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화(5,107자) · 하람 · 유월 초이틀
부르지 않기로
목욕탕 장부의 이름들 · 백해원
만 19세 이상 이용가
유월 초하루, 장마 앞 더위가 산까지 올라왔다. 탕채 널판 천장에 맺힌 김이 한낮에도 식지 않았고, 떨어지는 물방울이 목덜미에 닿으면 미지근했다. 원주 방은 더 더웠다. 맨 끝 아궁이의 열을 끌어다 데우는 방바닥을 원주는 한여름에도 식히지 않았다. 하람은 그 방에 들어서자마자 등줄기로 땀이 흘렀다. 연희가 그 곁에 섰다. 연희는 땀을 흘리지 않았다. 불 앞에서 석 달을 산 사람은 이만한 더위에는 땀이 안 났다.
탁문경은 장부를 제 무릎 앞에 놓고 앉아 있었다. 그 장부를 원주 방에서 보는 것은 예순한 해 동안 몇 번 안 되었다. 장부는 서기가 드는 물건이었다. 원주는 그걸 늘 서기 손으로 가져오게 했다.
“아궁이, 셈이 빠르니 길게 말하지 않겠소.” 원주가 부채를 내려놓았다. “초사흘에 도감 판관이 이 고을에 들어오오. 초나흘에는 여기 올라올 거요. 그 전에 이 장부를 들 사람을 바꾸겠소. 아궁이가 서기를 맡으시오. 그러면 초닷새에 서기를 내보내 주겠소. 예순한 해 만이오. 그리고 막내지게 한 해는 지워 주지.”
연희는 대답하지 않았다. 원주가 장부 뒤쪽을 손바닥으로 덮었다.
“서기가 되면 판관한테는 앞장만 보여 주시오. 뒤쪽 서른일곱은 여기 없던 걸로 하오.”
“싫다고 하면요?”
“뒤쪽은 오늘 밤 아궁이에 들어가오. 아궁이가 제일 잘 아는 데로.” 원주가 웃었다. “판관이 무엇을 보고 누구를 풀겠소? 서른일곱이 적힌 종이가 없으면 점 찍힌 일곱도 없고, 失足이라 적힌 줄도 없소. 할멈이 무슨 말을 해도 종이가 없소. 그리고 막내지게는 한 해가 아니라 세 해가 되겠지. 작은수건도 한 해 더. 산문 밖에서 떠든 값이오.”
하람은 입을 열었다. 원주 방에서 원주보다 먼저 입을 여는 것은 두 번째였다.
“서기 자리는 서기가 넘기는 겁니다. 원주 어른이 정하는 게 아닙니다.”
“그러니 서기가 넘기시오. 예순한 해면 충분하지 않소?” 원주가 하람을 봤다. 그 눈에 비웃음이 없었다. 그게 더 무서웠다. “나가고 싶지 않소? 해가 가는 걸 보고 싶지 않소? 당신 얼굴은 예순한 해 동안 한 번도 안 늙었소. 나가면 늙소. 늙는 게 나쁘오? 나는 늙어서 여기까지 왔소.”
하람은 대답하지 못했다. 나가고 싶었다. 예순한 해 동안 한 번도 입 밖에 낸 적 없는 말이 원주 입에서 먼저 나왔다. 원주는 그걸 알았다. 예순한 해를 곁에서 봤으니.
“이틀 드리지. 초사흘 새벽까지요.”
*
장부실로 돌아오자마자 둘은 싸웠다. 석 달 동안 한 번도 목소리를 높인 적 없는 방이었다.
“받으면 안 됩니다.”
“왜요? 하람… 서기님이 나가시잖아요.”
연희는 이름을 부르려다 삼켰다. 하람은 그 삼킨 소리를 들었다.
“서기가 되면 이 장부를 들고 있는 동안 산문을 못 나갑니다. 해가 져서가 아니라, 해가 떠도 못 나갑니다. 저는 예순한 해를 이 방에 있었습니다. 아궁이께서 그걸 하시겠다는 겁니까? 열아홉에?”
“서기님은 열아홉에 하셨잖아요!”
“제가 골라서 한 게 아닙니다!”
하람의 목소리가 방 벽에 부딪혔다. 등잔 불이 흔들렸다. 벽 너머 탕채에서 물 끓는 소리가 잠깐 멎은 것 같았다. 하람은 제 목소리에 제가 놀라 입을 다물었다. 연희도 놀란 얼굴이었다. 그러다 연희가 먼저 다시 입을 열었다. 이번에는 낮았다.
“저는 고르는 거예요. 제가 들면 서기님이 나가시고, 개동이 세 해가 안 되고, 뒤쪽이 안 타요. 셈이 맞잖아요.”
“셈이 안 맞습니다.” 하람이 장부를 가리켰다. “석 달에 세 번, 제가 정한 규칙입니다. 아궁이께서 서기가 되면 이 안에서 누가 아궁이를 부릅니까? 안 부르면 아궁이는 저처럼 제 이름을 잊습니다. 부르면 저처럼 안에 묶입니다. 그걸 아시면서 셈이 맞는다고 하십니까? 제가 나가서 뭘 합니까? 나루에서 국수를 먹습니까? 산 위에 아궁이를 두고?”
연희가 입술을 깨물었다. 턱이 떨렸다. 대꾸를 찾는 얼굴이었는데 대꾸가 안 나왔다. 하람은 그 얼굴에서 눈을 돌렸다. 돌린 자리에 장부가 있었다. 뒤쪽 서른일곱 줄, 그가 적은 서른한 줄, 점 찍은 일곱 줄.
“뒤쪽은 제가 빼겠습니다.”
“네?”
“원주 어른이 태우기 전에 산문 밖으로 내보냅니다. 문간 영감께 부탁하겠습니다. 영감은 기한이 끝나 밤에도 매여 있지 않습니다.”
“그러다 원주 어른이 아시면요?”
“아시겠지요.” 하람은 붓칼을 꺼내 뒤쪽 묶음을 꿰맨 실 앞에 댔다. 손이 떨렸다. 예순한 해 동안 한 번도 떨린 적 없는 손이었다. “이 실은 묵재 영감이 꿰맨 겁니다. 뒤쪽을 따로 묶어 두면 나중에 누가 볼 거라고 하셨습니다. 저는 예순한 해 동안 그 누가 오기를 기다리지 않았습니다. 아궁이가 왔습니다.”
실이 끊어졌다. 소리가 아주 작았다.
*
그날 오후, 용담사 주지 각현이 온수각에 내려왔다. 한 해에 두 번, 단오 뒤와 동지 앞에만 내려오는 사람이었다. 예순이었고, 가사 자락에 향 냄새가 배어 있었다. 주지는 탕채를 한 바퀴 돌며 물 온도를 손등으로 쟀다. 연희는 아궁이채 문 앞에서 그 앞을 막아섰다. 막아선 줄도 모르고 섰다.
“스님, 여기서 이름을 맡기는 거 아세요?”
주지가 손등의 물기를 가사 자락에 닦았다.
“안다. 내가 여기 올 때부터 그랬다.”
“기한 끝난 사람이 이름 없이 개경 수레에 타는 것도요?”
주지의 손이 멈췄다. 한참 뒤에야 대답이 나왔다.
“아랫마을에 문둥병 앓는 사람이 서른이다. 종기 난 아이들이 날마다 올라온다. 이 물이 그 사람들을 씻긴다. 아궁이 열둘이 꺼지면 그 물이 식는다.” 주지가 탕채 김을 올려다봤다. “원주가 장생고 돈을 어디서 받는지, 나는 묻지 않았다. 물으면 대답을 들어야 하니까. 대답을 들으면 물을 끊어야 하니까.”
“안 물으시면 물이 계속 데워져요?”
“그래서 안 물었다.”
주지는 연희를 지나 산문으로 갔다. 걸음이 느렸다. 산문 문턱에서 한 번 멈췄다가, 뒤돌아보지 않고 넘어갔다. 연희는 그 등이 원주와 닮은 데가 하나도 없다는 게 더 서러웠다. 나쁜 사람이 아니었다. 그런데 서른일곱 줄 곁에 원주만큼 오래 서 있었다.
해 질 녘, 연희는 문간 초막에 갔다. 하람의 부탁을 전하자 문간은 오래 말이 없었다.
“내가 그걸 들고 나가면, 원주가 나를 먼저 찾을 거요.”
“알아요.”
“그래도 가라는 거요?”
“영감님밖에 밤에 산문을 넘는 사람이 없어요.”
문간이 초막 벽 갈비뼈 틈으로 샘을 내려다봤다. 이번에는 돌확 너머까지 보았다.
“가겠소. 대신 초나흘에 판관이 오면, 아궁이가 내 이름을 샘에서 불러 주시오. 할멈한테만 맡기기엔 할멈 목이 쉬었소.”
그날 밤 연희는 아궁이채에서 잠을 청하지 않았다. 열둘째 아궁이 앞에 앉아 있었다. 자정 무렵 문간이 초막에서 나와 산문을 여는 소리를 들었다. 빗장이 벽에 세워지는 소리, 널문이 삐걱 열리는 소리, 짚신이 샘 쪽 흙을 밟는 소리. 문간 품에는 서른일곱 줄이 들어 있을 것이다. 날이 밝으면 방울할멈 국숫집 솥 아래 묻힐 것이다. 연희는 그 발소리가 벼랑 곁을 지날 때 숨을 참았다가 산길로 멀어지자 내쉬었다.
닭이 울기 전, 장부실 쪽에서 무언가 부서지는 소리가 났다.
연희가 뛰어갔을 때 장부실 문이 열려 있었고, 방 안이 누렇게 밝았다. 등잔이 바닥에 뒹굴었고 쏟아진 기름을 따라 불이 방바닥을 기고 있었다. 원주가 문가에 서 있었다. 한 손에 뒤쪽이 뜯겨 나간 장부를 쥐고 있었다. 하람은 책상 곁에 주저앉아 이마를 짚고 있었다. 손가락 사이로 피가 흘렀다.
“뒤쪽이 어디 있소?”
원주 목소리가 처음으로 높았다. 하람은 대답하지 않았다. 불이 책상 다리를 핥기 시작했다. 원주가 장부를 품에 안고 물러섰다. 불 끄라고 소리치는 대신 장부를 지키는 손이었다.
연희는 물동이를 찾지 않았다. 기름불에 물을 부으면 불이 튄다. 송골 가마에서 아버지한테 배웠다. 연희는 탕채 아궁이 앞 재 통을 들고 와 불 위에 쏟았다. 한 번, 두 번. 재가 불을 덮으며 쉬익 소리를 냈다. 매캐한 연기가 방 안에 가득 찼다. 연희는 저고리 소매로 입을 막고 세 번째 재 통을 쏟았다. 불이 숨을 죽였다. 방바닥에 검은 재와 탄 기름 냄새만 남았다.
복도로 발소리가 몰려왔다. 덕쇠가 물동이를 들고 제일 먼저 뛰어들었다. 연희가 소리쳤다.
“붓지 마요! 기름불이에요!”
덕쇠가 물동이를 치켜든 채 굳었다. 동이에서 물이 한 바가지 넘쳐 제 머리에 쏟아졌다. 덕쇠는 머리에서 물을 뚝뚝 흘리며 재 통을 대신 들었다. 개동이 뒤에서 재 통 둘을 더 날라 왔고, 셈 노인이 문가에서 몇 통인지 셌다. 넷이었다. 불은 셋에서 이미 죽었지만 덕쇠는 네 번째를 기어이 쏟았다. 들고 온 게 아까웠다고 했다.
원주는 연기 속에서 기침을 하며 문가에 서 있었다. 연희가 원주를 봤다. 재를 뒤집어쓴 얼굴이었다.
“뒤쪽은 산문 밖으로 나갔어요. 태우시려면 나루 국숫집 솥 밑을 뒤지셔야 할 거예요. 할머니가 국자 들고 계실 거고요.”
원주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부드러운 말 대신 무언가 다른 것이 올라오려다 가라앉았다. 원주는 장부를 안은 채 돌아서 나갔다. 초록 유리 등 불빛이 그의 등을 따라가지 않았다. 등은 처마에 그대로 걸려 있었다.
*
연희는 하람 곁에 무릎을 꿇었다. 이마가 찢어져 있었다. 등잔에 맞은 자리였다. 연희는 제 치맛자락을 찢어 이마를 눌렀다. 하람이 연희 손목을 잡았다. 손바닥이 뜨거웠다. 예순한 해 동안 한 번도 아프지 않았던 몸에 처음 피가 난 것처럼 떨고 있었다.
“이제 서기 자리 얘기는 없던 게 됐습니다.”
“다행이에요?”
“모르겠습니다.” 하람이 웃었다. 웃다가 이마가 당겨 얼굴을 찡그렸다. “원주 어른은 초닷새까지 저를 이 방에서 안 내보내실 겁니다. 그리고 제 이름은 아직 안에 기울어 있습니다.”
연희는 그의 이마를 누른 채로 오래 있었다. 불 꺼진 방에 탄 냄새가 가라앉았다. 연기 사이로 새벽빛이 문틈에 희끗 비쳤다. 연희가 먼저 말했다.
“초닷새까지 여기서는 서로 안 불러요. 한 번도요.”
“예.”
“그 대신 초닷새에 제가 밖에서 부를게요.”
“아궁이께서 나가시면 해가 진 뒤에 저는 이 방에 있습니다. 산문 밖에서 부르셔도 이 방까지는 안 들립니다.”
“그럼 들릴 때까지 부를게요.”
하람이 연희를 봤다. 재를 뒤집어쓴 얼굴이었다. 눈썹 끝에 재가 앉아 하얗게 셌다. 하람은 그 재를 털어 주려고 손을 들었다가 내렸다.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둘은 서로의 이름을 입안에 넣은 채로 새벽까지 앉아 있었다. 안에서는 한 번도 부르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