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화(5,124자) · 연희 · 유월 초닷새
서기가 존다
목욕탕 장부의 이름들 · 백해원
만 19세 이상 이용가
유월 초닷새 새벽 네 시, 연희는 마지막으로 아궁이 열둘에 불을 넣었다. 첫째 아궁이부터 차례로 소나무 장작을 밀어 넣고, 불쏘시개 솔가리에 불씨를 옮기고, 입김을 불어 불을 세웠다. 석 달 전에는 열둘을 다 세우는 데 한 시진이 걸렸다. 오늘은 반 시진이 안 걸렸다. 불빛이 누런빛에서 흰빛으로 오르는 동안 아궁이채 흙벽이 하나씩 붉어졌고, 장작 속 송진이 끓어 탁탁 튀는 소리가 열두 군데서 엇갈려 났다. 벽 너머 탕채에서 물이 끓기 시작했다. 연희는 버릇처럼 그 소리를 셌다. 열둘이었다. 석 달 동안 열둘이 다 산 소리를 들은 날은 손에 꼽았다.
열둘째 아궁이 앞에 쪼그려 앉아 불을 보는데 산문 밖에서 소리가 났다. 아직 날이 새기 전이었다.
“연희야!”
아버지였다. 연희는 웃었다. 대답은 산문 안에서 해도 괜찮았다.
“네!”
“왔다!”
“알아요!”
셈 노인이 아궁이채 문간에서 그 소리를 듣고 혀를 찼다. 새벽부터 부녀가 산을 울린다고 했다. 그러고는 손가락을 하나 접었다. 오늘 세는 첫 번째라고 했다.
*
해가 뜨자 장부실에서 기한 마감이 시작되었다. 판관과 아전 둘이 장부실 문 앞에 섰다. 방이 좁아서 한 사람씩 들어갔다. 서기가 책상 앞에 앉아 붓을 들었다. 이마의 천을 풀어 딱지가 앉은 자리가 드러나 있었다.
샘가에는 어제보다 사람이 많았다. 나루 사람들이 밤새 올라와 샘가 풀밭에서 잤다. 방울할멈이 솥을 이고 올라와 돌확 곁에 걸었다. 새벽부터 멸치 국물 냄새가 산문 안까지 넘어왔다.
첫 번째는 셈 노인이었다. 스물두 해였다. 서기가 줄 끝에 還 한 자를 적었다. 노인이 떨리는 손을 얹었다. 산문 밖에서 연희가 불렀다. 연희는 먼저 산문 밖에 나가 있었다. 오늘은 제 차례가 맨 마지막이었다.
“춘보 영감님!”
“오냐!”
종이가 따뜻해졌다. 춘보라는 두 자가 옅어졌다. 노인은 손을 떼고 한참 제 손바닥을 들여다보다가 장부실을 나왔다. 산문까지 걸어오면서 걸음을 셌다. 문턱을 넘으면서 스물두 해 만에 처음으로 셈을 틀렸다. 서른넷을 두 번 셌다.
그다음은 덕쇠였다. 뱃사공 마누라와 분이가 동시에 불렀다. 덕쇠는 대답하자마자 장부실 문을 박차고 나와 소리쳤다.
“나는 덕쇠요! 봉산 떡집 셋째 덕쇠요! 우리 집이 떡집이었소!”
샘가가 웃음으로 떠나갔다. 석 달 동안 떡 타령을 하던 까닭이 이름과 같이 돌아온 것이다. 덕쇠는 제가 왜 떡을 그렇게 찾았는지 이제야 알았다며 울다가 웃었다.
분이, 막동, 말순, 월이가 차례로 나왔다. 개동은 차돌이 불렀다. 밤골에서 새벽에 올라온 차돌이 샘가에서 목청껏 불렀다. 개동은 문턱을 넘자마자 차돌한테 달려가 매달렸다. 향이 차례에는 달래가 불렀다. 향이는 대답하고 나와서 달래 머리를 다시 땋아 주었다. 끝이 풀리지 않게 단단히 땋았다.
그리고 연희 차례였다. 연희는 장부실에 들어갔다. 서기가 연희의 줄 끝에 還 한 자를 적었다. 붓끝이 마지막 획에서 조금 머뭇거렸다. 이번에는 등잔 탓을 하지 않았다. 연희는 손을 얹었다. 산문 밖에서 두 목소리가 겹쳐 들렸다.
“연희 언니!”
“연희야!”
향이와 아버지였다. 연희는 대답했다. 종이가 따뜻해졌다. 석 달 전 처음 맡기던 날과 반대였다. 그때는 손바닥 아래로 무언가 빠져나갔고, 지금은 손바닥 위로 무언가 올라왔다. 두 자가 종이 결에서 옅어져 손끝을 타고 들어왔다. 연희는 제 이름을 떠올리는 데 장작 하나 탈 시간도 걸리지 않았다.
“연희.” 연희가 제 입으로 말했다. 입을 다물어도 이름이 남아 있었다.
서기가 장부를 덮었다.
연희가 산문을 나서자 아버지가 샘가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지게에 또 장 단지를 지고 있었다. 이번에는 셋이었다. 아버지는 연희 머리에 손을 얹었다. 가마 불에 데어 뭉개진 엄지가 정수리에 닿았다. 무겁고 뜨거웠다.
“연희야.”
“네.”
“연희야.”
“아버지, 이제 그만 부르셔도 돼요. 밖이라 괜찮은데, 귀가 아파요.”
“석 달 치다. 아직 멀었다.”
아버지가 한 번 더 불렀다. 덕쇠가 장 단지 셋을 보고 달려왔다가 아버지한테 이름을 물었다. 아버지가 덕보라고 하자 덕쇠는 덕 자 돌림이라며 반가워했다. 아버지는 무슨 소리인지 몰라 연희를 봤고, 연희는 설명을 포기했다.
*
장부를 넘기는 일은 산문 문턱에서 했다. 판관이 산문 밖에 서고, 서기가 산문 안에 섰다. 문턱 하나가 두 사람 사이에 있었다. 서기가 장부를 두 손으로 들어 문턱 너머로 내밀었다. 판관이 받았다.
서기의 손에서 장부가 떠났다. 서기가 휘청였다. 예순한 해 동안 들고 있던 무게가 빠진 몸이 어디로 기울지 몰라 흔들렸다. 연희는 그걸 산문 밖에서 봤다. 해가 한가운데 있었다. 연희가 불렀다.
“하람 씨.”
서기가 연희를 봤다. 대답하려고 입을 열었는데, 발이 산문 안쪽으로 반 걸음 물러섰다. 예순한 해 동안 안으로 기운 이름이었다. 한 번 불러서는 안 되었다. 연희는 한 번 더 불렀다. 그러고는 샘가를 돌아봤다.
방울할멈이 국자를 내려놓았다. 할멈이 불렀다. 강목이 불렀다. 달래가 불렀다. 차돌이, 개동이, 덕쇠가, 쇠돌이 불렀다. 쇠돌은 손가락을 접지 않고 불렀다. 뱃사공 마누라가, 밤골 사람들이, 절 아랫마을 사람들이 불렀다. 판관은 장부를 안은 채 입을 다물고 있었다. 도감은 문서만 보는 곳이었다. 그런데 한참 뒤 판관의 입술도 움직였다. 소리는 작았다.
하람은 문턱 안에서 그 소리를 들었다. 한 목소리가 아니었다. 할멈의 쉰 소리가 있었고, 달래의 날카로운 소리가 있었고, 강목의 낮은 소리가 있었다. 뱃사공 마누라는 제 이름을 부르듯 크게 불렀고, 쇠돌은 한 음절씩 끊어 불렀다. 저마다 끝을 올리는 자리가 달랐고, 숨을 쉬는 자리가 달랐다. 예순한 해 동안 그 두 음절을 낸 목소리는 묵재 하나였다. 이제 그 목소리가 수백으로 쪼개져 산 아래에서 올라왔다. 하람은 그 가운데 묵재의 소리를 찾으려 했다. 끝을 조금 올리던 소리, 목에서 쉰 숨이 섞이던 소리는 없었다. 없는데도 귀 안쪽이 따뜻했다. 노인이 예순한 해 전에 이 소리를 안에서 냈고, 이 사람들이 지금 밖에서 내고 있었다. 이름이 어느 쪽으로 기우는지 하람은 제 발바닥으로 느꼈다. 발바닥 아래 흙이 조금씩 산 아래로 기울었다. 한 번에 기울지는 않았다. 한 목소리에 한 알갱이씩이었다.
셈 노인이 샘가 바위에 올라 부르는 입을 셌다. 어제 이백열둘이던 수가 오늘은 더 많았다. 노인은 세다가 그만두었다. 세지 않아도 무섭지 않았다.
해가 기울 때까지 불렀다. 서기는 산문 문턱에 서 있었다. 문턱을 넘지도 물러서지도 않았다. 해가 등성이에 걸렸다. 연희는 샘가에서 서기를 봤다. 서기가 연희를 봤다. 해가 반쯤 먹혔다. 서기의 발이 떨렸다. 산 쪽으로 돌아서려는 발을 서기가 제 무릎을 짚어 붙들었다.
“하람 씨!”
“예!”
대답이 산을 울렸다. 서기가 문턱을 넘었다. 해가 넘어갔다. 발이 돌아서지 않았다. 서기는 샘가까지 스무 걸음을 걸어왔다. 걸음이 서툴렀다. 밤에 산문 밖을 걷는 법을 예순한 해 동안 잊은 발이었다. 연희 앞에 멈춰 선 서기의 이마 딱지 곁, 귀밑머리에 흰 올이 하나 보였다. 아침에는 없던 올이었다.
“하람 씨, 머리 셌어요.”
하람이 제 귀밑을 만졌다. 손가락 끝에 흰 올이 걸렸다. 하람이 웃었다. 웃는 얼굴에 주름이 하나 잡혔다. 그것도 아침에는 없었다.
*
유월 그믐, 도리나루 느티나무 아래서 방울 소리가 났다. 할멈 앞치마에 방울이 둘이었다. 셋째 자리에는 물에 번진 종이를 접어 넣은 작은 주머니가 달려 있었다.
온수각 아궁이 열둘은 꺼지지 않았다. 주지가 나루와 절 아랫마을에서 품 받는 일꾼을 들였다. 장부는 없었다. 들어올 때 이름을 대고, 부엌 평상에서 서로 이름을 불렀다. 산문 기둥 곁에는 쇠돌과 셈 노인이 같이 앉아 드나드는 사람을 셌다. 쇠돌이 열까지 세면 노인이 이어서 셌다. 둘이 한 번도 수가 맞은 적이 없었다.
무석은 개경 도감에 불려 가 증언을 마치고 나루로 내려왔다. 탁문경은 도감 옥에 갇혀 가을 판결을 기다린다고 했다. 무석은 방울할멈 국숫집 솥에 불을 땠다. 여섯 해 동안 제대로 낸 국숫값을 이제 장작으로 갚는다고 했다. 할멈은 그 장작이 너무 굵어 국수가 퍼진다고 날마다 타박했고, 무석은 날마다 그 타박을 들으러 솥 앞에 앉았다. 할멈은 무석을 부를 때 꼭 이름을 불렀다. 무석이, 불 좀 줄여. 무석이, 물 좀 떠 와.
연희는 품을 받고 아궁이에 불을 넣었다. 송골 가마는 도감이 장생고 빚을 다시 따진 뒤에 올리기로 했다. 아버지가 그때까지 흙을 고른다고 했다. 연희는 열흘에 한 번 나루에 내려왔다. 국수를 먹으러 온다고 했다. 아무도 믿지 않았다. 해가 넘어가도 발이 산 쪽으로 돌아서지 않았다. 연희는 첫 쉬는 날 일부러 나루에서 해가 지는 걸 끝까지 봤다. 강물이 붉어졌다가 검어지는 동안 발은 모래톱에 그대로 있었다. 그게 좋아서 그날은 산에 늦게 올라갔다.
하람은 나루에서 아이들에게 글을 가르쳤다. 첫날 가르친 글자는 제 이름 두 자였다. 달래가 제일 먼저 썼다. 두 번째 날부터 아이들은 하람을 선생이라 부르지 않고 하람 선생이라 불렀다. 이름을 빼면 달래가 따졌다. 셋째 날에는 개동이 밤골에서 내려와 아이들 틈에 끼어 앉았다. 열다섯이라 제일 컸다. 차돌 형 이름 두 자를 제 손으로 써 보겠다고 했다. 개동은 돌 석 자를 세 번 틀리고 네 번째에 맞게 썼다. 다 쓰고 나서 종이를 들고 모래톱을 뛰어다니며 형 이름을 불렀다. 강 건너에서 누가 대답했는데, 차돌이 아니라 모르는 뱃사람이었다. 그 뱃사람 이름도 개동은 그 자리에서 물어 외웠다.
그날 저녁 연희는 국숫집 평상에 앉아 있었다. 하람이 곁에 앉아 있었다. 강 위로 저녁 볕이 누웠고, 멸치 국물 김이 두 사람 사이로 올라갔다. 하람은 국수를 반쯤 먹다가 말이 없어졌다. 연희가 돌아보니 하람은 평상 기둥에 머리를 기댄 채 눈을 감고 있었다. 숨이 길고 고르게 오갔다. 젓가락이 손에서 미끄러져 평상에 떨어졌다.
연희는 석 달 동안 그가 자는 것을 한 번도 보지 못했다. 예순한 해 동안 아무도 못 봤다.
방울할멈이 다가오다가 걸음을 멈췄다. 방울이 울릴까 봐 앞치마를 손으로 눌렀다. 달래가 뛰어오다가 할멈한테 붙잡혔다. 연희는 떨어진 젓가락을 주워 사발 위에 가지런히 놓았다. 하람의 귀밑머리에 흰 올이 셋으로 늘어 있었다.
“하람 씨.”
연희는 아주 작게 불렀다. 깨우려는 게 아니었다. 하람은 깨지 않았다. 자면서 입술만 조금 움직였다. 대답하는 모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