니다.” 탁문경이 대답했다.
마종이 웃었다. 소매에서 종이를 꺼내 펼쳤다. 이름 대신 별칭이 줄줄이 적힌 노비 문서였다. 물지게, 부엌, 찬탕. 줄 끝마다 심 시중 댁 인장이 찍혀 있었다.
“시중 어른 댁 논이 백 결이 넘소. 봄갈이 손이 모자라오. 이번 보름에 곰보지게라고 했지요? 이름 안 돌아온 사람은 호적에 댈 이름이 없으니, 문서에 별칭을 적으면 그만이오.”
“기한 날 이름이 돌아오면요?”
단향이 물었다. 찻잔을 내려놓다가 나온 말이었다. 원주와 집사가 동시에 그를 봤다.
“서기가 말을 하는구먼.” 마종이 재미있다는 얼굴을 했다. “돌아오면 제 마을로 가겠지. 그런데 이 산에서 석 달 넘게 있다 나간 사람 가운데 이름이 돌아온 사람이 몇이오? 원주 어른, 몇이오?”
“스무 해 동안은 없었소.”
“그러니 문서를 미리 써 두는 거요. 서기는 차나 따르시오.”
단향은 차를 따랐다. 주전자 주둥이가 잔 가장자리에 부딪혀 작은 소리가 났다. 마종은 그 소리에 눈썹을 올렸고, 탁문경은 그 소리를 못 들은 척했다.
차를 마신 마종은 마당으로 나가 일꾼을 보자고 했다. 원주가 열둘을 탕채 앞에 세웠다. 집사는 두루마기 소매를 걷고 한 사람씩 앞을 지나갔다. 팔뚝을 쥐어 보고, 이를 보자고 하고, 손바닥을 뒤집어 굳은살을 봤다. 장에서 소를 고르는 손이었다. 곰보지게 앞에서 걸음이 오래 멎었다.
“어깨가 좋구먼. 쟁기를 지겠어.”
곰보지게는 땅만 봤다. 개동이 제 형 앞으로 반 걸음 나섰다가 큰수건에게 뒷덜미를 잡혔다. 그때 큰지게가 갑자기 배를 움켜쥐고 주저앉았다.
“아이고, 배야. 집사 어른, 저는 속병이 있어 쟁기는 못 집니다. 밥을 하루 다섯 그릇 먹어야 겨우 버팁니다.”
마종이 큰지게를 내려다봤다. 큰지게는 제 배를 두드려 보였다. 둥, 하고 북소리가 났다. 마당 뒤에서 누가 킥 웃었고, 셈 노인이 기침으로 그 웃음을 덮었다.
“다섯 그릇이면 쟁기 둘을 지겠구먼.”
집사는 웃지도 않고 지나갔다. 그 뒤로 큰지게는 사흘 동안 밥을 두 그릇만 먹었다. 누가 볼까 봐서였다. 단향은 그 광경을 탕채 처마 아래서 보았다. 아궁이는 열두 사람 끝에 서서 마종이 제 앞을 지날 때 눈을 내리깔지 않았다. 마종이 아궁이 턱을 들어 보려다가 그 눈을 보고 손을 거뒀다.
“이건 석 달짜리요?”
“유월 초닷새요. 송골 옹기장이 딸이오.”
“옹기장이 딸이 눈이 세구먼.” 마종이 탁문경에게 말했다. “초닷새에 이름이 안 돌아오면 이것도 내 문서에 올리시오. 시중 어른 댁 부엌에 불 볼 사람이 모자라오.”
*
그날 밤 아궁이가 장부실에 왔다. 불 냄새를 달고 왔다. 옷섶과 머리카락에서 송진 탄 냄새가 났다. 단향은 오늘은 차를 따르지 않았다.
“옹기장이 딸이 눈이 세대요.” 아궁이가 먼저 말했다. 문턱에 선 채였다. “송골서도 그 소리 들었어요. 가마 불 보는 애가 눈이 세면 옹기가 터진다고요. 근데 저 불 볼 때 한 번도 안 터뜨렸어요.”
“압니다. 오늘 아궁이 열둘이 다 흰불이었습니다.”
“그걸 보셨어요?”
“지나가다 봤습니다.”
아궁이가 잠깐 말을 잃었다. 불빛이 제 얼굴에 닿지 않는 자리로 반 걸음 물러섰다. 단향은 그 반 걸음을 보고 할 말을 도로 삼켰다. 대신 해야 할 말을 했다.
“보름에 곰보지게를 데려간답니다. 심 시중 댁 논으로. 문서에 별칭을 적어서.”
아궁이의 얼굴이 굳었다. 턱 아래 힘줄이 섰다.
“서른일곱 줄 끝에 점 찍힌 게 일곱이죠?”
“제가 찍었습니다.”
아궁이가 책상 모서리를 쥐었다. 손가락 마디가 하얘졌다.
“그걸 찍으면서 예순한 해 동안… 밖에서 부르면 밖으로 기운다는 것도 알고 계셨잖아요.”
“알았습니다.”
“그런데 왜 아무한테도 말 안 하셨어요?”
“밖에 아무도 없었습니다.” 단향은 제 손을 내려다봤다. 주름 하나 없는 손이었다. “나간 사람을 누가 부릅니까? 이름을 아는 사람은 이 방에 저 하나였습니다. 저는 산문 밖에서 밤을 못 넘깁니다. 제가 말하면 무엇이 달라집니까?”
“이제 있잖아요. 나루에 달래가 있고, 강목 아저씨가 있어요. 국숫집 할머니도 있고요.”
아궁이가 장부를 끌어당겼다. 뒤쪽 묶음을 펼치고 맨 위, 예순한 해 전 줄에 손가락을 댔다. 단향이 막을 새도 없었다.
“단향 씨.”
등잔 불이 흔들렸다. 흔들린 게 아니라 잠깐 커졌다가 원래대로 돌아갔다. 단향은 숨을 삼켰다. 예순한 해 동안 묵재 말고는 아무도 그 소리를 내지 않았다. 목소리가 달랐다. 노인의 쉰 소리가 아니라 불 앞에서 갈라진 젊은 소리였다. 그런데 그 두 음절이 귀에 닿은 자리는 같았다.
“그만두십시오. 안에서 부르면 안으로 기웁니다.”
“이미 기울어 계시잖아요.”
“한 번 부를 때마다 한 겹씩 무거워집니다.”
아궁이가 손가락을 장부에서 뗐다.
“그럼 밖에서 부를게요. 곰보지게 아저씨도, 단향 씨도요. 보름까지 며칠 남았어요?”
단향은 대답하는 데 조금 걸렸다. 목이 막혀서였다.
“열사흘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