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화(5,380자)

수건 색깔로 두 시간

목욕탕 남북 회담 · 모세담

12월 15일 금요일 아침 아홉 시 반⁠, 문산역 앞 골목은 사다리로 찼다⁠. 기자들이 담벼락마다 접이식 사다리를 세우고 꼭대기에 올라 망원 렌즈를 통일탕 현관에 겨누었다⁠. 중계차가 세 대⁠, 사다리가 마흔 개 남짓⁠, 사다리 하나에 기자 하나⁠. 사다리 사이로 순대국집 학봉이 종이컵에 국물을 담아 팔았다⁠. 한 컵에 이천 원이었다⁠. 컵마다 「⁠문산 순대 — 회담 공식 음식 아님⁠」이라는 스티커가 붙어 있었다⁠. 공식이 아니라고 써 붙이는 것이 학봉이 아는 가장 정직한 광고였다⁠. 일본 기자 하나가 컵을 받아 들고 국물을 마시다 사다리에서 미끄러질 뻔했다⁠.

옥자는 현관 앞에 서서 사다리 숲을 올려다보았다⁠. 쉰 해 동안 이 골목에서 본 사다리를 다 합쳐도 오늘보다 적었다⁠. 분홍 고무장화 끝에 렌즈 마흔 개가 동시에 초점을 맞추는 소리가 났다⁠.

“⁠사장님⁠, 들어가 계시죠⁠. 사진 찍힙니다⁠.⁠”

곽도식이 다가와 말했다⁠. 옥자는 들어가지 않았다⁠.

“⁠찍으라 그래⁠. 장화는 이미 영국 신문에 났어⁠.⁠”

*

열 시 정각⁠, 검은 승합차 두 대가 골목 입구 경호선 안으로 들어왔다⁠. 판문점에서 남측 차량으로 갈아타고 온 북측 선발대 네 사람이 내렸다⁠. 맨 앞은 쉰 중반의 남자였다⁠. 두꺼운 남색 외투⁠, 짧게 깎은 반백 머리⁠, 왼손에 줄자⁠, 오른손에 서류 가방⁠. 남자는 현관 앞에서 걸음을 멈추고 옥자를 한 번 보더니⁠, 누가 말하기도 전에 구두를 벗었다⁠.

옥자는 구두 벗는 손을 보고 이 남자가 마음에 들었다⁠.

“⁠주인 선생이십니까⁠? 의전을 맡은 방태건입니다⁠.⁠”

“⁠봉옥자예요⁠. 들어와요⁠. 바닥 미끄러워요⁠.⁠”

“⁠압니다⁠. 사진으로 보았습니다⁠.⁠”

방태건은 양말 바닥이 젖는 것을 개의치 않고 타일을 밟았다⁠. 줄자를 꺼내 현관에서 카운터까지 거리를 쟀다⁠. 줄자 감기는 소리가 짧고 정확했다⁠. 뒤따라 들어온 남기오와 방태건이 악수를 했다⁠. 둘 다 맨발이었다⁠. 남북 의전 책임자 둘이 동네 목욕탕 현관에서 맨발로 악수하는 장면을⁠, 사다리 위 렌즈 마흔 개가 유리문 너머로 담았다⁠.

*

여탕 휴게실 평상에 남북 선발대가 마주 앉았다⁠. 남측은 기오⁠, 곽도식⁠, 행정관 하나⁠, 그리고 맨 끝에 노트북을 편 채은⁠. 북측은 방태건과 셋⁠. 평상 가운데에 첫날 기오가 끌고 왔던 짙은 갈색 탁자가 놓였다⁠. 탁자 위에 수건 두 장이 개켜져 있었다⁠. 빨간 수건 하나⁠, 파란 수건 하나⁠.

옥자는 평상에 앉지 않았다⁠. 탕 문 앞에 장화를 신고 서서⁠, 장갑 낀 손을 허리에 얹었다⁠.

첫 의제는 탕 온도였다⁠. 방태건이 서류 가방에서 제 온도계를 꺼냈다⁠. 나무 자루가 달린 오래된 수은 온도계였다⁠. 탕 물에 넣고 오래 기다렸다가 꺼내 눈앞에 대고 읽었다⁠.

“⁠41도⁠. 단장 선생께서는 뜨거운 물을 즐기십니다⁠. 43도로 해 주십시오⁠.⁠”

기오가 서류를 넘겼다⁠.

“⁠우리 장관께서는 혈압이 있으셔서 의료진이 40도를 넘기지 말라고 했습니다⁠.⁠”

“⁠40도면 물이 미지근합니다⁠.⁠”

“⁠43도면 장관께서 쓰러지십니다⁠.⁠”

“⁠단장 선생은 예순하나에 43도에서 이십 분을 앉으십니다⁠.⁠”

“⁠장관께서는 예순여섯이십니다⁠.⁠”

두 사람은 한 시간 동안 1도씩 주고받았다⁠. 42도에서 맞나 했더니 남측 의료진이 전화로 안 된다고 했고⁠, 41⁠.5도에서 맞나 했더니 북측이 소수점은 회담 문서에 남기지 않는다고 했다⁠. 채은은 노트북에 「⁠온도 — 협의 계속⁠」만 다섯 번 쳤다⁠.

옥자가 장화 소리를 냈다⁠.

“⁠수요일 아침은 41도야⁠.⁠”

두 남자가 동시에 옥자를 보았다⁠.

“⁠있는 그대로라며⁠. 우리 탕 수요일 아침은 서른 해 동안 41도였어⁠. 42도면 정분 언니 혈압이 오르고⁠, 40도면 복녀 언니가 화를 내⁠. 여든아홉도 41도에서 이십 분을 앉아⁠.⁠”

방태건이 온도계를 내려다보았다⁠. 기오가 서류에서 눈을 들었다⁠. 둘이 서로를 보았다⁠.

“⁠41도로 하겠습니다⁠.⁠”

“⁠41도에 동의합니다⁠.⁠”

채은이 노트북에 쳤다⁠. 「⁠온도 — 41도 합의(⁠목욕탕 주인 제안⁠)⁠」⁠. 남북 실무 협의의 첫 합의를 동네 목욕탕 주인이 냈다⁠.

십 분 쉬는 동안 출입문 종이 울렸다⁠. 털모자를 눌러쓴 남자가 카운터에 만 원짜리를 내밀었다⁠. 목욕하러 왔다고 했다⁠. 옆구리에 낀 플라스틱 대야 위로 수건이 소복이 덮여 있었다⁠. 옥자는 거스름돈 천 원을 내주다 말고 대야를 보았다⁠. 목욕하러 오는 사람의 대야는 그렇게 무겁게 들리지 않았다⁠.

“⁠여탕은 오늘 손님 안 받아⁠. 남탕은 저기⁠.⁠”

“⁠아⁠, 제가 헷갈려서⁠…⁠…⁠.⁠”

남자는 남탕 대신 여탕 문으로 한 걸음 옮겼다⁠. 옥자가 장갑 낀 손으로 대야 위 수건을 들췄다⁠. 수건 밑에 사진기 하나가 렌즈를 위로 향한 채 누워 있었다⁠. 남자는 대야를 끌어안았다⁠. 옥자는 대야를 빼앗지 않았다⁠. 사진기만 꺼내 카운터 서랍에 넣고⁠, 대야와 수건과 남탕 열쇠를 남자 품에 도로 안겼다⁠.

“⁠구천 원 냈으니까 씻고 가⁠. 사진기는 나갈 때 줄게⁠.⁠”

남자는 얼굴이 빨개져 남탕으로 들어갔다⁠. 현관에서 뛰어 들어온 곽도식이 숨을 몰아쉬며 옥자를 보았다⁠. 평상에서 지켜보던 방태건이 기오에게 낮게 말했다⁠.

“⁠주인 선생은 경호원 열 명 몫을 하십니다⁠.⁠”

“⁠예⁠. 저희도 그 말씀을 드리려던 참입니다⁠.⁠”

곽도식은 대답하지 않고 무전기를 고쳐 쥐었다⁠. 귀 끝이 빨갰다⁠.

*

두 번째 의제는 수건이었다⁠. 기오가 탁자 위 수건 두 장을 손바닥으로 가리켰다⁠.

“⁠남측 수석대표께는 파란 수건을⁠, 북측 단장께는 빨간 수건을 준비했습니다⁠. 국기에 든 색깔에서 하나씩 땄습니다⁠.⁠”

방태건이 빨간 수건을 집어 들었다⁠. 손끝으로 올을 비벼 보더니 내려놓았다⁠.

“⁠우리 단장 선생께 빨간 수건을 드리는 까닭이 무엇입니까⁠?⁠”

“⁠말씀드린 대로 국기 색깔입니다⁠.⁠”

“⁠우리 국기에도 파란색이 있습니다⁠. 빨간 것만 우리에게 주는 까닭을 단장 선생께 어떻게 말씀드립니까⁠?⁠”

“⁠그럼 두 분 다 파란 수건으로 하겠습니다⁠.⁠”

곽도식이 손을 들었다⁠.

“⁠같은 수건이면 경호원들이 두 분을 못 가립니다⁠. 탕 안에서 두 분 다 맨몸이시니까 수건 색깔 말고는 식별할 것이 없습니다⁠.⁠”

“⁠얼굴로 하면 되지 않습니까⁠?⁠”

“⁠김이 차면 얼굴이 안 보입니다⁠. 지난 목요일에 확인했습니다⁠.⁠”

“⁠그럼 단장 선생께 파란 수건⁠, 남측 장관께 빨간 수건⁠.⁠”

“⁠그건 저희 장관께서 곤란하십니다⁠.⁠”

“⁠왜 곤란합니까⁠?⁠”

기오는 대답을 하지 못했다⁠. 왜 곤란한지는 다들 알았고⁠, 다들 말하지 않았다⁠. 수건 두 장을 두고 한 시간이 흘렀다⁠. 노란색⁠, 초록색⁠, 줄무늬가 차례로 나왔다가 들어갔다⁠. 노란색은 바가지와 같아서 안 되고⁠, 초록색은 때밀이 장갑과 같아서 안 됐다⁠. 줄무늬는 누가 위 줄이냐는 문제가 생겼다⁠.

두 시간째에 옥자가 카운터로 가서 수건 두 장을 들고 왔다⁠. 통일탕 수건이었다⁠. 흰 바탕에 끝자락에 파란 줄 두 개⁠, 가운데에 「⁠통일탕⁠」 세 글자가 파랗게 찍혀 있었다⁠. 쉰 번은 빨아서 올이 부드럽게 누웠다⁠.

“⁠우리 탕 수건 써⁠. 손님은 다 이거 써⁠.⁠”

“⁠같은 수건이면 식별이⁠…⁠…⁠.⁠”

곽도식이 말을 꺼내자 옥자가 수건 한 장을 접어 양 머리 모양으로 돌돌 말았다⁠. 찜질방에서 할머니들이 머리에 얹는 모양이었다⁠. 옥자는 다른 한 장은 그냥 어깨에 걸쳤다⁠.

“⁠한 분은 머리에 얹고 한 분은 어깨에 걸어⁠. 그럼 구별돼⁠.⁠”

방태건이 양 머리 모양 수건을 오래 보았다⁠.

“⁠이것은 무슨 뜻이 있는 모양입니까⁠?⁠”

“⁠양 머리⁠. 귀여워 보이려고 하는 거야⁠.⁠”

“⁠누가 머리에 얹습니까⁠?⁠”

“⁠더위 많이 타는 사람⁠. 43도 좋아하는 사람⁠.⁠”

방태건의 입꼬리가 아주 조금 움직였다⁠. 방태건은 「⁠통일탕⁠」 글자를 손가락으로 한 번 짚었다⁠. 짚은 손가락이 글자 위에서 잠깐 머물렀다⁠. 남북이 서로 다른 나라라는 말이 신문에 오르내린 지 여러 해였다⁠. 방태건은 손가락을 떼고 말했다⁠.

“⁠목욕탕 이름이니 일없습니다⁠.⁠”

기오가 「⁠일없습니다⁠」를 처음 듣는 얼굴로 굳었다⁠. 채은이 기오에게 작게 속삭였다⁠. “⁠괜찮다는 뜻이에요⁠.⁠” 기오는 굳은 어깨를 풀었다⁠. 채은은 노트북에 쳤다⁠. 「⁠수건 — 통일탕 수건⁠, 단장 머리 위⁠, 장관 어깨 위⁠. 두 시간⁠」⁠.

*

세 번째 의제는 들어가는 순서였다⁠. 남측은 동시 입장을 원했고 북측도 동시 입장을 원했다⁠. 문제는 탕 계단이었다⁠. 계단은 세 칸이고 난간은 하나뿐이었다⁠.

“⁠난간을 누가 잡습니까⁠?⁠”

“⁠손님을 높이는 것이 의전이니 단장께서⁠…⁠…⁠.⁠”

“⁠같이 들어가는데 한 분만 난간을 잡으시면 그 장면이 사진에 남습니다⁠.⁠”

“⁠사진은 안 찍습니다⁠. 탕 안입니다⁠.⁠”

“⁠천창 위로 무엇이 날아다닙니다⁠.⁠”

방태건이 천창을 가리켰다⁠. 모두 고개를 들었다⁠. 김 서린 유리 너머로 작은 날개 넷 달린 물체가 맴돌고 있었다⁠. 곽도식이 무전기에 대고 짧게 말했고⁠, 삼 분 뒤 골목 어딘가에서 기자 하나가 경호관 손에 끌려 나가며 영어로 항의하는 소리가 들렸다⁠. 보리가 현관에서 두 번 짖었다⁠.

옥자가 탕 계단 난간을 장갑 낀 손으로 탁 쳤다⁠.

“⁠난간은 무릎 안 좋은 사람이 잡아⁠. 목욕탕 법이야⁠.⁠”

“⁠두 분 다 무릎은 괜찮으십니다⁠.⁠”

“⁠그럼 아무도 안 잡아⁠. 둘이 서로 손 잡고 내려가⁠.⁠”

평상 위가 조용해졌다⁠. 기오와 방태건이 서로를 보았다⁠. 손을 잡고 탕 계단을 내려가는 두 대표가 둘의 머릿속에 동시에 떠오른 얼굴이었다⁠. 아무도 반대하지 못했다⁠. 채은은 노트북에 「⁠순서 — 난간 사용 없이 동시 입장⁠, 서로 손⁠」이라고 쳤다가⁠, 마지막 두 글자를 지웠다가⁠, 다시 쳤다⁠.

*

오후 한 시⁠, 답사가 끝났다⁠. 방태건은 줄자를 감아 넣고 서류 가방을 닫았다⁠. 현관으로 가다가 걸음을 멈추고 몸을 돌렸다⁠. 옥자 앞으로 와서 고개를 숙였다⁠.

“⁠주인 선생⁠, 단장 선생께서 하나 물어보라 하셨습니다⁠.⁠”

“⁠물어봐요⁠.⁠”

“⁠이 목욕탕은 다음 해에도 있습니까⁠? 단장 선생께서는 다음에 아들을 데리고 다시 오고 싶어 하십니다⁠.⁠”

휴게실이 조용해졌다⁠. 문간에 바나나우유를 사러 온 정분이 빨대를 문 채 멈췄다⁠. 채은이 노트북에서 손을 뗐다⁠.

옥자는 입을 열었다⁠.

“⁠있⁠…⁠…⁠”

“⁠선생⁠, 제가 정확히 말씀드리겠습니다⁠.⁠”

기오가 옥자 말을 끊었다⁠. 목소리는 낮았고 끝까지 흔들리지 않았다⁠.

“⁠통일탕은 이달 31일에 문을 닫습니다⁠. 사장님께서 지난달 파주시에 폐업 신고를 하셨고⁠, 도시가스 공급 해지도 신청하셨습니다⁠. 회담 날로부터 11일 뒤입니다⁠.⁠”

방태건은 대답하지 않았다⁠. 서류 가방 손잡이를 쥔 손이 조금 하얘졌다⁠.

“⁠할머니⁠.⁠”

채은이 벌떡 일어났다⁠. 노트북이 평상에서 미끄러져 바닥에 떨어졌다⁠. 채은은 노트북을 줍지 않았다⁠.

“⁠할머니⁠, 진짜야⁠?⁠”

옥자는 장갑 낀 손을 몸뻬 주머니에 넣었다⁠. 주머니 속에 이제 고지서 한 장만 있었다⁠. 접힌 종이는 카운터 서랍 속 박 바가지 밑에 깔려 있었다⁠.

문간에서 정분의 입에 물린 빨대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바나나우유가 정분 손에서 꾹 눌려 노란 줄기가 천장 쪽으로 솟았다⁠. 정분은 우유가 손에 흐르는 것도 모르고 옥자를 보았다⁠.

“⁠옥자야⁠. 너 우리 목욕날 지킨다고 정부랑 싸웠잖아⁠.⁠”

옥자는 대답하지 않았다⁠. 기오는 고개를 숙이지 않았다⁠. 사다리 위 렌즈 마흔 개가 유리문 너머로 무언가 달라진 공기를 읽고⁠, 동시에 셔터를 눌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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