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화(5,191자) · 연희 · 유월 초나흘
판관 앞
목욕탕 장부의 이름들 · 백해원
만 19세 이상 이용가
유월 초나흘 아침, 산길에 사람이 끊이지 않았다. 나루에서 올라오는 사람, 절 아랫마을에서 올라오는 사람, 밤골에서 차돌을 따라온 사람, 개경에서 판관을 따라온 아전과 군졸. 진달래가 지고 철쭉도 진 산비탈에 이번에는 사람이 피었다고 셈 노인이 말했다. 노인은 산문 기둥 곁 제 자리에 앉아 올라오는 머리를 셌다. 백을 넘기고 나서는 손가락 대신 조약돌을 옮겼다.
전민변정도감 판관 윤소는 서른여덟이었다. 키가 크지 않았고, 관복 소매 끝이 해져 있었다. 아전 둘이 그 뒤에서 문서 궤를 졌다. 판관은 산문 앞에 서서 온수각 널판 담을 한참 올려다봤다. 초록 유리 등이 낮이라 꺼져 있었다.
“판정은 어디서 하오?”
원주 탁문경이 앞으로 나섰다. 이마에 땀이 맺혀 있었는데 목소리는 부드러웠다.
“마당이 넓습니다. 안으로 드시지요. 그늘도 있고 차도 있습니다.”
“판관 나리.” 연희가 원주 뒤에서 말했다. 목소리가 떨리지 않았다. 떨리지 않게 밤새 불 앞에서 연습했다. “산문 안에서 이름을 부르면 이름이 안으로 기웁니다. 이름을 대야 하는 판정이면 밖에서 하셔야 합니다. 샘 옆 공터가 넓습니다.”
판관이 연희를 봤다. 원주를 봤다. 다시 연희를 봤다.
“이름이 기운다는 말은 도감 문서 어디에도 없소.”
“없죠. 그래도 여기서는 그래요. 나리가 못 믿으시면 안에서 하셔도 돼요. 그럼 오늘 이름 대는 사람 절반이 해 질 녘에 산문 안으로 끌려 들어올 거예요. 그걸 보시면 믿으실 거예요.”
판관은 대답하지 않고 아전에게 손짓했다. 아전이 문서 궤를 샘 옆 공터로 옮겼다. 원주의 입가가 한 번 굳었다.
*
공터에 멍석이 깔렸다. 판관이 가운데 앉고 아전 둘이 곁에서 붓을 적셨다. 왼쪽에 원주와 마종이 섰다. 마종 뒤로 일곱이 서 있었다. 시중 댁에서 끌고 온 사람들이었다. 목에 나무패를 걸었고, 패에 별칭이 적혀 있었다. 물지게, 부엌, 찬탕, 수건, 널대, 장작, 두 번째 물지게. 일곱 모두 햇볕에 그을렸고 손이 논흙에 갈라져 있었다. 누구도 고개를 들지 않았다.
오른쪽에 온수각 사람들과 나루 사람들이 섰다. 방울할멈이 맨 앞이었다. 앞치마에 방울이 둘이었고, 품에 무언가를 안고 있었다. 솥 밑에서 꺼낸 서른일곱 줄이었다.
마종이 먼저 종이를 폈다.
“시중 어른 댁 노비 문서요. 일곱 다 수결이 있고 인장이 있소. 온수각 기한을 마치고 제 발로 우리 댁에 온 자들이오. 제 이름도 댈 줄 모르는 자들을 양인이라 하면, 도감이 나라 법을 어기는 거요.”
판관이 일곱을 봤다.
“맞는 말이오. 도감은 제 입으로 이름과 마을을 대는 사람만 푸오. 거짓 양인을 막아야 하니까.” 판관이 첫 사람 앞으로 손을 내밀었다. “이름을 대 보시오.”
첫 사람이 입을 벌렸다.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다. 판관이 기다렸다. 샘물 넘치는 소리만 났다.
그때 오른쪽 줄에서 쇠돌이 나섰다. 원주가 쇠돌을 봤다. 쇠돌은 원주를 보지 않았다. 손가락도 접지 않았다. 단오에 받은 이름이었다. 사 년 전 제 손으로 수레에 태운 둘 가운데 하나였다. 쇠돌은 그 이름을 스무 날 넘게 입속으로 굴렸다. 열 넘는 수는 못 세는 사람이 하나는 잊지 않았다.
“순돌이!”
목에 물지게 패를 건 사내가 고개를 들었다. 쇠돌을 봤다. 사 년 전 제 팔을 잡고 수레로 끌던 얼굴이었다. 사내의 입술이 떨렸다.
“순돌이. 대답하시오. 내가 불렀소.”
“…오냐.”
사내가 제 목에 걸린 패를 쥐었다. 손이 떨려서 끈이 목을 조였다. 그 손을 쇠돌이 풀어 주었다. 그러고는 뒤로 물러섰다. 물러서면서 손가락을 하나 접었다. 쇠돌이 처음으로 제대로 센 것이었다.
“나는… 나는 순돌이오. 예성강 건너 갈골 박 서방 아들 순돌이오.”
아전의 붓이 움직였다. 판관이 고개를 끄덕였다. 원주의 얼굴에서 땀이 흘렀다.
그다음은 줄줄이였다. 차돌이 밤골 삼촌을 불렀다. 강목이 부엌 패를 건 여자를 불렀다. 뱃사공 마누라가 찬탕을 불렀다. 달래가 수건 패를 건 늙은이를 불렀다. 달래 목소리가 가장 컸다. 부를 때마다 대답이 왔고, 대답 뒤에 이름과 마을이 따라 나왔다. 밤골, 갈골, 송악 아래 우물마을, 벽란 나루 뒷골. 일곱이 목에서 패를 벗었다. 마종이 그 패를 주워 들려다 판관을 보고 손을 거뒀다.
“문서는 도감이 거두겠소.” 판관이 말했다. “억지로 천인을 만든 자는 도감이 따로 묻겠소.”
*
“그다음은 경자년 칠월 열여드레요.”
방울할멈이 멍석 앞으로 나섰다. 판관이 할멈을 봤다. 할멈은 품에서 서른일곱 줄을 꺼내 판관 앞에 놓았다. 옥금이라는 두 자가 잿빛이었다. 그 옆 칸에 失足이라는 두 자는 아직 검었다.
“우리 딸이 이 산 샘에서 죽었소. 원주가 밀었소.”
“증인이 있소?”
할멈이 뒤를 돌아봤다. 문간이 거기 서 있었다. 판관이 문간을 불렀다. 문간이 앞으로 나왔다. 걸음이 무거웠다.
“이름을 대시오.”
문간이 입을 벌렸다.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다. 원주가 그제야 웃었다. 부드러운 웃음이었다.
“나리, 이 늙은이는 여덟 해 전에 이름을 못 돌려받았습니다. 이름 없는 자의 말을 도감이 받으시겠습니까?”
연희가 나섰다. 방울할멈이 가져온 서른일곱 줄을 들었다. 그 뒤, 서기가 몰래 따로 적어 준 문간의 줄이었다. 열한 해 전 맡긴 날, 여덟 해 전 그만둔 날, 비어 있는 셋째 칸. 연희는 소리 내어 읽었다. 여기는 산문 밖이었다.
“무석.”
문간이 몸을 떨었다.
“무석 영감님.”
방울할멈이 연희 곁에 섰다. 할멈이 쉰 목으로 따라 불렀다.
“무석이. 대답해. 우리 딸 누룽지 얻어먹던 무석이.”
샘가에 모인 사람들이 숨을 죽였다. 셈 노인이 조약돌을 옮기던 손을 멈췄다. 문간이 할멈을 봤다. 여섯 해 동안 쉬는 날마다 국수를 먹으러 갔던 얼굴이었다. 방울 소리를 들으러 갔던 얼굴이었다.
“…예.”
그러고는 무릎이 꺾였다. 문간이 멍석 모서리를 짚었다.
“나는 무석이오. 개경 동문 밖 쇠전골 무석이오. 경자년 칠월 열여드레 해 질 녘, 이 샘에서 원주가 옥금이 어깨를 밀었소. 한 번이었소. 옥금이는 소리를 안 냈소. 종이가 물 위에 떨어졌고, 원주가 그걸 건져 소매에 넣었소. 나는 그걸 여섯 해 동안 아무한테도 말 안 했소. 밥을 얻어먹으려고. 이름이 없다는 핑계로.”
판관이 붓을 멈추게 했다. 오래 문간을 봤다.
“본 자가 하나면 말이 하나요. 다른 증거는 있소?”
서기가 앞으로 나왔다. 해가 아직 높았다. 이마에 천을 감고 있었다. 서기가 장부 앞장을 펼쳤다. 거기 그날의 기록이 있었다.
“경자년 칠월 열아흐레 새벽, 원주 어른이 저를 깨워 옥금 줄에 失足을 적으라 하셨습니다. 시신은 그날 한낮에 계곡 아래 바위에서 찾았습니다. 새벽에는 아무도 옥금이 벼랑에서 떨어진 줄 몰랐습니다. 원주 어른만 아셨습니다. 저는 그걸 알면서 적었습니다.”
샘가가 웅성거렸다. 판관이 군졸에게 턱짓을 했다. 군졸 둘이 원주 거처로 올라갔다. 원주는 움직이지 않았다. 부채를 쥔 손가락만 하얘졌다. 군졸이 돌아왔을 때 손에 문갑이 들려 있었다. 문갑 맨 밑에 물에 번진 종이 한 장이 접혀 있었다. 먹이 번졌지만 두 이름과 나루 국숫집 자리는 읽을 수 있었다.
“왜 안 태우셨어요?”
연희가 물었다. 원주가 처음으로 연희를 제대로 봤다. 부드러운 목소리가 아니었다.
“이름이 적힌 종이를 어떻게 태우오. 그 산에서 이름 맡기는 걸 스무 해 봤는데.”
군졸이 원주의 팔을 뒤로 묶었다. 판관이 말했다. 살인과 억지 천인은 개경 도감 옥에서 묻겠다고. 마종은 제 문서를 아전에게 빼앗긴 채 한 걸음씩 물러나다가 가마를 찾아 산길로 내려갔다. 아무도 그 등을 부르지 않았다.
주지 각현이 그제야 멍석 앞으로 나왔다. 반나절 내내 샘 위 바위 곁에 서서 입을 열지 않던 사람이었다. 주지는 판관 앞에 합장했다.
“장생고 돈의 절반이 시중 댁에서 들어왔습니다. 원주가 그 돈으로 쌀을 꾸어 주고, 못 갚은 집 자식을 이 산으로 올렸습니다. 저는 그걸 알았습니다. 묻지 않았을 뿐입니다. 물이 식을까 봐서요.” 주지가 고개를 숙였다. 가사 자락이 흙에 끌렸다. “이 물로 씻은 병자가 몇인지는 제가 셉니다. 이 물 때문에 이름을 잃은 사람이 몇인지는 제가 세지 않았습니다.”
판관이 주지를 오래 봤다. 그러고는 아전에게 장생고 문서를 가져오라 일렀다. 아전이 원주 거처에서 들고 온 문서 뭉치를 펼치자, 줄마다 밥값, 옷값, 약값이 덧붙어 있었다. 석 달이 두 해가 되고, 두 해가 스무 해가 된 줄들이었다. 셈 노인의 줄도 거기 있었다. 개동의 줄 끝에는 먹이 마르지도 않은 한 해가 적혀 있었다.
“덧붙인 것은 다 지우시오.” 판관이 말했다. “본래 빚도 도감이 다시 따지겠소. 그동안 온수각 일꾼의 기한은 내일로 다 끝난 것으로 하오.”
개동이 무슨 말인지 몰라 연희를 봤다. 연희가 고개를 끄덕여 주자 개동이 제자리에서 펄쩍 뛰었다. 뛰다가 덕쇠 발을 밟았다. 덕쇠가 비명을 지르며 개동을 번쩍 들어 올렸다. 셈 노인은 조약돌 옮기던 손을 멈추고 제 이마를 짚었다. 스물두 해를 한꺼번에 내려놓는 셈이 머릿속에 안 들어가는 얼굴이었다.
방울할멈은 물에 번진 종이를 두 손으로 받았다. 읽지 못하는 글자를 손가락으로 쓸었다. 앞치마 방울 둘이 소리 없이 할멈 가슴께에 눌려 있었다.
*
해가 기울었다. 셈 노인이 조약돌을 다 셌다.
“이백열둘이오. 오늘 샘가에서 이름을 부른 사람.”
판관이 문서 궤를 닫았다. 아전에게 장부를 거두라고 했다. 서기가 장부를 두 손으로 들고 섰다. 해가 등성이에 걸렸다. 서기의 발끝이 산문 쪽으로 틀어졌다. 연희는 그걸 봤다. 이백열둘이 모인 날에도 서기의 이름은 아직 안에 기울어 있었다.
“장부는 서기가 들고 있어야 합니다.” 서기가 판관에게 말했다. “제가 산문을 나가는 날 넘겨 드리겠습니다.”
“그게 언제요?”
서기는 대답하지 않고 연희를 봤다. 판관이 두 사람을 번갈아 보다가 먼저 말했다.
“내일 아침 온수각 일꾼들 기한을 마감하오. 그때 장부를 도감이 거두겠소. 장부가 개경으로 가면 이 산에 장부를 들 사람이 없게 되오. 그러면 서기도 서기가 아니오.” 판관이 아전에게 붓을 거두게 했다. “그 뒤에 서기가 어디로 기우는지는 도감도 모르오. 도감은 문서만 보오.”
서기가 고개를 숙였다. 해가 등성이 뒤로 반쯤 먹혔다. 서기의 발이 산문 쪽으로 한 걸음 옮겨졌다. 제 뜻이 아닌 걸음이었다. 연희는 그 걸음을 보고도 서기를 부르지 않았다. 여기는 아직 해가 남은 산문 밖이었는데도, 부르지 않았다. 장부가 서기 손에 있는 동안에는 불러도 소용없었다. 장부를 든 사람은 장부 곁에 기운다. 내일이 초닷새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