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5,381자)

1번 사물함은 길정분 거

목욕탕 남북 회담 · 모세담

12월 11일 월요일⁠, 통일탕 정기 휴무일 아침 아홉 시였다⁠. 옥자는 쉬는 날에도 다섯 시 반에 눈을 떴다⁠. 보일러를 켜지 않은 목욕탕은 숨을 참은 사람처럼 조용했다⁠. 타일은 차갑고⁠, 탕 물은 밤새 식어 김 대신 맑은 냉기를 올렸다⁠. 옥자는 카운터 서랍을 열어 박 바가지가 그대로 있는지 보고 다시 닫았다⁠. 하루에 세 번은 열어 보았다⁠.

골목에 트럭이 멈추는 소리가 났다⁠. 짐칸에 은빛 스테인리스 사물함 두 짝⁠, 새 평상⁠, 드라이기 다섯 대⁠, 전신 거울이 실려 있었다⁠. 남기오가 트럭 조수석에서 내렸다⁠. 뒤따라 대통령실 행정관 둘과 인테리어 업자 셋이 내렸다⁠. 기오는 현관 앞에서 구두와 양말을 동시에 벗었다⁠. 통일탕에 온 지 세 번째⁠, 이제는 문턱 앞에서 몸이 먼저 알았다⁠.

“⁠사장님⁠, 탈의실을 조금 손보겠습니다⁠.⁠”

“⁠있는 그대로라며⁠.⁠”

“⁠있는 그대로 두되⁠, 손님 맞을 만큼만 손보겠습니다⁠.⁠”

“⁠우리 손님은 맨날 이렇게 맞았어⁠.⁠”

기오가 서류철에서 사진 한 장을 꺼냈다⁠. 지난 목요일 경호처 요원이 찍은 탈의실 사진이었다⁠. 사물함 마흔 칸 가운데 열여섯 칸이 노란 고무줄로 묶여 있었다⁠. 문이 안 닫혀서 손잡이와 옆 칸 손잡이를 고무줄로 엮어 둔 것이었다⁠.

“⁠문이 안 닫히는 사물함이 열여섯 개입니다⁠.⁠”

“⁠고무줄로 닫히잖아⁠.⁠”

“⁠북측 단장께서 고무줄을 풀다 손가락이 튕기시면 회담 첫 장면이 그겁니다⁠.⁠”

옥자는 웃음이 나오려는 것을 참았다⁠. 비서관 입에서 손가락이 튕긴다는 말이 나올 줄은 몰랐다⁠.

인테리어 업자 둘이 탈의실 벽의 큰 거울 앞에 사다리를 놓았다⁠. 거울 위쪽에는 금색 글씨가 반쯤 벗겨진 채 남아 있었다⁠. 「⁠祝 開業 1978年 4月 統一湯 — 문산 역전 상인 일동⁠」⁠. 거울 가장자리는 은박이 일어나 얼룩이 졌고⁠, 가운데에는 쉰 해 동안 할머니들이 머리를 말리며 비춰 본 자리만 유난히 맑았다⁠.

“⁠그건 왜 떼⁠?⁠”

“⁠새 전신 거울로 바꾸려고요⁠. 얼룩이 사진에 나옵니다⁠.⁠”

“⁠얼룩도 손님이야⁠. 저 거울에 우리 시아버지가 개업 날 넥타이 매는 게 비쳤어⁠.⁠”

업자가 기오를 돌아보았다⁠. 기오는 거울 앞까지 맨발로 걸어갔다⁠. 얼룩진 거울 속에 검은 정장의 비서관과 꽃무늬 몸뻬의 목욕탕 주인이 나란히 비쳤다⁠. 기오는 금색 한자를 소리 내지 않고 읽었다⁠.

“⁠거울은 있는 그대로 두겠습니다⁠. 새 거울은 도로 싣고 가세요⁠.⁠”

업자들이 사다리를 접었다⁠. 옥자는 기오가 싸움 하나를 그냥 내주는 것을 보았다⁠. 내줄 싸움을 골라서 내주는 사람은 지킬 싸움도 골라 둔 사람이었다⁠.

*

탈의실에서 행정관 둘이 줄자를 들고 사물함 앞을 오갔다⁠. 한 사람이 평면도에 빨간 펜으로 화살표를 그었다⁠. 현관에서 여탕 탈의실⁠, 탈의실에서 탕 문까지⁠. 화살표가 가장 짧게 지나는 자리에 사물함 두 칸이 있었다⁠. 탕 문 바로 옆⁠, 1번과 2번이었다⁠.

“⁠수석대표 두 분은 1번과 2번을 쓰시는 걸로 하겠습니다⁠. 경호 동선이 제일 짧습니다⁠.⁠”

행정관 하나가 고개를 갸웃했다⁠.

“⁠비서관님⁠, 1번을 누가 쓰느냐가 문제가 됩니다⁠. 손님을 높이는 게 의전 원칙이니 단장이 1번인데⁠, 북측이 1번과 2번을 서열로 읽으면 우리 장관이 2번이 됩니다⁠.⁠”

“⁠그럼 단장 1번⁠, 장관도 1번⁠.⁠”

“⁠사물함 하나에 두 분 옷을 넣으실 수는 없습니다⁠.⁠”

“⁠번호를 떼면 됩니다⁠. 둘 다 번호 없는 사물함으로⁠.⁠”

“⁠번호가 없으면 열쇠를 헷갈리십니다⁠.⁠”

“⁠그럼 열쇠고리 색으로 나눕시다⁠.⁠”

“⁠무슨 색이요⁠?⁠”

기오가 대답하려다 입을 다물었다⁠. 열쇠고리 색깔은 아직 아무도 손대지 못한 의제였다⁠. 옥자는 카운터에서 귤을 까면서 두 남자의 말다툼을 들었다⁠. 사물함 번호 하나로 이십 분을 싸웠다⁠. 이 사람들이 회담 날 탕 안에서 무엇을 정할지 옥자는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1번은 안 돼⁠.⁠”

옥자가 귤 껍질을 내려놓았다⁠.

“⁠왜 안 됩니까⁠?⁠”

“⁠주인이 있어⁠.⁠”

*

주인은 삼십 분 뒤에 왔다⁠. 달순이 떡집 앞에서 트럭을 보고 단톡방에 「⁠통일탕에 트럭왔다 사물함싣고⁠」라고 올렸고⁠, 정분이 털모자를 쓸 틈도 없이 머리에 수건만 두르고 뛰어왔다⁠. 휴무일이라 잠긴 현관 유리문을 정분이 손바닥으로 두드렸다⁠.

“⁠내 사물함 건드리지 마⁠!⁠”

정분은 신발을 벗어 던지고 탈의실로 들어갔다⁠. 행정관 둘이 1번 사물함 앞에서 물러났다⁠. 1번 문짝에는 매직으로 쓴 「⁠길정분⁠」 세 글자가 흐릿하게 남아 있었다⁠. 서른 해 전에 정분이 직접 쓴 글씨였다⁠. 지난해 손주가 새 이름표를 붙여 주겠다고 했을 때 정분은 매직 글씨가 더 진하다며 거절했다⁠.

“⁠할머님⁠, 회담 날 하루만 비워 주시면 됩니다⁠.⁠”

“⁠하루면 내 물건은 어디 가⁠?⁠”

“⁠저희가 상자에 담아 따로 보관하겠습니다⁠.⁠”

“⁠상자에 넣으면 순서가 흐트러져⁠.⁠”

정분은 1번 문을 열었다⁠. 고무줄 없이 닫히는 몇 안 되는 사물함이었다⁠. 안에는 물건이 층층이 들어 있었다⁠. 맨 위 칸에 각질 제거기⁠, 바로 아래 칸에 바나나우유 빨대 한 묶음⁠, 참빗⁠, 손주 돌 사진⁠. 맨 아래 칸에는 누렇게 바랜 남자 때수건 하나가 비닐에 싸여 있었다⁠.

기오가 때수건을 보았다⁠. 정분이 비닐째 집어 들었다⁠.

“⁠영감 거야⁠. 영감이 저 남탕에서 서른 해 썼어⁠. 죽고 나서 남탕 사물함 비우라길래 내가 가져왔어⁠. 여탕 사물함에 남자 때수건 넣은 할머니는 나 하나야⁠.⁠”

탈의실이 조용해졌다⁠. 인테리어 업자 하나가 들고 있던 드라이기를 슬그머니 내려놓았다⁠. 기오는 안경을 벗어 김도 서리지 않은 알을 닦았다⁠. 그러고는 무릎을 꿇다시피 쪼그려 앉아 정분과 눈높이를 맞췄다⁠.

“⁠말씀은 알겠습니다⁠. 다만 이 사물함이 문에서 제일 가깝습니다⁠. 회담 날은 경호원 마흔 명이 이 두 칸을 보면서 움직입니다⁠. 다른 칸이면 동선이 열한 걸음 늘어납니다⁠.⁠”

“⁠열한 걸음 더 걸으라 그래⁠. 젊은 사람들이⁠.⁠”

“⁠걸음이 늘면 경호가 늘고⁠, 경호가 늘면 골목을 더 막아야 합니다⁠.⁠”

정분은 대답하지 않았다⁠. 골목을 더 막으면 달순네 떡집이 하루 장사를 못 한다는 것은 정분도 알았다⁠.

옥자가 장갑을 낀 손으로 1번 문을 탁 닫았다⁠.

“⁠비서관⁠, 의전은 손님 높이는 거라며⁠. 우리 탕 손님은 정분 언니야⁠. 서른 해 손님이야⁠. 북에서 온 손님은 하루 손님이고⁠.⁠”

“⁠사장님⁠, 하루 손님이 탕 하나를 정하고 갑니다⁠.⁠”

“⁠서른 해 손님은 등 하나를 정하고 가⁠.⁠”

기오는 일어서지 않았다⁠. 쪼그린 채로 무릎에 손을 얹고 잠시 생각했다⁠. 옥자는 이 남자가 지는 얼굴로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 다음 수를 고르는 얼굴이었다⁠.

*

기오는 정분에게만 말했다⁠. 옥자를 보지 않았다⁠.

“⁠할머님⁠, 이렇게 하면 어떻겠습니까⁠. 회담 날 하루 1번을 빌려주시면⁠, 회담이 끝난 뒤 1번 문에 정식 이름판을 달아 드리겠습니다⁠. 「⁠길정분 할머님 자리⁠」⁠. 그리고 회담 기념 수건을 드리고⁠, 끝나고 장관과 사진도 한 장 찍으시게 해 드리겠습니다⁠.⁠”

“⁠장관만⁠?⁠”

“⁠대통령께서 시간이 되시면 대통령과도요⁠.⁠”

정분의 눈이 커졌다⁠. 손에 든 때수건이 조금 흔들렸다⁠.

“⁠대통령이랑 사진 찍으면 단톡방에 올려도 돼⁠?⁠”

“⁠행사 끝나고는 괜찮습니다⁠.⁠”

“⁠우리 손주 놈이 대학 졸업할 때 내가 사진 같이 안 찍어 줬어⁠. 바빠서⁠. 손주가 아직도 그거 서운해해⁠. 대통령 사진 보내면 손주가 할머니 다시 보겠지⁠.⁠”

“⁠언니⁠.⁠”

옥자가 불렀다⁠. 정분은 옥자를 돌아보지 않았다⁠.

“⁠옥자야⁠, 나 여든넷이야⁠. 대통령 사진을 언제 또 찍어⁠?⁠”

“⁠언니 목욕날은⁠?⁠”

“⁠하루잖아⁠. 하루는 일산 가서 계란 세 개 먹고 오지 뭐⁠.⁠”

“⁠등은⁠?⁠”

“⁠일산 사람도 손은 있겠지⁠.⁠”

정분은 때수건을 비닐째 가슴에 안았다⁠. 그러고는 1번 문을 열고 물건을 하나씩 꺼내 바구니에 옮겼다⁠. 각질 제거기⁠, 빨대 묶음⁠, 참빗⁠, 돌 사진⁠. 행정관이 상자를 내밀었지만 정분은 바구니에만 담았다⁠. 순서를 흐트러뜨리지 않으려고 넣은 순서를 거꾸로 꺼냈다⁠.

옥자는 장갑 낀 손을 허리에 얹은 채 서 있었다⁠. 할 말이 없어서가 아니었다⁠. 정분이 꺼내는 순서를 틀리지 않게 보고 있었다⁠. 꺼낸 순서를 알아야 회담이 끝나고 다시 넣어 줄 수 있었다⁠.

*

점심나절⁠, 채은이 김밥 한 줄을 사 들고 왔다⁠. 휴무일인데도 출입증을 목에 걸고 있었다⁠. 채은은 휴게실 평상에 앉아 휴대전화를 할머니에게 내밀었다⁠.

“⁠할머니⁠, 외국 신문에 났어⁠.⁠”

화면에 영어 제목이 떠 있었다⁠. 「⁠Bathhouse Diplomacy⁠」⁠. 사진은 통일탕 간판과 현관 유리문⁠, 유리문 너머 카운터에서 귤을 까는 분홍 고무장화 한 짝이었다⁠. 얼굴은 안 나오고 장화만 나왔다⁠.

“⁠이게 무슨 뜻이야⁠?⁠”

“⁠목욕탕 외교⁠.⁠”

“⁠장화가 외교를 했구나⁠.⁠”

“⁠영국 신문이 실었고⁠, 일본 방송도 내일 온대⁠. 세계 기자단 신청이 벌써 삼백 명 넘었어⁠.⁠”

“⁠삼백 명이 다 목욕하면 내 보일러 터져⁠.⁠”

채은이 웃지 않았다⁠. 할머니 말에 웃지 않는 손녀는 처음이었다⁠. 채은은 김밥 꽁지만 먹고 몸통은 할머니 앞으로 밀었다⁠.

“⁠할머니⁠, 아빠가 무슨 얘기 안 했어⁠?⁠”

“⁠무슨 얘기⁠?⁠”

“⁠아빠가 어제 전화로 이상한 소리 하던데⁠. 할머니가 정부 사람들한테 그 얘기 했냐고 나한테 묻더라⁠.⁠”

옥자는 김밥 한 개를 집어 천천히 씹었다⁠. 몸뻬 주머니 속 접힌 종이가 무릎에 닿았다⁠.

“⁠너희 아빠는 맨날 이상한 소리 해⁠.⁠”

채은이 할머니 얼굴을 오래 보았다⁠. 거짓말을 못 하는 아이는 남의 거짓말도 오래 보았다⁠.

*

밤 열 시⁠, 옥자는 뒤채 방에서 텔레비전을 켜 둔 채 휴대전화를 들었다⁠. 단톡방이 줄줄이 울렸다⁠.

정분이 올린 글이 맨 아래에 떠 있었다⁠. 한 손가락으로 찍느라 띄어쓰기는 없었지만 내용은 정확했다⁠.

「⁠20일수요일은 일산찜질방 버스7시반골목앞 계란3개 식혜무한 대통령사진⁠」

글 밑으로 이모티콘이 하나씩 달렸다⁠. 엄지손가락⁠, 엄지손가락⁠, 하트⁠, 박수⁠, 생일 케이크⁠. 생일 케이크는 달순이었다⁠. 일곱 명이 반응을 눌렀다⁠. 열한 명 중 일곱이었다⁠.

기오에게서 문자가 하나 왔다⁠. 「⁠오늘 수요반 어르신 일곱 분이 회담 당일 이동에 동의해 주셨습니다⁠. 늦은 시간 죄송합니다⁠. 남기오⁠」⁠.

옥자는 단톡방 맨 위로 올라가 공지를 다시 읽었다⁠. 「⁠수요일·토요일 아침 6시⁠~9시 / 사천 원 / 사장님이 등 밀어 주심⁠」⁠. 손주가 적어 준 공지 아래로⁠, 아직 반응을 누르지 않은 네 사람의 이름이 남아 있었다⁠. 그중 하나가 허복녀였다⁠. 복녀는 단톡방에서 글을 읽기만 하고 한 번도 쓴 적이 없었다⁠.

옥자의 엄지가 화면 위에서 오래 멈췄다⁠. 이모티콘 목록이 떴다가 사라졌다⁠. 옥자는 아무것도 누르지 않고 휴대전화를 엎었다⁠. 텔레비전에서 밤 뉴스가 통일탕 간판을 비췄다⁠. 자막이 지나갔다⁠. 「⁠北 단장⁠, 회담 장소로 ‘⁠문산 동네 목욕탕⁠’ 지정⁠… 이유는 함구⁠」⁠.

옥자는 일어나 카운터로 나갔다⁠. 불 꺼진 목욕탕에서 서랍을 열고 박 바가지를 꺼냈다⁠. 철사 매듭을 엄지로 한 번 쓸었다⁠. 내일은 수요반 할머니 열한 명에게 일일이 전화를 돌릴 생각이었다⁠. 일곱에게는 따지려고⁠, 넷에게는 고마워서⁠. 옥자는 서랍을 닫다 말고 몸뻬 주머니에서 접힌 종이를 꺼내 바가지 밑에 깔았다⁠. 종이는 바가지 무게에 눌려 더 접히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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